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사상의 주체성
1. 사상과 주체 의식

근래 우리는 '한국적'인 것을 찾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것은 '우리의 주체성'을 모색하는 발돋움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란 절대 개념일 수 없으며, 또한 고유한 '우리 것'이란 있을 수 없다. 사상이란 것을 객관화할 수 있는 유산으로 볼 때에는 어느 한 민족이나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의 공동재산이며, 단순히 '사람'이란 공동성에서만도 그것이 어느 민족 또는 어느 개인에게서 발단됐든지 간에 피차 소통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너희에 대한 '우리의 사상'이라고 금을 그을 수 있는 뚜렷한 선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것' 또는 사상을 문제로 할 때 전혀 '고유한 것'의 발전 또는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 어떤 것, 또는 사상을 우리의 상황에서 어떻게 받아서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문제되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주체의식의 문제다. 주체의식이란 역사의식이다. 주체란 무엇에 마주선 '나'다. 이 마주선 것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주체의식이란 허구한 것이 된다. 이 나는 내가 참여하지 않은 역사적 전통(유산) 앞에 마주서 있다. 그것은 제도로, 습성으로, 사상으로 또는 종교로서 나를 강요하고 제약함으로써 내게 어떤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런 주어진 것을 비약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나는 이런 주어진 것 앞에 대담해야 한다. 이 나는 지금 형성되고 있는 역사와 마주서 있다. 형성되고 있는 역사와 마주서 있다는 것은 내가 참여하고 있는 현실이다. 나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역사 현실에 가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역사의 흐름에 나를 맡긴다는 말이 아니고, 역사 안에 있으면서 역사에 속하지 않고 대결함으로써 역사를 형성하는 변증법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며, 이럴 때에 비로소 역사 안에서 주체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상하는 일'은 주체의식이 확실할 때 되는 일이며, 이 주체의식은 내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며, 이 해석하는 것이 곧 사상하는 것이며 거기서 또 사상의 발견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이 글에선 우선 사물 파악의 자세를 검토해보고, 그것과 관련해서 유교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태도를 한 예로 삼아보고자 한다.

2. 사물 파악의 자세
1)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물 파악의 자세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사물 파악의 자세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를 밝혀보자. 동양인은 사물 파악에 있어서 종합적인 데 비해서 서양인은 분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 있는 줄 안다. 이 특징을 좀더 추구함으로써 우리의 의도하는 바가 밝혀질 것이다.

종합적이랄 때에는 이것과 저것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려는 데 주안이 있는데 비해서, 분석적이라고 할 때는 이것과 저것 사이의 차이점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의 구별은 다음의 몇 가지 특징과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생각된다.

종합적일 때에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반드시 어떠한 연속성 또는 공통점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합적이려고 할 때에 그것이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공통점이 있음을 찾아내야 한다는 사전 요청에 굴복하고 사물을 보므로 사실적이 아니게 되기 쉽다. 이 공통점 또는 연속성을 규명한다는 지상의 과제를 위해서 지성(知性)으로 추구하다가 그것으로 일관할 수 없을 때에는 직관으로 그 다리를 놓아야하는 불가피한 일이 일어난다. 결국 종합적일 때는 사물 자체의 규명보다도 어떤 도그마적 전제(그것이 기성윤리든지 전통적 이해든지)를 위하는 건설적인 데 주안이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에서 말하는 학문(Wisseneschaft)이기보다 지혜(Weisheit)가 된다.

분석적인 경우는 어떠한 전제도, 요청적인 결과도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찰자는 아무런 구속 없는 자유인으로서, 그 판단은 사실적일 수 있다.

따라서 그 연속성을 반드시 규명할 의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知)에서 의지에로,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대로 두고 알 수 있는 것만 밝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건덕적(建德的)인 지혜는 안 되어도 학문이 된다

이러한 성격 구분을 하이데거의 인간 존재 해석의 구분을 빌려서 맞추어본다면 종합적인 것은 '이렇게 존재해야 한다'는 명령이 포함된 존재적 실존적인 결론이 될 것이고, 분석적인 것은 단순히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는 존재론적 실존론적인 규명이 된다.

그런데 실존론적인 분석을 확실히 해놓았을 때 비로소 그 존재 자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하나의 구체적으로 주어진 주체로서, 그 앞에 내가 어째야 한다는, 즉 결단을 요청하는 '물음'이 되므로, 그것에 대결하거나 주체적인 동의를 하므로, 책임적일 수 있는데 비하여, 그러한 사실적 규명이 없이 곧 존재적인 명령으로 될 때에는 존재성과 나, 나와 너와의 관계가 불투명해지며, 따라서 대결도, 주체적인 동의도 불가능하게 되고, 마디도 앞뒤 의식도 없이 흐르고 말게 된다.

서양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란 커다란 두 사상적 조류가 바탕이 되어 형성됐다. 헬레니즘은 헬라에 근원한 지성감성을 통한 사물 파악의 전통이고 헤브라이즘은 기독교를 통해서 들어온, '유대'에 근원을 둔, 어디까지나 의지로 사물을 대하는 신앙이라는 전통이다. 그런데 이 두 조류가 서양에 와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 또는 동화하지 못하고 피차에 평행, 교차 또는 대결됨으로써 유럽 사상계를 형성해 왔다. 딴 말로 하면 유럽인은 이 둘의 차이점이질성을 그대로 분석해 밝혀 가짐으로써, 그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어느 하나에로 결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의식에서 자기를 형성해 갔다. 그러므로 그 양자택일의 요청 앞에서 대답해야 할 자기를 알기 때문에 대답하는 나로서의 주체 의식과 거기에 따르는 책임 의식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동양은 혼합주의가 그 특징이다. 동양에도 이교(異敎)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대부분이 파벌적인 싸움이고 그 내용에 대한 규명과 반발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이쪽 저 쪽의 공통점을 찾아 조화해나갔다. 가령 중국에서 노자교(老子敎)는 불교와 재래적 애니미즘을 혼합해서 도교(道敎)를 형성하는가 하면, 중국의 불교는 중국 고대사의 인물들을 위시해서 유교도교의 유산을 다 인정하여 자리를 허락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며, 유교 자체도 불교에서 절대 영향을 받은 주자에 의해 혼합 조화되어 형이상학에로 줄달음쳤다. 그런고로 중국에 가서 살아본 서양인은 중국 사람을 평해서 생활은 유교로, 종교는 불교로, 청담은 노자교라는 그들의 처세법에 놀란다고 한다.

2) 혼합주의의 극복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그대로이다. 천년 불교시대에서 유교시대로 돌입했을 때 얼마나 자기를 밝히기 위한 싸움을 했는지, 그 투쟁의 흔적을 나는 모른다. 물론 불교도들의 반발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거의가 파벌적인 싸움이지 그들의 종교 또는 사상으로서 내용적인 투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유교의 입장에서 배불론(排佛論)이 대두한 사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도 파벌적인 싸움 이상 넘어섰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도 이 두 이교가 들어올 때에 우리의 본래적인 민속신앙을 어떻게 처리했나하는 것이 문제다. 가령 샤머니즘적인 우리의 민속신앙은 불교시대나 유교시대를 막론하고 민가에서는 물론이고, 국사에 있어서도 조금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채용되고 있다.

가령 『삼국사기』를 보면 여우가 울었다든지, 개구리가 어디로 많이 나타났다든지, 유성이 어떻게 떨어졌다든지 하는 것이 국사 결정에 큰 역할을 한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일은 국가의 큰 행사다. 그렇다고 종합하여 어떤 제3의 것이 형성됐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혼합된 채 대결성도, 또 그렇다고 개방성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화랑도를 우리의 고유한 것으로 내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화랑도를 언급한 최치원의 말은 우리의 이런 혼합주의를 단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접화(接化)하였으되, 즉 들어서는 집에 효성을 다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되라 함은 공자의 뜻이요, 하염없는 일에 처하여 말이 없는 교를 행함은 노자의 종(宗)이요, 모든 악은 짓지를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석가의 교화다." 이러한 태도를 서양인은 평해서, "한국 사람은 생각할 때에는 불교인이요, 예(禮)를 행할 때에는 유교인이요, 삶의 위기 앞에서는 다 무당 종교인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건덕적이 되어 세상이 태평할 때나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무난할지 모르나, 유사시에는 그 무엇에도 대결할 수 없는 자세이며, 이러한 '관용'은 결국 여러 도피처를 만들어 놓게 될 따름이며, 결국 쉽게 체념주의에 빠지게 된다. 산다는 일이 자연에 나를 맡긴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움직인다는 말이 아니고 행동한다는 것이며, 그 자연적인 한 움직임이 행동으로 되는 것은 생각하는 데서 온다. 생각한다는 것은 벌써 가려내는 작업이다. 가려내는 일은 우선 분석하는 것으로 이것과 저것 사이를 떼어놓고 그 차이점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된다. 이것이 분명해질 때 종합적인 작업도 비로소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자연과학의 관찰과 사상 또는 철학하는 작업에도 차이가 있다. 분석한다는 면에서 보면 자연과학하는 태도와 정신과학하는 태도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자연과학은 분석했을 뿐 그 결과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대답은 못한다. 물론 그 분석의 결과를 활용해서 어떤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그 결론은 언제나 자연 법칙에 머물고 '나'는 거기에 개입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소재만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데 비해서, 사상한다는 일은 나와 관련시켜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이 사상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내게서 출발하고 나를 위한 소재를 밝혀, 그 소재를 다시 나와 대결시킴으로써 나의 삶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혼합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대결할 나를 찾게 될 것이다.

3) 전통과의 대결

무엇보다도 우리가 대결할 대상은 우리의 전통이다. 우리의 전통은 우리를 형성해준 모체다. 나는 이 전통 없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 전통과 대결함으로써 비로소 이 전통의 한갓 산물이 아닌 주체적인 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대결이라고 하는 말은 무조건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비록 무엇을 거부한다고 할 때에도 그 거부할 대상을 똑똑히 밝혀내서 나와 마주 세울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주체성 운운하면서 나를 있게 한 전통을 밝히 인식하는 노력을 등한히 하면 허공을 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전통은 내가 나면서 디디고 선 현실, 즉 내가 디디고 선 지반이다. 내가 이 전통에 반항하려는가? 그 반항이 강하려면 박찰 지반을 튼튼히 해야 할 것이다.

보수주의의 아성이 견고하지 않은 사회에 참 의미의 혁신이란 있을 수 없다. 인도에 브라만교의 완고하고 이기적인 고행주의계급주의가 없었더라면 대자대비를 내건 석가의 출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석가는 처음부터 브라만교를 무시하고 들어선 이가 아니다. 그는 전통의 길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끝까지 그 길을 가보다가 새 길을 발견한 것이다. 유대의 무자비한 율법주의, 바리새이즘이 없었더라면 예수의 출현을 생각할 수 없다. 예수도 결코 반항으로 그 길을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전통인 유대교에 대해서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 조상들의 길을 그대로 고수하다가 더 나갈 수 없는 것에 부딪쳤을 때 그에게 새 길이 시작된 것이다. 공자는 좀 경우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는 그 유명한 혼란의 전국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그 시대를 구출할 디딤돌을 찾기 위해서 시작한 작업이 저들이 잊어버린 전통을 다시 찾는 일부터라고 보아서 회고적인 보수주의로 기울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옛날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그런 작업으로 현재를 살리는 사상을 모색한 것이다. 이유 없는 반항이란 것도 허무한 것이지만 반항할 대상도 뚜렷이 갖추어 의식 못한 반항이란 더 허구한 몸부림이 된다. 우리는 얼핏 남을 모방하여 세계 사조의 유행에 몸을 실어 보나 그 결과는 그 사조의 본산지에서 일으킨 것과 같은 반응을 못 볼 때 허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만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그것은 반드시 그 사상을 바로 소화 못해서 그런 것만도 아니며 그 사상이 이미 그 효능을 잃어서도 아니다. 사상은 상비약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바른 관계에 서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가령 키에르케고르가 한국 땅에 와서 꼭 같은 소리를 아무리 외쳤어야 공기를 진동하는 허실한 것이 될 뿐이다. 그의 작은 소리가 그렇게 메아리치고 지축을 흔들게 된 것은 제도에서, 인습에서 완고한 아성을 쌓고 군림하는 있는 국교로서의 기독교회가 완강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당시의 교회를 향해 예리한 칼을 빼서 휘둘렀다. 그런데 그 칼은 바로 기독교에서 찾아낸 칼이었던 것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소리 친 것을 한국에서도 곧잘 되풀이하는 반항아들의 소리를 가끔 듣는데, 왜 사람들은 마이동풍인가? 그것은 우리에게는 니체가 마주선 관념적인 유신사상(有神思想)으로 천여 년 굳은 아성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우린 우리의 유산이 못났으니 반항하고 버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유산을 도로 살려서 하나의 아성을 만드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반항도 할 수 없고 버려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오늘의 우리를 살릴 새로운 사상의 창조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낡은 것'과 대항하려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낡은 것'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풍차를 보고 칼을 휘두르는 돈키호테의 만용을 못 면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되살려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3. 유교의 재해석

나는 여기서 단적으로 우리의 전통으로서, 우리가 디딘—비록 잊혀져 가고 있으나—지반으로서 유교를 되새겨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유교만이 우리의 전통을 형성한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는 이론을 제기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 유교는 적어도 500년의 우리 역사를 지배했고, 정치, 문화, 가족 제도나 윤리 생활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으로 우리를 지배한 응결된 전위를 지녔던 사상이었으며, 우리의 '마지막' 주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을 재음미할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또 비록 이러한 전제가 맞지 않더라도 사상의 빈곤이 어떤 데서 드러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재확인하고 그것에서 새것을 찾아내든가, 이에 대결하는 길을 모색하는 예로서 족하다.

1) 공자 해석에 대한 비판

우리는 유교를 논해서 그것의 공죄를 말할 때 '유교'라는 막연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 나라가 유교 때문에 생긴 폐풍으로 우리의 삶의 현실과 유리된 공론(空論)에서 공전하게 됐다고 한다. 즉, 유교의 형이상학이 우리를 비현실적인, 무능한 민족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죄과는 '유교'라기보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북송유(北宋儒)의 사상, 그중에서도 주자학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유교를 학문으로 접하고 누가 바로 알았느냐의 시비에서 당파싸움에까지 번진 것은 주자를 통해서 들어온 유교다. 입으로는 공맹(孔孟) 공맹 하면서도 실상은 주자에서 한 발자국도 감히 넘어서지 못하고 그의 해석 여하에 목숨이 왔다갔다했다. 그런데 주자는 정말 공맹을 바로 전 한 유일한 통로인가? 우리는 그와 전후한 동시대에서도 그와 정면으로 맞선 해석자들을 안다. 남송파(南宋派)가 있고 또 그와 동시대의 육구연(陸九淵)이 있으며, 명(明)시대에 와서는 저 유명한 왕양명파(王陽明派)가 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자(朱子)가 정말 공맹을 바로 해석했는가하는 것이다. 그의 우주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소위 주자(周子)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의 윤리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성론(性論)은 정자(程子)의 설을 이어받은 것이며, 그것을 본연(本然)과 기질(氣質)로 구별하여 본연을 미발(未發)의 천리(天理)에 속한 것으로, 기질을 이발(已發)의 이(理)로 해석하고, 소위 명덕(明德)이라는 개념에 이르면 무명번뇌를 끊고 진여선제(眞如善提)를 밝힌다는 불교의 사고에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정론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천(天)도 이(理)로 이해해버리며 귀신을 기(氣)로 해석해버린다. 이러한 그의 전개는 적어도 공자에게서는 전혀 그 흔적을 볼 수 없다. 사실상 주자 자신도 공맹을 내세우면서도 그의 사상 전개는 전혀 그들에 의거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자유자재로 『예기』(禮記)에 속해 있던 『중용』 『대학』을 끌어내어 『논어』와 『맹자』와 함께 사서(四書)로 삼고, 그 중심 규범은 오히려 『대학』으로 하고 『논어』 『맹자』는 학자의 사기를 일으키게 하고 『중용』은 그 총귀결점으로 삼아버린다. 그러므로 사실상 공맹의 주도권을 빼앗아 유교의 새 창조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중심 사상인 인(仁)은 완전히 퇴색하고, 그의 천(天)이나 천명(天命)사상은 날로 변질되고 말았다. 우리가 그를 한 사람의 형이상학자로 추대하고 그에게 배우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공자를 섬기는 것을 주인으로 하는 유교도가 주자를 상전으로 삼고, 주자를 공자의 입장에서 보고, 그 차이점을 보고 그를 시비하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으니 웬일인가? 공자를 떠받든 것은 좋다. 그러나 그 해석을 내가 하려고 할 때 날 살리는 사상이 생길 것인데, 이 해석의 주도권까지 무조건 남에게 양보하니 공자는 그대로 공전만 계속한 게 아닌가? 우리는 주자에게 배운 것이 중요하고 그래야 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주자의 풀이만을 그대로 배우고 그의 독자적인 해석의 자세는 배우지 않았는가? 이러한 현상이 그 어느 시대에 그친 것이라면 지나간 회고담일는지 몰라도 오늘의 우리 나라 유가들의 자세도 그런 것 같아서하는 말이다. 옛날에는 주자학이 관권과 결탁되어 학문의 자유가 구속됐으니 그랬다 하자.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자에 굴복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공자를 배척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공자에게서 칼을 받아 주자학에 반항하는 것이 더 시급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먼저 유교의 본원인 사서(四書)와 마주서야 될 것이다.

사서와 마주섰을 때 우리가 우선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주자가 억지로 떠맡겨준 안경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주자는 『대학』을 먼저 읽어서 안경을 삼고 『맹자』에서 『논어』로 들어가라는 작전 명령을 했다. 그런데 그 싸움은 내가 하는 일이다. 그 지휘권은 내가 쟁취해야 할 것이다. 우선 주자의 명령에는 자기가 해석한 대로의 『대학』을 읽고 그것과의 공통점을 『맹자』 『논어』에서 찾아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자에게 반항하는 첫 길은 그 순서를 뒤집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본원적인 『논어』와 마주 서보는 일이다. 그럴 때에 우리가 우선 발견할 수 있는 일은 공자의 사상이 다른 삼서(三書)에서 변질됐다는 것을 곧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대학』과 『중용』은 그 문체로 보나 내용으로 보아 이미 『논어』에서 말하는 공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들을 적어도 500년 정도는 뒤늦게 된 글이라는 오늘의 서양 학자들의 판단에 수긍이 갈 것이다.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니 중용의 '중'(中)의 형이상학적 해석 같은 것은 논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공맹이라고 해서 저들의 일치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을 비교할 때 주자가 준 안경을 쓰지 않은 사람이면, 그 변질된 것을 곧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仁)과 천(天), 또는 천명이 맹자에게 와서 근본적으로 변해갔다. 공자는 '인' 하나로 모든 것을 일관했다고하고, '인'을 절대화한 데 대해서, 맹자는 이에 맞서서 '의'(義)라는 것을 내세워 오히려 거기에 비중을 더 둠으로써 인을 상대화하고, 마침내는 소위 사단설(四端說)을 내세워 인을 의예(禮)지(知)와 함께 하나의 도덕 항목으로 추락시키고 말았다. 한 걸음 나아가서 그는 이 다른 세 가지를 포함한 인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완전히 변질시키고 말았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공자의 인은 '측은한 마음', 즉 '센치'에 근원을 찾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가 성(性)이라는 것을 확대시켜 공자에 큰 바중을 가진 천명이라 한 이 해석은 『대학』 『중용』에서 그대로 답습 함으로써 이미 공자를 떠나고만 것이다. 오늘날 학자들 중에는 『맹자』라는 책도 이미 불교와 노자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문서로 보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그 속의 소위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과 그 해석은 주자가 답습한 것으로 공자와는 전혀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이방적인 사상적 비약이다.

2) 공자의 재해석

유교에서 받은 피해가 크다고 주장하느냐? 그러면 그 피해를 제거하기 위해서 공자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유교가 우리의 전통의 기간(基幹)이기에 다시 이 전통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보는가? 그래도 공자를 재해석해야 한다. 시대의 전환기에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려면 언제나 전통을 거슬러 올라가서 수술할 칼을 구해야 하며 전통을 재수습하려면 그 전통의 원천적인 인물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공자를 재해석하려면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해석사에서 그를 풀어 놓고 그와 마주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연히 『유교 사상』이란 묵은 잡지에서 "인(仁)의 탐구"란 특집을 발견하고 손에 들었다. 필자들은 유교계의 중진들인 모양인데 그들의 논술은 하나같이 건덕적(建德的)이고 종합적인 것으로 수천 년의 해석을 반복한다. 가령 안인식(安寅植) 씨는 "인도(仁道)의 정신"이란 글머리에 "인은 인류애의 근본 정신이다. 공자의 인, 석가의 자비, 기독의 박애 이것이 3대 성인의 일치되는 점인데…"라고 한다. 이래서 건덕적이란 말이다. 그런데 정말 일치되는 것인가? 이 글을 쓴 이는 이런 전제를 하고 온갖 덕목을 나열하여 전부 인(仁)으로 종합하며 나아가서는 생리(生理), 물리(物理) 등과 대조하면서 거침없이 유통한다. 이렇게 그는 인으로 우주를 통합하려는 기세이다. 그 다음의 진대제(陣大薺) 씨는 공맹의 인을 함께 묶어 취급하면서, 결론으로 "인 가운데는 일체의 미덕을 섭진하였다 하겠고, 인은 중덕(衆德)이 합구(合構)해서 성립되었다 하겠으니 이것이 중덕의 총칭인 것이다"라고 한다. 그 다음 왕희필(王熙弼) 씨는 "인은 모든 덕의 일체를 포괄할 주덕(主德)이며 천도(天道)의 발현으로서 이것을 실천하면 인사만물(人事萬物)이 모두 조화 발전되는 덕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해석은 모든 것을 "하나의 솥에 넣어 끓여서"(趙之薰) 만드는 것인데, 이것이 그분이 지적한 대로 한국 사상의 특질이라면 슬픈 일이다.

그러나 공자는 "아니다"를 밝히 말할 줄 아는 이다. 그는 극(克), 벌(伐), 원(怨), 욕(慾) 등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은 덕목이나 인(仁)은 아니다 하며, 충(忠)이나 마음이 깨끗한 것(淸) 같은 것도 인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공자는 비록 말로는 옛 것을 술(述)하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찬양하나, 그러나 그는 그들을 반복하지 않고 그들을 업고 자기가 말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내세운 '인'이란 글자 자체도 그 이전에는 없었고 비록 그의 전 것으로 뒤에 있는 문서에 한두 번 나타난 것은 승인한다고 해도 거의 무색한 것인데, 공자에 와서 '인'이란 개념을 적극적으로 내세움으로써 전환기의 지표를 만든 것이다.

그의 인의 사상은 자연과 구별된 역사적인 자각으로서의 윤리 형성을 위한 충분한 소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인은 결코 비역사적인 개념으로서의 덕은 아닌 것이다. 그의 인은 어떤 아프리오리가 아니며, 인간 존재를 실체로서가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파악한 윤리 개념으로 이해할 충분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인이란 글자가 벌써 두 사람이라는 표기이며, 이것은 사실상 그의 인에 대한 설명은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전부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해야 할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하며, 인을 '서'(恕)로서 해석하기도 하고 소위 황금률로서 설명함으로써 내 마음에 원하는 것같이 '너'에게도 행하는 행위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테크닉으로서의 덕이나 그리스의 아테네가 아닌 주체와 주체와의 옳은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충분히 현대적인 재해석을 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맹자에 와서 하나의 덕목으로 되어버렸으며, 그가 인에 술자를 붙여 인술(仁術)이라고 함으로써 하나의 자기 완성의 테크닉으로 변질시킨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것과 더불어 그의 천(天)의 사상도 재해석해야 할 중요한 것이다. 맹자는 마음을 다하는 자는 성(性)을 알고, 성을 아는 자는 천을 안다고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을 기르면 곧 천에 봉양하는 것이 된다고 함으로써 사람의 성을 형이상학화하고, 천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공자의 천명도 자기 몸을 다스림이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중용』에 와서는 천명이란 곧 성을 말한다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대학』에서도 이러한 대전제로서 위를 정리하고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나 공자의 천이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적대자들에 대해 "천(天)이 장차 문(文)을 없애려고 하면 후에 죽을 자가 거기 어찌 참예하리오. 그러나 천이 문을 없애버리지 않으려면 광인(匡人)이 나를 어쩔 테냐?" 또는 "만일 도(道)가 없어진다면 그것은 천명이다." 또는 "천이 내게 덕을 준 한, 환퇴가 나를 어쩔 테냐"라고 했는데 이 천은 성은 아닌 것이다. 그는 천명을 소위 대인(大人)과 성인(聖人)의 말과 더불어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한다. 대인, 성인 등이란 인격적인 것과 함께 취급한 것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더욱이나 사후의 문제이거나 괴력(怪力)이니 귀신의 일을 불가지(不可知)한 것으로 배격하는 그로서, 이 천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우리가 공자를 하나의 도덕실천가로만 보던 재래의 해석을 고쳐 보아야 할 충분한 근거를 주고 있다. 더욱이나 그는 '성'(性)이란 개념을 형이상학화한 데도 전혀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가 '때'가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의 표현으로 그의 노경에 신화적인 상징으로 때가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면서, "내 때는 지나갔다"고 한 것은 그의 천의 사상과 관련시켜 볼 때 천을 자연법칙이나 어떤 원리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이해의 가능성을 다분히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추측이 만일 맞는다면 비시간적이고 대결이 없는 소위 종합주의적인 동양 사상의 재래적인 이해를 뒤집어 엎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3) 공자와의 대결

나를 살리는 사상을 한다는 것은 사변한다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참사상이란 행동으로 뒷받침되는 것이라야 참것이다. '나를 살리는 사상'을 한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순응할래야 할 수 없는 데서 온다. 딴 말로 하면 역리(逆理)와 모순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시작될 때 나를 구출하는 것이 된다. 주어진 여건에서나 논리적인 면에서나 사리에서 볼 때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이 길을 타개해주는 사상이라야 산 사상이다. 체념은 사상의 매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상의 빈곤성은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뒷받침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 점에서 공자와 대결할 이유가 있다.

공자든 천(天)에 죄를 지으면 더 빌 곳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이 견주는 것은 "그러니까 천에 죄를 절대로 짓지 말라"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미 죄를 지은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공자는 아무 말이 없다. 따라서 그의 말을 그대로 받으면 다소곳이 앉아서 죄의 결과로 오는 벌을 숙명처럼 당하는 수밖에 없다. 죄를 안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죄를 지어서 문제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성경은 죄짓지 말라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바로 죄진 데서부터 출발하며, 죄지은 나를 살리기 위한 투쟁사로 되어 있다. 똥 물에 빠졌으니 그대로 죽어야 한다는 것은 나를 살리는 사상이 아니다. 그 똥물에서 빠져나오려는 비명을 뒷받침해줄 때 사상은 시작된다. 히브리인은 죄지은 나 자신과 대결하며, 이 죄를 규정한 그들의 신에게 애걸하며 반항한 결과가 그들의 메시아 사상이고, 이 사상이 삼천 년 전에 죽었던 고목에 꽃 피게 하는 기적을 낳게 한다. 천(天)에 죄를 지었어도 빌 곳이 있어야 한다. 천은 내 비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안 들으면 들을 때가지 소리쳐야하고, 그 천과 싸우면서도 나는 살아나야 한다. 그 천으로부터 도망해서도 안 된다. 그와 대결해야 한다. 그럴 때 참 산 종교가 발생하는 것이다.

공자는 천하에 참(道)이 지배되면 나타나서 참예하고 참이 없으면 숨으라고 한다. 또는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행동이나 말을 엄격히 해야 하는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행동은 엄격히 하되 말은 순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체념적인 은퇴주의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 참 예하는 것은 좋으나 도가 없을 때 후퇴해버리면 그 나라는 누가 건진단 말인가? 이 뒤에는 역시 숙명 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증거다. 참 사상은 바로 혼란과 역경에 정면으로 마주설 때 형성된다. 공자가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정치에 참여했다가 집안에 숨어버렸을 때 그의 소극적인 태도를 묻는 질문에, 집에서의 효제(孝悌)가 곧 나라를 위하는 일이 아니냐고한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자기 도피이며 자기 기만이다. 나라가 혼란할 때 그 속에 뛰어들어 대결함으로써 참사상이 형성되고, 언론이 참것이 되며 산 것이 되지, 나라가 잘돼 나아갈 때에는 오히려 언론이란 숨어버려도 좋다. 우리는 이러한 공자의 태도와 대결할 때 비로소 우리를 살리는 사상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막힌 데서 뚫는 것이 사상이지, 열린 길에서 외치는 것은 아첨일 뿐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체념주의가 있다. 우리가 위기에 섰을 때 지식인이나 언론인의 자세가 그것을 잘 말한다. 이 현상 뒤에는 공자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공자와 대결함으로써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비겁에서 구할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인(仁)을 주장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일관한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럼 여기 어떤 사람이 우물에 빠졌다고 할 때 인자는 그 우물에 뛰어들어 그를 건져야 하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애매한 말로 그 현장에 가기는 하나 뛰어들 수는 없다고 한다. 이 질문은 벌써 군자의 도로서 그 거동에 존엄성을 지켜야만하는 귀족주의와 인(仁)의 실천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인데, 공자는 군자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 인을 일관하지 못한다. 그는 모순 앞에서 후퇴하고 만다. 이것이 아마 오늘날 소위 양반이란 전통을 흡수한 소위 젊지 않은 이들의 자세를 뒷받침하는 것인지 모른다. 방에서 도리를 말하고 남에게는 타일러도 자기는 일선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옳기는 옳으나 내가 그럴 수야 있느냐'라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주장은 탁상공론이고 우리를 살리는 사상은 못 내놓는다.

공자의 이러한 소극적인 자세는 윤리 행위의 궁극적인 문제 앞에서도 드러난다. 공자에서 종착점은 사랑으로서의 덕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원수에게도 덕으로 대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니, 그러면 덕은 무엇으로 잡겠느냐고 반문한다. 그의 덕도 논리적인, 또는 법적 규범과 대립될 때 일직선을 못 긋고 포물선을 그리고 만다. 사랑하려는 의지와 살려는 의지의 충돌, 권리 의무의 질서와 용서의 의욕 같은 모순 앞에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 모를 때, 그 모순을 어떤 형식으로든지 극복하는 것이 사상이다.

끝으로 생각할 것은 그의 정치 사상이다. 그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왕도정치(王道政治)라고 한다. 그는 봉건체제를 대전제로하고 그것의 원형을 주시대(周時代)에서 찾는다. 그러나 체제의 실현을 위한 핵심으로 아는 바 충효를 내세웠다. 봉건사회 유지에는 효, 왕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충이 절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의 정치 이념 설득은 실패로 돌아갔다. 유교의 정치 이념이란 바로 이것을 중추로 한 것이다. 그런데 유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 이 정치 이념이 함께 들어 왔다. 그래서 충효로써 정치윤리의 중추를 삼았다. 여기서 우리 역사는 병이 든 것이다. 우리에게는 봉건체제가 없었다. 그러므로 권력의 다원화는 불가능했다. 왕권은 형식상으로는 절대적이다(국내에서는). 그러나 그것의 발판이 없었다. 그러므로 결국 어떤 씨족이나 간신들의 노리개감이 되어 충효라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백성을 착취하는 역할 이상 한 것이 없다. 우리 역사에서 충효를 내세워 걷는 것이 무엇인가? 충의 철저한 강조는 무책임한 순종형을 만들고, 효는 결국 씨족(개인)주의에로 몰고 간 것뿐이다.

4. 맺는 말

처음에 '우리 것'이란 엄격한 의미에서 있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우리의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것이야 어디서 발단됐든지 간에)을 객관화하여 주체적으로 대응할 때 '우리의 것'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주체적이란 것은 주관적이라는 것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주체적이란 것에 객관성이 배제될 경우, 그것은 배타적 주관주의에 빠져버린다. 참 주체성은 냉철한 역사의식에서만 가능하다. 역사란 내가 포함되었음에도 내 것은 아닌 것으로서, 엄숙한 객관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적인 선택을 할 때 우리를 위한 우리의 것이 창조되는 것이다.

(『옳은 민족 옳은 역사』)

TAG •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