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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행동
루가 20, 8
1. 예수의 분노

거룩한 신전이 시장화된 것을 목격한 무명의 청년 예수는 홀홀단신으로 팔고 사는 무리들의 기구들을 둘러 엎어버리면서, 너희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민중들은 그의 하는 일이 옳다고 보아 오히려 '감탄'했는데, 이 성전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제사장, 율법학자들 그리고 장로들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저들은 그의 하는 일의 정당성 여부를 문제하는 것보다는 그럴 수 있는 권리가 문제였다. 그러므로 "당신은 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를 당신에게 주었소"라고 대들었다. 사실상 이것은 하나의 난동이 아닌가? 난동이란 기존질서에서 주어진 권한 밖의 일을 하는 일이며,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다. 인정된 성전의 주인들이 엄연히 있는데 아무런 자격도 없는 이가 이같은 폭력적인 개입을 하는 것은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다. 그러기에 예수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범법자요, 사회질서의 교란자다. 그는 처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뿐인가?

저들의 질문은 정당한가? 저들이 묻는 권위(ecksousia)란 대체 어떤 것인가? 유다인들에게서 권위적 존재라면 대제사장, 율법관 그리고 장로들이다. 유다인들이 저들의 권위를 승인한 데는 다음의 근거가 있다. 대제사장은 모세와 아론의 후예로서 혈통 또는 정신과 전통의 배경으로 성별됐다. 율법관은 경전을 가르치고 풀이하는 권리를 인정받은 자들이다. 저들의 권위는 바로 경전이 뒷받침한다. 장로는 남보다 뛰어난 지혜와 장구한 세월에서 얻은 경험으로 인정받은 자들이다. 말하자면 저들은 제도적인 기구에 의해서 합인(合認)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무슨 권위로!"라고 물을 때는 당신은 모세나 아론의 후예도 아니고 또 경험과 지식을 쌓아서 인정받은 원로도 아닌 일개 젊은이가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주제넘은 월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예수는 이러한 권위를 거부했다. 그는 이런 권위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권위와 싸웠다. 그러기에 저들이 요구하는 권위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저들에게 반문하므로 저들이 제시할 것을 바라는 그런 권위만이 궁극적인 것인가를 생각했다.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다. 대답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

이 반문에 저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하늘에서 왔다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을 것이요, 사람에서 왔다면 그를 예언자로 믿는 군중의 분노를 살 것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모르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함구하게 한 예수는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함으로 대답을 거부했다. 그러면 예수는 권위라는 것을 일체 거부한 것인가?

2. 권위에 대한 저항

권위(authority)는 현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라난 의식이다. 그것은 국가의 권력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종교 안에서도 용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권위를 타파하는 것이 현대인의 지상 과제처럼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성전을 숙청한 청년 예수의 행위에 박수를 보낼 만은 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권위 없이 살 수 있는가?

우리는 권위라고 하면 흔히 나를 억압하고 내게 명하는 조직이나 인물같은 것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은 나면서부터 권위를 요람으로 하고 자라난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부모의 권위 밑에 놓인다. 그 부모는 그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친다. 그는 왠지는 모르나 하라, 하지 말라에 복종해야 하며, 그 부모가 생각하는 대로를 기준을 삼도록 되어있다. 바로 그 부모가 뚜렷한 권위를 내세워서 강요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그들이 형성하는 가풍에 매이도록 되어있다. 그 가족 안에는 그보다 큰 형제들의 권위가 있다. 어린것은 그들의 틈에서 비판이 허락되지 않는 추종으로 자라난다. 7-8세가 되면 그에게는 또 하나의 권위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학교의 분위기와 그것을 직접 형성하는 선생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어떤 표식을 왜 그렇게 발음하고 그렇게 보아야 하는지 물을 여지가 없이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그것을 제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이렇게 자라서 사회에 나가면 선배, 상전, 지도자 그리고 국가의 권위 영역에 들어선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권위 안에서 자기를 형성한다. 이런 경우 전통이 바로 권위인 것이다. 사람은 나면서 어떤 문화권 내에 던지움을 받는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가치기준에 의해서 삶을 영위하도록 돼 있다. 이러한 전통이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 비록 객관성을 지닌 자연과학도 이날까지의 경험의 전통에서 이루어지며 싫든 좋든 종교, 윤리 등에서 제공한 가치관에 서게 된다. 비록 사람이 이러한 권위에 저항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그 권위(전통)가 제공한 무기를 가지고 하며, 비록 혁명을 한다고 해도 그 전통이 준 기준과 무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 현대인은 권위를 거부하는가? 분명히 현대인은 권위를 거부하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의 권위를 대표하는 '구세대'인 부모, 선생, 정치인 그리고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저항한다. 그런데 정말 권위를 거부한다는 것은 모든 일은 자기가 결정하겠다는 선언이요 행위이다. 즉 책임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 일체를 거부할 때는 자기를 마치 무제한의 존재로서 내세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은 제한된 존재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부한 현대인은 그만큼 초조하게 된다. 그러나 저들은 권위 자체를 철저히 거부하지 못한다. 저들은 국가나 교회 또는 어떤 특정인들의 권위를 대항하는 반면에 또 다시 하나의 권위를 필요로 한다. 그들이 새롭게 만드는 조직 그 중에서도 이데올로기 또는 젊은 세대니 역사의 추세니 자유니 새 것이니 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저들이 거부한 권위가 종적인 연속성을 가진 권위라면 이들이 다시 만든 권위는 횡적인 것이라는 것의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그 횡적인 권위도 또 다시 종적인 낡은 권위에 예속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주도세력에 대항해서 그렇지 못했던 과법(過法)의 권위를 빌어옴으로써이다. 어떤 사람의 학설 또는 제도 따위와 자기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권위에 대한 저항이란 이 권위에서 저 권위에로의 평면적 이동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권위를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를 증오할 따름임을 드러낸다.

저들은 자기들을 강압하는 권위, 자기들이 선정하지 않은 권위를 거부하고 자기들이 인정하고 자기들이 선정하는 권위를 찾는다. 그러기에 자기 갈 길을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세계 풍조나 어떤 학설을 찾으려고 하며, 우리에게 옳은 지도자가 없다는 것을 불평한다. 또 저들이 기성세대의 불신을 표방하는 것은 그들의 지금까지 행위로 봐서 신임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이면에는 당신들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도록 실증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저들이 정말 권위를 부정한다면 구세대에 어떤 호소를 할 필요없이 제 일은 제가 묵묵히 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책임을 남에게 묻는 것은 자기는 책임을 전적으로 지지 않겠다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권위를 여전히 필요로 한다는 말이 된다.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한 청년 예수는 확실히 권위주의를 거부했다. 그런 면에서는 오늘의 젊은이와 통한다. 그러나 그의 권위 자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현대 청년과 전혀 다르다.

3. 무슨 권위?

예수의 반문은 권위에 적어도 두 가지 구별이 있음을 나타낸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사람이 인정한 권위에서 행했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권위에 의한 것이냐? 이 질문은 권위에는 인간 영역에서 선정되는 것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하느님에게서 받은 권위란 어떤 것인가? 그것을 묻기 전에 먼저 사람의 권위란 무엇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세례자 요한의 권위는 사람에게 난 것이 아니었다. 까닭은 그는 그럴 수 있는 아무런 지위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기관도 장로도 아니었다. 그의 거동은 유다 역사에서 나타났던 예언자들의 그것이다. 예언자들은 어떤 지위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면 저들은 무슨 권위었나? 그것은 그들의 선포한 말씀에서 볼 수밖에 없다. 저들은 오고 있는 미래 앞에서 현재를 심판했다. 세례자 요한도 이제 올 새 나라를 선포했다. 이것은 저들의 권위의 근거는 기존적인 데서 찾은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미래에 발을 디딘 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이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엄밀히 말해서 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 까닭은 그는 저들이 발 디디고 있는 기존 질서에 어떤 자리도 허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당시에 이미 예언자의 발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는 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저들에게는 보이는 기존 질서 위에 딴 것이 없다. 비록 저들이 하느님을 내세워도, 그 하느님은 성전, 율법을 중심한 기존 질서를 통해서만 인정되는 신이다. 딴 말로 하면, 저들의 하느님은 저들의 기존 질서에 완전 감금된 이이다. 그러므로 그 하느님의 권위도 기존질서에 의해서만 성립될 따름이다. 그 하느님은 이미 창조의 하느님도, 역사의 주인도 아니며 단지 서기관이나 제사장의 하느님으로 위축된 것이다. 저들은 제도적으로 하느님을 독점했다고 생각했었기에 참 권위란 저들이 인정하는 범위 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그렇지 않았다. 저들은 권위의 소유자가 아니었기에(가난했기에) 새것에 대해서 폐쇄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기존 질서에 억압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향한 것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였다. 그러므로 저들이 세례자 요한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권위가 교리적(기존적)으로 승인할 수 있느냐를 묻지 않고, 그에게 몰려왔다. 그것은 새로운 돌출구를 그에게서 찾자는 동경이 하는 행위이다. 저들은 현질서에 억압됐으나 현재에서 삶의 근거를 구하지 않고, 미래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는 그들에게 절대적일 수 있었다. 이러한 저들의 신념을 가로막는 것은 저들의 숨통을 봉쇄하는 것과도 같다. 만일 그들의 길을 막으면 저들은 봉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지도자들은 저들을 무서워 했던 것이다.

예수는 무슨 권위로 성전을 숙청했나? 예수는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 그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예수는 그 권위를 말할 수 없다. 까닭은 그의 권위는 기존의 어떤 가치관에 의해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말할 수 있었다면 그는 벌써 낡은 질서에 속한 인물일 것이다.

한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도 그 이전의 질서를 대표하는 집권자나 사상은 그 권위를 상실한다. 또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나 사상은 기존 질서에서 아무런 권위도 못가졌던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비록 정권을 잡게 됐다고 해도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정권의 강탈 이상이 될 수 없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그 거점을 두었다. 그것은 미래적인 현실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기존적인 가치관에서 인정되는 권위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예수는 어떤 권위인지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일관된 태도이다. 그는 기존의 질서에 의한 입증만이 아니라 어떤 초자연적 입증을 요구하는 것도 거절했다.

유다인들이 예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정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어찌하여 이 세대는 표징을 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에는 아무 표징도 주지 않겠다"(마르 8, 11)고 했다. 저에게서 표징을 구한 것은 그에게 무슨 권위로라고 묻는 것과 꼭 같다. 그들은 그의 권위를 기존 질서에서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라도 보여달라는 것이다. 까닭은 예수의 행동이 그들의 종교적 관념의 어떤 틀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징을 구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낡은 세대(이 세대)의 것으로 보았기에 그것을 거부했다. 초자연적인 어떤 표징을 구하는 것은 일견 기존적인 것 이상의 것을 전재한 듯 하나, 그것 역시 낡은 세대에 속한 종교개념에 불과하다. 저들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표징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은 역시 낡은 종교관념을 충족시켜 주는 것 이상의 일이 될 수 없다. 지금의 모든 것은 모두 지나갈 낡은 것이다. 종교적인 것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낡은 것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은 새것은 아니다. 따라서 새것이면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조상을 업고 나오거나 어떤 재래의 종교관념에 자기를 적응시킨 따위의 흔적이 없으며, 심지어 율법의 거부나 전혀 다른 해석을 감행할 때에도 성서의 뒷받침을 전혀 구하지 않은 예가 많다.

그는 무슨 권위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는 것은 행동뿐이다. 그는 종교가 타락했기에 그것을 숙청해야 했으며, 소외자들이 가련하기에 그들의 편이 됐을 뿐이다. 그에게 어떤 제도나 지위가 행동하게 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현실이 행동을 강요했다.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행동 자체뿐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그의 행동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의 정의가, 진리가, 그리고 사랑이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 했다. 그러므로 정의, 진리, 사랑은 그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그는 메시아니까 그의 행동이 의미 있고 그의 말씀, 그의 십자가에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메시아니까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메시아이며 그의 십자가에 특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오실 그이"(메시아)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 질문 자체에는 대답 없이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는다"(마태 11, 2-5)고 했다. 이것은 그의 행동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마주 세우므로 그를 판단할 자유를 사람에게 맡긴 것이다.

4. 권외자의 저항

사회가 늙으면 조직이 강화되며, 그 조직은 경화(硬化)되어 비인간화의 작업과 더불어 삶을 잠식해 들어간다. 현세계를 대표하는 서구 사회는 고도로 조직화됐다. 그래서 그것을 편리한 사회라고 하며 이른바 복지사회라고 해서 우리는 부러워한다. 확실히 서구사회는 편리하다. 모든 일이 세분화되어 각기 맡은 분야가 뚜렷해져서 잔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 되어 있다. 사람이 병들면 의사가, 치료비는 보험회사에서, 죽으면 병원 시체실에서, 직접 공동묘지로 가면 목사가, 이처럼 기계와 같이 모든 일이 처리된다. 이렇게 모든 책임분야가 분명하므로 곁에 어떤 사고가 생겨도 끄덕하지 않는다. 까닭은 제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래서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불간섭이 미덕이 된다. 그것은 확실히 편리한 세계다. 그러는 동안 인간은 기계화됐고, 세계는 균형을 잃게 됐으며, 전체를 보는 눈을 상실한 세계가 됐다. 따라서 방향도 가치관도 의미도 묻는 이가 없게 됐으며, 따라서 정의도 진리도 무의미하게 됐다. 성전에 가서 예배하려면 양이나 비둘기를 바쳐야 한다. 순례자들은 이방에서 왔기에 그런 것을 성전 가까이에서 사야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돈을 바꾸어야 한다. 그들의 편리를 위해서는 성전은 양과 비둘기와 그리고 돈바꾸는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 성전의 책임자들이 이 장사를 시켜 그 이윤으로 성전의 유지비를 장만한다. 이같은 필요성에 의하면 그 어느 것도 다 필요한 것이다. 기존 질서란 이같은 연쇄성을 가졌기에 부분부분을 따져보면 필연적인 것뿐이다. 또 모두가 이러한 연쇄 속의 일익을 맡고 있기에 전체를 운운할 눈도 권리도 없다. 권리란 자기 분야와 직결될 뿐이다. 이래서 성전이 무어냐? 삶이 무어냐를 물을 사람이 없게 된다.

누가 만일 성전이 무어냐고 물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전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의미를 물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성전이 시장으로 둔갑해도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오늘의 사회도 그 과정에 정연한 필연성을 가졌으며, 그 과정은 세분화되었기에 참이 무어냐,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할 위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전쟁, 착취, 권모술수 따위가 판을 치고 있어도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이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가? 그러면 누가 그것을 문책하며 그것과 마주 서 싸울까? 그는 기존 질서에 자리를 가진 사람, 거기서 인정된 권위로는 불가능하다. 공자는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입장이기에 "세상에 도(道)가 있으면 나가 활동하고 도가 없으면 숨어 버리라"고 한다. 이것은 이른바 군자의 처세이다. 그것은 기존 질서를 대전제하고, 그것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행위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러기에 불의에 항거해 일어섰으며, 또 이 세상에서 지위가 없었기에 항거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현실이기에 저항해 일어섬으로 기존질서의 전체의 방향을 물었다.

오늘의 역사는 분명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이 질서에서 지위를 가진 자들은 그것에 저항할 수 없었기에 세계의 무명의 젊은이들이 항거해서 일어났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정치인이 아니면서 정치에 간섭하고 집권자에 반항했다. 새로운 길은 현 집권자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로 현질서에 자리가 없는 저들 만이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는 그 전문가들이 있다. 그러나 저들이 그릇된 방향에로 줄달음치므로 그 역사, 그 민족을 위기로 몰아 넣을 때 저들 스스로의 힘에 의한 구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자는 그 권외(圈外)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위기 앞에서 정치, 권력 밖에 있는 사람들이 내 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면, 그 나라 그 사회는 망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참여에 있어서 반드시 무슨 권위로, 하는 문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결심이 따라야 한다. 예수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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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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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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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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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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