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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1. 마르코복음의 수수께끼

맨처음 기록된 복음서인 마르코복음의 수난사를 분석하면서 놀란 것은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는 기사에서 겟세마네의 고투 그리고 골고타에서의 처형에 이르기까지 일언반구의 종교적 또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나 어떤 묘사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이미 부활경험을 했고 그리스도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 예수의 생애를 케리그마화한 지 오랜 후에 기록됐다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다. 이 수난사의 과정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조금도 다름없이 물리적으로 힘세고 음모를 잘하는 강자가 이기고 약자는 패배하며 때리는 자와 맞는 자, 울리는 자와 우는 자, 뺏는 자와 빼앗기는 자, 사리(事理)보다 억지가 이기는 그런 장면의 연속이며 그런 현실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개입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암흑의 연속이며 한 줄기의 빛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 냉혹한 현실은 십자가에 처형 된 예수의 최후의 절규에서 그 극치를 드러낸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것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드디어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의 운명은 이렇게 끝났다. 물론 마르코는 부활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서술법은 특이하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궁극적 승리를 과시하는 축제적 상황은 일체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의에 빠진 여인들이 그의 시체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그가 묻힌 무덤을 찾았을 때 그들은 거기서 죽은 예수의 시체도 못 보았고, 그렇다고 다시 산 예수도 못 만났고, 단지 '한 청년'이 "놀라지 말라.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자렛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그대들은 지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리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는 메시지만 들었다. 그런데 마르코는 그 여인들의 환희 대신 "놀라 정신 없이 무덤에서 나와 뛰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서워서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라는 서술로 끝낸다. 그리고 마태오나 루가에서 보는 것 같은 부활한 예수의 현현으로 승리를 시위하는 장면은 전혀 묵살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2. 유신론의 신

왜 하필이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절망적인 절규로 예수의 생애를 끝냈을까?

이것은 예수의 최후는 단순한 비극적 패배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장 폴 같은 이는 문학적으로 이런 입장을 반영했다. 그렇게 하느님에게 매달렸던 예수가 죽은 후 그 하느님을 찾아온 우주를 배회 하면서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 하고 불렀으나 영원한 태풍소리만 들릴 뿐 모든 것은 공허 자체였으며 어떤 반응도 못 듣고 결국 다시 세상에 내려와서 죽어 관 속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무리 중 돌아오는 그에게서 새 소식을 들으려는 어린 혼들에게 우리는 모두 고아라고 하고 탄식하는 예수를 묘사했다. 이것은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 이전에 상징적인 현실 폭로다. 그러나 이런 글을 쓴 폴은 끝에서 '그것은 꿈이었다. 꿈이기 다행이지' 하는 결론으로, 그렇게 무신세계(無神世界)를 선언한 다음에 올 카오스가 더 두려움을 드러냈다.

또 다른 해석은 이것은 비명이 아니라 시편에 있는 그대로를 찬송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그렇게 무능하고 비겁한 최후를 마칠 수 있느냐는 영웅주의에 선 해석이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예수는 고통도 침범할 수 없는 초인은 될 수 있을 지 모르나, 그렇게 풀이하면 예수의 십자가상의 고난은 하나의 가현적인 것으로 한 연극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또 다른 일반적 해석은—이것은 우리의 고정 관념이 된 것인데—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렀으며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것이라고 하는 해석이다. 이 면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뺄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느님마저도 '눈은 눈으로'라는 인과율적 법칙에 매인 분으로서 그의 전능성이 약화될 뿐 아니라 그 하느님은 피에 굶주린 복수의 신 이상이 아니라는 냉혹한 비난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의 해석들은 모두 유신론의 테두리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러니까 하느님은 존재한다!' '저러니까 하느님은 존재해야 한다는 유신론은 이러니까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저러니까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과 같은 테두리에 있는 동전의 안팎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 예수의 최후의 비명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을 계시한 사건이라는 해석이다. 예수의 수난에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신은 침묵 자체였으며 무(無)와도 같이 전혀 존재 영역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바로 그런 현실, 아무리 세상에 부조리가 지배해도 간여하지 않는 그런 현실 한복판에서 그래도 '나의 하느님'이라 부르짖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선 신앙의 참 모습이며 그는 무(無)와 같은 진실 위에 신앙이라는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것도 비록 버림을 받았더라도 그래도 버림받은 아들로서 그대로 충실하겠다는 단호한 신앙의 토로로 볼 수 있다. 까닭은 버렸다는 것은 가장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자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이것은 자기 운명에 대한 비명이기는 하나 하느님과의 관계의 포기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해석, 또 위의 모든 해석들이 모두 일면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나 그러나 모두 선입관적 도그마 또는 주관적 신앙에만 치중하고 지금 그렇게 부르짖고 있는 그 비명, 역사 안에 일어나고 있는 그 사건 자체에서 지나가 버리는 폐단이 있다. 그러한 현상이 본문에 잘 드러나 있다.

본문에 의하면 이른바 강도들 사이에서 억울한 재판에 의해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런데 '지나가던 자들' 즉 중립적 입장에 있는 자들이 그를 보고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한다. 또 그를 처형하는 데까지 음모한 주동자들인 대제사장, 율법학자, 장로들은 "이스라엘 왕이여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오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겠는데! 그가 하느님을 의지하고 있으니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겠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그랬으니까?"라고 한다. 또 예수가 "엘리 엘리" 했을 때 거기 섰던 자, 즉 관망자들이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어디 엘리야가 와서 구해주나 보자"고 한다.

'어디 보자!' 이것이 바로 유신론적 입장이다. 저들은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일이 이렇게 되도 저렇게 되도 유신론에 머물 것이다. 저들은 어디 보자!고 한다. 무얼 보자는 것인가? 저에게 하느님이 간섭하나 보자는 것이다. 즉 유신론적 도그마가 저에게 적용되나 안되나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신론적 관심이 저들의 눈, 귀, 마음을 현실 앞에서 차단시켰다.

유신론 자체는 세계의 수수께끼를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때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저들의 유신론이 언제나 기존적인 척도에서 보는 승리, 영광, 행복이라는 측면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유신론은 낡은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그 과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승리하는 자, 잘 사는 자, 웃을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힘은 곧 진리라는 입장과 상통한다. 하느님은 바로 승리자, 잘 사는 자의 편에 선 자이다. 이에 대해서 지금 패배하고 수난당하고 울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자는 자신의 업보이며 하느님이 그런 자의 편에서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저 유신론적 방관자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그 처절한 수난자, 그의 비명을 볼 눈도 들을 귀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유신론자들의 신은 역사적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관망하고 심판하는 이로 보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신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이가 아니라 역사 밖에서 이 역사를 무대로 한 드라마의 연출가로 만들어 버린 것이고 역사는 하나의 극(劇)이요 인간은 각기 맡은 배역을 담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런 유신론은 '말씀(神)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 안에 계시다'라는 화육(化肉)의 신앙과 정면 대립될 수 있는 것이다.

3. 성서의 하느님

그런데 성서에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의 하느님을 말한다. 예언자들 중에는 그의 백성을 반드시 승리하게 하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오히려 그 백성의 패배와 고통 속에서의 하느님의 뜻과 행위를 역설하는 이른바 불구원의 예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낸 군상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승리나 영광 속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패배와 비극 속에서도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다. 이와 관련해서 제2이사야는 추하고 볼품 없고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많은 수난을 당하는 자—유신론자들이 신에게 저주받은 자로 보는―에게서 우리의 질고, 슬픔, 징벌을 대신 담당하는 신적인 다른 측면을 구체적으로 본 예언자다(53장). 이것은 비극적 운명 속에서 하느님 자신의 활동을 본 새로운 눈이다. 신약성서에서 이 예언자의 눈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뜻을 해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들의 설교'를 통해 낡은 가치관과 유신론적 신관(神觀)을 정면으로 뒤엎는 선언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 지금 굶주린 자, 지금 슬피 우는 자, 미움을 받고 배척당하고 욕먹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며 저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선언한다. 이것은 현재 인간들에게 소외당한 이른바 죄인들인 창기나 세리같은 '죄인'들이 당시의 승리자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가고 있다고 선언한 마태오복음의 말씀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낡은 가치관 위에 선 유신론적 관망자의 입장을 떠나서 지금 이 역사 안에서 공기를 진동하는 그의 비명소리를 듣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정말 철저히 버림받은 자의 절규가 아닌가! 그러한 절규를 그대로 들을 때 우리가 유신론을 펼까? 아니면 함께 울어야 할까? 울고만 있어야 할까? 비록 유신론적 입장에 선다고 해도 거기서는 하느님이 정말 없단 말인가?

최후의 심판의 비유(마태오 25장)는 우리에게 중대한 사실을 전한다. 그 비유의 심판자(예수)는 심판의 기준으로 그가 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됐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갔을 때 그 고통, 그 비극에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두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극히 적은 자의 고통의 소리에 응한 것이 바로 심판자 자신에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바로 수난자와 자신을 일치, 아니 그 수난 속에 계셨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수난의 주체는 신 자신이고 인간은 수난하는 신 앞에서 있는 셈이다. 그 수난자는 '나를 믿으라'고 예배의 대상이 되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고난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런 눈으로 보면 루가복음에 있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뒤집어 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 중에서 그리스도의 알레고리를 찾는 자는 바로 그 선한 사마리아인을 지적했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 강도에게 죄없이 강탈당하고 몸에 상처를 입고 무인지경에 내버려진 바로 그 수난자가 예수여야 한다. 이 신음하는 이의 처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그의 신음에 귀를 막고 지나간 자들은 바로 유신론의 상징인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종교인들이었고 그 소리에 응해서 자기가 정한 방향을 바꾸는 모험으로 그 수난에 참여한 자는 바로 지나간 저들의 눈에서 소외된 사마리아계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그의 비참한 처지에 그대로 호응해서 자기가 돕지 않으면 누구도 도울 수 없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므로 그 수난의 이웃이 됐다. 그는 수난자를 보고 그를 구하기 위해서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고 어떤 종교적 이유를 따로 붙이지 않았다. 그는 관망하거나 수난당한 자의 성분을 묻지도 않고 단순히 구해야 할 자를 구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웃(그리스도)을 만났다.

4. 오늘의 그리스도

우리는 '오늘의 구원' '현존의 그리스도'를 찾아 많은 이론을 편다. 그것은 어제나 내일의 구원이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건으로 현존하는 초월에의 갈구다. 그러한 갈구는 세계관의 원리를 찾거나 보다 행복하려는 욕구에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이 부조리와 비극을 몸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그런 현장에서 삶의 무의미성을 몸으로 느껴서하는 몸부림이다. 이런 몸부림은 쉽게 역사적 지평을 넘어서 저 피안을 향하게 하거나 아니면 이 지평선상의 변혁에 기대 본 데로 기울어지기 쉽다.

갈보리 산상의 처형현장에는 피안적 개입도 또 어떤 역학적 변혁도 없었다. 그러면 이 사건은 비극의 연장, 삶의 무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폭로한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은 피안에서의 개입을 기대하게도 하지 않으며 부활의 승리에로 뛰어 넘게도 하지 않고 지금 '패배' 속에서의 절규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왜? 저 고대 희랍작가들에게서 보는 것처럼 하나의 비극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나 저는 비극작가가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사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평선상의 이 절규 속에서 '초월'을 만나라는 말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이다. 그럼 그 사건에서 2천년의 시간적 거리를 가진 오늘의 우리는 어디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2천년 전으로 소급해서 그를 만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부활의 승리가 지배하는 현실로 이변(移變)된 현장에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오늘의 그리스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절규를 오늘에서 들을 수 있을 때이다.

2천년 전의 그분의 절규는 2천년의 역사를 꿰뚫고 계속 들려오고 있다. 그것은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보는 대로 수난당하는 이웃의 비명소리를 타고 우리 현장에까지 진동한다. 우리는 오래 교회의 설교에서 오늘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주장을 들어왔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의 대부분은 십자가의 교리를 들려주어 그를 예배의 대상화하여 비역사화하거나 부활의 승리를 말하여 현장의 비극을 은폐한다. 그런 한 그것은 오히려 현장의 그리스도를 엄폐하고 현장에서 눈을 감고 2천년 전에로 소급시키거나 관념의 세계로 도피하게 한다. 참된 설교라면 현장의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그것은 2천년 전의 그 절규가 오늘의 현장을 위장한 장벽을 무너 뜨리고 우리를 그것에 직면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설교가 말로 그쳐서는 안 되고 사건의 현장을 서로 이끄는 증언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6.25 동란 때 그 처절한 비극 속에서 그리스도의 절규를 들은 일이 있다. 공산군이 입성한 어느 아침에 동굴에 숨었다가 국군이 환도한 것으로 착각하고 거리로 나갔다가 오늘의 신세계백화점 앞에 무장한 채 시체로 쓰러진 아들을 가슴에 안고 무엇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 어머니의 절규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비참한 월남전 보도 사진들을 무수히 보았는데 총탄에 절명한 어린 애기를 가슴에 안고, 피투성의 얼굴을 하고 땅을 치는 젊은 엄마의 모습에서 또다시 그 절규를 들었다. 최근에 나는 판자촌이 헐리고 거처할 곳 없어 전전하는 '어떤 어머니로부터의 편지'에서 우리 어린 자녀들을 김대두(金大斗) 같은 살인마를 만들 수 없어서 그 입장을 하소연한다는 대목에서 또다시 그 절규를 들었다. 우리의 눈과 귀를 덮지 않는다면 우리의 현장에서 진동하는 그 절규를 연쇄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온 세계가 지금 그 어느 시대보다도 억울한 자의 절규로 충만하다. 우리의 현장은 바로 우리가 선 자리이기에 이 절규가 몸 전체에로 숨어든다. 이런 현장에서 절망하는 자는 神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절규에 호응해서 그 고난에 참여하는 자는 오히려 정말 이 현장에 엄존하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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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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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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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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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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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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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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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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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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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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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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