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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1

'사건'이란 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면 상당히 비극적인 사건이 많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활동하신다. 최근에 나는 이런 관점에서 성서를 보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한 체계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 윤곽만이라도 말하려고 한다.

성서를 연구함에 있어 특별히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와 바울과의 관계인데, 놀라웁게도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바울은 자기가 존경하고 몸바쳐 일하는 예수의 행적을 자세히 말해주고, 그의 말씀을 반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바울은 예수의 비유 한 가지도 들려주지 않고, 예수의 중요한 말씀은 거의 빠뜨리고 전해주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를 더이상 '카타 싸르카'(kata sarca), 즉 '육체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다른 말로 바꾸면 "역사적 예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요, 반면 "그리스도 즉 부활한 그리스도를 알려는 데 초점이 있다"는 말로 들린다. 하여튼 바울 서신 전체가, 아니 사도행전까지도 예수의 말씀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하였다. 여기에 예수의 말씀이라고 나은 것은 교회의 케리그마지 역사적 예수의 말씀은 아니다.

한편 바울이 분명히 언급한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서운 선언이다. 십자가는 사건이다. 말씀이기 전에 사건이다. 이 말은 "십자가에 예수가 달려 죽었다는 십자가의 사건 외에는 다른 것엔 나는 흥미가 없다. 내 초점은 십자가의 사건이다. 이것을 나는 전하기 위해서 그의 증인이 된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 단호한 선언에서 우리는 바울이 왜 예수의 말씀보다도 그의 십자가의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는가 하는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사건이다. 역사상에 일어난 사건이다. 초대교회는 이 사건에 총집중하였다.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설교의 원형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 원형의 잔재를 발견하게 된다. 베드로의 설교만도 여섯 번이나 나와 있는데, 그 초점은 "우리는 너희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에 대한 증인이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전형적인 설교가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느님이 그를 사흘만에 다시 살리시고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미리 택하신 증인인 우리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습니다"(사도 10, 39-41).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분명히 사건인데, 그들은 바로 이 사건의 증인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말씀을 계승시켜서 예수의 이상과 말씀을 퍼뜨려 가지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 불법적으로 죽었다는 이 사건의 증인이 되겠다는 뜻이다.

2

바울 서신도 이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나는 바울의 생애를 도외시하고 바울서신들을 읽었는데, 이는 잘못이었다. 말씀은 그 상황 속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의 생애, 그 안에서 그 편지를 읽어야 한다. 후기 바울 서신은 제외하더라도, 옥중에서 쓴 편지에도 자기가 왜 옥중에 들어갔는지 일언반구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가 언론의 통제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전제로 바울의 글을 읽어야 한다.

사도행전에 바울의 생애가 나와 있지만, 이것은 상당히 전설적인 요소가 많이 섞여 있어서 문제가 많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는 숫자까지 나열하면서 바울 자신이 자기의 생애를 전해 준 것이 있다.

"나는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없이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는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

고린도후서를 쓸 때를 보통 주후 56년경으로 잡으며, 필립비서는 주후 60년경으로 잡는다. 그런데 바울이 주후 56년까지 단 하루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말 외에는 전해져 있지 않다. 로마인에게 태장으로 맞은 것만도 세 번이나 되는데(태장은 로마가 죄인을 때리는 형벌이다), 사도행전에는 한 번밖에 나와 있지 않다. 그 외에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맨처음 필립비에서 당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유대사람이 소동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고, 치안방해죄로 고소당했다(사도 16, 20). 어떤 근거가 있었기에 치안방해죄로 고발했을 것이다(종교죄로는 당시 로마가 상대를 안 할거니까). 그 다음엔 데살로니가에서 또 소동이 났었다. 유대사람들이 로마 관원에게 "그는 온 세상을 소란케 하고 가이사의 법을 어긴 자"라고 소란죄로 고소하였다. 그 다음 또 수난을 겪었는대 여기서도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법을 어기고 …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고소하였다(사도 18, 13).

그 다음 마지막으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다. 마지막 체포였다. 이것은 고린도후서에 밖에 나오지 않는, 바로 오늘 읽은 귀절이다.

필립비서에는 왜 감옥에 들어갔는지 일언반구도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 21장 이하에 그 이야기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이야기와 비슷한 데가 있다.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에페소에 들려, 거기 장로들과 마지막으로 만나, 서로 끌어 안고 우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제 더 만나지 못 할꺼거고 붙잡았다." 꼭 예수의 경우와 비슷하다. 바울은 "성령이 나를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시니 안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결사단이 이미 조직돼 있었다. 그가 성전으로 올라가니 그 무리들이 바울을 붙잡아 죽이려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이 소요를 진압하려고 가이사랴 필립비에 있는 로마 주둔군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이런 저런 고소를 하였으나 그 증언이 서로 맞지 않았다. 예수가 당하는 것과 거의 꼭 마찬가지였다. 로마 병정들은 이 유대인들의 증오심에서 바울을 보호하고 구출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묘한 말하나가 삽입되어 있다. 천부장이 바울을 이끌고 가이사랴 필립비로 가는 도중 "당신이 헬라말을 할 줄 압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다. 헬라말을 잘 안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얼마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폭도 40명을 이끌고 광야로 갔던 그 애굽 사람이 아니오?" 하는 난데 없는 질문을 하였다. 이것은 뭔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 폭도란 말은 "스카리오"를 말한다. "암살하는 자객, 결사대"를 뜻한다. 이 "스카리오의 주동자가 아닌가" 하고 묻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후 문맥상 이상하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당시 광야에는 유대 스카리오들이 30,000여 명이 모였는데, 그 주동자의 구호는 "여기 오면 내 그대들에게 평화의 상징을 보여 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30,000여 명은 "예루살렘을 더러운 자들의 손에서 뺏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감람산으로 전격해 갔다. 그때 총독 피닉스가 군대를 동원해서 그들을 격퇴했는데, 그 주동자는 도망해서, 이집트쪽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한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는 사실은 그 배후에 굉장한 역사적인 사실이 은폐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도 왜 그가 죽어야만 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더군다나 가롯 유대의 역할 같은 것은 마치 오페라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편지요!" 한마디 하고 없어지는 사람과 같다. 여기 바울의 경우도 보면, 로마 사람들이 관여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단지 반로마 운동만 규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유대인들에게 자유로 넘겨줬다.

3

앞에서 잠깐 인용한 바와 같이 바울은 많은 고생을 하고 매도 많이 맞았다. 그는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 내 몸에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는 고백을 하였다. 이것은 얻어 맞아서 상처가 생긴 것을 말한다. 즉 맞은 자리다. 말하자면 바울의 생애 전체는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만약 그가 설교를 해도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순복음 계통의 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했다면 그렇게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그는 무슨 못된 설교를 했는지, 밤낮 얻어 맞고, 밤낮 쫓기고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즉 사건, 사건, 사건이 그의 생애를 점철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전할 것을 다 전했다.

이렇게 사건으로 생애를 점철하던 바울이 결국 필립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필립비서에 보면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죽는다" 하면서 그는 새 사실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사건'이었다

"내가 그동안 계속 사건을 당했다. 얻어 맞고 억울하게 당하고,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지나가는 일이고 역학적인 일이다. 오직 내가 믿는 것은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예수의 십자가만을 전하겠다. 이것만이 내가 전할 중심이다."

여기서 그는 새 사실을 말한다. "내가 당한 일 자체, 내가 옥중에 들어갔다는 사건 자체를 하느님은 복음전파 아니 복음의 전진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건 자체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전제하고 있다. 사건! "반드시 말만이 아니라 내가 당하는 사건, 내게 이뤄지는 사건 자체를 하느님이 쓰신다"는 확신이다. 반드시 승리할 때만이 아니라 반드시 영광스런 때만이 아니라, 행복하게 될 때만이 아니라 어떤 성공을 거둘 때만이 아니라, 쓰러질 때, 얻어 맞고 피가 터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패배하고 불행하게 되는 그 속에서 하느님은 그의 편이 되어 주시고, 그 사건들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하느님은 그의 일을 하신다는 확신을 그는 갖게 되었다. 이 새 사실을 그는 발견하였다. 그렇다.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사건이요, 바울 생애 전체도 사건의 연속이었다. 부활도 사건이요, 오순절도 사건이었다. 사건의 점철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사는 앞으로도 사건을 통해서 이어져 갈 것이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은 이 사건들을 통해서 그의 일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여기에는 성서 안이냐 성서 밖이냐, 교회 안이냐 교회 밖이냐 하는 구별이 없다. 오늘날까지 하느님은 바로 이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그의 일을 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의 증인이다.

성서는 이 사건들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다. 모세의 이야기, 엘리야의 이야기, 엑소더스의 이야기, 그리고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 히브리서 13장의 이야기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그러면 이 '사건'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보통 역사가들은 사회학적으로 혹은 역학적으로 사건들을 해석한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나쁘고, … 윤리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타락했으니까 그들은 망했고, 이들은 특별히 이런 게 있었으니까 이겼고 …하는 식으로 역사적인 사건들을 해석한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승리할 때뿐만 아니라 망할 때에도, 하느님은 그 망한다는 사건을 통해서 그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놀라운 눈을 가진 예언자들이 있었다.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있음과 동시에, 반대로 불행과 멸망을 예언하는 예언자도 있었다. "지면 내편이 아니고 이기면 내편이다" 하는 식의 사고가 아니고 "사건 전체를 통해서 하느님이 이긴다"는 굉장히 고답적인 사고를 그들은 갖고 있었다. 예수의 사건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다. 그것만 내버려두면 사건이 의미화가 되지 않는다. 단순하게 보면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잡혀서 죽은 것이 십자가의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고, 또한 죽으자 가운데서 살려 일으키셨다고 해석할 때 그 의미는 아주 달라진다.

4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히브리 13장을 나는 즐겨 인용한다. 레위기서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죄를 대속할 때 사용한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사람들이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순결한 짐승의 피를 대신 바치는 의식이었다. 피는 제단에 바치고 그 가죽, 똥은 성문 밖에 버렸다. 또 하나는 흠없는 양을 끌어다가 제물로 바친 다음, 피를 뿌려서 제물의 죄가 그 피에 흡수됐다고 생각하고 그 피를 그 양에게 발라준다. 이는 우리 죄를 "네가 다 짊어져라" 하는 뜻이다. 그리고 그 양을 광야로 끌고 나가 버린다. 그러면 이 양은 광야를 헤메다 죽게 된다. 잔인하다면 참 잔인한 일이다. 우리 예수도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아닌, 저 성문 밖으로 쫓겨 나서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앞에서 말한 제물로 드려진 양의 똥과 살과 가죽처럼 성 밖에 끌려나가 거기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으로 나가자. 거기 그리스도가 계신다.

사건이 있으면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 앞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고 증언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이란 뭐냐? 하고 이 사건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우리는 사건을 평면적으로만 본다. 사회학적 관측, 정치적 관측, 경제적 관측, 생물학적 관측 등등, 이런 관측들은 모두 다 평면적인 관측이다. 우리가 관측한다는 것, 즉 객관화해서 관측하는 것은 모두 다 평면적인 관측이다. 이런 평면적인 관점에서 승패를 보기 때문에 이기느냐? 지느냐?하는 문제를 크게 생각하고, 이기면 축제를 올리고, 지면 끝장이 난 줄 알고 절망하게 된다. 처음에는 의분을 가지고 야단스럽게 시작을 했다가도, 평면상에서 볼 때 다른 가능성이 없으면 맥이 빠지고 절망한다. 일반이 그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그리스도인들도그런 실정이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사건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평면적인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면적인 것 속에 뚫고 들어오는 수직적인 것을 말한다. 즉 평면적인 것에 수직적인 것이 뚫고 들어와서 터지는 일이 사건이라고 성서는 해석한다.

예수 자신의 죽음도 평면적인 것으로 해석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사람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즉 하느님이 간섭해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이다. 호리존탈(horizontal)한 것에 버티칼(vertical) 한 것이 마주치는 거기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이것이 사건이다.

우리는 일상성 속에 사로잡혀 사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이 기본적인 버티칼한, 수직적인 하느님의 개입을 잊어버리고 만다. 계산에 넣지 않고 산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개입해 들어온다는 사실 즉 기적을 믿어야 하겠다. 성서의 말씀대로, 세상이 뭐라해도 하느님은 개입해 들어오신다. 뚫고 들어오신다. 기적은 일어난다. 계속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을 믿고 선포한 것이 그리스도교의 역사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과학에서도 그걸 다시 새롭게 말한다. 자연법칙이란 영원불멸하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발적인 것이 점철되서 연속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보고 증언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느님이 개입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성서의 기본적인 입장에 비추어, 오늘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봐야 할 것이다. 호리존탈한 데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버티칼한 사건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성서적인 계율에 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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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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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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