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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마르 8, 27-33
1. 일년의 마지막 자리

마지막 대림절이다. 오늘은 구라파에서는 마지막 촛불까지 붙이므로 네 촛불을 다 켠다. 이것은 이제 예수가 오실 날이 가까왔다는 말이다.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마음의 불을 밝히고 오실 이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오는 길 닦기' 담당으로 자처했다. 루가기자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은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로 그의 역할에 대한 예언으로 삼았다.

우리는 이제 주의 나신 날을 앞두고,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또는 일생 동안 쌓아둔 재고품을 들추어 내어서 정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안에 건너 뛸 수 없는 이 깊어진 마음의 골짜기를 메우고 우리의 관념이나 감정 또는 의지 등에서 높아져 버린 것을 낮추고 구부렸던 마음 일들을 바로 잡고 험해진 것을 평탄케 하고 참 허탈한 마음으로 이제 올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마르코 8장 27절 이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 자기류(自己類)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자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해가 무너지면 세상이 망하고, 자기도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 베드로에게 그 깊어진 골짜기와 높아진 관념을 파헤침으로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이름 밑에서 숨겨진 것과는 전혀 딴 사실을 말하는 내용의 것이다. 마르코 기자의 기술대로 읽어나가 보자.

2.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장면은 마르코복음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대목이다. 8장 26절까지는 주로 가르치고 병고치는 예수가 나타나는데, 27절 이후부터 그 분위기는 돌변하듯 수난의 암운이 감돌게 된다. 이 장면은 처음으로 오늘날 지구상의 1/3이나 되는 사람들이 또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고백하는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하는 첫 고백과 동시에 예수의 비밀이 공개되는 첫 장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큰 사건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인 빌립보 근처에서 되어졌다. 몇 제자들과 예수가 길을 간다. 가다가 스승 예수는 갑자기 '세상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들 말하는가'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세상 사람들은 선생님께 대해서 구구한 말을 합니다.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 더러는 엘리야 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라고 제자들은 대답한다.

그런데 왜 당시인들은 이 한 랍비에 불과하게 보이는 이를 단순히 '랍비 예수'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턱없이 높은 칭호를 붙였는가? 당시는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다. 메시아 시대란 개벽의 미래다. 그것은 메시아가 평화와 정의로써 다스리는 현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때가 오기 위해서는 그보다 우선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비케 하는 선구자가 와야 한다는 통념을 갖고 있으므로 세례자 요한에게도 그런 기대를 안고 그의 정체를 물었다. 혹은 엘리야가 하늘에서 또는 예레미야가 죽음에서 되살아나거나 아니면 환생할 것이라는 통념에서 '세례자 요한이 바로 환생한 그들 중의 하나인가' 하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죽은 지금은 예수를 환생한 그들 중의 어느 누구일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실이 이 평범해 보이는 그를 그렇게 보게 했을까?

예수는 하나의 선구자인가?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수에게 이렇게 여러 가지 칭호를 붙이는 자가 많다. 새 세계를 가져올 자는 아직 안 왔다 또는 새 시대가 가까왔다 또는 아직 멀었다고 보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는 참 올 이의 선구자에 불과하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린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도, 우리 한국에서도 새 메시아가 와야 한다고들 한다. 지금도 예수가 여기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하고 하느냐 하면 첫 제자들과 똑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다음에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그들의 견해를 묻는다. 이 질문은 2000년 교회사가 줄곧 물은 질문이고, 교회에 들어 오려는 자에게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이렇게 교회사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교회는 바로 이 질문과 대답 속에 세워졌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베드로가 대답한 '당신은 그리스도이다'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그것을 재확인시킨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는 제자들의 이 대답은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의 대답과는 다르다. 그 대답은 그는 하나의 선구자라는 말을 부정한다. 이 말은 어떤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답을 부정한다. 이 대답은 예수에게서 역사상에 궁극적인 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는 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팔레스틴의 먼지나는 시골 노상에서 같이 걷고 있는 그를 그렇게 본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란 예수의 둘째 이름인데, 이것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것은 직권상의 칭호다. 이 그리스도란 말 가운데는 그가 이스라엘에 자유를 자져오고, 이 이스라엘을 중심할 하느님의 승리가 모든 민족에게 미치고, 인간의 마음을 변동시키고, 평화와 공의가 지배되는 새 시대가 옴으로 결국 이 역사가 끝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3. 당신은 그리스도이다

이렇게 역사가 그 때와 본질상 큰 변동이 없이 전쟁, 불의가 계속되는 이 마당에서 그런 고백이 정말 가능한가? 그러나 베드로의 이 대담하고 위대한 고백은 예수의 비밀폭노로 무산된다. 예수는 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정면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칭호 밑에 깔린 관념을 정면 거부했다. 저들은 그리스도라는 칭호 아래서 두 가지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첫째는, 위대한 민족적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는 전제이다. 이것은 메시아는 다윗의 후예일 것이며, 그의 고향은 다윗처럼 베들레헴일 것이라는 통념과 맥을 같이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에게 승리와 영광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고 로마제국을 무찌름으로써 땅 위에 새 시대가 오게 하리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승리와 영광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비밀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은 이 침묵 명령을 그의 자신의 그리스도 신념을 비밀로 붙이라는 뜻으로 받는다. 제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예수는 아마도 우리에게도 이런 명령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자기 욕심대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예수와 상관없는 한없이 많은 표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도 바로 베드로적인 그리스도만을 설교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반발한 순진한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조용히 침묵하라, 오늘 나에게 절대이니까"(schweige stile denn er mir das Absulüte)라고 했다. 예수 명령을 그래도 따른 것이다. 사실상 벌써 수만종의 예수전과 그에 관한 설명서가 나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모두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그는 마침내 비밀을 폭로한다. "인자는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모든 장로들과 대사제와 서기관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며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것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말 이상이 아닌가? 베드로는 무한한 영광의 꿈을 안고 자신도 더불어 누릴 영광에 부풀었는데 그리스도이어야 할 그 당사자는 죽음을 얘기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를 깨고 또 깨는 말이며, 기대하고 규정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많은 환상가들의 꿈을 산산조각을 내는 말이다. 정치적인 주(主)로 기대되는 그가 정치가들에 의해서 배척받고 하느님에게서 온 자로서 모든 종교가들에 배척받고,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바꾸어 축복으로 변화시키고 마침내 죽음까지 극복할 줄 알았는데, 스스로 고난당하고 마침내 죽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사흘만에 살아난다고 했어도 앞에 말한 충격이 너무 커서 그것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수난사에서는 끝까지 그를 따른 여인들마저도 그가 사흘만에 살아나리라는 사실은 염두에도 없었다.

이로써 베드로는 그가 이 장엄한 칭호로 한 고백으로 허구성이 여지없이 폭로됐다. 그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일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보았다면,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정말 믿었다면, 그의 보여 주는 것 앞에 무조건 복종했어야 한다.

내 머리에 그린 것대로의 그리스도라면 그것은 벌써 그리스도는 아닌 것이다. 베드로는 결국 자기 머리에 그려놓은 그리스도 상(像)을 예수에게 투영한 데 불과했다. 이 베드로의 머리에 있는 관념은 그들 앞에선 실재보다도 더 강했다. 그들은 그 앞에 선 그를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에 형성된 관념의 그리스도를 절대화했다.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를 가로막고 그럴 수 없다고 대항한다. 마태오에는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절대로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이를 단호히 뿌리치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 한다. 이로써 그 그릇된 관념만이 아니라 그런 관념에 노예가 된 인간도 거부됐다.

4.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하느님의 일은 이래야 된다 하고, 즉 내 소원의 성취라면 벌써 하느님의 일은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일은 결국 내 가능성의 투영에 불과하다. 내 욕심, 내 기대를 하느님의 일과 바꾸어 놓고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일처럼 유혹하는 것이 바로 사탄이다.

게바! 이것은 베드로의 또 하나의 이름인 바위라는 뜻인데, 이 바위는 높은 산 꼭대기에서 천 길, 만 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경우만이 아니다. 또 베드로에게 향한 심판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이나 전이해(前理解)가 있어서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 전이해가 실체를 알게 되면 후회돼야 할 터인데, 그것이 실체를 끝까지 거부해 버릴 수 있다.

참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거부당해야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일은 영광스럽다. 그는 전능함으로 승리만이 가능하다. 하느님의 일은 창조자이니까 초자연적으로만 자신을 계시한다"는 등의 단정도 거부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는 '하느님의 일로써 패배해야 한다. 거부 당해야 한다. 수난당해야 한다. 죽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예수는 영광의 보좌에 앉은 하느님이란 관념을 뒤집어 엎고 이 역사 속에 들어와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당하는 하느님을 계시했다. 이러한 사상이 마태복음 25장에도 있다. 하느님은 바로 세상에서 버림받고 수난하는 작은 소자 하나의 속에서 수난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예수의 삶은 초라했다. 그의 출신도 사실상 초라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말구유 위에 천사들을, 하늘의 빛 등으로 장식했을지 모른다. 예수의 화상도 자꾸 달라졌다. 점차 화려한 의복이 입혀졌다. 그의 얼굴도 서구화됐다. 가장 오래된 예수의 얼굴에는 수염이 없다. 그것이 점차 자라났다. 그것은 교황이 왕권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예수에게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일은 초라하게 조용히 사람에게 가장 어두운 속에 깔려서 숨어서 되고 있음을 계시했다. 만일 예수가 이와 다르게 영광스럽게 일생을 보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2천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우리 마음을 점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장면이나 겟세마네의 장면은 처절한 고독과 비극이었다. 루가기자는 차마 그렇게 그대로 전승할 수 없었음인지 겟세마네의 기도 끝에 천사가 수종들음을 삽입하고 있다. 그리스도! 그는 참말로 십자가 상에서만 참그리스도였다.

이제는 우리를 점령하고 있는 많은 관념을 정리하자. 그리고 참 겸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자. 그 때에 비로소 내 한계성을 넘은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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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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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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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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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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