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
—영원의 노크
묵시 3, 14-22
1.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요한묵시록은 로마제국의 박해에 직면한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회에 보낸 편지다. 그런데 이 편지의 핵심은 "내가 곧 온다. 내가 네 문 앞에 서있다"로서 심포니의 주멜로디처럼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면서 반복된다. 지금의 본문은 바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 시의 교회에 부치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교회들에게는 반드시 칭찬과 더불어 경고한 데 대해서 이 교회에는 칭찬은 없고 책망뿐이다. 그 책망의 내용을 보면 이 교회원들에게는 위기의식이 없었다. 따라서 그 삶의 태도는 "이것이냐-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저것도"였다. 저들의 이러한 태도는 특히 로마 카이저 종배(宗拜) 문제에 있어서 타협주의로 나타난 듯하다. "나는 네 행실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는 책망은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말한다. 그럼 왜 저들은, 그러한 상태에 머물고 있었는가?

"나는 '내가 부자다. 나는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한다"는 경고 그대로 저들은 현재 상태에서 만족하고 있었다. '라오디게아'는 에페소에서 수리아로 통하는 대로에 자리한 상업과 군사 도시로서 소아시아의 은행과 금융의 중심이며, 특히 그들은 모직물과 의류제품으로 치부(致富)했으며, 또 한편 '멘'이라는 의학신전과 더불어 의학교가 있었는데, 특히 '콜루이온'이라는 안약을 만들어서 대량 수출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 책망에서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바로 저들이 모직물과 안약을 자랑으로 했음이 반영되어 있다. 저들은 그 삶의 보장을 부(富)에 구하고 종교마저도 저들의 지금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한 저들에게는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삶의 노력의 전부일 수밖에 없으며 조화, 타협 등은 있어도 결단이라는 것이 불가능했음은 당연하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해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즉 그들은 구토의 대상이다. 구토의 대상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사람이 다 그것은 결정해야 할 것을 덮어두고 현재 가진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래서는 안 되겠는데', '가부간에 결정을 해야 하겠는데'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눌러 버린다. 그는 그 소리를 눌러 버리기 위해서 현재 가진 것들을 내세우고 그것을 성벽처럼 높여서 이 소리를 묵살한다.

즉 과거에서 얻은 것으로 현재를 견고히 하고 그 안에 영원히 들어앉아 버리려는 사람이다.

2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현재에 안주하기 위해서 결단을 포기하고 있는 자를 찾아 그 소리의 주인공은 현재라는 문 밖에 서서 현재를 향해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 문 두드리는 손은 현재에서 밖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현재를 향해 들어오기 위해 노크하는 손이다. 이 손의 주인공은 '아멘'이요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창조의 근원"이 되는 이다. 그는 과거에서 온 이가 아니라 미래에서 오고 있는 이이다. 세상에서 필연으로써 형성된 이가 아니라, 세상 밖에서 세상을 향해 오는 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현재에 사는 사람에게는 미지수이다. 미지의 그가 지금 문을 달고 안주하려는 내 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열기를 독촉한다. 미래가 현재하는 내 집을 노크한다. 영원히 피안에 안주하는 나를 노크한다. 그는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네게 "들어가" 너와 "함께 먹고" 너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지의 다른 가능성이다. 묵시록의 저자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는 과거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제 올 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여전히 미지수인 것이다. 그러나 이 노크는 사람을 흔들어 깨워 일으키는 부름이다. 그 부름의 소리를 한 마디로 하면 "이 세계는 홀로 있는 세계가 아니다"는 것이다(불트만). 이 세계의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딴 현실과 마주서 있다. 그런데 사람은 쉽게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마주 선 현실은 기존적인 것을 뚫고 들어옴으로써 심판 또는 구원의 판가름을 할 것이다. 인간은 이 세계를 이끌어나갈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은 이 세계와 더불어 자기를 내어 바쳐야 하는 주인이 따로 있다. 이 주인에게 내어 바쳐야 하는 날은 바로 이 세계의 종말이며 그것은 동시에 이 역사의 종착점, 역사의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리는 이 세계에 안주하려는 사람에게는 위협이다. 그것은 내손으로 쌓아 올리고 내손의 때가 묻도록 정을 들였으며 그것으로 나를 보장한다고 생각된 내 '고향'이 결국 놔 버려야 할 무상한 것(Unheimlich), 나를 내맡길 수 없는 것이라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이러한 소리를 말살해 버리기 위해서 자기 집의 문을 더 튼튼히 잠그고 그런 소리에 대해 귀를 막아 버리려고 한다. 영원이니 진리니, 하느님이니 하는 따위는 다 허구한 소리이다. 그런 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있는 것은 내 손에 들어 온 것, 들어 올 수 있는 것뿐이라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저들은 동시에 이러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 세계를 건설해 나가려는 의욕을 소모시키며 무능한 사람으로 좌절시키는 것이라고 반항한다. 그러나 그러한 무관심주의 또는 현실주의의 대문을 아무리 굳게 잠구어도 이 노크 소리를 말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허무에로 돌아가는 잔해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고 있는 새것에 의해서 무참히도 쓰러져 없어져 가는 대열을 통과하고 있다. 어제까지 가치있던 것이 오늘에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 쓰러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거리에 내버린 시체처럼 되어 버린다. 이런 현상은 내손에 잡힌 도구에서부터 우리 사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꼭 같은 현상을 노출한다. 오늘같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가치있던 것이 허무한 것으로 되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현상이 가속되어 지금에 안주하려는 내 가슴을 두드린다. 우리에게 "이만하면 됐다"고 밀봉해 둘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없다. 내 가진 것은 무엇이나 문을 열라는 노크의 독촉을 받는다. 이 소리에 끝끝내 응하지 않으면 노크의 주인공은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 그 때는 이미 그 밀봉한 것은 시체로 변해 버린다. 그뿐이 아니라 우리에게 "리드미칼"하게 들리는 노크소리도 있지만. 우리는 또한 단속적으로 오는 불의의 강타를 당한다. 천재에서 받는 강타도 있으나 오늘날은 예측할 수 없는 인재의 위험이 그것이다. 매일 신문을 들면 안주하려는 내 세계를 위협하는 노크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이 앞에서 모든 물질은 지나가도 나만은 건재하다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제 머리에 나타난 한 오리의 백발을 뽑아 손에 들고 죽음의 사신의 노크처럼 새삼 놀랬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죽음의 사자가 문을 열 때를 계산하고 다시 생활의 설계도를 꾸몄다고 한다.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죽음의 사자의 도래는 약속된 시간이 없다. 아니! 이 세상 현재도 내 본향이 아니거니와 나 자신도 나를 내맡길 불공(不功)의 성벽은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 '노크' 소리를 말살할 수 없다. 있다면 취하는 길밖에, 미처 버리는 길밖에! 그러면서 자기를 상실하는 길밖에!

3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것은 따라서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유부단하므로 자기를 상실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심판의 소리다. 저들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다. 이 소리는 차라리 차거나 더운 것을 원한다. 이 본문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물음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한다. 하느님의 물음에 대해서 결단하지 않고 중간에서 애매하게 끌려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물음에 반항 또는 부정하는 자세가 낫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무신 또는 반신론자(反神論者)는 아니다. 나는 선은 못해도 악하지는 않다.' 이러한 최종적인 교두보를 설정하고 이 직접적인 '노크' 소리를 피해서 자기의 신앙경력, 교회의 일원, 교리에 대한 지식 따위로 성벽을 쌓고 자기는 부한 것으로 자처하고 오히려 남을 문제하고 비판하며, 소위 그리스도교적인 활동에서 자위하는 자들에게 이 선언은 그 교두보를 철폐한 것과도 같은 심판의 소리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소위 그리스도교적이라는 것으로 이 노크를 정면으로 듣지 않기 위한 완충지대로 만든 사람이 많다. 이들은 차라리 하느님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보다 못한, 정말 구토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하느님과 싸우는 자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연결성을 드러낸다. 가령 '니체'같은 이는 그러한 사람이다. 그가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해야 한 것은 그만큼 그것이 그에게 심각한 문제였음을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이 '노크' 소리를 정면으로 듣고 있는 증거이다. 그의 이 반항의 소리는 한 걸음 나가서 신에 대한 물음에서 결단을 보류하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둘러싸여 안주하는 자들에게 강한 노크가 되었다.

서구의 신학자들 중에서 소위 '신의 죽음의 신학'이라는 아이러니칼한 소리를 질러야 한 것도 어떻게 보면 인간의 교만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인 것으로 부한 줄 알았던 인간이 자체내의 허무함(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자기)을 그대로 폭로하는 겸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신의 죽음의 신학의 소리도 실은 애매한 상태에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노크'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께 행한 집요한 싸움은 오히려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진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크' 소리는 소위 중교인들에게만 심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 대신 삶의 의미니 진리니 가치니 하는 것을 설정하고 안심하는 인간 전체에 해당된다. 낭만주의는 어느 시대에 일어났다가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언제나 인간에게 붙어돈다. 그것은 나는 짐승은 아니다라는 긍지를 위해도 필요하며 나밖에 타의라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것은 이 영원의 노크소리를 둔화시킨 관념들이다.

만일에 이 '노크'한 손이 그 문을 열면 어떤 사실이 폭로될까? 내가 산다고 자처하든 바로 그 안이 텅빈 공간뿐이고 나는 그 밖에서 떨고 있지 않을까? 그 안에는 내 이력서, 기쁨, 슬픔, 걱정, 의복, 훈장, 돈 따위는 있어도 나는 없는 진상이 폭로된다면? 할 일이 있을 때 지위가 주어 졌을 때 그처럼 활기있던 사람이 그런 것에서 제거되는 순간 그대로 이즈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과 일 사이의 공간을 메꿀 길이 없어 몸부림치는 현대인은 무얼 말하는가? 부요한 나라에서 여가가 그처럼 사회 문제로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노크'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너로써 존재하고 있느냐고! 너는 만화가 '윌헤름 부쉬'가 상상한 수학적 인간이 되어 있지 않느냐고! 행동은 정확하나 그 속은 동혈(洞穴)이였다는 그 수학 인간이!

4

문을 두드린다함은 인간이 폐쇄상태에 있음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 폐쇄상태는 자족한 상태에서 올 수도 있지만, 절망 상태에서 올 수도 있다. 그 둘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새 가능성에 대한 차단이다. 하나는 지금 가진 것이 새 것에 의해서 파괴될 것이 두려워 차단하려고 하는 데 대해,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기다리다 지쳐 버린 데서 오는 자기 폐쇄다. 밖에서 내방을 '노크'한다. 누굴까? A일까? B일까? 어느 누구라고 해도 지금 내가 향유하고 있는 것에 손해는 끼쳐도 더 나은 것을 갖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끝끝내 문을 열지 않는다. 밖에서 홀로 있는 내방을 '노크'한다. 이 외로움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싶다. 그러나 죽은 내 애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한 나는 아무런 방문에도 흥미없다. 이래서 홀로 외로움에 지쳐 절망에로 시들어가면서도 끝끝내 문을 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거듭 실망한데서 온 체념이다. 엘리어트는 그의 『칵테일 파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문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열 수 없었다. 문고리를 잡을 수 조차 없었다. 왜 나는 '나'라는 감방에서 나올 수 없을까? 지옥이란? 그것은 곧 나 자신이다. 지옥이란 홀로 있음이다. 거기에서 다른 사람은 한갓 그림자처럼 스칠 뿐이다. 무엇에로 도망하며 무엇을 찾아 도망하자는 것인가. 처음부터 나는 홀로이다. 어떤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밖으로 향한 통로를 찾다 지친 고독자의 소리이다. '사르트르'도 이와 꼭 같은 고백을 한다. 그는 죽음과 그리고 이웃이 벽처럼 자기를 감금하여 홀로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나갈 문이 없다.) 이것은 진정한 교류를 찾아 옆으로 난 문을 열고 찾아나갔다가 참 '너'는 만나지 못하고 '카프카'의 성벽 주변만 빙빙 돌다가 실망하고 돌아선 실의에서 온 자기 폐쇄이다. 이런 경험이 거듭되면 결국 나는 나를 폐쇄해 버리고 시장이나 도박장의 교류처럼 요령과 '에티켓'의 세계에 정좌함으로써 마침내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정인(市井人, das Mann)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새 가능성을 체념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노크' 소리는 계속된다.

이 '노크' 소리에 종당에는 문을 여는 경우가 있다. 일상생활에 지쳐서 그 줄을 끊고 한적한 절에 왔다. 여러 날이 지났으나 신통한 생각이 없다. 오늘 하루도 그저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지금은 밤이 깊었다. 홀로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한편,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을 생각한다. 그래도 대답은 뻔했다. 오늘의 반복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같은 내일이 안 올 것도 겁이 난다. 차라리 이런 내일이라도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잠을 청한다. 밖은 끝없이 조용하다. 그런데 밖에서 내 문으로 가만히 오는 발자욱 소리가 들린다. 누가 이 밤중에? 사랑하는 친구일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도적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 발자욱 소리는 문 앞에 와서 멎는다. 공포와 기대가 착잡하게 얽힌다. 마침내 그 미지의 손이 '노크'한다. 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불안에 싸였다. 절대로 문을 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노크는 계속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고리를 벗기고 그 문을 열어제쳤다.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했나? 왜인지는 모른다. 어떤 심산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니다. 만일 앞뒤를 생각했더라면 오히려 그 문을 못 열었으리라. 그러나 그의 이 용단은 어떤 예기치 않은 것이 자기를 급습해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한 일이다. 그에게 절실한 욕구는 차단된 현재 속에 무엇인가 뚫고 들어와서 나를 다른 가능성에로 옮겨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어떤 은행을 털려는 강도일당에 타의반 자의반으로 휘말려 들게 됐다. 그 강도일당의 계획을 들었을 때는 벌써 그에게는 그것을 거절할 자유는 없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도 그것을 기회로써 그의 애인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그래서 확실한 대답도. 결론도 없는 채 자기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문을 굳게 잠그고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 그때 밖에서 '노크'를 했다. 경찰인가!? 그래서 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노크'는 계속한다. 그는 점점 공포에 싸여서 그 문을 열 용기를 잃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반면에 무엇인가 그 문을 깨고 들어와 주었으면 하는 제 심장에 놀란다. 그는 다음 순간 혹시 자기 애인아 아닌가 생각했다. 그 순간 얼른 그 문을 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 문을 열수 없었다. 왜? 그 문을 여는 순간 그 애인을 죽여 버릴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 까닭은 이 애인이 자기에게 강도 행위에 참가할 결의를 굳게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는 왜 경찰이 문을 깨고라도 들어와 주기를 바라는 심정이 있었던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애인을 위하는 데서 오는 욕구와 동시에 이러한 위험 속에 휘말려 들려는 이 절박한 현실의 줄을 끊어 줄 어떤 힘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도 애인도 마주 설 수 없는 심정 때문에 그는 어쩌지도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문의 열쇠를 열어버렸다. 그리고 무엇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을 기다렸다. 그는 더이상 이 상태를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인지를 확인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운명에 내맡기면서도 바란 것은 경찰도 애인도 아닌, 어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다른 가능성이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 문두드리는 손의 주인은 책망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식탁을 같이 하기 위해 문을 열라는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를 뜻한다. 그의 소리는 자족하려는 자에게는 심판이 될 것이나 고독 속에서 절망한 자에게는 구원이다. 그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절망 속에 시들어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새 가능성이다.

이 영원으로부터 오는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내 가진 것, 나를 둘러싼 것의 노예가 되어 그 안에서 죽고 만다. 사람들은 현대 문명에 현혹되어 그 안에 영원까지 포함된 듯이 낙관한다. 일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현대 과학문명에 현혹되어 사회참여니 현실참여니 하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을 긍정만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과거의 형이상학적인 기독교의 오류에 대한 반성 내지 반발로서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은 세계 자체가 자족한 것으로 문 밖의 '노크'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그는 희랍적 사고의 대변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5

'크리스마스'가 또 박두하고 있다. 이것은 문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이다. 점점 더 자명적이 되어가는 세계 과학적 사고, 유물 사상 등으로 폐쇄적 코스모스화 되어가는 이 세계에 또 한번 들리는 노크소리이다. 첫 '크리스마스'의 '노크'는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반응을 일으켰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차단한 세계에 뚫고 들어 온 사건이 바로 '크리스마스'라고 성서는 말한다. 이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자에게는 심판의 소리겠으나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체념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에게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의 소리다.

자기의 제한성에 지쳐 버린 자, 제 성격, 제 능력, 제 무능, 제 늙음에 갇히어 문을 꽉 닫어버린 자! 밖의 여건이 절대처럼 보여 애당초 사회참여를 포기하고 제 문을 닫아 버린 자, 인간관계에서 실망을 거듭함으로써 인간 증오의 철문을 굳게 닫은 자, 권력에, 돈에, 기계에, 제도에, 습성에, 교리에 노예가 되어 밖으로 향하는 문을 못 가진 자에게 '크리스마스'는 '노크'한다. 이 '크리스마스'는 유한한 것에 가라앉아 굴을 뚫으려는 세계에 계속 '노크'할 것이다. 2,000번이 아니라 2,000만 번이라도 그 문을 열 때까지 '노크'할 것이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