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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419 희생자 어머니의 절규

책가방을 들고 맨주먹으로 독재와 맞서 싸운 의로운 피가 아닌가. 그 피가 헛되지 말아야겠는데, 그 피로 이 강산이 평화로워야겠는데, 그래서 아름다운 이 나라가 되어야겠는데, 내 아들의 피가 온 국민이 바르게 잘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야겠는데, 그래서 그 슬픈 역사를 두 번 다시 재연하지 말아야겠는데…… 참으로 밝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되었다는 소리가 나와야겠는데!

이 어미가 외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10년도 좋고 20년도 좋다. 3선도 좋고 4선도 좋다. 아니 그 생명 다하도록 영원히 정권을 잡아도 좋다. 419 혁명을 혁명이 아니래도 좋고, 516 밑으로 내려놓아도 좋고, 겉치레의 모든 행사를 완전히 말살해도 좋다. 문제는 무너진 이(李) 정권 때처럼 부정 부패 운운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최소한 이(李)정권 때보다는 살기 수월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상은 바로 419날 희생된 한 고등학교 학생의 어머니가 10년 후에 발표한 절규와 같은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흔히 419를 순수한 혁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책가방을 쥐고 맨주먹으로 독재와 맞서싸운 의로운 피"라고 한다. 깨끗하고 의로운 죽음이라는 신념이다.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보다 나은 조국을 이룩하기 위해 바쳐진 희생의 제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절규하는 것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원망이 아니라 이 사회가 이승만 정권 때와 달라진 바 없이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419정신은 516 군사 쿠데타로 그 순이 잘려졌고, 다른 형태의 권력욕이 계속 모든 생명을 억압질식시키고 말았다. 이 새 권력욕은 419의 정신을 격하시켰을 뿐 아니라 한번 잡은 권력을 영구히 누리기 위하여 헌법을 뜯어고치는 폭력 정치를 초래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친 어머니는 힘없는 서민으로서 이같은 상황을 직시하고 절규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제는 무너진 이(李)정권 때처럼 부정 부패 운운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이(李)정권 때보다는 살기 수월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라고 외친 이 어머니의 애원은 그 후 15년이 지난 이 시점에 와서 과연 달라졌을까. 419 혁명을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는데 이 순간에도 학생들은 쉬지 않고 희생을 무릅써가며 이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사실을 그 어머니는 어떻게 해석할까. 자기 아들의 죽음이 아무 값없는 개죽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원망할까, 아니면 오늘의 학생들을 힐책할까. 그것은 419와 우리의 현실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419의 정신을 보는 세 가지 시각
민주주의에 대한 낭만적 갈망의 노출

419 정신을 측정하는 데는 세 가지 시각이 있다. 이 시각은 419를 시기적으로 구분하는 데 따라서 달라진다.

첫째는 315에 시작되어 419에 절정을 이루어 마침내 이승만 정권이 항복한 시기까지로 끊어서 보는 시각, 둘째는 419의 주도 세력인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뒤 학원으로 돌아갔다가 민주당 정권의 정체를 인식, 또다시 재기하여 민족 통일에로의 의지를 행동으로 구현하려다가 516 군사 쿠데타로 좌절되었을 때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는 시각, 셋째로는 보다 긴 역사적 맥락에서, 적어도 민중운동의 근대적 출범이라고 볼 수 있는 갑오농민운동에서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민중 운동의 맥락에서 보는 시각 등이다.

첫째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은 419는 결코 혁명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학생들의 구호는 부정과 불의를 규탄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고조됨에 따라 이(李)정권의 퇴각을 요구한 것이다. 저들의 분노는 기존 헌법에 의해 규정된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고, 민주주의의 기초인 선거가 법 질서대로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저항이었다.

이렇게 보면 419 학생 봉기는 기존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궐기한 사건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갈망의 노출이었다. 학생들은 부패한 독재 정권이 물러서면 살기좋은 민주주의 질서가 곧 실현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 수립에 대해서는 이정권의 반대당이었던 민주당에 내맡기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까지를 419로 본다면 그 정신은 보수성에 있다고 할 것이며, 학생들이 기존 체제를 보존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 419라고 규정하면 될 것이다.

이 정권 퇴각에서 민족 통일로

그러나 둘째 시각에서 보면 419 정신의 뜻은 달라진다. 이정권의 퇴각을 요구하던 학생들의 절규는 민족 통일로 바뀌어졌다. 이러한 전환은 우리가 처해있는 민족적 비운의 실상을 근본적으로 재인식한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서도 기본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의 재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저들이 싸워서 넘어뜨린 이정권의 정체를 뒤늦게나마 새롭게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좌우남북 등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살 길을 찾는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에 들어와서 민족적 화합을 모색하기는커녕 민족 대다수의 비원을 물리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 민족 분단을 고정화시켰다.

그가 내세운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이었다. 이것은 일제가 부르짖었던 구호의 계승이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 구호였다. 이승만은 누구와 더불어 이같은 일을 감행했는가. 그는 한국땅에 들어와서는 어떠한 민족 운동의 정통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임정(臨政)도 건준(建準)도 상대하지 않았다. 오직 미군을 내세웠을 뿐이다. 여러 측면에서 보아 저들은 한국땅을 우리 민족의 삶의 자리로 보지 않고 소련과의 각축장으로 삼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바로 이 미국의 정책에 호응하여 우리 민족을 반공의 십자군화하려 했으며 마침내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한편 권력욕의 화신인 그는 외적으로는 반일을 주장하면서도 사실에 있어서는 친일파와 손을 잡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은 망했으나 친일파는 이승만을 등에 업고 상존했을 뿐만 아니라 나날이 번식해 갔다. 민족 정기를 바로 잡겠다던 반민 특위도 이정권의 압력으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정권과의 싸움은 단순한 부정 선거에 대한 저항이거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차원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의 생존권과 자주 독립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그 싸움은 이정권이 항복하는 것으로 종결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민족 분단의 비극이 그대로 38선으로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남북 통일이라는 새로운 구호를 제기했던 것이다. 저들의 제2단계 싸움은 구호에서 행동으로 옮겨져 마침내 행동적인 운동 체제를 조직하기까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불로소득으로 정권을 이양받은 민주당이라는 존재의 체질을 인식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민주당 역시 민족 통일의 주체가 되기에는 결함이 많은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체 내에 잠재한 식민 세력의 잔재들을 청산하지 못했으며 통일문제에 대해 적극성을 띠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새 정권에게 통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자신들이 직접 통일의 주체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을 보는 눈이 점점 밝아진 증거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419 정신을 파악하는 것은, 민주당 하에서 516 군사 쿠데타에 이르기까지의 학생들의 주장이나 의식에 한정시키는 경우, 편향적이며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며, 셋째 시각에서 볼 때 비로소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인권적 민족 운동의 성격

인권적 민족 운동의 맥락에서 419의 정신을 찾아보자는 시각은 419 주역들에게서 표출된 계획이나 의식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이 저들이 민권적 민족 운동사에서 어느 마당을 차지했는가를 묻는 일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민권적 민족 운동의 대단원은 이미 말한대로 갑오 농민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갑오 농민 봉기는 그 동기에 있어서 419와 유사한 점이 많다. 둘 다 계획적인 봉기가 아니라 부정한 정권의 포악성이 그 촉발점이 되었고, 그 운동은 탄압과 더불어 점점 가열되었다. 농민 봉기가 한 고을 군수의 비리와 부정에 항거한 것이 도화선이 된 데 대하여 419는 대구(大邱)에서 야당 대표의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중고등 학생을 소집한 데 대해 항거한 것이 촉발점이 되었다. 둘 다 저항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원한을 점진적으로 의식화 또는 확대시켜 나갔다.

농민 봉기가 의식을 가진 동학교도 중 전봉준을 위시한 농민 대표들이 농민의 원성을 수렴하여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 전국적인 사건이 된 것처럼 419는 월여(月餘)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서울의 대학생들이 이 저항 운동을 이어받아 구체화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둘 다 기존 체제에 대한 입장을 확고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농민 혁명 주체들이 착취의 본산인 왕권 체제에 대해 불투명한 태도 설정을 했던 데 대하여 419 주체들 역시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가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 있다. 농민 봉기가 생산의 주역이면서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 자신에 의해서 감행된 데 대하여 419는 삶의 근거인 생산권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생존적 위협도 받지 않는 학생들에 의해서 감행됐기 때문에 낭만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419 혁명을 '대리혁명'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옳은 견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건은 한 역사적 맥락에서 파생된 불가분의 사건이다. 먼저 농민 봉기를 보면 이를 기점으로 민권적 독립 운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점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독립협회운동, 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 31운동, 광주학생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 사건들을 하나하나 독립시켜 볼 때는 어느 것도 성공한 것이 없다. 농민 혁명은 외세에 의해서 짓밟혀졌고 다른 운동들도 폭력에 의해서 좌절됐다. 419도 비록 한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사회 개혁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그 역시 군사적 폭력에 의해서 중단됐다.

그러나 이 사건들이 한 커다란 화산맥(火山脈)에서 연쇄적으로 폭발된 사건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사의 밑에 깔린 중심적 염원이 큰 맥을 이루어 연쇄적으로 표출된 것이 되며, 그렇게 볼 때 419도 성공 여부를 물어 평가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기 구현의 한 장을 차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일단락된 것이 아니라 그 성취의 순간까지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419를 농민 봉기와 함께 혁명 운동의 한 단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때서야 제2의 시각에서 본 해석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419 정신과 오늘의 현실

419는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는 419를 회고하면서 구태여 미숙성이니, 미완성이니, 낭만적이니, 한계성이니, 심지어는 무책임성, 무사상성 등등으로 그 의의를 상대화하는 말장난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후 계속되는 학생 운동을 419 정신의 연장이라고 보고 또다시 419와 같은 학생이 주동이 된 혁명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러한 기대에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419 당시와 비교해 현재의 사회 현상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이 사회의 구성의 변화이다. 그중에서도 권력 체제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419의 학생 운동이 낭만적이었다면 자유당 정권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권력 체제는 제도상으로나 기술상으로 전혀 다른 수준에 있다. 이른바 테크노크라시라는 새로운 통치 장치가 발달, 민의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권력 유지가 가능하게 되었다. 박정권이 횡포의 극을 치달렸을 때 학생의 저항 역시 치열했으나 그 정권은 결코 학생들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419 당시에는 농민을 제외하면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가진 집단으로서 학생만한 층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을 통하여 소비 사회로 급전환했고, 안정을 바라는 중산층이 형성되어 체제 유지의 중요 요소로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노동계층이 우리 인구의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덧붙여 종교계, 특히 기독교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양적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화된 계층이 두터워졌다. 또 기성 세대 내에 있어서의 민권 운동도 크게 성장, 발전되었다. 한마디로 민권 운동의 주체 세력이 다원화되는 현실에 돌입했다고 하겠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국민 운동의 주도권을 학생에게만 기대하는 현실은 이미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게 우리의 사회 구성 요소가 엄청나게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학생 사회는 419 때나 오늘이나 같은 조건 밑에 있다. 학생들은 생활 권에 뿌리를 갖지 못했다는 점, 학생 성원 모두 과도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 어떤 운동의 주체로서의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점 등등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 학생 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으나 대학이라는 체제를 전제하는 한 그 한계성들을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419 정신을 이어받을 집단은 언제나 학생 자신이라는 전제에서 오늘의 학생운동을 평가하거나 또는 그런 기대를 계속 가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419 정신은 다른 계층에 의해서, 다른 현장에서 계승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믿어야 된다.

419 정신의 핵, 자유

우리는 위에서 419 정신의 여러 측면을 말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꿰뚫는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역시 '자유'일 것이다. 자유! 이것만큼 학생의 위치에서 어울리는 지표도 없을 것이다. 이 자유는 민족의 자유, 민중의 자유를 통하며, 사회 각 구성원들이 각기 제자리에서 이 자유를 쟁취하는 운동을 펼 때 우리가 염원하는 진정한 민족사회가 열릴 것이다.

요즘 정부가 학원의 자율화를 거듭 약속하며 점차적으로 구체화하는 기미가 보이는데, 이것도 419 정신에 의한 투쟁의 열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학원의 자율화는 요원하다. 그것은 학원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니다. 어느 영역을 막론하고 모두 자율화의 길로 가야 한다. 그런데 자율화가 학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말 학원의 자율화가 실현될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419의 승리이며, 파생적으로 각 분야에로 파급될 수밖에 없는 수문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1천만을 육박하는 노동자들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보장되지 않고는 건전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419는 몸으로 이 자유를 쟁취한 산 정신이다. 이 자유는 가로지르고 들어온 권력에 의해 사정없이 유린됐지만 학생들은 집요하게 이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 이것은 사회 각 분야에 점화될 것이다.

그러나 419가 내세운 자유 정신은 자기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 싸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노동자의 자율권은 노동자 스스로가 그 생존의 현장에서 찾아가져야 참 제것이 될 것이고, 언론의 자유는 언론 현장에서 붓을 든 집단 스스로가 찾아가져야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희생도 각오해야만 한다. 그런데 현금의 학생들이 학원 외의 문제들을 모두 끌어들여서 해결하려는 자세가 만일 419 정신의 계승은 그들만이 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서 온 것이라면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학생은 자기의 현장인 학원의 자율화를 성공시켜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각 분야마다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싸우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학생 집단이 유일한 419의 계승자로 자부하여 모든 일을 주도하려고 든다면, 그럴 능력도 없지만, 학원 자체가 공전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누가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419는 높이 찬양되고 있지만, 그것이 학생들 자신을 위해서 결코 다행한 사건은 아니었다. 또 국민은 계속 학생에게 희생의 제물로 앞장서주기를 원치도 않는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거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큰 까닭도 있지만 자기 분야의 자율성을 침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생 운동이 지속되는 이유

419의 직접 원인은 학생을 정치적 목적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데에도 있었다. 해방 이후 학생들이 정치적 목적에 얼마나 많이 동원됐으며, 학원은 계속된 지시 일변도의 문교 정책에 얼마나 병들었던가. 그러면서도 역대의 정권은 필요할 때면 학생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는 식의 구두선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그럴수록 학생들의 관심의 범위와 관여의 폭은 넓어져 갔고 또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은 물론 시민들도 박수를 보낸 것이다.

사실 정부뿐 아니라 뜻있는 기성충도 학원의 소요를 크게 걱정하고 있다. 정부는 학원의 '소요'를 막기 위해 막대한 경찰력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왔다. 학생들은 왜 학원 외의 문제들을 내세우면서 국민의 선각자로 자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회 각 분야의 기성층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 학생들이 정당을 점유하며 노동자의 투쟁 현장에 달려가는가. 그것은 정당이 국민의 뜻을 대변해야 하는 제구실을 못하며 노동자가 자율권을 제 힘으로 못 찾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학생들이 계속 유인물을 만들며 유언비어 속에 살아야 하나. 그것 역시 언론인들이 알려야 할 것을 사실대로 알리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원의 '소요'를 해결하는 길은 기성 세대들이 각기 자기 분야에서 '자율'할 수 있을 때만 이룩될 것이다. 대학에서 교수들이 학생에게 무시된다면 어떻게 학원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런데 그런 풍조가 있다면 그것은 교수들이 자율권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학생들이 영리해졌다고 해도 교수들의 지적 수준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수들에게 사상을 표현하는 자유가 없게 되면 결국 학생들에게 무식한 구세대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아무리 사회에 민감하기로서니 노동자 자신들만큼 생존을 위협하는 조건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기 문제를 해결할 자유가 없으므로 학생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419 정신은 학생들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과 그런 의식이 계속되는 것은 학원의 자율화를 쟁취하는 데 도움이 못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학원소요'를 걱정하는 정부에 권하는 것은 '학생의 본래 자세'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비리를 권력으로 눌러 은폐하는 폐습을 하루속히 지양하고 자율화해서 '어른들은 역시 어른이구나' 하는 판단이 학생들에게 생겨질 수 있도록하는 길밖에 없다는 점이다.

어떤 위정자는 서구 학생들은 한동안 그들의 힘을 강력하게 과시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잠잠해졌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왜 그렇지 않은가 하고 통탄하는가 하면, 서구에서처럼 곧 '진압'될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너무도 피상적인 비교이다.

서구에서는—일본을 포함해서—언론이나 노동조합의 자율권이 보장돼 있기 때문에 기성 세대의 세계가 적어도 학생이라는 신분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을 만큼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이 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더 큰 문제들을 못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민 사회가 그런 큰 문제를 위해 싸워주고 있으며, 국회가 학생들이 생각하는 수준만큼은 문제들을 수렴해서 정치에 반영하는 자율권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만 주저앉고 만 것이다.

말하자면 학생보다 사회 전반이 앞서 가므로 스스로 한계를 느껴 자연스럽게 후퇴해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이슈도 있다. 그것은 학생 고유의 영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기성 사회가 양보하고 개선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국회가 제구실을 못할 때 학생들이 국회의 임무까지도 담당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할 수 없으면 학생들이 직접 노동 현장에 뛰어들며, 언론이 눈치만 보고 있으면 결국 몸으로라도 자기들의 뜻을 시위해야 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한 학생들의 민감성을 민족애의 발로로 보고 가상하게는 못 여길망정 함부로 어떤 불순 세력으로 규정한다면 학원의 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

결론적으로 419 정신이 학생으로 하여금 학원에서 자기 분야에 몰두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사람됨을 형성하는 데 장애 요소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정신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국제경쟁에서 낙후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19 정신은 학생들이 아니더라도 계속 우리 역사 속에서 민족 통일의 그날까지 생동될 것이다.

(『신동아』 198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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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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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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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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