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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
세계에서 소외됐던 한국

한국은 세계사적인 역할은 물론, 세계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 본 역사가 없다. 근세 이전까지는 극동의 일소국(一小國)으로서 언제나 세계 하면 중국 대륙이었으며 또 그 대륙에서 일어나는 정치, 군사적 관계에서 그 위치를 유지하려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밖에는 섬나라 일본을 향한 문화적 교량 역할, 또는 때때로 침략의 대상이 됐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동 안에서의 한국이었으나 그 안에서도 이렇다할 적극적인 주역을 해본 일이 없다.

근세에 와서 구미의 손이 아시아에 뻗치기 시작함으로써 점차 중국이나 일본 아닌 보다 큰 '세계'를 의식하기 시작했으나 그때도 이미 내적으로 멍들고 국제적으로 그 운명이 결정된 단계에 이른 때였으므로 주체성은 전혀 없이 여러 개들에게 둘러싸인 한 덩이 고깃덩이 같은 운명에 놓였다가 마침내 일본에 삼켜 버려졌던 것이다.

언제나 중국 아니면 일본의 그늘 아래 있었기 때문에—최소한 밖에서 볼 때—세계에서 우리의 문화 따위는 소개된 일이 없고, 중국의 그늘 아래 있을 때는 중국 문화의 일부, 일본의 지배 아래서는 우리의 고유한 것들도 일본 것으로 소개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랜 불교국이었고 유교국으로서 그 독창성을 드러낸 것은 사실이나 놀라운 것은 최근까지 서구의 문화사에서 보면 한국은 불교국에도 유교국에도 들어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국에 고유한 언어나 문자가 있는 것조차 모르던 것이 세계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이었다.(이점에서 볼 때 가령 티벳을 위시해서 동남아의 여러 나라는 불교국으로서의 고유성을 세계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근세 특히 일본이 얼마나 한국을 세계의 눈에서 잔인하도록 가렸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 사람은 오랫동안 스스로 소국(小國)으로 자인하고 그러한 컴플렉스에서 자기 발견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논자 중에는 우리 민족성의 평화성을 말하기 위해서 역사상 남의 나라를 침범해 본 일이 없다고 하나 그것이 어떤 사상이나 민족의 기질에 근거해서 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은 억지며, 실은 자학성에 가까우리 만큼 스스로 위축되어 있었던 탓으로 보는 게 제대로 보는 것일 것이다.

일제 때 청소년들에게 이 같은 전승된 컴플렉스에서 해방시키려고 노력한 이는 누구보다도 최남선을 꼽을 수밖에 없다. 그는 한국의 지정적(地政的) 조건이나 역사적 운명을 비관적으로 보는 데 맞서서 한국은 그 두 면에서 마침내 세계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됐음을 역설했다. 어릴 때 가슴이 부풀도록 감격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한국의 지정적인 고찰을 이탈리아와 비교했다. 이탈리아도 한국 같은 반도(半島)이지만 그것을 무대로 전구라파를 석권하여 서구사(西歐史)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와 같이 한국도 이제 정신만 차리면 바로 이 반도를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단으로 삼고 온 아시아를 모든 면에서 지휘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우리가 비록 정치군사적으로 약해서 침범을 받고 있으나 그것을 계기로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를 흡수했고 장단(長短)의 많은 것을 보고 배워왔으므로 그것을 잘 살림으로써 마침내 아시아에서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때가 와 본 일은 없었다.

"한국(Korea)"이라는 것이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은 625동란이다. 그때 세계인들은 세계지도를 펴놓고 한국의 위치를 찾았으며 바로 이차대전을 끝낸 직였으므로 아직 전쟁의 공포에서 가시지 않았던 서구인들에게 큰 충격을 일으켰다는 것은, 서구 아이들이 유행어로 무서운 것이 온다는 말 대신 "한국 전쟁이 가까이 온다"고 말한 사실이 그 단적인 표시다.

625와 세계 속의 한국

625가 왜 일어났는가? 이것이 정치군사적 질문이라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우리가 묻는 것은 고차원적인 대답을 듣기 위해서다. 함석헌 선생은 그의 한국 역사에서 625의 고차원적 물음과 대답을 시도했다. 그것은 줄곧 고난의 역사를 계속하는 이 민족의 운명을 단순히 한 못난 민족의 숙명이라고 보지 않고 세계의 부조리가 바로 이 작은 땅에서 맞부딪쳐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쏟는 세계 공동묘지가 됐다는 것은 바로 세계사적인 역할이 이 민족에게 있다는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공개됐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세계사에서 결국 하수도의 역할 즉 수난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으로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적 외침으로 세계 강대국들에게 경고한다. 말하자면 저들이 그토록 생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해 썩어야 하고 음지에서 이루어져야 할 수난이 필요한데 바로 이 역할을 담당한 것이 한국이라는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려고 한 것이다. 비록 수난을 해도 의식 없이 당하는 노예적 수난과 세계사적 사명의식에서 당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비록 수난하나 그것이 세계 사적 역할이라는 것을 정말 의식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할 수도 있으며 긍지를 지닌 민족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찾는 민족이 될 수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의식만 갖고는 되지 않는다. 싸워야 한다. 싸울 때는 투지만으로도 안 된다. 싸울 '무기'가 있어야 한다. 무기만 있어도 안 된다. 싸우는 목적이 '희망'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 희망은 구체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의 정황과 역량과 밀착되어야 한다.

625는 분명히 이 민족이 세계 속에 일원으로 그 운명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뚜렷한 실증으로 보여 주었다. 38선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이른바 강대국이 만든 것이다. 이것은 독일이나 베트남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인위적인 양단(兩斷)이다. 한 언어와 문화로 수천 년의 통일의 역사를 가진 유기적인 민족의 허리를 잘린 채 30년 간을 지내 오면서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의 정체를 발견함과 동시에 피해자로서의 할 말이 칼끝처럼 예리하게 됐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모두 서구의 산물이다. 내놓은 것이야 무엇이든지 간에 한국에서 저질렀고 그 상태를 현재까지 30년 간 그대로 내버려두는 이 세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폭로입증하고 있다.

세계는 힘이 곧 진리라는 전제 밑에 움직이고 있다. 이데올로기요 휴머니즘이요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자기들의 힘을 뒷받침하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세계는 이기주의가 지배한다. 그것이 현실주의요 실리주의라는 탈을 쓰고 자기 정당화를 한다. 결국 '세계'가 남을 위하느니, 우방이니 내세우나 결국은 자기 팽창이 목적이다.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실상의 힘인 정치니 경제니 외교니 협상이니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 유리된 또 하나의 상층 구조로서 마침내 인간, 인권 따위는 완전히 소외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그처럼 수난과 수탈을 계속 당해 온 약한 이 민족을 산 채로 허리를 자를 계획을 했으며(그걸 전략이란 이름으로) 그런 상태로 30년을 고착상태에 내버려 둘 수 있는가? 그러고도 아직 도전과 같이 휴머니즘이니 이데올로기니 또는 인류평화니를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을 그토록 분단한 채 철수해 버린 미국의 처사를 지금도 납득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일어난 625에서 세계가 달라붙어 돕는 듯했으나 다시 38선을 고착시킨 채 30년 동안 이른바 UN에서 입씨름만 계속해 왔을 뿐이라는 사실은 그 허구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진상과 위치를 분명히 드러내므로 새로운 과제를 준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반만년 역사를 지녔느니, 찬란한 문화를 지닌 단일 민족이니 하는 주장이 얼마나 무력한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냈다. 까닭은 38선을 '전략적'으로 계획한 것이 애당초에는 약자에게는 발언권이 없다는 세계적 멸시에 기인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비록 그러한 기정 사실에서도 밖으로부터 들어온 이데올로기니 체제 따위를 초개와 같이 버릴 만한 민족적인 긍지나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주적 결단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결국 밖의 조정에 그대로 휘말려 스스로 양단(兩斷)의 운명에 주저앉은 것이 우리의 진상이다. 동시에 이 나라는 고도(孤島)가 아니라 세계 속의 한 공동체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그러므로 대원군의 무조건적 폐쇄주의는 하나의 만용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동시에 개화기의 독립협회의 활동이나 주장에서 엿보이는 무조건적인 자기 개방과 외세 문명의 수입 자세만으로는 한 민족으로서의 제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세계라는 한 배에 탄 한 단위다. 그러므로 세계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의 운명과 직결된 세계사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야 어떻든 우리는" 할 수도 없는 노릇이요, 동시에 "우리야 어떻든 당신들이" 할 수도 없게 됐다. 우리는 '세계'라는 한 배에 같은 권리를 갖고 탄 승객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땅에서 세계가 안았던 문제, 굶았던 상처가 터졌다. 이것은 한 배를 탔다는 증거다. 그러나 625는 한국이'세계'라는 배의 안정을 위해 심청이가 되어 바다에 내 던져진 꼴이 됐다. 그러나 심청의 경우와는 다르다. 청은 그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자진해서 제물이 됐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약자였기 때문에 강대한 자들에 의해서 강제로 선발 되어 제물이 된 것이다. 청과 같이 스스로를 세계를 위해 자기를 내던졌다면 벌써 부활했으리라. 그렇지 못했기에 아직도 탁류 속에 있다. 그러나 바로 세계가 강제로 우리를 내던졌기에 우리에게 해야 할 말과 그런 권리가 있다.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의 정체

38선의 비극은 이차대전의 결과다. 이차대전까지 무엇이 세계를 지배했나? 그것은 그 전쟁이 어떻게 진행됐나를 보면 자명하다. 이차대전이 일어날 무렵처럼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내세운 때는 없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기수로 자처하고 세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타가 공인했다. 이에 대해서 소련은 공산 혁명의 기수로 자처하고 자본주의사회를 궁극적 원수로 내세우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를 그 깃발 아래 모이라고 외쳤다. 이 양 진영의 긴장 속에 민족적 독재주의를 표방한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이 일어났다. 저들이 세계를 소요하게 할 때 저들을 치기 위해 '자유 진영'은 연합군을 조직했다. 그런데 그 속에 숙적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을 포함시키고 파멸 직전에 있던 저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저들과 제휴한 것은 바로 미국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는 인류의 원수라는 신념보다 더 긴요하고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것은 소련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저들의 혁명 목표로 내세운 저들이 아니었나. 그러면 그런 것을 비웃을 만큼 더 긴요하고 강한 것이 무엇이었나? 결국 '힘'이다. '힘이 곧 진리'라는 원칙만 있었을 뿐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호하자는 이기적 목적 외에 당시의 미래의 인류 사회 문제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파시즘의 세력은 격퇴했으나 공산 세계를 힘으로나 판도적(版圖的)으로 비약하게 했다. 무력으로 진군한 지역이 바로 자기들의 판도로 결정된 것은 '힘만이 진리'라는 약육강식의 낡은 가치관이 판을 쳤다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왜 연합군은 한국을 양분해서 그 반을 공산군에게 맡겼는가? 그것은 전략적 방편으로 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전범자도 아닌, 눌려서 신음하는 한국에 대한 전략이 그랬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인을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군의 힘으로 점령한 나라들을 자기들의 영향 아래 평정한 다음 손실을 계산하고 있는 동안 625동란이 터졌다. 이것은 역학적 고려만 생각하는 통에 공산 세력을 길러 놓은 결과다. 그것은 힘의 원칙 아래 선두 진영의 연쇄적인 충돌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힘의 원칙 아래 세계를 몰고 온 이른바 강대국들의 싸움터로 한국이란 땅이 제공됐을 뿐이다. 이른바 강대국들의 싸움터로 한국이란 땅이 제공됐던 것이다. 이른바, 자유진영이 연합해서 공산 침공에 대항했다. 그러나 그것은 38선이라는 기득권을 확보한다는 범위에서 끝내고 말았다.

그럼 오늘의 세계는 달라졌나? 힘의 원칙만을 믿던 결과로 세계가 그 같은 비극을 일으킨 반성에서 다른 길을 찾았나? 그렇지 않다. 우리 민족의 허리를 자른 채 30년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힘의 팽창이라는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른바 민주적 자본주의와 공산적 독재주의 국가들에 의해 양분됐다. 이 둘은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닌, 구미에서 발생한 것이며 그들이 주도하는 세계의 부조리로 굶은 것이 우리 땅에서 터진 것이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바로 우리를 분단시킨 힘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양쪽이 그 명맥을 유지한다.

이 마당에서 우리는 폭력의 진리 위에 선 낡은 세계의 죄악에 의해 수난 당한 민족으로서 그 죄악의 증언자가 된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나 폭력적 힘 지상의 세계의 방향의 종지부를 찍고 이 역사의 주도권을 새로운 가치관에 이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강대국이 세계의 인류 각 민족의 문제를 요리하는 시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군사, 경제, 기술 등의 힘을 바탕으로 한 휴머니즘이나, 해방 따위는 결코 믿을 수 없으며 그런 것이 이 땅 위에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아니다! 하루 빨리 새로운 돌출구를 마련해야 한다. 어떤 제삼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낡은 세계에서 심청의 운명과 같은 고배를 마신 우리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엄숙한 과제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38이북은 힘의 팽창과 힘에 의한 정복을 본성으로 하는 공산 정권이 때만 노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역시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힘의 공백은 반드시 또 다른 전쟁의 회오리바람의 장소가 된다는 역학적 자명성 앞에서 생존권을 위해서 "힘은 힘으로"라는 좌우명 아래 총력을 집중해야 할 불행한 상황에 놓여있으며 이 현실 앞에서 반론을 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자기방어를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그것만이 전부라는 입장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힘은 힘으로"라는 과거 세계의 방향을 전환할 과제를 지닌 민족이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지녀야 한다. 까닭은 우리는 그것에 의해 희생당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안목에서 세계사적인 과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게 무엇이며 그런 것이 우리에게 가능할까?

세계 속의 한국이 지닌 것

오늘의 세계(구미가 주도하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술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윤리나 도덕적 가치관의 바탕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고 있다는 데서 마침내 인류의 종언을 경고한다. 위에서 반복한 대로 오늘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힘'이다. 군사, 경제 그리고 기술을 바탕으로 한 힘의 경쟁 아래 세계는 신음한다. 그것은 딴 말로 집약하면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세계다. 공산세계는 애당초 유물론의 바탕 위에 세워졌기에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른바 자유진영도 결국 물질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 물질주의가 기계 문명을 낳았다. 기계에는 윤리가 없다. 그러므로 기계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경제가 있고 권력은 있으나 '인간'은 없어져 간다. 호크하이머가 유언에 남긴 바대로 오늘의 국제 관계에서 이미 휴머니즘적인 윤리적 고려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다. 그것은 실리주의가 판을 친다는 말이며 그런 한 상호 신뢰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은 '하나의 세계'를 소리높이 노래하더니 지금은 그 주장의 배후를 본 세계의 각 민족들은 또다시 민족주의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표명인 것이다. 이것은 또다시 힘의 대결이라는 다음의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속에 있는 어느 누가 또는 어떤 민족이 이 물질을 바탕으로 한 힘을 억제 또는 무력하게 하는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위치와 그리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서의 과제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분명히 작은 지역을 차지한 작은 민족이다. 게다가 자신의 당면 문제에 직면하고 있기에 세계적이니 또는 새로운 가치관이니 하는 따위의 말은 추상적이고 망상적인 이상주의라고 일격하기 쉽다. 우리에게는 세계사적 역할 따위를 운위하면 자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힘의 원칙' 아래서 보는 약소민족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희랍이나 히브리 민족과 같은 작은 민족들이 세계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오늘에도 판도상으로 가장 작은 나라의 하나인데다가 거의 산악지대로 된 악조건의 땅과 그리고 최소한 세 개의 다른 민족과 그에 따라 세 가지 이상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스위스가 민주주의의 창시적 모델 케이스가 되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들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거나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했던 것이다.

나는 헤겔(Hegel)이 말하는 세계사에서의 민족관 즉 세계사는 민족을 단위로 계속 바통을 받아서 세계 정신을 발전시킨다는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국가나 민족이 세계사적 역할을 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고 예기치 않은 다른 민족이 일어나서 새로운 방향의 계기를 마련한 경우가 세계사에 여러번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구미의 민족 또는 국가들은 크든 작든 세계사적 역할을 한 차례씩은 해봤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에게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까닭은 저들은 현재 너무 풍요한 유산을 갖고 있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계속 수호, 확장하는 데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들의 풍요가 저들을 노예화했다. 지금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탈식민문화에 여념이 없고 반서구적 경향과 헤게모니 싸움에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아시아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것이 대체의 경향이다. 그런데 일본은 서구문명의 일부로서 그 운명과 방향은 결정됐고, 중국을 위시한 공산주의에 방향을 돌린 나라들에게서는 새것을 기대할 수 없다. 공산주의도 이제는 늙었으며 그들이 내세웠던 유토피아적 공산 세계의 실현은 스스로 포기한지 오래며 그들의 폭력 원칙이 그들이 내세운 휴머니즘이 얼마나 가공적이었나하는 것을 세계가 다 알고 있다. 까닭은 그들은 결국 소수 집단이 폭력으로 민중의 인권을 완전 매점하고 세계를 분열과 유혈의 장으로 만들고 있음을 직접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과제도 이미 끝났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민으로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결코 망상일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거나 강대국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망상이며 또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낡은 세계의 전철을 밟는 이상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춘원(春園)은 그의 민족 개조론에서 한국 민족의 원모습을 인을 중심한 도덕적 깊이라고 봤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의지용(仁義知勇)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산해경(山海經)을 논증으로 한 주장이며 그 가치기준은 유교 윤리다. 최남선을 위시한 많은 한국 고대 연구가들은 언어적 분석으로 한국은 진리를 숭상하는 민족임을 말했다. 한마디로 하면 종교적이요 윤리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의 고증의 신빙성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 민족은 무력적인 야성보다는 역시 정신적인 문화 민족이라는 판단 이 옳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종교윤리 등으로 나타난다.

현금(現今)의 한국에서 주목할 것은 특히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샤머니즘이건, 불교건 유교건 또는 자연종교건 여러 형태로 종교적 민족이라는 것이 점점 승세를 보이고 있다. 많은 신흥종교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사회학적 분석으로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기성 종교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써 새로운 궁극적인 것을 찾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대조적 입장에서 다시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북과의 관계에서 볼 때 이북은 모든 종교의 뿌리까지 다 뽑은 데 비해서 남한에는 그 현상이야 어떻게 종교가 민중 속에 거의 절대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이 종교성을 대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질적 요소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세계 전체를 볼 때 공산 세계는 물론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종교의 쇠퇴와 더불어 윤리적 바탕이 무너져 마침내 균형을 잃은 난파선 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므로 계속 새로운 가치관의 수립에선 구원을 청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할 때, 우리의 이른바 종교적 전통성이 무엇인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근간이 될 수 없다는 단정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새로운 종교로써 세계를 정복한다거나 종교성 자체가 곧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공동체(共同體)를 형성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며 그러한 공동체가 세계의 하나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세계와 선교』 197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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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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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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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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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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