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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 1-11
1. 자기상실

(1) 이 주제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자주 받는 질문 그대로 입니다. 교회에 적을 두고, 주일마다 한 시간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박제된 듯한 신앙고백을 자신없이 함께 외웁니다. 그러나 그 날 오후부터 일주일 내내 나는 회사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진급과 월급 올라갈 것에 신경을 쓰면서 일하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투닥거리기도 하고, 아이들 걱정을 하거나 TV를 들여다보다가 이불 속에 들어가 잠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 대포집 같은 곳에 들러서 남이 하듯이 술잔도 기울이고, 시정(市井)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를 지껄이며 말다툼도 하다가 녹초가 된 채 집에 돌아와서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를 듣다 못해 역정을 내기도 하다가 잡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오래 전부터 집사인 탓에 교회로 옷을 갈아 입고 나가 헌금도 거두고, 새로 온 사람들에게 백화점의 여사원들같은 인사를 하는 등 마음에 없는 웃음을 짓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또 일 주일 동안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은 할 틈도 없이 돈을 쪼개 쓰고, TV에서 보는 생활을 부러워하다가 스트레스만 안은 채 잠드는 이상 아무 것도 다른 점이 없고, 내가 벌어들이는 월급이 모자란다고 계모임도 하고, 돈푼이라도 생길 일에 분주할 뿐이라고 푸념이니 도대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를 게 무어냐는 것입니다.

전에는 신앙, 나아가서는 종교의 영역과 일상생활의 영역이 뚜렷했거나, 또는 신앙적인 입장에서 모든 삶을 일원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소위 성속(聖俗)의 구별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일과 '시민의 일원이 된다'는 것 사이에 뚜렷한 구별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전에는 교리나 제도로서 일사분란하고 신성불가침의 종교적 영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에서 제정한 것이 기준이 되어서 삶의 모습이 형성되었으며, 자기 삶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러한 종교왕국은 없습니다. 즉 구심적 모체는 없고 각 사람에게 판단의 권리가 이양됐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주적으로 판단하는데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변동에서 온 변화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전에는 신앙(종교)의 가치관이 그 첨단에 선 피라밋과도 같은 가치관을 형성했으나, 오늘은 그 첨단의 자리에 과학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과학은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통일적인 가치관을 책임질 권위의 소재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전에는 일원적인 세계상을 보였으나 오늘은 다원적인 세계상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종교도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 중의 하나일 뿐,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또 전에는 가치 기준이 확실해서 혹백의 차가 분명했으나 지금은 혹과 백이 막 뒤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선과 악, 의와 불의, 이러한 구분을 하기 위한 뚜렷한 기준은 적어도 팻말에 써 붙이듯 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기준이 크게 문제되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간단히 식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만 해도 전에는 '교회에 출석하느냐?', '술, 담배를 안 하느냐?', '세례를 받았느냐?' 등등의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는 기준이 있었으나. 오늘에는 그런 기준은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정말 교회 안에 참 그리스도인이 있는지, 오히려 교회 밖에 있는지, 심하게는 무신론의 영역 속에 참 그리스도인이 있는지. 유신론의 그늘 밑에 반(反)그리스도인이 있는지, 얼른 말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기준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특수한 경우에 한 말 중에서 한 단면을 배우려고 합니다.

 

(2) 이 바울의 말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고린도교회'에 한 말입니다. '고린도'는 로마제국의 점령 아래 있던 희랍적인 문명 도시였습니다. 로마는 무력으로 이 도시를 정복했지만, 희랍의 사고나 삶의 철학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했던 희랍 철학은 에피큐리안적인 것이었는데, 그들은 쾌락주의적 행복의 추구를 지상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전당을 꾸미기 위한 것이었고, 일하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일하고, 철학은 진리 탐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한 도구이며, 심지어 종교마저도 이 쾌락의 보장을 위한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시에는 아프로다일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이 세워졌던 이유는 쾌락하는 인간을 질투할지 모를 신들에게 '뇌물'을 바치어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신전에서는 한때 1,000명이 넘는 미녀들이 제사의식에 참여했는데, 저들은 순례자에게 쾌락의 대상도 되고 신도 무마하는 신들과 인간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일종의 종교적 창기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제사는 그야말로 축제였습니다. '제신들 앞에서 실컷 놀고, 먹고, 마시고, 구경하고 즐긴다!' 그것은 극장에 모인 군중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즐거움'이 직접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 태도는 인권을 옹호해야 하는 재판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판 그것은 하나의 관극(觀劇)과도 같았습니다. 우선 사적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두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대표를 내고 중재자가 하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큰 거리에서 진행함으로 관객을 많이 모이게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볼거리'입니다. 이러한 간소한 재판에서 판결이 안 나오면 배심원을 관객들 가운데에서 뽑습니다. 20, 40, 100, 1천, 나아가서는 6천 명까지 동원한 예가 있었습니다. 그 재판장은 아마도 서울운동장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3) 이러한 헬레니즘문화가 지배하는 세계 속으로 그리스도교가 침투해 들어간 것입니다. 이 쾌락주의가 오늘날 우리 나라의 부패상만큼이나 속속들이 침투해 있던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 가야 하나?'가 문제였는데, 기본적으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문제와 같습니다.

이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거센 물결 속에서 바른 자세를 취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두 길로 갈라졌습니다. 첫째 부류들은 '이방 문화와 이에 물든 자들을 절대로 상대하지도 말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부류는 일체 저들과의 관계를 끊고 금욕적이며, 율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둘째 부류들은 '저들의 분위기에 휘말려서 적당히 어울려 살자'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문제를 제기하게 한 자들은 바로 둘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간에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당시의 쾌락적인 관극과도 같은 재판석에 자기들의 문제를 내맡겼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하여간 이로 인해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조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문제를 관극적인 재판에 맡겨야 합니까?

이에 비해서 유대민족에게는 정반대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유다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정치범 이외의 문제(민사)는 끝끝내 자체 안에서 처리할 것을 주장해서 그 권리를 쟁취해 냈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선민사상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경우를 알고 있던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의식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2. 세상을 심판할 권한을 가진 그리스도인

(1) 그는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라고 합니다. 자질구레한 문제를 자체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극장과 같이 알고 모이는 관객들에게 시비를 가려주기를 기다리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말입니다.

바울은 재판을 구경거리로 한 세상을 '불의한 것들'(adikon)이라고 단정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을 '성도'(hagioi)라고 부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란 그러므로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구별된 자로 봅니다. 이런 사고는 이스라엘민의 자의식에 그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민의 선민사상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스라엘인'으로 스스로들을 지키고 살게 하지만, 죽고 망하게도 한 중요한 인식입니다. 그들이 어떤 굴욕적 역사 상황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게 한 것이 이 인식임과 동시에 이 인식이야말로 주변 민족과 적대화되게 하고 고립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민의식과는 달리 이 민족의 타락상에 분노한 예언자들이 여러 차례 그런 의식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세계 구원은 '구별된 자' 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신념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선민이 아니라 아직 오염되지 않은 '구별된 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이 선민권이 그리스도인에게 계승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본문 11절; 로마 9, 6-8). 그리고 아마도 그런 신념을 또 한번 강화한 것은 그가 바리사이파에 소속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리사이'란 말 자체가 '선별되었다'는 말로써 그것이 바리사이파의 공죄(共罪)에 큰 작용을 했습니다. 그것은 엘리트 의식의 극치로서 교만과 동시에 책임의식을 낳게 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할 때는 이같은 사상의 맥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 의식을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민중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승됐다고 확신하는 바울은 확실히 역사의 주체를 뒤집어보게 된 것입니다.

 

(2) '민중'인 그리스도인이 '성도'로 구별된 것은 동시에 특권이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예속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선별'을 강조한 것이 오해를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성속(聖俗)의 구별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그것에 무관심하는 것이 옳은 길인 줄 아는 금욕적 고립주의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탈세계(脫世界)를 말하지 않았고, 비세계화(非世界化)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음행하는 사람이나 욕심부리는 사람이나 약탈하는 사람이나 우상숭배하는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 뚜렷하게 그런 오해에 쐐기를 박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 안의 존재입니다. 바로 이 세상을 위해 선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약탈하는 폭력배, 부유(富裕)가 지나쳐 향락에 빠져 변태성욕자가 우굴거리고, '보다 더'라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사람까지도 돈버는 상품으로 보며, 바로 그렇게 살기 위해 권력이나 재력 따위를 절대화하고 우상을 만들어 무릎을 꿇는 것들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은 결국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세상'이라고 말할 때, 희랍적으로 코스모스,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세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발전하여 역사의 저 끝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어지리라는 낙관주의자가 아닙니다. 세상은 썩어가는 무정란(無情卵)과도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 보냄받은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보냄받았습니까?

3. 세계 심판

(1)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리라"(6, 2) 아니! "우리가 천사를 심판하리라"(6, 3)고 말합니다. 이로써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인 됨'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바로 본문 위에서(5, 13)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심판'이란 언어가 원문에서도 꼭 같습니다(6, 2; 6, 3 비교 5, 13). 이로써 '그리스도인 됨'에 대한 바울의 인식의 근거가 확실해집니다. 그것은 삼판의 주체가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하느님께 내맡겨 버리고, 자기를 객체화시키고 수동적인 자세를 완전히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세계 심판의 주체라는 확신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위치를 알면서도 이런 선언을 하는 것은 그의 회심의 동기와 맥을 같이 합니다. 기층민중이 중심을 이룬 예수공동체가 세계 안의 하느님의 권한을 이양받았다는 말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세상만 아니라 천사들도 심판할 권한을 가졌다는 선언입니다. 천사는 하느님을 둘러싼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어떠한 중간자도 없다는 선언이 됩니다. 군주적 권력 따위는 물론 교권 따위도 중간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2) 이런 선언 속에는 로마 권력(법에 의한)과 유다교의 교권을 안중에 두고 있습니다. 세계 권력은 인간의 시비를 재판하고 선악을 판가름하는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아니! 생사권까지도 그 손에 장악하고 있도록 제도화했습니다. 유다교는 성서의 해석권을 장악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심판할 권리를 독점하려 했습니다. 그런 현장을 아직 자의식이 확실하지 않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대로 승인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들의 시비를 자진해서 세계의 체제가 인정하는 재판 현장에 끌고가서 판결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행위 자체가 벌써 세상에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이미 지고 들어가는 마당에 이기고 지는 것이 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법의 제재 밖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피안에서 산다는 뜻입니까?

우리에게 '저 사람은 법없이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법의 제재 밖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법 따위가 간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주체적으로 법의 제재를 앞질러 산다는 말입니다. 제도적 법정보다 차원 높은 것이 양심입니다. 이 말은 '양심껏 사는 사람에게 법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이 말은 소극적인 자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법 그리고 양심마저도 심판할 주체가 '우리'라는 것입니다.

 

(3)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적으로 법의 제재를 받지 않습니까? 아니! 받습니다. 바울도 법의 제재를 받아 처벌받고 투옥까지 되었습니다. 한걸음 나아가서 그는 총독들의 재판에 불복하고 로마의 카이저의 법정에서 판결받겠다고 고집해서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단 법체제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법체제에서 시비를 가려주기를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는 법과 그리고 법을 등에 업고 불의를 행하는 집행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처럼 로마법정에서 심판받으므로 로마제국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전해진 한 장면(16, 16-40)은 바울다운 일면을 보여줍니다. 로마 치안관이 바울과 실라를 치안소요혐의로 옥에 가두었다가 법에 걸 수 없어 그를 놓아 주라고 간수에게 지시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재판도 하지 않고 공공연히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와서 슬그머니 우리를 석방하오"라고 하며 치안관이 직접 와서 사죄하기 전에는 출옥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결국 항복을 받고 풀려납니다(사도 16, 35 이하). 법다운 법도 아닌데 그것의 절차에 따르지 않고 인권만 유린하는 치안관을 심판한 것입니다.

이 고고한 자의식은 엘리트 의식도 아니요, 이스라엘민의 선민 의식도 아닙니다. 이미 식민지인으로 길든 마당에 그런 민족의식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아니! 이것은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의식입니다.

 

(4) 이같은 그리스도인 의식이 확고한 사람은 이 시대의 '의인'일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 중의 1/10만 이런 의식에 확고하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굴러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의식이 우리의 민(民)의 의식으로 보편화된다면 민주주의를 위해 복잡한 제도는 아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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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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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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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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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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