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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기독교
31운동의 동기

첫째 동기는 새 시대(時代)에 대한 희망이다. 1918년 4년 간의 1차 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이에 연합군의 주도권을 잡게 된 마당에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이 강화 조약 14조항 중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선언을 채택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 아래 있던 민족인 체코, 유고, 루마니아가 독립하고 러시아 지배 아래 있던 폴란드, 핀란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이 독립하게 됐다. 이와 더불어 혁명의 기운이 뻗쳤다. 이미 1917년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만국 사회당 대회(萬國社會黨大會)가 있었고, 9월에 뉴욕에서 약소 민족(弱小民族) 25개국 회의가 잇달아 열렸다. 이러한 세계의 혁명적 분위기를 31 선언은 "아! 신세계(新世界)가 눈 앞에(眼前) 전개(展開)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는 지나가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왔도다." "이것은 하늘의 명령이며, 전인류 공존공생권(共存共生權)의 정당한 발동(發動)이라"고 했다.

31운동은 새 시대를 투시하는 혜안(慧眼)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신념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것은 이른바 지식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 무명(無名)의 여인이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에 잡혀서 고문을 당했다. 그때 그녀는 "너는 닭을 못 보았느냐? 닭이 새벽이 되어 우는 것도 누가 시킨 줄 아느냐? 우리 나라가 독립될 서광이 바추기에 내가 저절로 만세를 부른 것이다"(애국 동지회 후원회, 『한국 독립 운동사』, 1956, p.182)라고 하였다. 이것을 볼 때, 새 시대의 여명을 보는 혜안은 어느 누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태양을 누가 독점할 수 없듯이 새 시대를 밝히는 여명은 우리 민족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둘째 동기는 일제의 잔인한 무단 정치(武斷政治)와 경제 착취였다. 우선 그 경제적 침략을 보자. 일본은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재정, 금융, 화폐, 교통 기구, 통신 등 우리 경제 명맥(命脈)을 장악했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토지 조사'랍시고 해서 전체 토지의 10%를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조선) 정부에 전답(田畓), 임야(林野)를 내놓게 하고, 그것을 개간한다고 보조금까지 강요하고, 일본인 이민(移民)에 1인당 평균 2정보(町步)를 분배했다. 그리고 토지 신고를 하게 하여 이른바 총독부 말뚝을 꽂는 것을 1918년에 끝냈을 때, 조선(한국) 인구 1,600만의 것이 418정보(町步)인데, 그 때 30만 일본인 소유가 23만 정보(町步)가 됐으며, 조선(한국) 소작인은 78%나 되었다. 1911년 일본 사람이 조선(한국) 본사를 둔 회사가 109개가 되어 조선(한국)인 소유의 4배를 능가하게 됐다. 또한 광산권(鑛山權)은 일본인이 80%를 점유했다.

폭력 정치는 저들이 내세운 무단 정치가 잘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헌병 경찰제이다. 즉, 헌병 장교나 하사관이 장(長)이 된 경찰 제도이다. 이것은 공무원에도 적용되어 관리는 교원에 이르기까지 금테 두른 군복형(軍服形) 복장을 입었다. 저들이 한국 사람에 적용한 처벌법은 자국(自國)에서 명치 시대(明治時代)부터 금지된 태형(笞刑)인데, 태(笞)에 맞으면 업혀 나오기 마련이고, 90태형에는 죽음 아니면 폐인이 됐다. 또한 이른바 직결 처분 제도는 "함부로 타인의 신변에 다가서거나 또 따르는 자"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매일신보(每日申報)라는 기관지 외에는 신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책도 50여종 20여 만 권을 소각했다. 이래서 경제, 인권 그리고 정신마저 빼서 버리게 되어, 그 이상 참는다면 우리 민족은 개 돼지 되는 길만 남았던 것이다. 이런 것이 분노로 폭발된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들한다"고, 박해도 극(極)에 이르면 터지고 마는 것이다.

31운동의 헌장

우선 재미(在美) 신한협회(新韓協會)의 서재필(徐在弼),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晩) 등이 독립 운동을 서둘러서 윌슨에게 진정서를 냈다. 그 다음 국제 관계에 빠른 동경(東京) 유학생 600명이 1919년 2월 8일 동경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내고 독립운동을 결의했다. 한편 상해(上海)에서 움직여 국내 밀사(國內密使)로 장덕수(張德秀), 선우혁을 보냈다. 선우혁은 양전백(梁甸伯), 이승훈(李承薰), 길선주(吉善宙) 등 평양 기독교 인물들에게 점화(點火)했다. 또 하나는 천도교에도 손을 뻗쳤는데,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는 현상윤(玄相允), 김성수(金性洙) 등 중앙학교측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리고 YMCA,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여러 계열이 따로 움직이다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서 마침내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의 33인을 결정하고 청년, 학생들과 공동 전선을 펴기로 합의했다. 마침 강제로 퇴위(退位)된 고종의 변사(變死)에 격분한 때를 이용, 그의 장례날을 피하고 주일(主日)을 피해서 3월 1일에 거사했다. 33인은 태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경찰에 자진해서 체포되고, 파고다 공원에서는 청년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약 2만 명이 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가두 시위에 돌입했다.

이렇게 시작해서 약 60일간, 만명 이상이거나 15일 이상의 시위를 한 고장만도 40곳이며, 회수는 1,500회나 되었다. 218군(郡) 중 211군에서 일어났으며, 1,600만 명 중 200만이 동원됐으니 약 1/8의 인구가 궐기했던 것이다.

그 중에 기생들도 귈기하였고 서울의 600여 명의 노동자들도 궐기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이 때에는 전(全)서울이 철시하고, 의주에서는 총파업이 일어났고, 평양은 주민들이 전원 학생과 함께 대모의 대열을 이루었으며, 남대문 부근에서 다시 800명이 시위하였다.

이 때 인명의 손상은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총독부 통계 박은식 통계
체포된 자 19,525명 46,306명
사상 사망 350-630명
부상 800-1,900명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기소자 10,441명
  내용
직업 농업 - 55.3%
학생 - 9.9%
…… - 8.3%
여자 - 5.8%
날품팔이 - 3.8%
교육수준 무교육 - 31.4%
가정, 서당에서 배운자 - 19.2%

우리는 지금까지 31운동 하면 33인을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안병직(安秉直)의 31운동에 관한 책들을 보면, 그 중에서도 특히 천도교측의 손병희(孫秉熙)를 신랄히 비판한 바도 있지만, 그것은 지도층의 봉기로만 보면 잘못이고 그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아니, 31운동은 민족 운동이었다. 체포된 사람의 통계(총독부)를 보면 31운동이 민중들이 주체가 된 운동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직업으로 보나 교육의 정도로 보나 못 가지고 무식한 노동자, 무식자(無識者)들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나라의 민중의 힘이란 굉장한 잠재력을 가졌음을 입증한다.

31운동과 기독교

첫째로, 기독교인으로서 33인 중 16명 외에 주동자로서 오기선(吳基善), 안세환(安世桓), 오상근(吳祥根), 함태영(咸台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등이 활약하였고, 청년 학생층으로서는 박희도(朴熙道), 김원벽(金元壁), 이용설(李容卨) 등 다수의 사람들이 31 만세 대열의 선봉에 섰다. 그리고 31운동의 산실(産室)로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 승동교회(勝洞敎會) 등을 들 수 있다. 그 때의 31운동 동태(動態)의 연락망은 전국 교회였다.

총독부 통계만을 보아도 피검된 사람 중에서 유교 1.8%, 불교 1.1%, 천도교 11.1%인데 비하여 기독교 17.7%이며, 조지훈(趙芝勳)의 통계로는 천도교 1,426명에 비해 기독교 2,190명이나 된다. 그 중에 목사 40 명, 전도사 59명, 기독교 기관에 일하는 이 52명으로 도합 151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피해받은 교회만 47곳이나 되었다.

그 후도 운동은 기독교에서 계속되었다. 그때 총독부는 선교사들에게 "독립 운동 이래 2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 운동에 관여한 대다수가 기독교도임에 대하여 당신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사실의 일단(一斷)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만일 우리가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됨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된 1884년을 기독교의 출발 시점으로 하면, 불과 30여년 사이에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우리 민족사에 가장 중요한 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사람들은 독립 선언은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니 기독교 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기초자(記草者)인 최남선(崔南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나는 의식적으로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당시의 애국 지사들은 대개가 기독교인들이었던 만큼 그들과 자주 상종하는 동안 자연 내가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본래 자유 사상이 농후한데다가 독립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정의니 하는 말들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말이고 보면, 나의 사상은 기독교적 요소를 빼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기상 1972. 3, 전택부와의 대담).

사실상 그 속에 있는 희망, 자주권 의식, 독립 권리를 찾으면서도 일본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며 어디까지나 평화적 투쟁이라는 사상은 기독교적이다. 이것이 인도의 간디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는지 모르나 인도의 비폭력 운동이 1919년에 있었다. 그러므로 31운동 당시 그때에 다른 나라의 유사한 운동들뿐만 아니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였던 다른 것들에 비해 사상적으로 기독교는 선각적이었다는 것이 한 이유다.

둘째로 기독교인은 대체로 서민층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민중과 호흡을 함께 함으로 저들의 고통을 더불어 할 수 있었다. 이광수(李光洙)는 한국 기독교 교역자를 비롯한 전체 수준이 저질(底質)이라고 했다("今日朝鮮..…敎會의 결점", 1917. 11, 청춘지). 그러나 그는 엘리트 의식에 젖은 눈만 갖고 있었다.

셋째로 중요한 것 하나는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애국 충정 외에 어떤 야심이 없었다. 가령 천도교와 비교해 보면 대조적이다. 가령 안병직(安秉直)이 31운동에 대해서 지적한 것을 보면, 경성 복심원 형사부 보고(1920. 10. 30)에 "손병희(孫秉熙)는 구한국 시대 친일파에 속(屬)하고 일청(日淸), 일노(日露) 양 대전의 후에 인부(人夫) 등을 공급하고 또 철도 부설에 대해서는 노동자(工夫) 등을 보내고 또 군자금 1만원을 공급하여 제국에 대해 다소 호의를 표시"라고 서술한다. 그는 농민운동(全琫準)이 강렬해지자 그것을 등에 업다가 실패하니, 일본에 망명하여 "호사함이 왕후(王侯)와 다름없는"(靑松南莫, 『朝鮮騷擾史論』, p. 27) 생활을 하며 일진회(一進會) 간부인 이용구(李容九), 송병준(宋秉峻) 등과 친일 앞잡이 노릇을 서슴지 않았다. 안병직(安秉直) 체포 후 일차 조서에서 "나의 의사(意思)는 관청에서 채용되지 않고 항상 기속되었으며 근래에는 천도교당 건축에 대하여 관청으로부터 기부 모집을 저지 당하여 마음이 편치 않던 중, 민족자결주의라고 하는 것이 제창되었기 때문에 금일(今日)에 앞에 나서게 되었다"(1919. 4. 10)고 하였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민중 규합 내용이다. 즉, "본교(本敎)는 5만년 무극(無極)의 대도(大道)로써 장래 국권 회복에 이어 세계 통일할 것이다. 이제 본교(本敎)를 충심으로 믿기만 하면 희망하는 바가 하늘에 통하여 국권 회복, 세계 통일이 실현되면 고위고관(高位高官)의 요직에 임명되고 자기 일대(自己一代)는 물론이고, 자손을 다하는 상징으로써 자기 가족 수에 따라 매 취식시(每 取食時)에 한 숫가락의 성미(誠米)와 청수(淸水) 일완(一院)을 바치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안병직, 104)고 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 운동과는 대조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디에도 "장차 한 자리 하겠다"는 전제에서 목숨을 내 건 흔적이 없고, 오직 민족에 대한 애국 충정에 차 있었다. 말하자면 사리사욕(私利私慾)이나 개인에게 오는 피해에 의해서 복수한다는 동기는 없고 순수한 순국정신(殉國精神)에서 움직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단순한 신앙의 근거 위에 선 민족애(民族愛)의 발로(發露)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현실적 전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이 운동을 계속한 것이 기독교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31운동 때의 현실 참여가 독립, 자유, 평등 등의 민권 의식이 각성됐다는 것, 둘째 민중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성서적 입장에 부응했다는 점, 그리고 어떤 이기적인 야욕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늘날 말하는 기독교 정신에 투철했다고 할 수 없다. 까닭은 그런 기독교적, 사상적 뒷받침이 별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들의 순국 정신이 평화 수단으로 어떤 면에서 무계획적으로 돌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땅을 진동하여 한국 민중운동의 맥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가져 오는 데 주역이 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과 나라 사랑이 하나가 됐었기 때문이다. 불과 30여 년 역사와 서민층을 가진 이 공동체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설명으로는 불가능하다. 저들의 단순한 행위가 사건화(事件化)된 것은 하나님 신앙과 민족애가 합류되어 한국 역사에 그리스도교를 뿌리박고, 세계에 첨단을 걷는 정신을 실천화한 것이다.

이 사건화는 세계에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그 뒤인 1919년 5월 중국의 54 운동이 일어나고, 같은 해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일어나고, 1920년 아일랜드의 혁명이 터졌는데, 모두 한국 31운동을 본받으라고 한다. 타고르의 한국의 송시(領詩)는 유명하지만 옥중(獄中)의 네루가 16세의 딸 인디라 간디에게 쓴 『세계사 편력』에 한국의 31운동을 극구 찬양하고 특히 유관순의 예를 들어 자기 딸에게 배울 것을 격려한 것도 유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건국과 더불어 31 정신을 전통으로 내세웠고, 이 정권 하의 헌법도 그것을 못박고 있다.

박해받은 31 정신

그런데 통탄할 것은 이러한 31절을 기념하는 것이 이처럼 무서운 분위기에서 감시를 받아가며, 점점 공포에서 31절과 이 민족이 멀어져 가게 된 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언제 다시 일제(日帝)가 재점령했나'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작년 이른바 명동 31 사건이 된 선언문도 그 서두는 곧 31 선언의 내용을 기본 정신으로 뚜렷이 명시했다. "오늘날 31절 62돌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전세계에 울려 퍼지던 이 민족의 함성, 자주 독립을 부르짖던 그 아우성이 쟁쟁히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것은 구국 선열들의 피를 땅에 묻어 버리는 죄(罪)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 구국 선언을 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준수해야 한다. 민족 자본 육성의 경제 정책을 해야 한다. 통일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골자로 애족(愛族)의 충정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죄라 해서 기소되어 지금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기소문에서 몇 가지 지적하면 다음 같은 대목이 있다. "이른바 「민주 회복 국민회의」, 「갈릴리 교회」 등 반정부 선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어 기도회, 수양회 등 각종 종교적 의식을 빙자하여……" 교회, 기도회, 수양회 등 각종 종교의식을 빙자하다니! 이것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다. 일생의 생명을 건 삶의 근거를 <빙자>의 도구로 삼다니! 이런 고소에는 기독교 전통에 대한 무지(無知)가 폭로된 것이다. 기독교는 애국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기독교는 나라 걱정말라는 말인가? 그러면 31운동 규탄에 나서야지! 그런데 정교 분리니, 종교는 제 본분을 이탈했느니 비판해도 아직까지 31운동에 기독교가 주역(主役) 역할한 것을 비판할 용기는 왜 발휘 못하나? 아니! 우리는 31 정신 그리고 거기 참여해서 피흘린 우리 선열들의 뒤를 따른 것뿐이고 이것은 더욱 철저히 해야 할 과제다.

또 기소문은 "정권 투쟁에의 집념, 오도(誤導)된 현실 비판 등에서 비롯된 대정부 불만을 버리지 못한 채 민주 구국(民主救國)이라는 미명 아래 갖가지 대정부 투쟁을 계속하여…… " 또는 "간헐적인 반정부 선동만으로는 정권 투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정권욕(政權慾)에 급급해 있는 일부 반정부 분자 및 해직 교수 등 현실 비판 세력을 통한 끝에 현정부를 축출하여 5천만 온 겨레가 새 역사 창조에 발 벗고 나서기 위해서는 31운동과 419에 쳐들었던 아시아의 횃불을 다시 쳐들어야 한다는 선동적 구호 아래……"

정권투쟁? 정권욕? 그래 정권욕에 불타면 이번 선언을 기초하고 주동하였던 문익환 목사가 8년간이나 구약성서를 번역하기를 몰두하고 있었을까? 그렇게 해도 정권이 굴러떨어지나? 아니다. 우리는 31운동에 나섰던 그리스도인처럼 어떤 욕심도 없다. 그저 애족(愛族)의 충정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이문영(李文永)씨가 말한 대로 계산할 줄 모르는 순박한 행위였다. 이 점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는 "한편 현정부를 국제적 궁지에 몰아 넣을 목적 아래"라는 구절이 있다. 종이 한 장으로 이 정부가 국제적 궁지에 몰린다면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는 증거밖에 안 된다. 아니, 누구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음모를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아니, 그럴 여가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국제적 고아' 됨을 걱정해서였다.

31절에 이대로 앉아 있는 것은 구국선열들의 피를 땅에 묻어 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 구국 선언을 내외에 선포했다고 우리를 구속 기소한 것은 너무도 억울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을 감사했다. 까닭은 우리도, 31운동을 일으키다가 고초 끝에 투옥되었던 분들의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앉아서, 그들이 먹던 콩밥, 그들이 당하던 수모를 당하면서 그 선열들의 대열에 뒤늦게나마 참여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옥중에서 그 찬 마루, 그 콘크리트 벽을 보고 만지면서, 또는 그 똥통에 우두커니 앉으면서, '여기 우리 선열들의 손과 몸이 닿았겠지', '여기 그들의 원한과 애국 충정의 숨결이 남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그들과 함께 숨을 쉬거나 하듯 1919년의 선열들과의 일체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카톨릭, 신교의 지도자들과 함께 법정을 드나드는 동안 수난의 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을 그렇게 느낄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사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법정에서 그 쟁쟁한 변호사들과 청중들과 함께, 우리를 신랄히 고소하는 검사들과 마주해서 그 때 세상에 있지도 않았기에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재판 장면 즉, 일제(日帝)의 재판정에 당당히 민권(民權)과 주권(主權)을 주장했던 그 때의 장면을 연상하면서 18명이 아니라 31절에 투옥된 9,456명과 함께 섰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때 체포된 46,306명과 함께 아니, 200만 명의 아우성 소리를 함께 듣게 했다.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사건을 일으키는 손이 역사라고 보게 되었고, 그래서 '사건의 신학'이라는 주제를 더 확실하게 했다.

결론

바울은 "악한 것은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것은 미워해야 하기에 우리 정책에 대해 비판을 하고, 유린당하는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한다.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선을 위한 것, 바로 그런 입장에서 있다. "환란을 참으며 꾸준히 힘써 하시오"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이것은 정권 쟁취를 위한 빙자가 아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써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도모하시오"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는 증오일 수 없다. 오직 우리가 믿는 선(善)의 관철 때문에 악(惡)과 악한 구조와 인간을 구별하면서 비판한다. 그것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시어"라는 말씀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악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악한 방법을 쓰게 되면 스스로 악에 지는 것이기에 선한 방법을 쓴다.

그럼 지금 우리가하는 일은 무엇인가?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오"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금요 모임은 고생하다 출옥한 자를 맞아 기뻐하고, 쫓겨났던 노동자들이 직장을 얻으면 기뻐하며, 직장에서 축출되고 인권이 유린되고 옥중에서 찬 마루에서 얼고 있는 친구들과 그 아빠, 그 남편 때문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을 못하게 하는 정부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모임에 수십 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감시하는 이 분위기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정부라고 하겠는가? 이런 모임에 가는 사람들을 강제로 차를 태워 억지로 세 시간 이상의 드라이브시키는 행위를 선(善)하다고 볼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까닭은 "희망 중에 즐거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까닭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미미한 기도와 행위를 어느 때 하나님이 사건화(事件化)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또다시 "아! 신천지(新天地)가 눈 앞에 전개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는 지나가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오도다"고 예지(豫知)한 선언이 카터의 입을 통해 다시 들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터를 믿지 않았다. 그는 여명이 오니 어쩔 수 없이 울어야 하는 첫닭일 뿐이다. 우리는 여명을 오게 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즐거워 한다.

(1977년 31절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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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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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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