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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우리 역사상 학생들의 힘으로 처음 정권을 정복한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이 짧은 시간에 여러분에게 비록 단면으로나마 그 산 모습을 전달할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나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으므로 신문과 그리고 내가 그들과 더불어 산 경험을 통해서 나의 상상을 동원하여 그들이 일으킨 이 엄청난 사건의 의미를 파악해 보려고 합니다.

가부장 통치를 시도한 이승만

유럽에서 희랍 문화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동안에 한국에 있어서는 중국의 문화가 그와 같은 비중의 역할을 했습니다. 유교가 바로 그와 같은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유교적인 입장에서는 민주주의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까닭은 유교에 있어서는 서구에서 말하는 의미의 자유라는 사고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정 정치적 제왕 체제가 전 역사를 통해 지배했는데 이러한 체제 밑에서는 국민은 자주적인 인격이라기 보다는 복종을 제 일차의 의무로 하는 신하일 뿐입니다. 신하의 복종은 법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한 것입니다. 왕은 바로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국민에게 제한없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제는 가정 안에 있어서 가부장 제도와 맞물린 것으로 아이들에게는 복종만이 의무일 따름이고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권한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 안에서의 자유란 도대체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심지어는 결혼은 일생을 지배하는 것인데도 저들에게는 그 동반자를 선택할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정해주는 대상을 나이나 미, 그리고 그의 외적 용모 따위가 어떻든지 간에 무조건 자기 동반자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집에서만이 아니고 집 밖에서도 자기 아버지를 대하듯 모든 어른들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그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유교적인 전통이 서구 문명이 들어와 학교의 제도가 서구화되었을 때에도 근저에 깔려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선생에게 절대 복종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선생은 왕과 아버지와 더불어 강요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선생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전에는 학생들이 선생의 그림자를 밟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외적인 것은 달라졌어도 기본 자세는 바로 그런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번에 축출당한 이승만 대통령도 바로 이런 시대, 그와 같은 상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청년기에 미국에 가서 미국 교육을 받아 학위까지 받고 거의 40년 가까이를 민주주의 사회로 자부하는 미국에 살았으나 이러한 낡은 사고에서는 결코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처음 우리가 새 나라를 시작할 때 헌법은 민주 사회의 그것에 별로 뒤지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은 마치 이 헌법과 법률 위에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모른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분단 상황에서의 반공이라는 것을 이 같은 독재를 가능케 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국민에게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을 잘 몰랐으며 더군다나 젊은 세대, 특히 학생들이 어땠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새 세대의 저항

제2차대전 이후에 청년들에게 공산주의가 풍미했는데 특히 학생들에게 그랬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봉건적 사고와 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주의에 대항한다는 면에서 쉽게 그들의 공통 분모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산주의가 아주 이상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저없이 공산주의적 투쟁의 전선에 섰던 것입니다. 모든 대학들 특히 서울대학은 이론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무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열망했던 해방은 38선이라는 분단을 가져왔고 마침내 남쪽이 단독 정부를 수립함과 동시에 북쪽도 소련의 지원 아래서 공산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 결과가 결국 한국전쟁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인데 그것은 사상적인 면에서만 보아도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남한은 남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재빠르게 공산군에게 점령되어 약 3 개월간 공산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학생들이 그들이 이론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몸으로 체험하는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저들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죽음 아니면 자유를 달라고 외쳤던 것인데 그와같이 희구하던 자유는 공산 정권 아래서 경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점차 그들은 자유와 죽음이 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한의 정부가 민주적 자유의 정부로서 바르게 다스려져야 한다는 방향에로 저들의 사고가 변화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이 전쟁 이후에는 공산주의적 젊은 청년들은 표면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상황에서 이승만 정치는 저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다음 두 가지 갈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경향이 농후해졌습니다. 하나는 저들 중에 많은 부분이 이기주의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게 개개인의 자유를 찾은 것입니다. 이들에게 선호된 것은 실존주의였습니다. 니체,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싸르트르, 까뮈 등등이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는 이것이 건전한 귀결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진지한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도피 현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또 일부는 그들의 소원을 교회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 현상은 반드시 한국전쟁 이후에 시작된 것만은 아니나 폐허 상태에 빠진 전쟁 중에 그리고 그 뒤에 현저해졌습니다. 그때 많은 지식인들, 특히 학생들이 교회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이 실망은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조직된 교회가 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조직된 교회에 속하지 않고 직접 성서를 연구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졌습니다. 한동안 놀라울 정도로 대학이나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성서 연구 그룹들이 많이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신학적인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그들은 신학생 자체보다도 더 열렬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저들은 어떤 해결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안에 있는 외래적인 요소들을 저들은 소화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구에서처럼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신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저들은 천여 년의 피와 살이 된 유교나 불교를 기독교보다 저열한 종교로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저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길을 동의 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리라고. 저들은 예수를 화육한 개인으로 믿을 수가 없었고 오직 인류를 선도하는 선각자라는 정도로 만족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진리이다'라고 했던 그 '나'가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목사 아닌 지도자 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위에서 말한 그런 학생들이 그리로 몰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저들은 저들의 전통적인 사고 세계를 거부했습니다. 저들은 그 이상 어떤 귄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적극적인 방향을 발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위해서 자유를 향유하려고 했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거의 허무주의로 나타났습니다. 구세대들은 이들을 전후 세대라고 규정할 뿐 그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구세대가 큰 충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투쟁의 현장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지난 5월에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정부의 당은 선거전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경찰권을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부정선거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저 선거 아닌 선거를 통하여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다시 전과 같은 일상 생활이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남쪽 한 도시에서 일요일에 야당의 후보가 선거강연회를 준비했습니다. 그것이 일요일이었는데도 정부는 그 강연회를 방해하기 위해서 모든 학생들을 등교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강연회를 무산시키고 그들이 비판의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학생들은 그 전까지만 해도 순한 양처럼 보였는데 마침내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학생들은 마침내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행진했습니다. 그 플래카드에 쓴 내용은 '우리를 건드리지 마라' 또는 '학생을 정치의 도구로 삼지 말라' 또는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등등이었는데 그날의 시위 학생은 무려 2,000여명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대학생이 아니라 중고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저들의 시위를 가로막으려는 경찰과 격렬한 투쟁을 벌여 서로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분노의 불길을 점화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어떤 한 작은 도시에서는 40명이 다쳤고 12명이 사살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선된 것입니다.

이 때에 대학은 아직도 방학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학과 더불어 학생들은 각 대학에서 이 불의와의 투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슬로건은 '독재자는 물러가라', '우리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등등이었습니다.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정부 청사로 몰려가고 대통령 관저로 진격했습니다. 경찰이 이것을 막았으나 처음에는 저들과 정면 충돌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방어망이 뚫림으로 위기를 의식한 저들은 실탄 사격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쓰러지면서도 계속 죽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진군했습니다. 그때 저들이 부른 노래는 '우리는 우리의 동료의 시체를 밟고 진군한다'였습니다. 그 방향으로 몰려간 학생들은 약 8만 명이었는데 그 중에 200명 가까이가 사살을 당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때까지 일반 국민들은 그저 구경꾼으로 보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교수들의 일부가 거리로 나와 행진을 벌인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학생들과 시민들까지 합해서 약 50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를 누렸습니다. 결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이것을 진화하려고 했으나 군대들마저도 이 시위대에 정면 충돌할 것을 회피하므로 마침내 이 늙은 독재자 이승만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419 학생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이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 큰 기대를 겁니다. 까닭은 단순히 그들이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유를 남용하지 않고 인간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행동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의 항복과 더불어 저들은 곧 그들의 분노를 멈추었습니다. 저들은 결코 복수의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들은 무산된 경찰을 대신하여 거리의 질서를 책임지고 투쟁을 통해서 어지러워졌던 모든 것을 바로잡자 저들은 자기들의 대학으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돌아갔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승만이 대통령이 아니고 하나의 시민으로 대통령 궁을 떠날 때 저들은 그들의 최대의 존경을 나타내면서 '오래 사시오. 우리 할아버지'라는 환호를 올렸던 것입니다. 저들이 한때 분노를 참지 못해 이승만의 동상을 밧줄로 매서 거리로 끌고 다녔었는데 힘없는 노인으로 항복한 순간 이렇게 태도를 돌변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대로 한다면 무사도적인 행위라고 칭찬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저는 신문에서 한 기사를 읽다가 눈물에 젖는 감상에 빠졌습니다. 모든 병원은 시위대에서 시위하다가 다친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습니다. 그중의 한 학생은 의사가 치료하려고 할 때 자기 뒤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는 훨씬 젊은 학생들이 누워 있습니다. 저들은 아주 재빠른 치료가 필요합니다. 나는 저들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 그는 평화스러운 얼굴을 한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들은 오직 자유를 위해서 싸웠을 뿐입니다. 저들은 어떤 정파에 속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미국 아니 소련 등에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때때로 저들은 미국을 비난했습니다. 까닭은 미국 정부가 이승만을 결코 민주적인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이승만에게 권력을 장악하게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이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위기 때마다 그들의 본질을 잘 드러냈습니다.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지금까지 저는 한국의 학생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그것을 갈망했다고 말했습니다. 자유는 세계의 평화를 전제로 합니다. 까닭은 참 자유는 평화 없이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젊은 세대들이 홀로 그들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우리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 이 작은 새우 한국은 큰 두 고래들 사이에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바로 이 강대 세력의 불장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얄타 협정을 저주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 상인의 협상의 결과라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저들이 입으로는 언제나 영원한 평화를 말하면서도 어떻게 한 민족을 이렇게 찢어놓을 수가 있을까요. 이 두 세력이 지금 베를린 문제에 대해서도 마치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들으면 고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미 두세 살 먹은 아이라도 이러한 난관이 곧 올 것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역시 한국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누가 500만이라는 사람을 죽인 한국의 전쟁을 유발하고 조절했습니까.

나는 양대 세력을 심판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내가 말하려는 것은 오늘의 한국 사람들은 세계 두 강대 세력에서 해방되어서 제 힘으로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운명은 세계 평화와 유리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계에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민중과 더불어 전체 인간 세계를 위한 참자유를 위하여 함께 전진할 것을 외칠 뿐입니다.

(1960. 5.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강연)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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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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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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