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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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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에서 본 조국
우리는 정말 죽기 위에 생겨난 족속인가?

"Land zum sterben geboren?" 얼마 전에 독일 신문에 이런 제목으로 거의 반면을 차지한 기사를 읽었다. 흥분과 격분으로 그 신문사와 싸우고 싶은 생각, 우리 정부에 호소하고 싶은 생각들에 망설이면서 날을 보내다가 결국 우리의 반성의 계기로 고맙게 받자하는 결론에 볼 것 없는 감상문이나마 몇 자 적어 여러분께 알리기로 한다. 구라파 인들의 아시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선입전제가 있다. 그것은 아시아는 미개했거나 잠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잔다고 할 때는 중국이나 인도를 두고하는 말함이고 깨지 못했다 함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족속을 두고 말하며 한국은 후자의 반열에 자리잡고 있다. 단, 일본만은 예외국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중국은 잠이 깼다고 말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들은 가끔 아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강연회를 열면 찍어온 사진들을 환등으로 보인다. 거기는 우리 나라도 끼어있되 본모습을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원시적 모습만 골라 찍어 온다. 나는 여기서 고책점(古冊店)을 잘 뒤지는데 거기서 영스페인 그리고 독어 책으로 된 한국 소개판을 몇 권 발견했다. 영독어 책은 한일합방 무렵의 사진이 실린 것들이고 스페인 책은 625 전후에 낸 책인데 모두 3백 면을 넘는 큰 책이다. 예로 그 안의 그림만 소개한다면 우선 한국 사람 밑에 갓 쓴 영감이 두루마기와 고맥기에 묶은 버선을 막대기에껴 둘러메고 바지는 힘껏 올려 치켜 접어 내려서 배꼽 근처가 들여다보이고 그 치켜올린 것도 고르지 못해 가랑이가 길고 짧고 거기에 긴 담뱃대를 물고 담배쌈지를 허리춤에 터덜거리면서 한여름 신작로를 가는 모습이다. 한국 학교라고 해서 마당에 깐 돗자리 위에 두서너 밥상을 놓고 7, 8명의 애들이 책 펴고 앉았고 그 복판에 관 쓴 영감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서당'이다. 한국 이발소라 해서 거적을 친 변소 곁에 쭈그려 앉히고 이발질하고 있는 것이다.(아마 구라파 인은 그것이 변소인 줄 모르리라) 한국 어부라 해서 글자 그대로 발가숭이 된 몇 사람이 반두질하고 있고, 한국 결혼식이라 해서 납작한 집 대문턱에 역시 배꼽 내논 두 사람이 든 가마 속에 눈을 내리깐 신부가 들어 있고 그 주변에 베 적삼 치마를 걸친 아이, 아낙네들이 물끄러미 서 있는 것이다. 한국 장군이라 해서 가운데 조그마한 바퀴 하나 달리고 그 앞뒤로 밀고 끄는 그 위에 갑옷에 눌린 원시인 표정을 한, 일 이른바 장군이 앉아 있다. 그 외에 나무 절구질하는 주변에 바가지 등 나무 그릇이 여기저기 놓인 그림 등은 목기 시대 그대로요, 한국 수도라 해서 동대문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옹기 종기 모인 종로를 찍어냈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도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을 뿐 참된 우리의 모습을 소개한 것이라고는 통 없다. 최근 나온 아시아 여행편 같은 데 한 목씩 끼어 난 걸 보아도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 사전이나 그 비슷한 소개 난에는 줄곧 중국의 예속국에다가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가 이차대전에 독립됐다는 정도이다. 그런 정도로 통 무시당해 오던 한국이 625동난으로 갑자기 유명해졌는데 이들은 이상의 선입관과 연결시켜 연상했던 것이다. 625동난으로 나타난 사진이란 한국군(韓國軍)의 활동은 거의 무시되고 마치 미군(美軍)과 공산군 싸움 틈바구니에서 화를 만나 보따리를 둘러업고 지고 마지막 떠나가는 기차에 옹기종기 매달린 모습, 울고 불며 이고 지고 강을 건너는 장사진, 아들 등에 업힌 늙은이, 거리에 누워 악을 쓰며 우는 아이들, 거지떼들 천막이 군데 군데 쳐진 들에서 밥 끓이는 모습 등이 범람했다. 나는 이곳 한 국제적인 기숙사에 있을 때 세계각처에서 오는 잡지들을 보았다. 영국 어떤 신문에 때묻은 얼굴에 깡통을 옆에 놓고 악을 쓰며 우는 두 아이에 눈이 가서 보니 그 밑에 "나는 아직 이렇게 부모 없는 아이들이 버림받고 있는 것을 본일이 없다." 하고 그런 고아들을 위한 동정을 호소하는 어떤 단체의 광고인데 그것은 물론 한국이었다. 하루는 스위스의 모 국제기관에서 발간한 KOREA라는 소책자를 손에 들었더니 뼈만 앙상한 거지 애들, 구제품을 타기 위해 늘어선 창백한 빈민상, 거리 어귀에서 밥을 끓이는 모습들, 하여간 내게도 이방인 같은 인상을 주는 것으로 글자 그대로 지옥을 표현하고 있다. 이 소책자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으리라.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아침 또다시 삼단의 큰 글로 Glanz und Elend in Südkorea(남한의 호화판과 궁상)라고 쓰고 숙명적인 판문점 얘기 외에 가난한 농촌, 파괴와 빈곤에서 허덕이는 모습과 더불어 호화로운 암시장의 사치품들과 무엇보다 반도 호텔의 모습을 그려 그 모순성을 지적했으며 이 대통령과의 대담에서 얻은 그의 호전적인 인상을 비웃고 있다. 이 신문(Frankfurt-Allgemeine)은 독일의 대표적인 것으로 전국은 물론 구라파에 퍼지고 있는 것인데 기자는 아시아를 여행한 이곳 재무상 에르하르트를 따라 한국에 갔던 자다. 그 논조는 약 일년 전에 텔레비전 소개와 방송 강연과 거의 같은 것으로 가능한 대로의 혹평을 퍼붓고 있다. 다른 신문은 외국자본이 발 들여 놓을 데 없는 부패한 나라라고 하고 한국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을 오히려 비난했다. 하여간 구라파에 있는 한국인은 한국 문제가 언급될 것을 겁나할 수밖에 없다. 젊은 친구들이 몇 앉으면 "이놈의 새끼들을 다 부셔 버렸으면…" 하고 흥분하나 반드시 거짓말만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들이 한사코 그늘진 면만 골라 일러 바치는 것은 괘씸하다. 일본만 해도 한심한 그늘진 데를 가지고 있건만 일본에 관해 언급하면 으레히 좋은 면만 골라낸다. 여기에 반드시 선입적 기분이 크게 관계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적은 일들이면서 의외의 영향을 미치는 몇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저널리스트의 붓 끝이란 기분에 많이 좌우되는데 한국에 갔던 기자들은 대체로 호감을 못 가지고 돌아오는 것같다. 우선 거의 전부가 반도 호텔을 언급하여 설비와 써비스에 비해서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것 그리고 미화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비난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 호텔주가 누구(?)라는 것까지 들춰낸다. 그리고 문화인으로서 발 들여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호텔" 운운한다. 그들은 아마 주머니를 단단히 털리고 분풀이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안내로 국내를 시찰하는지 잘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일 년에 도대체 몇 명 안 되는 외국 기자들에게 정부는 특별한 편의를 도모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우리 나라 다른 일류 호텔은 그리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팸플릿이나 한 장 쥐어 주거나 영어나 몇 마디하는 통역이나 달아 보낼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고유성을 이해시킬만한 학자들과의 접촉을 주선해 주어야 할 줄로 안다.

나는 고국에 있을 때 세계 종교 단체나 개인들의 활동으로 비록 떨어진 옷 조각이나마 얻어들이는 것을 퍽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 와서 놀란 것은 그 대가가 놀라운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저들이 자기들의 얼굴을 팔아서 주워 온 것들이었다. 즉 그 대가는 거지 궁상(Elend), 제구실 못하는 것 등등이다. 저들은 그러한 구제 운동을 위해 우리의 가장 궁상맞은 것만 골라 사진으로 공개하고 말 선전해 얻어들인 것이다. 전란 직후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전후 근 십년(十年)의 오늘까지 우리는 구제품에 침 흘릴 수는 없다. 비록 저들이 선의로 뻗치는 손길이나마 이제는 얼어 죽어도 곁불을 안 쪼인다던 우리의 체면을 찾기 위해서라도 깨끗이 거절할 때가 왔다. 그 까닭은 평생 제구실 못하는 민족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다.

구라파 어느 대학 도서관엘 가보아도 중국, 일본 등의 고간은 물론 근간신문, 잡지들이 범람한다. 중국은 대만에서도 중국에서도 선전사진, 잡지 등을 보내온다. 그러나 우리의 것은 도무지 볼 수 없다. 캠브리지대학 도서관에는 중국, 일본 책은 꽉 차 있었고, 한국이란 못말까지 써놓고 기다리되 우리 간행물이란 한 권도 없었다. 그런고로 이들이 한국을 알고 싶을 때는 일본 같은 간접적 소개에 의한다. 그러니 한국에도 신문이 있나? 대학이 있나?하는 질문을 받아야 한다. 나는 우리 들의 약간의 간행물이 미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세계의 여론은 아직도 구라파가 쥐고 있다. 우리는 저들이 알건 모르건 우리도 살고,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만이라도 가능한 대로 간행물을 적어도 각 대학 도서관쯤에는 보내야 할 줄로 안다.

코리아에도 야당이 있어요?(정치)

이것은 누구나 묻는 말이다. 그런데 놀란 것은 '승만 리'를 모르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차 안에서라도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오, 승만 리"이다. 서울을 모르는 이는 얼마든지 있어도 승만 리는 다 통한다. 우리 민족의 한 사람이 이만큼 세계에 알려져 있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럴 때면 내 아는 범위 내에서 그의 업적을 자랑해본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박사 외에는 어느 한 사람도 한 단체도 아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도 그렇거니와 여기서도 가령 우리 정부나 우리 군대나 경찰을 지칭할 때는 승만 리 정부, 승만 리 군대, 승만 리 경찰이다. 이것이 경사스러운 일인가? 나는 아이젠하워 군대니, 아데나워 경찰이니 하는 표현을 들은 일이 없다. 확실히 이들은 이 박사를 한국의 유일한 인물로 안다. 그런고로 그가 세상 뜨면 어쩌느냐고 염려 아닌 염려를 한다. 이것은 한국에는 인적 자원조차도 전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우리에게도 훌륭한 인물을 많이 가진 야당이 있고 주요한 언론기관은 야당적이라고 말하면 저들은 이 박사와 맞서는 인물이 어찌 가능하며 그 야당지를 누가 읽느냐는 것이다. 즉 단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이 박사를 철저한 독재가로 그릇 알고 있다. 글쎄 구라파에 와보니 독재라는 개념이 우리보다 철저하다. 한 예로 나는 처음 여기 왔을 때 저쪽에서 우둥퉁한 정복 경찰이 뚜벅뚜벅 내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버릇이 거의 일년을 끌었다. 나는 경찰이란 으레 무서운 것이라는 인식이 일제 시대를 거쳐 유감스럽게도 건국 십 년간에도 전혀 가시지 않았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저 경찰들이 내 편이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길을 물으면 물론, 거리에서 길을 몰라 서성 거리면 멀리서 쫓아와서 내가 당신을 위해 무얼할 수 있을까요? 웃는 얼굴로 묻고는 자세히 가르쳐 주고 애매해 하면 몸소 안내해 준다. 저녁이 되면 전기등을 손에 든 경관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문을 흔들어 본다. 난 무슨 죄인 수색이라도 하나했더니 문단속 잘 됐나 돌아보는 것이다. 저들은 종일 뚜벅뚜벅 거리로 왔다 갔다하는데 그것은 신분증 조사를 하기 위한 게 아니라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 경찰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여간 그렇더라도 우리 나라는 야당을 용인하는 의회국가가 아니냐! 이 박사는 야당과 야당지를 용인하는 민주적 대통령이다. 장개석이나 스페인의 프랑코와 비교해서 얼마나 민주적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동정을 못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박사를 일인 독재자라고 인정해버린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닌가.

거기에는 다음 이유를 들 수 있는 것 같다.

이미 말한 대로 이 박사 외에 어느 누구도 알려져 있지 않은 까닭이다. 야당은 고사하고 이 박사의 내각 인물도 전혀 모른다. 아이젠하워 하면 덜레스니 누구니 으레 함께 알려져 있다. 아데나워 하면 그 팀이 누구누구로 구성된 걸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한 팀의 정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밤낮 사람을 갈아대므로 결국 억울하게도 일인 독재라는 인상을 남기곤 했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 짓는다고, 비록 부족하더라도 한 일을 한 사람에게 오래 하게 하면 실력도 늘려니와 세계에도 그 보좌인이 알려지는 것인데 우리는 왜 그래야하는지 난 모른다. 야당이 있고 야당 인물이 있고 야당 언론이 있다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단체의 자랑이다. 그것은 비판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요, 따라서 그런 산 민중을 대표한 정부나 대통령이란 의미에서 그 평가는 높아지는 것이다. 오늘날 독재하의 민중처럼 멸시받는 것은 없다. 프랑코의 독재 때문에 구라파의 스페인 민중은 멸시받고 있다. 그나마 망명해 온 인사들의 투쟁으로 그 민중의 체면이 유지되는 형편이다. 즉 거기도 산 사람들은 있구나 하는 인상이다.

십여 년 히틀러 소리밖에 못 들어온 세계는 독일놈은 다 멍텅구리인가하는 인상을 주었다. 이런 인상은 오늘날도 남아 있어 그렇게 많은 인재를 낳은 국민이건만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전구라파에 남아 있다. '그 밸빠진 놈들이 또 어떤 놈에게 속아 또 무슨 일을 저지를 지 아나?' 하는 것이다. 우리 국체(國體)는 독재 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다시 밝혀야 한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 야당 인물이나 언론이 있다는 것은 이 박사에게 불명예가 아니라 그 반대다. 지금은 신화시대도 영웅숭배시대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 정부는 야당 인물이나 언론의 해외 진출을 그렇게도 겁내는 건가? 참말로 소심(小心)한 처사들이다. 시대의 착오이다. 추장(酋長)이 평가받는 시대는 아니것만! 제정신 똑바로 가진 민중을 민주적으로 치리(治理)할 줄 아는 자가 존경받는 시대거늘!

나는 구라파인들에게서 625 전란은 한국측이 일으켰지요?하는 질문을 자주 들어 왔다. 영국에서는 아주 그런 전제로 말을 시작하는 인사들을 여러 명 만났다. 물론 영국은 중국의 선전에서 받은 것이겠지만 우리는 왜 다른 나라들 특히 우리와 입장이 같은 서독인들에게까지 이런 오해를 받고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공산당의 교묘한 선전을 쉽게 받아들이는 뒷받침으로 우리 나라가 호전국가라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상을 받은 까닭을 추구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들의 무력통일이라는 구호요, 다른 하나는 대일관계의 우리의 태도를 든다. 교묘한 일본인들에게 또 한 수 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들의 어리석음은 잠깐 두고 우리가 내세우는 무력통일이라는 구호에 대해서 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공산당을 잘 경험해 왔기에 타협할 여기가 없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이 점은 공산당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이 내세우는 구호는 평화다. 그것은 그들이 세계의 인심 동향이 어디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 "정치란 음흉한 동물이 하는 짓이다"라는 말을 한 듯한데 그것은 표현과 속마음이 같지 않다는 말일게다. 정치라면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하는 요령쯤은 배워 무방하리라. 그러기에 한국 정치는 "소리를 높이 지르므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 "주변의 국가와는 다 원수가 되고 오직 바다 건너 한 나라에만", 그리고 "Säbelrasselnder Diktator" 운운하는 혹평을 듣는다. 사실 오늘날 원자 무기를 달라, 백만 군인을 달라, 무력통일이라, 하는 구호를 내세운 것도 구라파 내지 세계의 어느 나라가 내세운 국호와도 너무나 대조적이다. 지난해 서독에서 원자 무기 설치안이 국회를 통과 된 후로 그 반대 민중운동은 대략 교회를 위시해서 노동자, 농민들간에 맹렬히 일어나고 있으며 영국은 이집트를 폭격하므로 민중이 얼마나 흥분하고 반항했나하는 것은 그들의 철수로 증명된다. 불란서의 튜니시아 폭격은 극단의 비난의 대상이 되어있고 네루 같은 평화주의적 제스츄어는 얼마나 높이 평가되어 있는지 모르며 일본도 내적으로는 야심만만하면서도 평민 외교로나 발표로는 극히 평화애호 국가로 분장하고 있다. 정권들은 몰라도 민중은 확실히 전쟁을 싫어하며 따라서 호전적 인상을 주는 자들에게는 극도의 반감을 가진다. 이러한 흐름에 우리는 역행할 수밖에 없는 숙명성을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는 힘을 가져야 한다. 나는 이들과 마주앉거나 강연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사정을 얘기하며 이들의 대공(對共) 인식이 너무나 추상적임을 비난한다. 그러면 저들은 납득은 하면서도 한국 문제는 당신 나라에 국한될 일이 아니고 세계 문제인데 왜 당신들이 앞장서야 하느냐 당신들의 무력 여하로 공산당의 태도가 좌우된다고 생각은 않는다는 것이다. 실상 이 박사가 누차 말한 대로 우리는 세계반공전선의 숭고한 임무로 희생당했으며 또 스스로 이 임무를 떠메려고 하나 세계에 준 인상은 주제넘으니, 호전자라느니 하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심을 차리면서도 세계의 동향을 살펴 가면서 정치 표현을 해야 될 것이 아닌가!

한국에도 자기 글이 있나요?(문화)

나는 주로 기독교회 관계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게 될 때에는 그들이 준 제목이 무엇이든 으레 유도해서 한국 선전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고마운 친구가 보낸 한국 색사진을 환등으로 보여주며 '문화강연'을 계속한다. 경주의 고적(古跡)으로부터 고려시대 이조시대 등, 나오는 사진에 따라 역사를 말하며 우리 문화는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조시대에 우리의 "고유한 어느 문자도 따를 수 없는" 한글 얘기를 한다. 저들은 오랜 민족인 줄은 아는 이가 많으나 문화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한글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없었다. 한자의 복(福)자를 아는 이들은 퍽 많이 봤고 일본 글 '사요나라'를 외운 이도 퍽 있으나……. 감탄한 사람들은 그러한 문화가 왜 전혀 소개돼 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나는 또 역사적 숙명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태리스페인영국독일불란서 가는 곳마다 박물관에는 물론 고물상, 골동품점, 또는 가정에 실물 아니면 그림이라도 중국일본의 골동품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으되 우리 것은 한 가지도 없다. 나는 어쩌다 런던 대영 박물관에서 몇 점의 우리 물건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일본부 한국석에 'Japan and Korea'라는 장에 즉 일본의 그늘 밑에서 무색(無色)했다. 고려자기도 있었건만, 또 그것은 일본 것과는 비교할 바도 아니건만 한 구석에 쓸쓸히 놓여 무색했다.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거의 아무 얘기도 못 들었으니 한국에 글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서울 시가(市街)를 찍은 여러 모습을 보여줬을 때 한국에 전차가 있는 걸 보고 의아해한 이는 한두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 전화 있어요?"라는 무지한 노동자의 질문을 받은 것이 두 차례다. 이들이 한국에 눈이 내린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후에 알고 보니 미개와 열대를 결부시켜 생각하는 버릇에서 한국은 열대지방이려니 한 까닭임을 알았다. 한국 가옥이 나오면 우선 '시네쉬세'(중국 것)라고 하고 한국 여자들의 고운 옷이 나오면 '기모노'라고 한다. 난 그것이 한국적이고 그 의복은 고유한 한국 것이라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긴다. 우리 여자들 의복을 어찌 일본 '기모노'에다 비기리오. 그러나 일본의 상징은 그 기모노 입은 여자이고 한국의 상징은 거지뿐이었으니 어쩌랴.

브뤼셀의 세계박람회는 세계 각국의 초유의 경쟁장소였다. 미국, 소련은 물론 아프리카 동남아 남아메리카 일찍이 이름도 기억 못한 나라들이 참여해서 제 나라 소개, 선전에 분망했다. 돈 없는 작은 나라에서는 대부분 사진들과 고물(古物)들로 장식했을 뿐 사실 별로 볼 것 없었고 일본도 대부분의 사진에 약간의 현대 기계를 진열했을 뿐 볼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호기심에 찬 구경꾼으로 범람했다. 더욱이나 일인(日人)들이 옹졸한 정원을 만들고 또 식당을 내어 구역질나는 '미소시루'에다 다 다꾸앙을 발라서 젓가락을 쥐어주는 것인데 초만원을 이루어 젓가락질에 즐기고 있는 것을 볼 때는 때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우리는 거기 참예 못했나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란 말은 우리에게만하는 교과 내용인가? 돈이 없어서인가? 태국은 조그마한 자기류(自己流) 건물의 모형만 만들어 놓고도 제 체면을 지켰다. 우리는 우리의 국보 일부만 진열했었더라도 큰 인상을 남겼으리라.

여기는 자주 일본중국인도 등에서 자기들의 무용, 음악을 가지고 순회한다. 그것은 큰 인상들을 남기는 것이다. 나는 녹음해 온 우리 나라 고전 음악을 기회있는 대로 들려준다. 한번은 십여명의 음악가들만이 감상하고 진정으로 감탄했다. 만일 우리의 무용가를 여기 무대에 세운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그 효과가 어느 고관 백번 다녀간 것보다 나으리라고 믿는다. 손끝과 발끝이나 놀리는 태국 아니 버어마의 무용도 좋다하는 이들에게 손짓 발짓에 몸 전체가 덩실덩실 넘어가는 한국 무용일소냐!

구라파인은 정치적으로 미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들을 얕보는 면이 있다. 그 심정을 살펴보면 그들에게 고유한 전통적 문화가 없다는 데서다 자기들의 문화는 입체적이고 미국의 문화는 평면적이라는 심정에서다. 이것은 구라파인이 얼마나 전통을 존중하느냐는 단적인 표현이다. 이들이 만일에 우리의 고유한 문화 또는 정서를 잘 소개받는다면 그 보는 각도가 다를 것이다.

나는 평민의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낀다. 평민외교란 정치적 외교를 말함이 아니라 우리 문화 또는 정서적 공세를 말한다. 그래서 먼저 우리도 우리의 세계를 이루고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우선 우리는 이들 앞에 미개인임을 면해야 한다. 정부는 쓸데없는 쇄국정책 아닌 쇄국정책을 버리고 가능한 대로 우리 나라의 사람들을 내보내야 할 줄 안다 정치인보다도 오히려 문화인예술인을 보낼 것이며 능력이 있다고 보이면 한국의 특성을 보일 만한 아무런 직업인도 좋다. 예로 구라파에서 한국 요리점을 낼 만한 이들이 있거든 주선해서 보낼 것이며 무용가나 예술단체, 체육단체도 가능한 대로 보낼 것이며 한국의 화집(畵集)이나 예술품 등을 해외에 진출시켜야 한다. 질적인 데 너무 매일 필요가 없다. 한국의 특성을 살릴 만한 것이면 무어나 좋다. 정부에서 그럴 만한 여유가 없으면 그런 능력 가진 사단체나 개인을 적극 협조는 못할지언정 막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성분을 너무 캐지 말라. 아무리 못됐기로 또 아무리 큰 인물이기로 그가 해외에 나가 정부를 뒤집어 엎을 수는 없다. 사실 외국에 나오면 한국인으로서 체면 유지에 더 급해서 정부 불평을 할 새도 없는 것이다. 유학생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얼마 되지 않는 수를 공연히 자꾸 제한할 필요 없다. 정부의 원조 능력이 없으면 제 힘으로 가는 자는 막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국가 체면 손상시키리라는 소심(小心)은 안 가져도 좋다. 아무리 저능아라도 유학생치고 우리 민족체면을 떨어뜨릴 리는 없다. 그 까닭은 우리의 체면이 더 아래로 내려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민중이 살아야, 민중이 산 것을 알아야, 그 민중의 정부도 대접받고 그 말이 존중되는 시대다. 민중의 소리를 죽여버리고 정권의 소리만 높여 존중받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한국은 벼(쌀)가 그 전부?(농촌)

한 독일 신문에, 코리아는 라이스가 그 전부라고 하고 그 벼알로 공복(空腹)을 면하고 그 볏짚으로 집 울타리를 두르고 지붕도 그 벼, 심지어 그네 줄까지 벼로 꼬았더라는 것이다. 실상 차 안에서, 산등에서 우리 나라 농촌을 내려다보면 볏짚으로 덮인 공동묘지 같은 초가집들이 조용히 수난에 눌려 시들어 가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여름 방학철 두 달을 독일 한 농촌에서 지냈다. 약 삼백여 호 되는 동리에 약 천여 명이 살고 있었다. 내가 농촌에서 순 독일 민족됨과 그 종교 생활을 보고 싶다는 청으로 어느 독일교수의 소개로 여기 왔던 것이다. 정해진 가정에 들어서니 기대와는 딴판이다. 전형적인 농가를 원했는데 그 삶 삶이 도시와 거의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옹접실의 설비니 더욱이 부엌은 그대로 공기와 가스장치고 그림을 건 것이든 꽃을 배치한 것이든 라디오 그리고 정해진 내 방은 한국에서는 상류 호텔이다. 아이 넷을 가진 부부인데 딸 형제가 자는 방을 내게 제공하고 그 애들은 그 옆방으로 몰려가고 부부들 침실, 아이들 침실이 제대로 문화 시설이다. 나는 약간 실망했다. 나는 그 교수가 자기 민족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제일 좋은 촌과 가정을 골라 주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오해였다. 그 동안 여러 촌과 가정을 많이 보았으나 대체로 그러했다. 이 부부는 소학교를 나은 전형적인 농민 가정이나 남편은 이십년 내로 한편 공장 직공 생활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일곱시면 공장에 나가고 부인은 홀로 또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함께 밭에서 종일토록 일하고 남편은 공장에서 돌아오는 대로 밭으로 나간다. 어두워 돌아오면 곧 둘이 함께 우유를 짠다. 식사는 아침은 간단히 커피와 빵 조각을 먹고는 각기 흩어지고 점심은 비로소 더운 음식을 함께 먹고 저녁은 으레 여덟시 이후 차와 빵 조각을 씹는다. 그리고 열시 경까지 함께 모여앉아 손일을 하면서 단아하게 즐기다가 모두 침실로 가도 부인은 으레 열두시 넘어서 침실로 간다. 이들의 농사로써 먹을 것은 사들이지 않고 두 마리 소에서 짠 우유를 상용하는 것은 물론 버터를 만들어 먹고도 반 이상은 판다. 이렇게 공장에서의 수입과 소에서의 수입으로 매년 계획한 대로 창문이니 목욕탕이니, 가구를 개량해 나간다. 일주일을 쉴새없이 드세게 일한 그들에게 일요일은 그대로 안식일이다. 오전에 교회로 갔다가는 전가족이 말끔히 차려 입고 끝 없는 숲 사이로 산보하거나 또 먼데 있는 친척이나 시가(市街)를 방문한다.

내가 거기 갔던 무렵 그들은 가장 현대식 축구장을 신설하고 있었다. 시설이 작을 따름이지 서울 축구장보다 더 현대식으로 되어 있었다. 저 높은 산에 저수지를 만들어 몸을 씻고 마시는 수도도 갖추었다. 한가운데는 아담한 교회와 새로 건축할 소학교가 있다. 이 동리의 소유인 젖소가 삼백을 넘는다. 아침에 늙은 목자가 뚜하고 고래를 불면 소들은 제 집을 나가 모인다. 두 마리 개와 함께 이 노목자는 그것들을 끌고 풀밭을 찾아 하루 종일 먹이다가 저녁이 되어 동리까지 끌고 오면 소들은 저절로 제 집들을 찾아든다. 동리에는 협동조합이 있고 거기 속한 건물이 있어 밤마다 여러 가지 프로가 있으며 책 등도 준비해두어 가서 읽을 수도 가져다 읽을 수도 있도록 되어있다. 그들은 이미 가난이란 것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이곳 촌장의 말을 들으면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었다한다. 팔십 년 두고 두 차례의 큰 불로 몽땅 타버린 일과 1차, 2차 양대전(兩大戰) 직후의 수난사는 우리와 그리 못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화재 같은 것을 계기로 오히려 현대화되고 편리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집을 하나 짓기 위해서는 수년을 계획하여 집짓기를 착수하고 일년 또는 이년을 끄는 집 이 많았다. 돈이 되는 대로 차츰차츰 쌓아 올라가기 때문이다. 못 지으면 못 지어도 초가삼간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참말로 만년 대계다. 피곤한 줄 모르고 초조함도 없이 소처럼 꾸역꾸역 일한다.

이리해서 전쟁 후 먹을 것이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다는 이들 마을에는 집집마다 라디오가 있고 텔레비젼이 14대 자동차 가진 집이 사십여 집 오토바이 아니면 자전거 없는 집은 물론 없다.

나는 저들 틈에 허허거리며 저들의 사투리도 배워 써가면서 친하면서도 자꾸 한국 농촌이 눈에 얼찐거려 견딜 수 없었다. 우리 농민들이야 이들에 비하면 개, 돼지만도 못한 생활이지 무엇이랴! 왜 이들은 이렇게 잘 사나? 땅이 비옥한가? 아니 땅의 배당은 각 가정에 몇 정보도 안 되는데도 태반이 곡식이 안 되어 소먹이는 풀을 심고 있다. 그리고는 대체로 감자를 심는다. 그러면 우리 농민은 게으른가? 아니 그들도 년내(年內) 꾸역꾸역 맑은 하늘을 쳐다 못 보고 일한다. 그러면 무슨 까닭인가? 문제는 우리 농민들은 생의 의욕이 없다. 참말로 마지못해 사는 것이다. 수천 년 밤낮 안으로 밖으로 눌려만 살아왔기에 저들은 자기 팔자를 이미 단념하고 있다. 독일 농민들은 도구도 고안하고 고안해서는 기계화했건만 우리 농민들은 천 년 전 도구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이들에게도 원시적 도구가 많으나 생각하고 해서 묘하게 발전시킨 흔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농민들은 그저 그날 그날의 하루살이 생활이요 생각이다. 결국 정신이 죽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책임을 그들에게 추구할 수는 없다. 이들이 아무리 부지런 하기로 일하는 것만큼 잘돼간다는 보장이 없다면 이럴 수 없는 것이다. 그 예로 대전(大戰) 이후에 이들은 통 저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들은 은행에 대한 불신임이 있다. 애써 저금한 돈이 대전 이후 휴지로 돌아간 쓴 경험은 지금은 사실 안전한 것이건만 그대로 불신임을 버티고 있다. 사실 이들도 농사만 가지고는 어림없다. 정부가 면밀한 계획으로 공장 설비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매호 한 명 이상은 공장 생활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병이 나거나 불우한 일을 당해도 잘 처리된다는 보장이 있다. 집을 지을 의욕도 정부의 지원이 미리 주어지므로 되는 것이다. 가령 정부는 집 지으려는 자에게 싼값으로 땅을 제공한다. 건축은행이 따로 있고 거기에 저금하는 대로 일년반 만에 그 저금액의 4배를 탐냄과 동시에 정부는 목재를 제공한다. 이렇게 얻은 돈을 년 5퍼센트씩 물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국민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정부는 정부가 아니다.

외지(外紙)는 우리 서울 거리의 범람한 고급차를 조소했고, 텔레비젼을 공격했다. 사실 우리가 제 정신 가졌으면야 팔할의 농민이야 익지도 않은 벼를 미리 팔아버리거나 굶어 쓰러지거나 정치 자금 방출 성적은 남의 앞장을 서면서 농민은행 하나 정도도 못 두었으며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덧붙이고 덧붙여 그들의 등이나 굵어 먹는 판에 대체 저들이 어디서 건설(建設)의 의욕이 날 것인가? 기껏 생각해야 '서울특별시'나 상대해 보려구하니 그거야 몸둥아리야 성병균에 썩건 얼굴이나 곱게 쓰다듬고 밤거리에 나서는 창기(娼妓)와 다를 게 무언가? 옛날에는 관내 정치더니 민주주의가 됐기에 기껏 서울특별시 내 정치가 된 셈인가? 우리가 정말 살 작정이면 정부를 떠메고 시골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서독 정부의 노동자, 농민 치중 경제 정책은 효과를 거두어 동독 정권의 슬로건을 비웃고도 남음이 있다. 동독이 요새와서 겨우 부르짖는 것이 서독을 능가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그 좋은 증거다. 중국 정권이 관료와 지식층을 강제로 지방에 소개했다는 것을 구라파신문은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얼마 전에는 주은래가 육 주일 간 농민들과 밭갈이하는 사진을 크게 냈다. 아무리 원수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의 태반의 국민인 농민을 저렇게 내버려 두고는 국회고 서울 특별시 계획이고 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대다수를 위한 정책이 민주정치요 대다수의 소리에 응하는 것이 의회정치일진대 팔할 이상의 농민을 무시한 한국의 정치는 '국시(國是)'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가장 더러운 도시(사회 보건)

"Die Schmutzigste Stadt der Welt?"

이것은 서울을 투고한 한 신문의 표현이다. 그 위에 서울이라고 해서 가장 더러운 천막촌을 찍어냈다. 이만하면 국제적 모독이라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격분대로 할 수 있다면 외국인은 다시 발을 들여놓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다시 대원군의 만용을 되풀이할 때도 아니다. 꾸역꾸역 참아가면서 우리는 우리 살림을 제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설움받는 자의 비꼬인 마음으로 이들의 약점을 찾아 비웃어 주고 싶었다.

나는 어떤 사사로운 좌석에서 중국 사람들이 썩은 달걀을 먹는다지요?하는 질문에 비꼬인 마음으로 딴 소리를 했다. "내가 구라파에와 보니 참 위생 관념이 없어 보이는데요." 긴장해진 그들은 듣고 싶어했다. 나는 "우선 구라파인은 손으로 집어먹는 것이 많은데 그것은 비위생적이요. 땅에 흘린 음식을 주저없이 도로 주워먹는 것을 많이 보는데 그것도 그렇고 개를 방에서 기르고 전차에도 도도히 끌어올리는 것도 그렇고 또 난 차 안이나 식당에서 긴 손톱에 때가 새까맣게 끼인 사람을 무수히 만나는데 의아했고(이들은 쓴웃음으로 긴장했다) 더욱이 균 이 우글거리는 입술을 함부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맞추는 것은 그 극단이다"라고 했더니 저들은 폭소했다. 비록 농담식으로 말했으나 구라파인들의 개개인은 유달리 위생 관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그것을 특히 느꼈다. 일류 호텔은 다를 터이나 일반 가정이나 중류이하의 호텔은 더럽다. 접시나 컵에 무슨 지저분한 것이 묻어있는 것은 일쑤다. 네덜란드에서 온 한 부인이 커피를 언제나 왼손으로 마시는 걸 보았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묻지 않는 말로 "컵에 입술 자리가 씻겨지지 않은 걸 많이 보았기에 왼손으로 마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이들이 우리보다 비위생적으로 산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들에게는 위생이니 박테리아니 하고 떠드는 계몽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이들은 개개인이 일일이 주의할 필요 없도록 사회보건 제도가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에게도 용변의 의욕을 일으키는 더러운 구석진 데가 없기 때문에 "개면 싸라"라는 웃지 못할 팻말이 붙지 않아도 개밖에는 그런 일을 하게 되어있지 않다.

박테리아가 자기 안에서 나오기는 할지언정 밖에서 묻혀 들어갈 염려는 별로 없는 것이다. 하수도가 청결 시설이 우리나라와 같이 불결하다 해도 우리 나라 사람치고 용변을 바지에 받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쓰레기를 방안에 쌓아 둘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파리가 그렇게 우글거리는 한 파리가 앉아 검은 콩밥같이 된 밥이라도 먹는 수밖에 없으며 수도 사정이 그런 한, 이가 끌더라도 벗고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도처에 병원 간판이 우글거려도 보건 시설이 그렇게 무관심한 한 불결과 병자가 줄어들 수는 없는 것이다. 치료보다는 예방에 개인에게보다 국가가 앞장을 서야지 "거리 용변 벌금 얼마"라는 법 문이나 구성해봐야 경찰과 국민의 사이만 나쁘게 하는 것이다. 또 이런 보건이란 소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회보장이 있어서 되는 것이다. 그 많은 거지떼나 그날 그날의 생활이 보장되어 있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위생 관념을 강요할 수 있을까.

구라파에도 거지들이 있다. 그런데 그 거지 중에도 허가(용인)받은 거지와 무허가 거지가 있다. 허가된 거지란 대체 불구자로서 그 직업을 위해 기술을 배운 거지다. 가끔 거리에서 아코디언이나 바이올린의 처량한 곡이 들려온다. 내다보면 한 거지가 문 어귀에서 연주하는 것이다. 주민들이 문도 열고 한 푼 던지면 웃는 얼굴로 답례하고는 처량한 멜로디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무허가 거지란 영국에서 자주 만났다. 허술하기는 하나 그래도 넥타이까지 맨 싱싱한 사람이 깍듯이 인사하고는 "미안합니다만 차 한잔 마실 돈을 저를 줄 수 있을가요"라고 한다. 만일 상대방이 응하지 않으면 "미안합니다" 하고 그대로 사라진다. 거지치고는 고급 거지다. 차 마실 값을 달라니…….

그러나 난 자선에서보다 대영제국 국민 거지에게 거지 나라 국민으로 한 푼 쥐어줌으로 값싼 복수심을 채워보고 싶은 통쾌함이 있어 한 번도 거절 안했다. 후에 그런 얘기를 어떤 영국 '신사'에게 했더니 그것을 경관이 알면 그 고급 거지는 처벌된다는 것이고 일하기 싫어서 뛰쳐 나은 놈 동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거지라도 대영제국 거지는 다르다. 그들은 자유로운 자기 결단에 의해 스스로 택한 직업이고 우리 나라 거지는 버림받음으로 된 거지다. 직장이 준비되어 있고 구제의 만반 준비가 되어있는 구라파 거지가 술로써 스스로 망해가면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은 때려눕힌대도 무방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누울 자리도 준비 못해준 우리 거지들에게 위생 관념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새로 얻은 방에 와서 들은 얘기인데 이 집 주인이 쓰던 방이란다. 그는 이 동리에 유명한 주정꾼으로 일은 않고 밤낮 이 돈 저 돈을 끌어모아 가지고 술 먹고 고약한 버릇을 계속하던 Herr Faust였다. 그를 경찰이 데려갔다. 그러나 체포해간 게 아니라 산림 속에 가장 현대식으로 지은 요양소로 모셔갔다는 것이다. 내가 내는 집세는 그가 진 빚을 청산한다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가장 현대적 생활을 즐기리라. 이만 하면 여기는 주정꾼도 돼볼 만하다. 바로 내가 사는 집 건너편에는가톨릭에서 경영하는(그러나 정부에서 원조하는) 영아원이 있다. 사백 명이 넘는 그들은 다 사생아들이다. 거기는 수십 명의 젊은 여인들이 함께 있는데 다 배가 불러있다. 다 애비없는 애들을 낳기 위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모두 버들강아지처럼 보등보등하고 수 없는 장난감으로 즐기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고 그 여인들은 사창굴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재생의 직장과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병원엘 방문해보면 어느 구석에서도 우울한 분위기를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그 환자의 치료비와 가족의 생활비까지 충분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적 생활의 건전성이 없이 외적 해결이란 있을 수 없으며 내적생활의 충실을 꾀하지 않는 외적 치장이란 송두리째 망하자는 말이다.

왜 당신은 양복을 입었소?

이것은 얼마 전 세계적인 유명한 신학자 고가르텐(Gogarten) 교수와의 대화 끝에 내게 던진 질문이다. 그는 복음(진리)은 하나이나 역사적 상황은 각 민족마다 다른 고로 이 진리를 자기의 역사적 조건과 대결시켜서 얻은 것이라야 자기를 살리는 학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역사와 언어 안에서 진리를 살리는 것이 의무라는 말 끝에 백발 수염에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왜 당신은 양복을 입었소? 자기 의복을 입지 않고" 했다. 나는 그것을 한갖 농담으로 받지 않았다. 그림이나 환동으로 한국을 볼 때 한국의 궁전이나 여인들의 옷을 보면 호기심에 찬 표정들이고 서울 거리에 많은 양장 군(群)들을 볼 때 이들은 "schade", 유감스럽다고 한다. 사실 한국에 현대건물이 아무리 선다해도 이들에게는 대수로울 게 없다. 여인들이 아무리 양장에 분장해도 체격에서 벌써 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꼭두각시 이상 보일 까닭이 없다. 철학을 하느니 예술을 하느니 암만 해도 자기 발받침을 무시한 그 어떤 수고도 타고 내버린 재를 긁어 모으는 것밖에 없다. 구라파 각국이 그렇게 인접해 있어도 각각 다 자기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구라파 각국마다 그 자체 내에 여러 방언과 다른 풍속이 있다. 그대로 고수되고 있다.

독일 등은 몇 십 리 거리 두고 그 지방어에 퍽 차이가 있다. 그 자체로는 그렇게 환영할 바 못될지 모르나 그 전통적인 고유성을 살리려는 집착성은 주목할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성들은 그대로 살려 조화함으로 다채로운 하나를 형성해 나간다. 언뜻 보면 구라파인은 다 같은 풍속인 줄 알기 쉬우나 거리에 나서면 그 양복 머리깎은 것 동작 동에서 어느 민족임을 곧 알아내도록 구별이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로서 살기 위해 그러므로 세계 반열에 참예해서 일역을 담당할 수 있는 길은 역시 우리를 찾아 가지는 일로 안다. 후진 국가, 후진국가 해서 덮어놓고 남을 모방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는 것이며 세계에도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모방은 어디까지나 모방이며 그런 한 언제까지나 후진국가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계몽이니 개혁이니 하면 곧 서양을 닮는다는 그릇된 인상을 준다. 우리에게 계몽이라면 역시 옆사람을 알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 내 바탕, 내 선 자리를 알리는 일, 우리가 무얼 계승받았으며 무얼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 우리는 백 번 죽었다 살아나도 한국인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프랑스의 혁명이 그대로 우리의 것일 수는 없고 이들의 사고방식이나 풍속은 물론 더욱 아니다. 우리는 우리만 받은 고유한 미가, 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찾아 가질 때 우리가 설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가령 우리들의 의복이 불편하다고 그대로 벗어 내치고 남의 것을 뒤집어 쓰는 것은 자기 포기다. 우리는 우리 의복을 이 시대에 살릴 수 있어야 한다. 건축도 우리는 한국 가옥하면 천 년 전 그대로요 현대식 하면 하면 그대로 서양식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리에 맞지 않는다. 요(要)는 그 사이에 아무런 노력의 흔적이 없다. 자기 발전은 없고 남의 것만 벗었다 입었다할 뿐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는 어디까지나 독일적이고 싸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어디까지나 프랑스적이지 그게 썩은 된장 먹고 지게로 짐 나르고 있는 우리의 것일 수는 만무하다. 시(詩)의 형식이나 표현에 있어서도 그림이나 음악에 있어서는 물론 더욱 그러하다. 가령 선(線)의 예술같은 것은 우리가 살려야 할 우리의 고유한 것이다.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 있다 함은 우리가 자각(自覺)의 역사를 가졌다는 증거다. 가령 종교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 진리는 하나일 것이다. 우리에게 심어짐으로 고유하게 표현되었어야 정말 우리 살리는 종교일 것이다. 예로 기독교는 하나인데 각국마다 어떻게나 다른 표현인지 모른다. 복음은 하나일 터나 기독교는 일색(一色)일 수 없다. 우리가 오랜 불교시대, 유교시대를 가졌다 해도 이렇다는 세계에 내세울 유산이 없는 것은 자각없이 받은 증거다 구라파는 우리를 불교권 내에도 두지 않는다. 오늘의 한국의 기독교도 자기 현과의 대결이 없는 채 직수입만 계속하는 한 한국 사람과도 유리되고 세계에도 의미없는 것으로 지나가고 말 것이다. 기독교에 관심있는 이들이 나더러 당신들의 전형적인 교회 건축을 보여달라, 당신들의 정서로써 표현한 찬송가를 들려다오, 할 때는 참 딱하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회의 건축같이 조소 거리는 없다. 없는 돈에 애써 서양 모방은 했으되 서양에서는 더 보기도 싫어하는 낡은 재판이다. 또한 그 건물은 어쩐지 우리 한국민의 감정과 유리된 것이다. 이 한 예만도 우리 기독교가 얼마나 자기 생각이 없나하는 단적인 표현인 것이다.

내가 살아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이지 남이 내 안에 들어와 내가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정말 혁명해야 할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혁명의 힘을 마르크스에서 빌려올 것도 불란서에서 주워올 것도 아니다. 내 안에서 찾아내야 할 줄로 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다 처녀지(處女地)다. 그러니 새 출발이다. 그러니 희망으로 차 있는 것이다.

(1959. 1. 하이델베르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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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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