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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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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31절을 기념하는 한국교회협의회의 예배를 위하여 '3. 1절과 민족사적 고백'이라는 제목을 내세웠다. 31절은 민족 독립을 위한 봉기였기 때문에 그것을 민족사적으로 재평가해보자는 것이었고, 고백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차원에서 민족 내지 민족주의와의 관계를 살펴보자는 의도에서 내세운 말이다. 그런데 이 제한된 시간에 그것도 설교 형태로 이 문제를 논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68돌의 31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우선 과제로 주셨는지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

오늘날 대학가를 위시한 지식층에서 가장 활발히 논의될 뿐 아니라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절대적인 당면 과제로서 민족주의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한국의 현상만은 아니다. 제3세계는 물론 자본주의 여러 국가들 그리고 놀랍게도 공산주의가 제창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최근에 민족민중민주 이른바 삼민이라는 것이 크게 등장하여 대학가를 휩쓸고, 그런 슬로건 밑에서 운동을 벌이다가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지난해만도 4,610명이나 된다. 우리 교회는 이것을 어떻게 수용하며, 이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정부가 규정하듯이 좌경화 경향이며 용공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민족사적으로 이 운동을 해명해야 될 의무는 없는 것인가?

오늘 선택한 본문의 내용은 구약에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신명기 6, 26장, 여호수아 24장, 시편 78, 105, 136편 등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사적 신앙고백이다. 그 중에 가장 간결하게 된 것이 신명기 6장이다: "우리는 이집트 파라오의 종 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야훼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를 내려치시고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다. 야훼께서 크고 두려운 표적과 기적을 이집트에 내려 파라오와 그의 온 궁궐을 치시는 것을 우리는 이 눈으로 보았다. 이렇게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신 것은 우리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우리를 데려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후일 너희 자손들이 도대체 이런 규례나 법도를 왜 지켜야 하느냐고 묻거든 이처럼 대답하라고 한다. 이 말은 중요하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법도나 규례가 바로 이 민족 해방의 사건과 연루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편 78편에서는 "역사에서 교훈을 뽑아내어 그 숨은 뜻을 밝혀 주리라"(시 78:2)고 한다. 역사의 숨은 뜻 특히 자기들의 민족 해방과 독립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에 복종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모든 명절 때는 물론이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민족 해방의 역사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결심을 다짐하고 그 정신을 후손에게 전승했다. 시편 136편은 저들이 이 내용을 가지고 예배 때 사회자와 회중이 화답하는 것을 전하고 있다.

이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을 치셨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억센 손, 그 팔을 휘두르셨다.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
파라오와 그 군대를 홍해바다에 처넣으셨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도다."
사막에서 당신 백성 인도하셨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도다."
……
그들 땅을 우리에게 물려주셨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도다."

우리가 구약을 우리의 경전을 받아들이는 한에 있어서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그리스도교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망언은 더 이상할 수 없으며 오히려 민족적 과제를 외면한 죄를 참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세계적 현상이지만 결코 같은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기 팽창을 위한 민족주의이다. 그것을 우리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우리의 말 '민중'이 적어도 신학계에서는 세계의 언어로 되어 있다.

독일에서도 민중이라는 언어가 통용된다. 그런데 그것을 한사코 자기들 말로 번역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Volk'가 그것이다. 그런데 Volk라는 말에 대해 아주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있다. 히틀러 시대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민중을 Volk로 알고 거부감을 느낀다. Volk란 말은 관리와 대립시켜 사용하는 경우에는 민중이라는 뜻이 있고 국가 형성의 일원이라는 의미에서는 민족이 된다. 그런데 히틀러는 세계를 침략하면서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서 우월성을 내세워 계속적으로 Deutche Volk라는 것을 크게 내세우므로 Volk는 배타적인 그리고 침략적인 민족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여기서 같은 말이 엄청나게 다른 두 가지로 사용되는 예를 볼 수 있다. 이른바 강대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주의는 자기 세력을 팽창하게 하고 어떤 형태로나 다른 민족들을 침략하는 목적을 견지하는 데 대하여 또 하나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외세를 거부하며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절규인 것이다. 이른바 제3세계의 나라들이 독립국가가 되었는데도 계속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사실상 독립은 안 되고, 새로운 형태의 종속 관계를 이룬 신식민지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군대의 침략도 아니며 국가 행정의 관리직을 차지한 것도 아니면서도 약소국의 운명을 완전히 자기 손 안에 넣고 좌지우지하는 나라들을 일컬어 선진국이라고 한다. 이렇게 예속된 민족들은 그 전체가 민중적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약소민족의 민족주의는 민중적 민족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피식민국을 장악하고 조종할 매개고리를 찾는데 그것은 예외 없이 독재정권이다. 그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독재정권은 민(民)이라는 발판이 없기 때문에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정부든 외세에 의존하면 의존하는 만큼 반민주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민족적 자주 독립 운동은 외세와 싸울 수밖에 없고 또한 그것에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독재정권과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민족민주는 동전의 양면처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31절과 민족 독립

31절 민족 봉기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민족 자주 독립을 위한 싸움으로서,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 세계에서 처음으로 일으킨 민족 봉기 운동이다. 유례없이 삼엄한 일제의 무단정치 밑에서 바늘 하나 쥐지 않고 전국적으로 목이 터지도록 독립만세를 부르짖은 것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민족주의를 과시한 일대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병행하여 파고다공원에서 약 2만 명이 선언서를 낭독하고 가두시위에 돌입한 이 운동은 약 60일간 계속되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동원수가 만 명 이상이거나 15회 이상 연속적으로 시위한 고장만도 40여 곳이고 전국 218군 중 211군에서 일어났으며, 전체 인구 천 육백만 중에서 2백만 이상이 동원된 큰 사건이었다. 이 운동은 일본 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로 점화되어, 그해 5월에 중국의 54봉기를 일으키고, 같은 해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촉발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아일랜드에 혁명이 일어났다. 그때 타고르의 한국에 대한 송시도 유명하지만 옥중에 있던 네루가 16세의 딸 인디라 간디에게 쓴 『세계사 편력』에서 한국의 31운동을 극구 찬양했는데, 특히 유관순을 예로 들며 자기 딸에게 배울 것을 격려한 것도 유명하다.

이 선언서의 문장이나 내용은 민족적 혜안을 과시했다.

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는 지나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이것은 하늘의 명명이요 시대의 대세이며
전인류 공존공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다.

저들은 세계의 대세를 본 것이다. 혁명적 전환기를 느낀 것이다. 사실상 그때를 즈음하여 오스트리아제국 하의 민족들 체코, 유고, 루마니아 등이 독립했고, 러시아제국 지배 하의 폴란드, 핀란드를 위시한 다섯 민족이 독립했다. 1917년 8월에 스톡홀름에서 만국사회당대회가 열렸는가 하면 그해 9월에는 뉴욕에서 약소민족 25개국 회의가 열렸다. 그런가 하면 1917년에 공산혁명을 성공한 레닌은 그의 이른바 '평화 선언'에서 주변의 약소민족에게 독립을 위한 지원을 천명했고,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에 윌슨은 모든 식민지의 요구를 조정할 것과 민족 자결권을 선포했다. 그러나 31 독립운동의 큰 맹점이 있었던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미국의 윌슨이나 소련의 레닌의 선언들을 액면 그대로 받고 그 배후에 숨은 음모를 몰랐던 것이다. 윌슨이 세계연맹을 제창하고 미국은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듯이, 세계의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기치로 한 공산주의에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설 자리가 없었다. 약소민족을 위시한다는 것 배후에는 그들의 팽창주의, 세계 제패의 야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밀약으로 필리핀 등 아시아권의 식민지를 확보하는 대신, 일본에게 한국을 맡겨 버린 미국을 의지해서 독립을 선물처럼 받으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으며 공산화를 예상하지 않고 레닌의 힘을 빌어 독립하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에 혁명의 기운이 돈 것은 사실이나 신천지가 저절로 한국땅에 도래한 것도 아니고 위력의 시대가 지나간 것도 아니며, 오히려 도의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침략의 시대에 돌입했던 것이다.

둘째로, 위의 사실과 관련된 것이지만 민족독립은 쟁취하는 것이지 그저 하늘에서 떨어지듯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 의식이 없었다. 심는 수고 없이 추수할 수 없으며 십자가의 수난 없이 부활이 없다는 이 너무도 자명스러운 철칙을 저들은 간과한 것이다. 신흥 세력으로 아시아를 재패하려는 일본제국을 어떻게 만세소리만 높이 외쳐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암흑의 세력과의 싸움, 폭력과의 싸움 없이 신천지도 도의의 시대도 오지 않는다.

그 당시에 민족독립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다면 31만세사건은 억울한 피만 흘린 실패된 한 토막의 비극일 뿐이다. 그러나 31민족 봉기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세에서의 해방, 곧 민족 자주 독립을 위한 첫 포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면면히 흐르는 화산맥에서 뛰쳐 나온 활화산과 같은 사건이다. 이 활화산은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화산맥은 뜨거운 열기로 지하에서 흐르고 있었다. 이 민족의 힘이 활화산이 되어 반민족적인 것을 제거할 때 비로소 민족독립이 온다. 그런데 815때 사람들은 또 한번 착각을 일으켰다. 해방이 공짜로 연합군에 의해 굴러떨어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미군도 소련군도 우리에게 해방과 자주독립을 주지 않았다. 남북이 분단됐으며 동족상잔이 일어나 많은 피를 흘렸다. 이것은 모두 우리들이 한 일이 아니다. 이른바 강대국들이 주인없는 땅처럼 업신여기고 떡 자르듯 잘라 양분했으며 세계 양대 세력의 결전지로 한국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에게 언제 자율권이 주어졌는가? 새로운 세계적 세력이 주인으로 대치된 것뿐이다. 아니, 대치됐다는 것도 잘못된 말이다. 일본이 물러갔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저들은 한국전쟁 때 우리 민족의 피를 딛고 경제 재건을 하더니 지금은 새로운 단장을 하고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두 주인을 가진 셈이다.

이른바 해방이 지난 오늘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통수권을 미군이 완전 장악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주둔에 필요한 경비까지 분담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한국은 미군 주둔지로 중국 봉쇄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고, 일본을 후방 병참기지로 삼으므로 한국은 초토화되고 일본은 경제 재건의 기틀을 잡게 한 것도 미국이다. 한국의 비무장지대는 일본의 전선 방어선이 되고 있는데 그 책임은 한국군이 지고, 자신들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해갔다. 60년대에 한일국교 정상화가 강요되고, 미일 안보조약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간접적 관련을 맺으므로 한국이 일본과 군사적인 공동 행위를 하게 될 문이 열리게 되었다. 미국은 한일 군사동맹을 대소 전략으로서 4해협 봉쇄의 전선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미일 및 한미간의 공동 작전이 점차 대규모화되고 그 횟수가 잦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은 뭐냐? 닉슨 독트린으로 미군 철수를 계획했을 때도, 한국과의 교전국이었던 중국과 우호 관계를 체결할 때도 한국 정부에는 일언반구의 의논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과 더불어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설득하게 하여 71년 역사적인 남북대화가 열렸다. 그러나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며, 통일이 아니라 분단 고착화의 전초적 작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박 정권은 국민에게 일언반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했으며 그것을 미끼로 절대권을 강요했다. 레이건 이전까지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절대 필요했고 일본의 안보를 위해서 한국이 필요했을 뿐 미국에게 한국은 간접적인 의미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한일국교를 강제한 65년 7월에 한국 청년들을 월남에 파병하기를 강요했고, 한국 정부는 이에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복종해서 그 어처구니없는 대리전쟁에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런데 레이건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레이건은 한국이 절대 필요하며, 그래서 한미의 사활(死活) 관계를 강조한다. 무엇 때문인가?

첫째 소련을 겨냥한 핵기지로서 적지(摘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소련을 겨냥한 군사 훈련지로 가장 알맞은 땅으로 보았다. 팀스피리트 훈련이 바로 그것을 말한다. 셋째로 무기 시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2~86년까지의 5개년계획기간 동안에 미국에서 수입할 무기는 무려 80억 불에 해당한다. 한국은 미국의 무기 시장으로 세계 제6위에 속하고 있다. 우리는 군사정치적으로 미국에 예속되고, 경제적으로는 일본에 예속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에 의해서 우리들의 농민이나 노동자들이야 어떻게 됐든, 시장을 개방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계속 밀리고 있다. 이러고도 독립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문제를 불문에 붙이더라도 민족분단의 상태에서 민족독립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분단 40여 년에 날로 자주권을 잃어만 가고 있으며 민족끼리의 대결 상태 또한 고조되기만 하다. 그것은 이른바 안보논리에 의한 것이다. 6천만 인구 중 최소한 150만 명의 청년들을 전선에서 대결시키며 서로 적대 감정만 고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양분 상태는 우리를 둘러싼 이른바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에서 견지되고 있다. 저들은 우리의 분단 상태를 놓고 우리를 희롱하고 있다.

중, 미일, 중일이 만나서 한국 문제를 토론했다는 보도를 심심치 않게 듣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저희들이 무슨 권리로 우리 없이 우리 문제를 의논하는가. 더군다나 우리의 침략자 일본이 우리 문제의 해결사라도 된 듯이 간섭한다는 것은 치가 떨리는 일이다. 우리의 31운동의 성공은 민족 통일이 와야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신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런데 외세는 우리 분단의 고정화를 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민족 통일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길을 가로막는 내부적인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외세와 야합해서 권좌에 앉아 세력을 부리거나, 부(富)를 향유하는 극소수의 독점 세력이다.

이승만은 입으로 반일을 내세웠으나 친일 세력에 의해 자기 정권을 유지함으로 그 세력을 키워 왔다. 박 정권은 일본 하급 장교가 주도한 정권으로 일본의 재침략을 도와 안에서 대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현 정권은 바로 박 정권이 반민주적으로 만든 헌법에 의해 된 정부요, 그 구성 요인들로 보아 박 정권의 연장이다. 저들은 우리 민족을 희롱한다. 세계가 데탕트로 향하며 실리를 추구할 때 그 독점 세력은 이에 편승하면서 국민을 언제나 냉전 체제에 묶어 놓는다. 즉 반공을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로 쓰면서도 자신들은 그 구속에 매여있지 않다. 또는 국민을 정보에서 완전 차단하여 우민정책을 쓰는 일이다. 그러므로 민족의 자주 역량을 질식시키고 있다. 저들은 우리 민족 편에서 외세를 대하는 자들이 아니라, 외세의 편에서 우리 민족을 잠식하는 반민족세력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민족주의는 민중적이 되어야 한다.

민족주의와 그리스도교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했으며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지금 민족주의가 31 민족 봉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31운동에서 그 단서를 찾자.

31 민족 봉기 때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참여 상황을 보면 다음 두 가지 사실이 특징적이다. 하나는, 거기에 참여한 계층이 압도적으로 민중이었다는 점이다. 체포된 사람들의 통계를 보면 농민만 55.3퍼센트이다. 9.9퍼센트인 학생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부가 민중이었다. 교육 수준을 보아서도 완전문맹이 31.4퍼센트이고, 자기 이름줄이나 쓰는 사람들이 19.2퍼센트로서 무교육자가 50퍼센트를 상회한다. 그러므로 31 운동의 주축은 민중들이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의 비례도 이 통계에 준했을 것이다. 저들은 선교사가 주도하는 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저들은 외국 선교사들의 민족적 문제 간섭을 행동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을 배척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둘째로 주목되는 것은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는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의 결단에 의한 것이지 제도적 교회에 의한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민족적 대사건 앞에 어느 교파의 총회나 노회같은 데서도 이 문제를 거론한 일이 없다. 심지어 어떤 개교회의 제직회같은 데서 결의한 기록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 사실은 첫째로 제도 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의 어용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로 그러므로 조직화된 운동이 되지 못했다.

31운동이 일본의 야수적 폭력으로 진압되자 그리스도교의 민중들도 별다른 힘을 과시하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도 그리스도교의 민중들은 그리스도교 밖의 민중들보다 민족적 사명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될 수밖에 없는 조건하에 있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 지도층이 차안 대신 피안을, 집단으로서의 민족 대신 개인을 내세운 교리에 의하여 계속 세뇌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민중의 민족적 염원을 실현할 무대가 아니고 오히려 역기능만 하게 되었다. 이것은 민족에 대한 배반이다. 그때 민족적 민중적 애환을 안고 교회문을 두드렸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떠났던가? 그때 그리스도교를 떠난 상징적인 인물로서 이동휘와 여운형을 들 수 있다.

이동휘는 이조 말에 무관으로 활약하다가 1907년 일본에 의해 폐군 되자 슬픔과 분노를 안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그리스도교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재빨리 전도자가 되어 전국을 누비면서 눈물로 호소했는데 그 설교의 내용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으려면 예수를 믿으라"라는 것이었다. 그의 호소가 어떻게 애절했는지 그는 '눈물의 애국자'로 널리 알려졌었다. 그의 소문을 들은 캐나다 선교사 그린슨(R. Greenson)이 그를 동역자로 불러 전도사로 임명했다. 그는 함북 일대에서 눈부신 전도자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신앙에는 단서가 붙어 있다. 그것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본의 강제 점거와 동시에 그는 3년 동안 옥고를 치렀으나 다시 나와서 여전히 전도사로 활약하다가 간도로 망명했다. 거기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일본의 추적을 받은 그는 러시아를 망명지로 선택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볼셰비키와 손을 잡게 되었고 한국 공산당 조직의 주동자가 되기에 이른다.

여운형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승동교회의 전도사로 활약하던 착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1920년에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왜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공산주의를 선택했는가? 사람들은 저들을 끝끝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이동휘는 레닌과 대좌했을 때 그의 물음에 한마디 말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까닭은 그는 공산주의의 ABC도 몰랐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민족 독립을 위한 장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교회를 떠난 것이다. 1925년에 이 땅에 공산당이 조직되어 사회주의의 거센 바람이 일어났으며 반면에 일제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우상으로서 서울에 이른바 신궁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에 아무런 대책도 저항도 없었다. 저들의 신앙의 비역사화가 저들을 그렇게 무력하게 만든 것이다. 일본이 단말마적으로 한반도를 난도질할 때 저들은 고스란히 순종했을 뿐 아니라 많은 찬일파도 생겼다.

해방후 그리스도교는 친미 일색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한국 그리스도교는 반공과 그리스도교를 동일하게 생각했다. 그때 월남한 사람들이 370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반공투사가 된 것이다. 그후 419가 일어나고, 516이 터졌어도 그리스도교는 깊은 잠에서 깨질 못했다. 그런데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강요되었을 때 비로소 잠을 깨어 그리스도교가 대거 궐기했다. 그러나 일본을 뒤에 조종하는 미국을 볼 눈이 없었고, 군국주의의 뿌리를 볼 눈도 없었다.

70년대에 들어와서 인권을 의식하고 독재정권에 대항해서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인권도 민주화도 민족의 독립이 있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에 눈을 뜨지 못했다.

80년대에 넘어 와서 우리가 왜 민족주의를 부르짖어야 하는가를 대학가를 통해서 배웠다. 이 마당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이며,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선동에 반대해야 한다. 그 까닭은 민족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 민족주의에 동조할 수도 없다. 까닭은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만이 가진 고유한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3세계 일반에서처럼 구식민지의 잔재뿐만 아니라 새로운 식민지에 의한 수탈 상태 외에도 민족분단이라는 현실에서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그리스도교 구성원은 중간층이다. 구조적으로나 수적으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교가 어떤 데로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메시지의 본질로 보아서도 민중 지향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민족사적 현단계에서는 민중적 민족주의를 몸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의 본문에 들어가 보자. 이미 말한대로 이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백이다. 이 고백을 보면 다음 몇가지가 주목된다. 첫째는 저들이 민족적 고백을 민족사의 파악을 통해서 했다는 것이다. 노예 생활에서 고난의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 그들의 역사.

둘째는 저들의 민족의 뿌리는 민중이었다는 점을 고백한다. "저희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다." "이집트에 기식하고 살았다." 사실상 저들은 하삐루였다.

셋째, 그 민족 형성의 모태는 수난이었음을 고백한다. "억눌리고 괴로움을 당하고 착취를 당했다." 그래서 저들의 절규는 하늘에 충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민족사의 출발을 이집트에서의 해방으로 삼고 40년의 수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고백한다. 놀라운 것은 이 같은 민족적 고백을 저들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아이들을 위한 교과서는 "우리는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다"라는 내용에서 시작한다. 물론 저들은 그 모든 일이 그들의 신 야훼의 억센 손과 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고백을 잊지 않는다. 우리도 이 같은 민족사적 고백을 형성하여 우리 민족의 척추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처럼 고대에까지 소급할 수 없다면 근대사에서 농민봉기를 거점으로 하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31절을 기점으로 하든 한 시점에서부터 자주 민족의 투쟁사를 민족사적 고백을 형성해 보자. 그러면 그 고백의 마지막 말은 "마침내 남북통일을 이룩함으로 모든 외세에서 해방됐습니다"로 될 것이다.

(1987. 3. 1, KNCC 삼일운동기념예배/『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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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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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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