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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1. '너무나 짧은 그의 생애'

이 제목은 청년들이 요청한 제목이다. 이 제목에 두 가지 강조점이 있다. 하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까?'이고 다음 '청년!'이라는 것을 강조한 점이다. 예수가 이 사회에 첫발을 내밟은 것은 청년기이다. 그러나 불과 1년 내외에 로마와 그 앞잡이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처형당했다. 최근까지 학자들의 중론(衆論)은 기원 30년경에 처형 된 것으로보고 있다.

1년도 못 산 예수, 청년, 30세의 청년 예수I 그런 그가 2000년 후의 우리를 사로잡는다. 위대한 지식을 지닌 성현(聖賢)도 아니었다. 그는 겨우 성서나 해독하는 정도의 민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명문 집안에서 낳다면 모르겠다. 그는 수공업, 즉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를 다윗의 계보로 삼으려는 마태오, 루가의 노력은 맞지 않는다. 그는 제사족속(祭祀族屬)은 아니요 바리사이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예루살렘에서 나거나 거기서 공부했거나 활동한 것이 아니라 600년간 유다인에게 '이방인의 땅'이라고 버림받은 갈릴래아에서 낳고, 거기서 자라서, 거기서 활동했을 뿐이다.

2.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살았기에 그의 생애는 그렇게 짧았으며, 어떻게 죽었기에 그의 죽음이 시공의 한계를 넘은 폭발력을 갖었던 것인가? 그것은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는가?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는 로고스이기 때문에, 그는 생명의 원천이기에 그는 신이기에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젊음'이라고 하고 싶다. '젊음' 이것은 바로 생명의 구체적 상징이다. '젊음'은 계속 낡은 것에서 탈출하여 새것을 창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방성과 창조성이 그 특징이다. 이것을 늙음과 대조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늙음이란 폐쇄적이고 그러니까 정착적이다. 그러면 창조적이 못되고, 수호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보수란 바로 그런 것이다.

역사는 계속 발전, 진화한다고 믿는 패들이 있는가 하면, 반복될 뿐이라고 믿는 자가 있다. 이 두 견해는 다른 듯하나 공통점은 역사의 목표를 못 보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목적론적으로 본 것은 히브리인들인데, 성서가 그 입장으로 일관한다. 이것을 받아서 역사 철학으로 체계화해 보려고 애쓴 것이 헤겔이고 마르크스도 역시 그 계열이다. 또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에는 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역사는 목적을 향해 전개되고 있다고 볼 때, 거기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된다. 그것은 늙음과 젊음이다.

역사 현상을 단계적으로 볼 때, 언제나 담지자가 있다. 민족이든, 계급이든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 민족, 그 계급 그리고 그들이 주체가 된 문화는 늙어간다. 이 때, 이 늙음을 박차고 또 깨뜨리고 나오지 않으면 썩는다. 이것을 박차고 새 역사의 장(場)을 여는 것이 바로 혁명인대 이것은 '젊음'이 하는 일이다. 이 '젊음'은 지하에 묻힌 용암같이 땅 속에 흐르는 썩지 않은 생수같이, 지구와 그 위를 사는 것들에게 생존을 가능하게 하며, 때로 폭발하여 지구표면에로 표출하여 낡은 것을 태우거나 분출하여 고갈된 상태에서 새 생명을 공급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의 예수됨을 그 '젊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는 지하에 숨은 용암처럼, 생수처럼 2000년 낡은 역사의 껍질을 깨고 뛰쳐나와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고갈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창조의 샘이 된다. 그의 '젊음'의 원천, 그 물줄기에 자신을 연결시킨 젊음이 이 역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나는 일생토록 구원(久遠)의 젊은 예수에게 매혹되었으며, 그에게서 힘(氣)을 얻어 살아왔다.

3. 오늘의 '젊음'

그런데 여러분의 관심사는 '오늘을 사는 젊음'이다. 예수는 바로 이 젊음의 원천이라는 뜻에서 그에게 연결되어 오늘의 썩은 지각을 깨고 표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 오늘을 사는 예수는 누구인가?

단적으로 그는 민중의 친구로서 오늘을 산다. 마르코 2장에 세무소에 앉아 있는 레위라는 세리를 본 젊은 예수가 "나와 운명을 같이 하자"고 했는데, 레위는 곧 그를 따를 뿐 아니라 출가의 잔치를 베풀었다. 거기 모인 초청객들은 그와 같은 계층인 세리 그리고 죄인들이었다. 적어도 그 때 지배층에서 볼 때 사람 아닌 사람들, 인간 중심에서 밀려나서 연대적 민족공동체에서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그런 무리들이다. 당시 체제에서 로마의 죄인으로 소외된 계층을 분류하면, 네 가지 원인에 의해 배제된 자들이다.

첫째는 가난하기 때문에 그 때 종교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자들! 가령 안식일 시행법을 지키면 그날 또는 그 다음 날은 굶어야 하고 십일조는 고사하고 그날 그날의 먹을 것에 허덕인다. 그러니 이른바 사회적 의무를 지킬 수 없다. 결국 가난 때문에 된 죄인이 생겨났다.

둘째는 직업상으로 된 죄인이다. 세리는 악질로 간주되었는데, 그것은 민족 감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하든지 했을 것이고 그들도 가난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악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저들은 민족의 적으로 간주됐으며 그것을 종교적으로까지 죄인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어부, 목동 창기 등은 안식일이라고 쉴 수 없다. 가는 배를 정지시킬 수 없고, 안식일은 휴업이라는 간판을 내걸만한 창기는 없다. 목동 역시 생물들을 안식일이라고 해서 굶길 수는 없다.

셋째는 병자들도 죄인이다. 즉, 혈루병, 나병 등은 뚜렷하게 저주받고 불결한 죄인으로 되어 있고, 그 외에 소경이나 귀머거리나 하여간 병은 죄의 원인이라는 판결 때문에 저들은 인간 대우를 못 받았다.

넷째, 그리고는 정치적 죄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한 반로마 게릴라 부대, 그들은 동시에 집권층에 붙어먹는 예루살렘에 사는 지도층을 쳐부수기 위해 칼을 갖고, 필요할 때는 그것을 썼다. 반로마의 봉기를 주도했던 유다를 '갈릴래아의'라는 단서를 붙였듯이 이들을 로마는 물론이고, 예루살렘 중심의 지배층은 '강도'라고 불렀다. 끝으로 지방의 성격을 규정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을 함께 매도하기도 했다. 갈릴래아나 사마리아 지방을 그렇게 보려는 것은 유다 지방 사람들이다.

예수를 '나사렛' 또는 '갈릴래아의 예수'라고 부른 것은 그런 저의가 있다. 그것은 그 지대가 그런 무리들의 우범지대이기도 하지만 촌놈, 촌닭이라는 멸시의 뜻도 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상과 같은 민중의 편에 선 것이고, 그들을 친구로 함으로 기존법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선동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됐던 것이다.

예수가 왜 권력자에게 잡혀 죽었나? 아직도 견해 차이에서 판가름이 나지는 않았으나, 분명한 것은 바로 이런 무리의 편에 서서 저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저들의 입이 되어 주고 그리고 기성 종교귀족 층에 대해서 저들을 '오고 있는 나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한 것은 바로 혁명 내지는 큰 소요죄로 단죄됐을 가능성은 100% 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의식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배층들이 그를 감시할 때, 그리고 고소할 때 "나는 이른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이른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언했다.

4. 젊은 예수의 민중을 위한 싸움

그럼 저들의 친구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첫째,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현체제에서 죄인으로 규정받는데 대해, 새 세계가 곧 올 터인데, 그 날의 주인이 바로 저들이라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대우함으로 더불어 수난당했다. 사람이 사람취급 못받는 것을 보고 그대로 나만은 그래도 사람이라고 담을 쌓는 자가 청년인가? 아니다. 청년 예수는 그런 것을 그대로 보고 넘어가지 못했다. 죽음을 내놓고라도 예수는 말했고, 행동했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예수는 죽임을 당해야 했다.

둘째, 청년 예수는 위와 같은 민중이 수난당하는 현장에 찾아가서 위로한 이가 아니라 자신이 민중이 되어 그들의 운명을 자신이 걸머졌다.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심판의 비유는 그 뜻을 잘 드러낸 것이다. 굶주린 자, 고향을 잃은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등의 고통을 자신의 등에 짊어졌다.

한 사람이 굶주려 쓰러졌다. 무심히 지나간 사람, 그에게 한 조각의 빵을 준 사람, 목말라 물 한 모금 달라는 사람, 그대로 모른 척 지나간 사람, 그에게 물 한 모금을 준 사람, 헐벗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 병들어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지나가거나 도와준 사람이 있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공범자, 한 패라는 누명을 쓸까봐 근방에도 안 간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돌본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렇게 한 조각의 빵, 한 모금의 물, 병들고 갇힌 사람들을 도와주고 돌본 사람들이 바로 변모한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는 그 굶주린 사람, 그 감방에 갇힌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상의 일치가 아니라 그 자리를 교체했다고 봐야 초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 이해의 틀에 맞는다.

셋째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한 예수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비명을 올렸다(마르코). 그는 버림받아도 철저히 받는다. 억울함도, 수모도, 외로움도 그리고 철저히 다 뺏겼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옷벗기고 관권(官權)에게 재판받아 정치범으로 처형당하는 마당에 최후 비명을 올렸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비명! 2000년을 두고 계속 메아리치던 이 비명!

죽음으로 모든 버림받고 억눌리고 억울하게 직장에서 추방되고 해고된 수많은 학생, 교수, 신문기자, 노동자, 목사들! 반공법에 가두고 나라위한 충성의 소리를 자기들이 불러주는 대로 안 하고 자기 소신껏 애국충정을 토로하면 9호 위반으로 쓸어넣고 공산당에게 노동자들을 뺏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민주, 민권의식을 돕는 산업운동을 공산당짓이라고 해서 영등포 예장 산업선교본부에 500만원의 추징금에다 1,500만원 넘는 벌금을 부과하고, 이들의 뜻이 고마워 동조하는 여공들에게 마침내는 똥을 퍼다 입에다 틀어막는 이런 무모한 짓이 자행되어도 오늘의 국민의 입이어야 하는 신문은 벙어리가 됐다.

여기 청년 예수의 원천적 비명이 메아리친다. 그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다. 이렇게 죽은 그가 살아났다는 것이 부활이요, 그렇게 무능하던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살아나서 민중의 편에 서고 저들을 대변하다 모두 처형되고 그러면서 침묵하고 저들의 대변인이 되고 하는 역사로 그리스도교는 시작됐다. 청년 예수의 젊음이 그들에게 계승된 것이다.

5. 오늘의 젊은 예수는?

그러면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가 어디 있나? 그는 바로 일차적으로 부조리 속에서 억눌리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려고 침묵을 깨게 하다가 잡혀 감옥에 갇힌 저 청년들이 사는 거기 있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남 공부할 때 공장에 취직해서 3만원 미달의 월급에 14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다 못해 산업선교의 도움으로 초과수당을 요구하다가 입에 똥을 물어야 하고, 그들과 그의 동료들의 이 억울함을 위해 투쟁하다가 집단해고된 124명의 여공, 그리고 가장 질이 나쁜 섬유노조위원장이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헛소리하는 현장에 가서 그의 비행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돌렸다고 선거법 위반으로 투옥된 7명의 아가씨, 약속받고 심은 고구마를 거둬 길거리 내놔도 끝끝내 가져가지 않아 결국 모두 썩어 내어 버리므로 기아선상에 선 저 농민들! 바로 이들의 삶의 현장에 청년 예수는 있다.

지난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폭로된 것을 보면 지난 5월 5일에 완전히 썩어 짐승도 못먹을 김치와 국을 준 데 항의하여 반항했다고 해서 구타당하고, 팔을 뒤로 묶고 입에 자갈을 물리고, 전기도 주지 않다가 감옥 속에 감옥에 쳐 넣었으며, 이런 일이 분노로 격화되자 결국 9사 4층에 따로 가두었다가 11개 교도소에 분산시켰다. 청년 예수는 바로 거기 있어 그런 수난을 당한다.

여러분은 바로 이런 '젊음' 예수가 "나를 따르라"는 것은 바로 "젊은이여 나와 연결되라"라는 말로 들으면 된다. 그러나 연대적 젊음은 가능성이지 젊음의 현실은 아니다.

여러분은 젊은 청년 예수의 피를 받았는가?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게 될 것이다. 단, 하나의 사실을 지적한다면 오늘은 2000년 이전과는 달리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구조화된 이른바 기술문명 시대라는 것과 동시에 세속적 메시아니즘으로 민중이 유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그의 젊음을 따르는 길은 구조적이어야 하며, 예수의 참뜻을 세속적 메시아니즘과 구별하는 투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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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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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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