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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끝났다
요한 19, 28-34

요한복음의 예수의 수난사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요한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많이 전하는 것이 없고 약간의 공관서의 자료를 그의 독특한 입장에서 해석했을 뿐 대부분을 신학적 전개에 바친다. 그런데 수난사 만은 어느 복음서보다 자세하며 또 특이하다. 그 중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최후로 하셨다는 두 마디 말씀을 중심하여 생각해 보겠다.

1. "목이 마르다"

왜 이 엄숙하고 긴박한 순간에 하필이면 "목이 마르다"라는 말씀을 전했을까? 이것은 사실 그대로를 전한 것이라고 보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까닭은 피를 흘렸으니 목이 마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복음에서 전기적(傳記的)인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는 이 기자가 이 순간의 말씀을 사실이니까 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비명같은 말씀을 기록한 동기는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의 그리스도론의 반증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저들의 주장대로 하면 그리스도는 영으로 왔다가 영으로 갔을 뿐, 육체로 오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날로 더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어지럽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요한 편지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는 자, 예수가 육체로 온 것을 부인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로 공격하고 그것을 시인하는 것을 참 신앙의 기준처럼 반복한다(요일 2, 29; 4, 2-3; 4, 15; 5, 1; 5, 6. 요이 7). 사실상 요한복음의 대 선언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계셨다"(1, 14)가 그 주제이다. 그의 주장대로 예수는 초인적인 면을 가진 반면에 너무도 인간적인 면을 드러낸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나자로의 죽음 앞에), 고민 중에 결단을 못하여 절규하며(죽음을 앞에 두고), 찌르면 아픈 것을 알고 물과 피가 흐르는 육체를 가졌었다. 부활한 그가 회의에 빠진 제자 도마에게 그의 상처를 만지도록 한 장면도 바로 영지주의의 그리스도 가현설을 의식하면서 전했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단서가 붙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제 끝난 것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이다. 그것은 시편 69편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는 이 시편의 눈으로 그의 죽음의 최후를 이해한 것이다. 이 시편에는 "무고한" 의로운 이가 이유없이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머리털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과 박해를 받아 마침내 집안 식구들에게까지 소외되어 쫓겨난 후 고난이 "홍수"처럼 몰려와 그를 죽음에로 몰고 간다. 그는 인간들이 그를 학대하여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초로 마시었사오니"라고 하소연한다. 이런 역경에서 그는 하느님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여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목이 마르며", "하느님을 바람으로 눈이 쇠하였나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범죄자나 되듯이, 비참한 모습으로 고통받는 그의 모습 때문에 실족할 수 있는 이들을 염려하여 간구한다. "주를 바라는 자가 나로 인하여 수치를 당케 하지 마소서",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하옵소서!"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은 무(無)처럼 구원의 손을 펴지 않는 현실에서 인간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수난자로서의 고통이며 동시에 자기의 억울함보다 "주를 바라는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선 대속자적인 모습이다.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의 모습과 흡사하나, 이사야서는 보는 자의 서술로 된 데 대해서 시편은 수난자 자신의 말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면 "dipso"(목 마르다)! 이 한마디는 마르코복음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와 먼거리에 있지 않다. 까닭은 버림받은 상태에서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목이 마르다고 했으니까!

시편의 뜻대로라면 하느님은 끝끝내 침묵하여 이 수난자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 내게 응답하시며 … 내게 돌이키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애원한다. 예수를 처형하는 장면은 마르코의 그것처럼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밖에 그 어떤 것도 간섭하지 않는다. 철저한 암흑, 냉혹한 현실 철저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목 마르다! 이것은 기다림의 극치를 나타낸다.

우리에게 목이 탄다는 말이 있다. 갈증의 극치를 말한다. 목이 타는 상황으로 우리는 곧 사막을 연상한다. 아무도 없고 끝도 안 보이는 사막, 거기서 길 잃은 나그네는 목이 탄다. 그는 오아시스를 찾아 목이 탄다. 엄마를 잃은 어린애는 엄마를 찾아 부르고 또 부름으로 목이 마른다. 그의 그리움은 목이 타게 한다. 꼭 와야 할 이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다림에 지쳐서 목이 탄다. 단순히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목마른 자도 있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불의와 모순의 한복판에 있다는 뜻이며 죽어도 그것에 타협하고 주저앉을 수 없는 자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참 의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목이 마른 것이다. 참되게 살려는 자는 언제나 목이 마르다. 목이 탄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삶과 물을 연결시킨다.

예수가 목이 마른 것을 전하는 한 장면이 또 한번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향하는 도중 "예수는 행로에 피곤하여" 수가 성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았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다. 예수는 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다.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숙적 관계 때문에 그 여인은 물 한 그릇 줄 것을 거부한다. 육체의 목이 말랐던 이 나그네는 인정의 고갈에 목이 탓을 것이다. 무엇이 삶과 사람 사이를 이렇게 가로 막는가? 무엇이 지나는 나그네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것까지 거부할 만큼 인정의 고갈을 가져 왔는가? 지난 역사에 얽힌 낡은 관계, 우월감과 배타심이 마침내 철의 장막이 되어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은 것이다. 여기에 종교적 개념마저 가담한다. 그러므로 그 여인에게는 목마른 인간은 보이지 않고 '원수'만이 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인정의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물도 있고 물뜰 그릇도 있고 사람도 있으나 물을 줄 사람이 고갈됐다. 그러므로 '물을 달라! 줄 수 없다'던 대화는 하나의 삶의 문제로 옮겨간다. 참 물! 생명의 물,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육체의 목이 말라 물을 청하던 이 나그네는 다른 갈증에로 옮겨간다. 그것은 참 삶에 대한 갈증이다. 그 기사에는 처음 요구하던 물을 주었다거나 마셨다는 기록이 없다. 마치 그보다 더한 긴요한 갈증이 있었음을 말하려는 듯이, 마침내 그 여인과 나그네 사이에 막힘 담이 무너졌다. 물을 길러왔던 그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둔 채 동리로 달려갔다. 그것은 참 만날 이를 만난 환희, 거기서 얻은 참 삶의 생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목이 말라 물을 청하던 예수는 물을 마셨다는 기록은 없는데 양식을 사와서 권하는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여 저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원수의 담에 폐쇄되어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이 담을 헐고 마음을 열어 화합하게 된 것이다. 육체의 갈증을 사랑의 만남이 해소시킨 셈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갈증은 그를 원수로 치부하고 증오로 찬 인간들 때문에 목이 말랐다. 아니 바로 그런 현실에서 참 삶, 참 하느님을 찾아 목이 말랐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목이 마르다. 우리는 갈증에서 고통하고 있다. 까닭은 우리의 현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던 그 주변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에 굶주려 목이 마른다. 목이 탄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는다. 그러나 예수의 목마름은 철저했다. 그는 벌써 우리 앞에서 이미 목이 타서 죽었다.

그런데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의 목마름의 뜻을 심화한다. 문맥에서 보면 '목마르다'라는 말보다 그 다음의 설명에 초점이 있다. "모든 일이 이제 끝난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이 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라고 서술했다. 즉 신 포도주를 받는 것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목적처럼 되어 있다. 성서(시 69)에는 인간의 학대, 수난의 극치로서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를 마시었다"고 한다. 이것은 박해와 수난을 나타낸 것이다. 신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목마르다고 했다면 그것은 갈증을 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학대와 수난의 철저화를 자초했다는 뜻이 된다. 신 포도주는 시편의 수난자가 강요당한 초와 같다. 그러면 그는 최후의 고배(苦杯)를 자청한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로써 요한 기자는 그분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고통을 철저화했으며 사람과 하느님에게까지 철저히 버림받은 이라는 신앙고백을 한 셈이다.

2. "이루었다"

Tetelestai(이루었다)! 이 마지막의 또 한마디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끝났다는 뜻도 된다(It has been finished). 무엇이 끝났는가? 무엇이 이루어졌다는 것인가?

우리는 악한 운명과 싸우다가 마지막 거점이 무너질 때 끝장이 났다고 한다. 이것은 망했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패배를 의미한다. 하늘같이 귀하게 기르던 외아들이 죽는다든지, 병석에서 암이라는 선고를 받는다든지 뜻을 같이하는 가장 믿던 동지를 잃을 때에 끝장이라는 비명을 올린다.

논어에 공자가 이같은 비명같은 소리를 했다는 것이 두 곳 있다. 한번은 기둥처럼 믿던 제자,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噫! 天喪予天喪予"라고 했다. 하늘이 나를 버렸다는 말로서 끝장이 났다는 말이다. 그는 만년에 그의 뜻이 모두 좌절됐다고 자인했을 때 "鳳鳥不至河不出圖 吾已矣"라고 했다. 역시 끝장났다는 뜻이다.

만일 "끝났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런 뜻이라면 십자가는 패배와 체념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이밖에 같은 어원을 사용한 데가 또 한 곳 있다. 13장 1절에 그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하셨다고 했다. 끝까지라는 eis telos는 끝났다는 어원과 같은 것이다. 요한복음은 후반부터 제자들에게 집중하는 예수의 행동과 말씀으로 되어있다. 부탁과 위로와 동시에 저들이 마침내 스승을 버릴 것을 예고한다. 사실상 제자들은 그를 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저들을 신뢰할 수 있고 끝내 그의 뜻을 따를 것을 믿을 수 있을 때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이 아니었다. 저들은 끝까지 그를 배신했다. 그래도 끝까지 사랑했다.

십자가의 사건에서 양극이 드러났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임을 끝끝내 부인했다. 비겁의 끝에까지 갔다. 가롯 유다는 스승을 팔았다. 배신의 끝에까지 간 것이다. 군중은 그를 십자가에로 라고 소리 질렀다. 그들의 맹목성이 끝장에까지 갔다. 유대 종교 지도자, 그리고 빌라도도 그 타락과 잔인성을 끝장까지 드러냈다.

이에 대해서 그는 마지막 신 포도주까지 마심으로써 바로 저를 배신하는 인간들을 위한 수난을 그 끝장까지 갔다. 12장 27절은 그가 '무엇을 이루었다' 또는 '끝났다'고 했는지를 반영한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왔나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자료다. 결국 그는 수난의 고통에 대한 공포와 사랑 사이에서 마침내 후자의 길을 결정하고 신 포도주를 맛보는 순간까지 끝끝내 사랑의 일직선을 그었다. 싸움은 끝났다. 초지(初志)를 관철했다. 목적한 바의 끝장을 본 것이다. 그런 뜻에서 "다 이루었다"는 번역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는 끝장을 봤다. 그것은 망했다는 뜻도 아니요 동시에 승리했다는 영웅적인 선언도 아니다. 아니 적어도 외적으로 보면 그는 끝장까지 아무 저항없이 순수하게 수난했다. 그러나 사랑의 일직선을 그었다는 점에서 그는 끝을 낸 것이다. 그런 뜻에서 다 이룬 것이다. 이로써 요한복음은 그의 죽음이 단순히 물리적 힘의 충돌에서 이루어진 비극도 아니요, 그렇다고 죽으면서도 껄껄 웃는 영웅의 죽음을 말한 것도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목적이 완성됐다는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3. 반성

우리는 지금 십자가 사건에서 보는 양극의 평행속에 살고 있다. 십자가 사건은 양극의 분수령이었듯이 언제나 참이 그 첨단을 드러낼 때 그것은 둘로 갈라 놓는 분수령이 된다. 위기라는 것은 반드시 어두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는 참이 그 첨단을 드러낸 순간일 수 있다. 일상성은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 때다. 다 비슷 비슷하다. 그래서 선악의 구별이 불투명하다. 그러나 위기는 가라지와 곡식을 갈라내는 때다. 그것은 분수령이 되어 깨끗하게 흑백을 가려낸다. 그러므로 위기는 동시에 현실적인 심판이라는 것이 요한의 입장이다. 그물이 물 속에 있을 때는 쓸 것과 못쓸 것이 한 그물 안에 있다. 위기란 바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참과 거짓을 폭로하는 순간이다. 이때 모든 것이 갈린다.

추수의 때, 그물을 들어낸 순간은 모두 끝나는 순간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끝나는 사건이다. 그런 뜻에서 종말적 사건이다. 와야 할 것은 빨리 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끝나는 것이며 위기다. 까닭은 위기가 좋아서가 아니다. 단지 악과 선, 의와 불의, 참과 거짓이 한 울타리에 있어 밀과 비슷한 가라지가 섞여 있어 어느 것이 참 것인지 가리기 힘들고 악한 것이 선을 가장하여 선의 힘을 잠식함으로 세상이 점점 혼돈에 빠지는 것을 끝내야 하겠기 때문이다.

악이 복면을 벗고 치닫는 현실은 동시에 선이 숨김 없이 자기를 드러내야 할 때가 온 것을 뜻한다. 포악한 박해가 극치에 이르면 진실한 이는 수난을 당하게 되나 참을 위한 수난자가 뚜렷히 드러나는 것은 끝이 왔다는 징조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는 순간이며 거기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유교에도 불의한 세상에서 치부(致富)와 영화를 누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가난하고 수난하는 것이 자랑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이 불의로 차있고 부조리가 판을 치는 마당에서 목마른 줄 모른다면 그는 이미 불의와 한패가 된 증거며 정말 목이 마르고 탄다면 그는 십자가의 예수의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증거이다. 불의로 찬 현실 속에서 이대로의 안정만을 소원하는 자는 바로 제집에 사는 증거이다. 끝이 와야 한다. 끝났다(tetelestai)를 기원 또는 선언하는 자는 예수가 들리운 것처럼 새 세계로 옮겨지리라! 그런데 끝났다고 바로 말을 할 수 있는 이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자만이할 수 있다. 우리는 무슨 목표를 갖고 있으며 마침내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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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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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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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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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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