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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
—WCC 뱅쿠버 총회 주제를 위한 성서연구
로마 8, 18-28
1

이 주제에 대한 성서연구 준비모임이 1981년 겨울 스위스에 일주일간 열렸는데, 필자도 그곳에 참여했다. 공산권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30여 명의 신학자들이 참여하였고 희랍 정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그때 주제는 토론의 내용을 셋으로 구분하였는데, 죽음, 생명의 약속, 생명의 축제였다. 분과토의를 종합하면서 우리의 질문은 "지금 죽음의 현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에 집중되었다. 거기에서 가장 무서운 현실로 논의되었던 것은 군국주의의 팽창과 무기의 위협, 기계문명에 의한 인간 부재현상, 자본주의에 의한 제3세계의 종속관계 등이었다.

이것에 대해 삶의 약속은 놀랍게도 뚜렷이 제시되지 못했다. 그것은 오늘의 현장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약속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죽음에로 뛰어 들어가는 생명들에게서 삶의 약속을 보았다. 그러므로 순교자에게서 삶의 약속을 보려고 하는 데 집중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부딪히게 된 문제는, 왜 오늘날 교회에서보다 일반 사회에서 순교자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 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싸우다 순교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을 위하여 죽은 사람을 순교자로 주저없이 규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교회가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거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자체의 기득권 보호 내지 확대를 위해서 노력하는 데 머물고 있기 때문에 순교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을 연결시키는 길로서 삶을 축제화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논의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로서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것에로 기울어졌다. 이것이 사회 문제로 확대되어 교회가 나누어 먹듯이, 사회가 어떻게 나누어 먹는 사회가 되도록 만드느냐에 이야기가 확대되었다.

나는 여기서 김지하의 다음의 시만큼 성례전적 삶을 토론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나는 주제에 대한 성서연구의 출발을 로마서 8장 18-28절을 중심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이 본문은 바울에게 있어서 상당히 이례적(異例的)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되고 있다.

2

케제만은 로마서 8장 18-28절은 현대의 메시지 중의 메시지라고 말한다."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이라는 테마는 배후에는 오늘 세계가 지금 생태학적 위기를 이미 넘어서 완전히 죽음의 멸망에로 치닫고 있는 세계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염에 의한 생태학적 위기를 말했으나 지금은 파괴와 살상 무기에 의한 죽음 앞에서 전 인류가 협박을 받고 있는 마당에,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생명이라고 어떻게 고백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이것이 죽음의 위협에서 해방되는 사건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가? 권력과 전쟁무기상이 결탁하여 세계를 무기고화해가는 악마화된 힘에 대한 선전포고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생명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문제이다.

로마서 8장 18-28절의 메시지는 이것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불트만은 이 바울의 발상이 영지주의에 연유한 것이라고 보았다. 영지주의는 영과 물질의 이차적, 즉 영이 어떤 우발적인 계기에 물질 즉 육의 포로가 된 것이 인간의 상태이기 때문에 바로 이 육, 물질에서 사멸될 것, 허무한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삶의 길이라고 본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고, 영지주의의 구원관이다. 불트만은 "없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로"라는 말에서 영지주의의 흔적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피조물이라고 할 때 물질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지주의에서는 물질적인 것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오히려 이 본문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강조되고 있다. 22절에서 다시 "모든 피조물"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23절에서는 "그뿐 아니라 성령의 처음 열매를 가진 우리 자신 들"이라는 말로 대립을 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새로난 사람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보며 그들과 대립하여 그 외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물질을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을 허무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물질을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강요된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려고 지금 신음하고 있다고 보기에 이점에서 영지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영지주의적이라면 이 세상은 탈출해야 하는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세상을 포함한 인간 구원을 말하고 있다. 결코 이 세상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제자이면서도 불트만을 비판하고 나온 케제만은 이것은 영지주의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고 창세기의 원역사(原歷史)가 전제된 것이라고 본다. 즉 원역사에 인간의 타락으로 자연이 변질되었다는 사고가 있다. 그래서 변질된 자연과 인간은 긴장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 자체의 회복은 인간과의 관계회복에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묵시문학은 이점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묵시문학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메시아 주권이 수립되는 날이며 생명의 날이다. 이 메시아의 주권이 수립되기 전에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심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제4에즈라서 7장 11-12절에, "아담이 나의 계명을 어겼을 때 피조물은 심판을 받았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통로는 좁고 비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룩서 15장 7-8절은, "당신이 의로운 자들에 대하여 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다면 다시금 미래의 세계는 그들을 위해서 온 것이다." 랍비 쉐무엘(Schemuel)은 "비록 사람들이 완전하게 창조되기는 하였으나 첫번 인간이 피를 흘린 후에 부패되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기 전에는 그것들이 자신들의 질서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R. Schemuel 260). 이것은 창세기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바울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를 통해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로마 5, 12)라는 말과 기본적으로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늘 제1, 2세계에 의해서 이룩되어 가는 구조화된 의지는 바로 이 세상을 멸망에로 치몰고 있다. 즉 죽음에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남북의 대립,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으로 세계는 매일 1,500명의 생명을 빼앗고 있다. 지금 세계는 핵무기를 위한 무기판매의 시장이 되어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제3세계 사람들의 운명은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무기를 사들이기 위해 세금을 내야하고, 그 무기의 협박 하에서 독재정부의 압제 아래 짐승처럼 길들여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마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생명이다'라는 도그마를 입으로 반복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면 생명이 되는가? 아니면 서구신학을 소화하고 발전시키면 그리스도가 세상의 생명이 되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과 함께 죽음과 삶의 문제에 대해서 이제 본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먼저 이 본문이 바울의 다른 본문과는 달리 문제에 접근하는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절을 분석해 보자. 우선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서부터 문제를 출발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모든 피조물의 간절한 마음"(기다림)이 이어지며, 셋째로 "우리 자신도 속량 받기 위해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23절)라고 말한다. 나아가서 성령도 탄식하며 우리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26절). 마침내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간절한 신음소리에 호응하고 있다. 이 순서는 전통적인 교리, 신학, 혹은 교회가 논하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세계의 순서가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예수-교회에서 말씀이나 명령을 듣고 진리를 갖고 세계를 향하거나 처방과 같은 교훈이나 계획을 갖고 세계를 갖고 구원한다는 순서가 아니라 정반대이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다. 아래에서 위이다. 바르트는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로 신학의 출발점을 삼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 나의 고통, 세계의 죽음의 고통에서의 해방의 절규에서, 그것에 호응하는 사람들, 성령, 나아가 신까지도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공동체와 모든 피조물을 구별하고 있다. 23절에서 그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즉 "성령의 처음 열매를 가진 우리 자신들도"라고 함으로써 앞에서 말한 모든 피조물과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과 삶의 문제를 교회나 교리에서 출발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출발한다. 교회가 이미 이데올로기화 됨으로써 상층 구조를 이룬 것이라면 상층에서 하층에로가 아니라 아래, 즉 세속적 현실에서 신음소리를 듣고 문제를 본다. 구문상으로 모든 피조물이 신음함으로 우리도 신음한다고 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신음의 성격에 있어서 눌린 자들과 성령의 신음 양쪽 이 병행되고 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이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가 바울에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로마서 1장 19-20절, 2장 14-15절이 그것인데, 유다 사람들이 율법을 가진 것에 대해서 이방사람들도 인간의 본성에 따라 율법이 그들 마음 속에 씌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지금까지 신학자들이 자연신학이라는 한마디로 매도해 버린 것이다.

다음으로 26절을 주목하면 교회 내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유리", 즉 교회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교회의 혼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교회, 그것은 병든 교회다. 죽음에 이르렀다. 벌써 목적의식이 분명치 않게 되었고 사명도, 아니 존재 이유가 불투명한 것이다. 케제만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어떻게 기도할지 모른다는 것은 당시 방언의 대두에 의한 혼란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떻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피조물의 소원, 즉 그것을 기도라고 한다면 오히려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다는 구체적인 기도다. 나아가 해방되는 길은 참된 새인간이 출현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고 참된 인간의 출현을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참된 인간을 보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피조물은 알고 있었는데, 교회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결국 교회는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저 피조물에게서 배워, 그것으로 교회의 기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논리이다. 피조물이 신음하는 것은 바로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이 사멸의 종살이를 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에 의해 비롯되었다. 여기서 교회(우리)의 과제가 드러나고 기도의 제목이 밝혀진다. 그것은 저들로 하여금 사멸의 종살이를 하게 하는 악한 구조, 악한 의지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래서부터의 신음소리가 소위 구속받은 우리를 움직이고 성령을 움직이고 신마저 움직여 동원시킴으로써 죽음에서 삶에로의 사건이 전개되는 것이다.

4

여성 신학자로서 정치해방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는 죌레(D. Sölle)는 한 글에서 말했다. 아프리카의 젊은이가 신학을 어느 곳에서 공부하면 좋은가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더 이상 하이델베르그, 옥스퍼드, 루벵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낡은 유럽에서 중요한 정신적, 종교적 충동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새로운 정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유럽의 주변국가이면서 군국주의 독재 하의 고문실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 현장이라고 대답하겠다. 그 구체적인 인물 셋 가운데 한 사람은 김지하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루터는 로마교회를 바빌론 포로의 교회라고 하였다. 그런데 죌레는 지금 서구의 교회는 물질적 풍요 사회에 포로가 되어 있다고 본다. 문제는 그것이 포로 상태인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배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고 공박하면서, 소위 저명한 신학자들이 핵무기에 의한 안전의 논리를 지지하면서 서명한 것에 대해 극렬한 비판을 가했다. 저들을 영지주의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물질 혹은 육에 포로가 된 영과 같다. 누가 저들에게, 죽어가는 저들에게 생명의 사신을 전달하기 위한 문을 두드릴 것인가? 그 천사는 어디 있는가? 죌레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
우리를 부르고 있는 저들
그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이러한 전향은 제1세계의 신학적 제국주의가 파괴될 때 비로소 성취될 것이라고 죌레는 갈파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신학이 파괴되고 중지될 때만 가난한 자들의 신음소리가 복음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한 여인의 소리요, 예언자의 소리이다. 이것은 한 "소리"다. "한 손가락"이다. 그런데 그 손가락이 지시하는 곳은 2천년 전의 갈보리 산이나 교회가 아니라 제3세계다. 이것은 성서연구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 더 많은 순교자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새로운 충동을 받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입장이다. 바울은 케리그마화된 그리스도론을 전개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 케리그마화된 그리스도론이 아니라 고난의 현장에 신음하는 소리를 천사의 소리로 듣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주적인 죽음과 생명의 문제가 개시된다. 생에 먼저 생명이 있었다. 창세기의 처음과 요한복음이 선언한 것이고 선재설이 그 전제 위에서 형성되었다. 이미 있는 생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그 생명을 차단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무엇이 바빌론에 포로가 된 그 생명을 해방시킬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뱅쿠버에서 다루어진 문제이다. 과거의 도그마를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어떻게 해야 이것이 세상의 생명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세상의 현실을 다루지 않고는 성서를 제대로 전달할 길이 없다.

5

창세기는 추방되는 인간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 이전의 이야기는 추방되는 이유 설정에 필요한 질서일 따름이다. 이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고난이 하느님의 문을 두드리는 천사의 역할을 한다.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에서는 아벨의 무고한 피가 사건으로 앞서고 있다. 그 피가 땅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하느님을 도원한다. 출애굽기에는 합비루의 비명이 선행하고 있다. 그것이 모세를 일으키고 마침내 하느님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생명에로의 사건이 관념이 아니라 출 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난다. 가나안의 합비루들이 군주제 지주들에게 억눌려 신음하던 중에 야훼를 만났다. 야훼 신이 그들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명이 야훼를 움직인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규합하기 위해 야훼 신앙으로 종족동맹을 맺게 되었고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형성시키는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다윗 왕조는 야훼를 예루살렘에 집을 지어 감금하였다. 그리고 다윗왕조를 지키는 수호신, 즉 지배 이데올로기화하였다. 이 밑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신음에 잠을 깨어 그들의 대변자가 되고, 하느님에게 호소하여 하느님을 움직이고, 그 힘으로 왕조에 맞선 사람들이 예언자 군(群)이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소리를 먼저 들은 것이 아니다. 왕조의 압제에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를 먼저 들었다. 신음하는 소리가 민중의 소리였고 그 신음소리가 하느님까지 움직였다. 움직이게 하는 주체가 역사의 주체라면 구약에서의 역사의 주체는 신이기 전에 민중이다. 하느님의 질서나 말씀이 앞선 것이 아니라 민중의 신음에 의한 사건이 앞선다. 그 사건은 언제나 죽음에서의 절규와 더불어 일어난다. 그것에 호응하는 것이 신의 말씀이요 신학이다.

6

신약에서는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비윤리적이고 비종교적이며 비논리적일수록 원형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원형일수록 삶에 가까운데 그것은 비윤리적, 비종교적, 바논리적이다. 콘첼만은 약 20년 전에 종말론이 후퇴하면 윤리가 대두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종말론이 정면에 나서면 윤리가 후퇴한다. 윤리는 언제나 강자가 지배를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볼 수 있다. 루가는 "가난하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마태오는 그 앞에 "마음이" 혹은 "의에"를 첨부함으로써 윤리화시키고 있다. 마태오는 교회를 정착시키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로 두면 기존 질서, 기존 체제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루가와 마태오가 그것을 쓴 시기에는 커다란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다른 것은 루가는 예수 시대와 우리 시대는 다르다는 전제 밑에서 예수의 말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었는데, 마태오는 예수의 말씀과 교회를 일치시켜 교회에서 말씀이 유용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부득이 원래의 말씀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신학도 교회주의에 편승해서 생생한 예수의 말씀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여기서 다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도대체 그리스도교의 성립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영광의 부활사건이라고 보통 생각하고 있으나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성립은 십자가에서이다. 십자가의 억울함. 그것의 비극, 그 현장의 비명에서다. 여기에 호응한 것이 교회다. 이것은 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기적이다. 교회사에서 부활한 예수가 교회의 상징이 될 뻔했으나 끝끝내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렇게 불편한 십자가를 교회는 관철한 것이다. 부활사건은 그 십자가상에서 비명. 그 비극의 소리의 뜻을 깨달은 사건이다. 그 사건은 절망과 죽음 가운데 있는 민중을 일으키게 하였다. 죽음에서 삶에로 옮기게 하였다. 십자가의 사건이 십자가의 의미, 그리고 그것의 신학화는 훨씬 후대의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선재설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정립했다. 마가는 이것에 반기를 들었다. 마르코에게는 그러한 신학적 설명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신학적 명상을 할 시대에. 상황에 마가는 처해 있지 않았다. 나는 마르코가 복음서를 쓴 시기가 주후 70년 후반기. 유다 전쟁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팔레스틴이 완전히 점령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유다인이 전부 추방되어 알거지가 되어 있는 상황 마치 예수를 싸고돌던 민중과 같은 상태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적인 명상적이고 변증적인 신학은 아무 의미도 없었으며 그들에게서 추방되었다. 그들에게 그리운 것은 예수의 원초적인, 본래적인 신음소리이다. 고난의 현장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것은 40년 전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와 직결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는 그리스도론적 십자가론에서 십자가 처형 이야기에로 돌아갔다. 바울은 분명히 육으로서의 예수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음에 반해 마르코는 바로 그 육으로서의 예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신학화되기 이전, 케리그마화되기 이전의 육으로서의 예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에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 "왜 나를 버리느냐"고 소리치면서 숨을 거둔 비명이 있었다. 이 비명이 잠을 깨운, 포로 되어 갇혀 있는 감옥문을 깨는 힘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 십자가의 이야기는 어떤 영웅의 이야기도, 신적인 드라마도 아니다. 베드로전서 2장 4절에서처럼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예수"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마르코는 나아가 하느님에게서까지 버림받은 예수를 소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마르코는 아주 무능한 사람의 운명을 폭로하고 있다. 그런데 높은 곳, 영광스로운 곳, 권위가 가득한 곳, 신적 후광을 받는 곳에서 어떤 구원의 생명이 주어지리라는 전통적인 생각에 젖어 있던 그들이 어떻게 이 초라한 사건, 이 약한자의 비명에서 생명을 찾았을까?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그 당시의 가치관에서 보면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어쨌든 저들은 여기서 새롭게 제도화된 교권. 나아가 그리스도론을 깨뜨리고 살아 있는 이를 만났다. 이미 케리그마화된 그리스도론을 정립한 바울도 이러한 원칙적인 원 동력의 편린을 담아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는 가난하게 되었다"(고후 8, 9)고 말한다. 이것은 그 당시 상당히 유포된 말이었을 것이다. 바울 자신에게는 그렇게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민중에게는 중요한 말이었다. 그리고 당시 영웅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강하다, 영광스럽다, 부하다라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후13, 4)고 말한다.(마태오와 루가는 아직도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어야 명분이 선다고 보고 있지만 마르코는 12장에서 예수는 다윗의 후예가 아니다라는 중요한 선언을 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처형에서 너무나 약한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런 편린들은 오래된 초대교회 자료들로서 민중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억울한 수난자가 민중이요 약해서 당하는 자가 민중이라면 십자가 사건은 민중의 사건이다. 적어도 마가에서 예수는 그를 에워싼 오클로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십자가에 처형받은 것이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그러므로 민중이다. 하느님이 처형했다고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다. 예수의 삶의 여정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서나 자기가 계획하여 진행된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떠밀려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본래 모습, 참 모습이다. 천내인(天乃人)이 아니라 인내천(人乃天)의 순서이다. 민중에게서 출발하여 예수에게로, 다음에 하느님에게로 올라간다.

성서는 예수가 체계적, 계획적으로 병든 자, 수난당하는 자들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 몰려오는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그들을 보고 그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신음소리에 움직여 하느님께 호소하고 그들을 상황에서 해방시킨 것뿐이다. 그것이 말씀으로, 병고침으로, 귀신을 쫓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건은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민중의 사건이다. 예수의 사건은 곧 민중의 사건 전기다.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은 그리스도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민중의 죽음과 절규, 그리고 거기에서의 부활의 사건에서 보고 설명되어야 살아있는 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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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묵시록 3장 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을 두드리는 손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런데 묵시록에서 두드려지고 있는 문은 스스로 풍요하고 모든 것을 안다는 라오디게아교회(3, 17)의 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 문을 누가 두드리고 있는 것인가? 오늘의 교회와 그 생태가 반그리스도교적인 오류에 빠져 있다. 세상의 생명이 아니라 독을 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할 천사는 누구인가? 그 손은 누구의 손인가? 그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오늘날 감옥의 간수처럼 자기 쪽에서 문을 뜯고 들어설 수 없는 약자, 단지 간절한 비명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가 아닐까? 크게는 제1, 2세계가 아니라 제3세계 부유하고 유명한 목사나 신학자가 아니라 눌려 사는 현장에서 들리는 소리의 주인공들이 아닐까? 그들이 지금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눌린 그들이 폐쇄된 교회와 세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기에 죽은 교회, 죽은 그리스도인, 죽은 세상이 그 두드리는 소리에 호응할 때 생명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을 향해 문을 열고 맞아들여 그들과 밥을 나누어 먹을 때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사는 길이다. 그것 외에는 살 길이 없다.

루가복음 18장 1절 이하에 보면 농촌이 아니라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는 한 재판관이 등장한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그 재판관에게 늘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주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가 결국 혼자 중얼 거렸다. "내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지만 이 과부가 하도 나를 성가시게구니 그 여자의 원대로 판결해 주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가 나를 자꾸 찾아와서 내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재판관은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이 재판관도 과부만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단순한 이야기를 전승받은 교회는 우리를 모르는 척하는 하느님도 우리가 계속 문을 두드리고 성화를 하면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전해오는 민담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가난한 집에 몇일을 굶은 친구가 한밤중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자신들도 먹을 것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래도 할 수 없어 그 친구를 들어오게 하고, 자신은 좀 낫게 사는 이웃집의 굳게 잠긴 문을 두드려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한밤중에 찾아온 사람이 귀찮아 상대하지도 않으려 했으나 너무도 조르는 바람에 문을 열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 위해 한밤중에 깨어난 이웃은 때마침 닥친 재앙을 피할 수 있어 목숨을 구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나누어 준 밥을 먹고 생명을 구했다. 밥을 나누어 먹었기 때문에 모두가 생명을 건진 것이다.

성서는가장 원초적인 순수한 비종교적, 비윤리적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이것이 종교적 윤리적으로 변해 가는 데 문제가 있다. 하나 더 예로 들기로 하자. 루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제관과 레위인은 신음소리를 듣고도 응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목적지로, 제 길을 갈 뿐이다. 그 소리를 묵살한다. 그러나 유다인에게서 가장 소외당하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은 이 신음소리를 하느님의 신음소리로 듣고 그를 구해준다. 그래서 둘 다 생명을 얻는다. 이 신음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가 바로 문을 두드리며 같이 밥을 나누어 먹자고하는 주인공과 동일인이 아닌가?

오늘 우리에게 복음, 즉 세상의 생명과 단절을 깨뜨리고 열게 하는 사자는 어디 있는가? 그가 어디 있든, 누구이든, 그가 바로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와도 내가 문을 열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는다. 적어도 오늘의 교회에는 예수가 계시지 않는다. 그 예수는 갈릴래아 민중의 한에 밀려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이다. 그는 지금 어디에 현존하는가? 제3세계, 그 안에서다. 가난하고 눌려 신음하는 현장에서 현존한다. 이 소리에 자신을 개방하면 교회도 세계의 생명이 될 수 있다. 개방하지 않는 한. 돌 하나 돌위에 놓이지 않고 무너지는 예루살렘 성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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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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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 (묵시 2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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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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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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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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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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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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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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