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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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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키시고 구해주시는 이
고후 1, 8-11
1

나는 31절을 계기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기 이전의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마지막 공판일 22일을 앞에 놓고 돌아가는 분위기에서 더욱 침통해졌습니다. 그것은 나만이 가진 심정은 아닐 것입니다. 31절에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알려진 것만도 서울에서만 60여 명이 연금이 되었고, 기도회를 보고 나오는 이들 중에서 짐승처럼 차에 실려 경찰서로 끌려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광주에 강연차 갔다가 밤중에 호텔에서 모욕적으로 수색을 당하고, 다음날 새벽에는 자던 중에 내복 바람으로 5-6명에게 개 끌려가듯 차에 실리워 서울에까지 압송되어 집에 연금당해야 했고, 집은 밤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수색을 하겠다는 10여 명의 경찰들과 아내가 대결하는 대소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함석헌 선생, 이해동 목사 댁도 강제로 집 수색을 당했다고 합니다.

요사이는 오는 22일의 공판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유포되고 있습니다. 불구속자들을 투옥한다는 풍문입니다. 본인들은 모두 담담하게 그 날을 각오하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정은 착잡합니다. 나는 우리의 투쟁을 위해서 당국의 강경 정책이 잘 되는 일이라는 일부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심정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오히려 70, 80 고령의 어른들과 그래도 이 민족의 장래를 걱정해서 마음과 몸을 바쳐오던 두 여자분들! 젊은 몸도 아닌 저들이 투옥된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옥중에서의 쓰라리던 경험이 다시 되살아 납니다.

내 우울은 그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운명이 걱정됩니다. 이렇게 미련하게 몰고 가면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이 어찌될까를 생각해서 착찹합니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우울한 생각은 이런 횡포를 당하고만 있는 우리 민족의 못난 데 대한 슬픔이 겹치기도 합니다.

다시 돌이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심합니다.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이 적은 무리는 그 대열에서 떨어져나와 이리에게 포위되어 있는 잃어진 소수의 양떼의 운명과도 같습니다. 단 하루, 단 한 걸음 이라도 안심할 수 있는 법의 보장이 없습니다. 정말 지금은 다음 시간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풍전등화의 운명에 내맡겨진 몸입니다. 아무리 악을 쓰고 손톱을 곤두 세우고, 피를 토하는 절규를 한다고 해도 세평(世評)에서 비웃는 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격 이상이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에서 허탈해집니다.

이 예배는 공판을 앞둔 예배입니다. 나는 예수를 생각하고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의 본문을 발견한 것입니다.

2

"형제들이여.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여러분에게 숨기지 않으렵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살 희망을 포기해 버릴 만큼 심한 환란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말입니다. 아마도 사도행전 19장 이하에 반영된 에베소에서 당한 사건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에서 그는 선동된 군중들에게 그대로 짓밟혀 죽을 뻔 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간신히 빠져나와서 사람을 가만히 보내어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여러분이 보는 대로 이제 나는 성령에게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신 것으로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투옥과 환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 합니다(사도 20, 23).

바울의 가는 길에는 언제나 매질, 투옥과 같은 환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시아 어느 도시에서도 같은 박해를 받을 때 너무 힘에 겨워서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절망과 포기, 또는 완전히 내맡기는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죽음을 각오했습니다'고 합니다. 이게 오늘의 우리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바울은 이 편지 속에서 "차라리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5, 8)고 합니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나타나는 현상만 볼 때 스쳐가는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정략적 사고, 역학적 측정(力學的 測定)으로 생각하면 이런 어려움을 견딜 수 없으며, 또 견딘다고 해서 별 승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의 심정에 사로잡혔던 바울은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고 합니다. 이것은 로마서 4장 17절에서 "이 약속은 그가 믿는 하느님, 다시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보장된 것입니다"라는 확신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절망 속에서 그냥 머물지 않고 마침내 "그러나"(alla)로써 그의 재기를 다짐합니다. 바울에게는 내적 고민이 있었습니다. 회의와 절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느냐! 내가 그를 계산에 넣지 않았었구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그 하느님은 죽은 자 살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즉, "그러나"에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던 잘못에서 다시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하느님을 재발견한 환희와 그것에서 나온 힘이 용솟음치는 전환의 발돋음입니다. 그 하느님은 막연한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까지 심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시는 이'입니다. 여기 '건져 준다'는 류오마이(luomai)는 '구원한다', '지켜준다'는 뜻입니다.

3

나는 우연히 이 귀절에서 문익환 형의 시를 생각했습니다.

쉰까지만 살았으면
하던 폐병들린 허약한 소원이
꺾일 듯 꺾일 듯하다
지나치기 이미 4년
365일을 네 곱해서 1460일
그 하루 하루를 나는
덤으로 살았다.
내 마음만큼이나 작은
유리잔—거기서 넘어나는 아버님 어머님의 눈물을
혓바닥으로 감치다가 나는
찝질한 인생을 덤으로 맛보았다.
여섯 달 살고
혼자되어도 좋다며
시집온 아내 …
그 나팔꽃 같은 마음에 내 목청을 다 쏟고
펄럭이는 가슴 옷자락에
아내의 체온을 묻히며 살기 벌써 28년
이제사 나는 덤으로 사랑을 알듯 하다.
바다 물살에 무너져 내리는
호, 영, 의, 성 네 놈의 모래성 …
하늘끝처럼 시린 달빛을 등어리에 받으며
두 손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래를 쓸어 올리다가 올리다가
손가락 사이 사이로 새 나가는
모래알들 속에서
억만 년을 씻기지 않는 반짝임을 보는
아…
그 놀라움을 나는
덤으로 만져 보았다.
나의 인생보다도 소중한 덤을
이렇게 한아름 안겨 주신
아 …
그분의 말씀은 저절로 다 노래라서
그분께 내 마음을 아뢰려다가 나는
덤으로 노래를 익혔다.
진달래 꽃송이처럼 열린 가슴에
그 분의 노래가 봄비처럼 내린다.

이것은 <덤>이라는 시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것은, 그가 4년 동안 폐병으로 생사(生死)의 명멸의 고비를 겪으면서 최대의 소원이 50세만 살게 해 달라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는 어머님, 아버님의 눈물어린 사랑을 덤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6개월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르는 약체(弱體) 때에 '나팔꽃 같은 마음을 가진 처녀의 여섯 달만 살고 과부가 돼도 좋다'는 박용길이라는 여자가 쏟아붓는 사랑을 덤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호, 영, 의, 성"을 받아 차디찬 현실에서 가진 애를 쓰며 기르는 동안 "억만년을 씻기지 않는 반짝임을 보고 놀라는 삶"을 덤으로 받았습니다. 이런 덤으로 받은 삶에 감사해서 마침내 덤으로 주는 그 분께 감사한 마음에서 스스로 시인이 되게 한 것도 덤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4

그런 그는 '50세만'이라는 소원에서 이제 60세가 되었으니, 자기의 소원에서 10년을 덤으로 받았습니다. 그는 그의 삶을 덤으로 받았다고 믿었기에 이 겨레를 위해 바치기 위해 절규하다가 옥중의 몸이 되는 영광을 또 덤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뜻밖에 온 세계에 불길들을 높이는 사건화(事件化)의 손을 보는 경험을 덤으로 받았습니다.

우리의 생이 그런게 아닌가! 제가 잘나서 무엇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도대체 몇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나! 그것이 우리의 힘인가? 아닙니다. 우리를 건져 주신 그 분입니다. 그 분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게 우리 힘인가? 아니, 그 분이 건져 주시어 삽니다. 그뿐인가? 그렇다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으면, 감사하고 말면 다 된 것인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 감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므로 앞으로도 건져주시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에서 살아왔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건져주신 그가 앞으로도 우리를 지키고 구해주실 것을 믿읍시다! 이 희망은 "육(肉)의 딸아" 하는 희망이 아닙니다. 육에 따른 희망이면 "주에게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4, 6)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4, 7).

보이는 것 굉장히 강한 것 같고 튼튼한 것 같아도 그 따위 것에 위축되거나 실망하는 것도 "육에 대한 삶"을 의지하는 결과이고, 그런 것을 넘어서서 희망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5

끝으로 바울의 부탁을 들읍시다! 이것은 수난자들의 부탁, 지금 옥중에 있고, 어쩌면 옥중에 들어갈 지 모르는 이들의 부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와 협력해 주신다면 많은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여기 기도로 협력해달라는 협력의 원문 sunupourgeo은 발돋움이 되는 것, 팔을 껴안는다(Unterfassen Cooperating)는 뜻이 있습니다. 앞서서 말하였던 사도행전의 보도에서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최후 부탁을 하고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로 되어 있고, 그리고는 서로 껴안고 큰 소리를 내며 울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기도에는 골방에서 하는 것, 공동체로서 하는 기도 그리고 행동으로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바울이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이 셋이 일체가 됐을 때, 즉 삶이 곧 기도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애찬을 나눌 것입니다. 이 애찬은 죽음을 결심한 주님이 직접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흘린 피와 살을 먹고 마시면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의 피와 살을 나눈 혈연적인 형제임을 재확인합시다! 그리고 우리 함께 팔과 팔을 끼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승리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이해동 목사의 축도를 받읍시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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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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