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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1. 독일 기독교의 민족 이해

민족이라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틀에서 절대화한 예로서는 일차대전 직후 독일 일부 교회 운동을 들 수 있다. 이른바 '도이체 크리스텐'(Deutsche Christen) 운동이 그것이다. 1927년에 마련된 기본 주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 독일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힘을 믿는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그의 투쟁과 고난의 길이 동시에 사랑과 삶의 길임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독일 민족의 피와 운명체 속에 속하게 됐으며, 그의 미래를 위해서 이 운명의 멍에를 진 자로 책임이 있다. 독일은 우리의 사명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능력이다……독일 법의 완수의 길이 바로 신앙하는 독일 교회다 …… 한 민족, 한 하나님! 한 나라! 한 교회!"

1933년에는 2만 군중이 베를린 체육장에 모여서 다음과 같은 선언을 했다.

교회는 번영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본향 의식(Heimatgefühl)이 필요하다. 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와 고백에서 모든 비독일적인 것을 제거해야 한다. 구약과 그 안의 유태적 응보 도덕과 목동과 음란한 역사에서 해방돼야 한다……우리는 유대교 선전과 싸웠으며 앞으로 계속 싸울 것이다. 유대의 피가 섞인 자는 독일 민족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사가 될 수도 없으며 신자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목사된 자는 사라질 것이다……우리는 위대한 예수의 정신과 북독(北獨)의 정신의 동일성을 경험한 것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완성이 오리엔트의 물질주의에 대한 북독 정신의 승리가 됨이 천하에 밝혀질 것이다.

이들의 민족주의는 빠른 속도로 배타적 독선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국제성을 지닌 모든 것에 대항하게 됐다. 그런데 이들은 이른바 크리스천들이다. 저들은 히틀러의 민족주의에 현혹된 것이다. 히틀러는 집권과 더불어 신구교의 담을 헐 것을 권했고 독일인 민족의 윤리 생활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교회는 냉정했으며 교회의 조직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그는 교회의 세력을 교란, 마침내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무명의 목사인 뮐러를 총감독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라디오를 통해서 독일의 신교가 하나가 되어서 민족 부흥의 대과제 앞에서 제 할 일을 다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함과 더불어 폭력으로 교회를 한 손에 휘어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폭력적인 억압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많은 신학자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뜻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민족에 대한 성서적 또는 신학적인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세 가지 타입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먼저 낭만적이상적 민족주의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민족을 신의 자기 현현 양식이라고 함으로써 초개인적인 공동체 또는 유기체로 본다. 피히테, 슐라이어마허, 헤겔 등의 민족관이 이에 속한다(1차대전 이전의 독일 민족관). ② 이에 대해서 민족을 자연적인 근거에서 생물학적으로 파악 함으로써 개인은 이 공동체와 숙명적으로 직결됐다는 주장이다. 흙피 등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19세기 후반의 독일 민족관). ③ 이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창조 사상을 이용하여, 민족은 창조질서이며 그 소산이라는 사상을 근거지웠다. 이런 전제에서 독일 사회의 특징적인 민족적 그리스도교 윤리를 만들어냈다.

이 같은 전통을 받아서 저들은 민족적 불운 속에서 쉽게 저들이 배척한 히브리적 선민 사상과 메시아 사상에 점화되어서 마침내 "우리 민족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독일 사람, 독일의 운명 안에 하나가 됐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사명이며 그것을 위해 싸운다"고 외치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진심으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영도자, 하나님이 내게 준 영도자!
오래오래 튼튼히 서라.
그대는 깊은 고난에서 독일을 구원했도다.
오늘의 양식을 위해 그대에게 감사한다.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고 나를 버리지 마라.
영도자! 나의 영도자! 나의 신앙! 나의 빛!
만세, 나의 영도자!

그러나 이런 것에 매혹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른바 고백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 저항의 최초의 소리가 21명의 목사들의 이른바 '알토나의 성명'(1932년 발표)이다. 이 성명은, "① 교회가 그의 선교를 어떤 정치적 힘에 예속시키면 결국 반그리스도적 종교로 된다. ② 어떤 정당이든지 인간의 힘으로 영원한 복지를 약속하면 그것은 종교화된다. ③ 우리는 국가의 신격화를 배격한다. 국가의 권력을 양심의 주인으로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다. ④ 나치 정당은 이미 정치적 고백이 됐기에 배격한다. 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예속됐으며 그에게 복종한다"고 했다. 이 선언문은 민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그 무엇이거나 절대의 자리에 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민족이 신의 자리에 설 수는 없다는 선언이다. 1934년의 '발멘선언'도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외에 아무것에도 예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은 결코 고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36년 이른바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을 향한 고백교회의 각서는 신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비기독교화의 길로 달리며, 이른바 '실증적 그리스도교'(positives Christentum)라는 이름 밑에 민족의 이익을 위한 기독교를 말함으로써 민족을 신격화하는 것 등을 비판하고, 나치 정부가 무제한적으로 그들의 세계관에 그리스도교 교회를 예속시키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피종족민족명예 등을 불멸의 것으로 내세우나, 신교의 그리스도인은 첫 계명에 의해서 이런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리안족을 (그토록) 영광스럽게 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믿는다. 나치스의 세계관의 틀에서 반 세미티즘(anti-semitism)*부도덕하고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고 혐오하고 평등한 권리 부여를 거부한 반민주주의적 차별의식위협감 그리고 적의에 찬 태도가 일관되어 있다.을 강요하여 유태인 증오를 의무화하나, 그리스도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명령이 그것을 용납지 않는다." 즉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지상의 명령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1933년 고백 교회의 대회에서 유태인 박해에 저항하였는데, 그 주장은 두 면으로 집약된다. '하나님 앞에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와 '하나님의 은혜의 사신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가 그것이다. 이 성명에서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바울의 말을 강조하고, 한 몸의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아프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체 됨을 선언했다. 이에 대한 '도이체 크리스텐'의 반발에 고백교회는 유태주의는 유태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교회적 운동 속에 있다고 함으로써 교회를 민족의 차원에 감금하려는 자세를 공격했다.

이상의 독일 고백교회의 투쟁에서 드러난 것은 민족 자체의 의미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민족 지상주의가 반그리스도교적임을 강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같은 투쟁은 그때 상황에서는 최선의 길인지 모르나 참을 위한 적극적인 싸움이기보다는 교회의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수세적소극적인 자세였기 때문에 일부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고 또 받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 이해에 대한 정당한 신학적 논쟁은 제대로 싹트지 못했다.

오늘의 독일에 있어서는 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되고 있다. 1968년에 공개된 교회의 회상록인 "분단된 독일의 정세에 부쳐"라는 데서 보면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이제는 분단(Teilung)이 문제가 아니라 분열(Tremmlung)이 문제이다. 둘째, 재통일(Wiedervereinigung)을 할 것이 아니라 다시 친근해짐(Wiederannährung)이 목적이어야 한다. 셋째, 적대 관계에서 상호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의 통일이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는 유럽 전체와 더불어 새로운 이웃 관계로서 피차의 공동의 길을 가도록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독일 기독교 입장이 브란트의 동서 문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성서에 나타난 민족 이해

성서에는 『구약』, 『신약』을 일관해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선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얘기에서부터 민족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족이다(창 18:18, 12:18, 26:4). 이것은 유대 민족사에서 중추 역할을 한 예언자들에게서도 일관되어 있다. 가령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사 25:6-8)라는 것이 그러한 예다. 그런데 여기서 '만민', '모든 백성'등은 'ghoi'라는 복수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말한다. 이 '백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Am'이라는 단수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말한다. 이 예는 인간을 민족이라는 단위에서 볼 뿐 개인으로 보지 않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한다.

이 민족은 신의 질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그 중심에 선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가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8).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단어들은 '국민'이라고 할 수 없고 독어의 'Volk', 동양의 '민족'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국가의 조건인 국토를 잃고 또 정치적 권력을 잃은 이후의 사상이기 때문에 놀랄 것은 없으나 하여간 국가나 국민과 구별된 민족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 증거다. 이 민족은 공동의 숙명체다. 따라서 같은 축복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민족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배반할 때 이 민족을 심판한다.

이들의 불우한 운명과 선민 신앙의 후퇴는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민족 의식을 후퇴시켰다. 그러므로 에스겔 등은 연대 의식을 거부하고 개개인을 신 앞에 내세웠고, 이사야 등은 민족 안의 '적은 무리'의 선택이란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유대교 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을 민족으로 파악하던 전통이 거의 후퇴되고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로 파악했으며, 다른 민족을 종교의 측면에서 이방인이라고 했고, 민족이란 개념을 점점 멸시하는 뜻으로 사용했는가 하면, 일면 민족이라는 말 대신 '군중'(oklos)이라는 말로 바꾸게까지 됐다.

『신약』에 와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다시 중요하게 등장한다. 『신약』 전체에서 약 60회 가량 민족(ethos)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한다. 그런데 약 1백회 가량 『구약』의 전통대로 유대 민족 또는 그리스도 공동체를 다른 민족들과 대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한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마 6:31-32).

복음서의 예수는 유대 민족이라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한다. 초대 교회에 이르러 이 민족의 담을 넘는다. 바울이 그 선구다. 복음은 한 민족의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도 여전히 복음의 대상을 '민족들'이라고 하고 있다는 점과, 또 하나는 유대 민족의 우선권을 끝끝내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은 이방인, 즉 다른 민족들에게 전파되고 결국은 유대 민족도 이 복음으로 돌아올 때에 비로소 역사의 끝이 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유대 민족을 불멸의 것으로 본 것은 아니다. 궁극적 상태는 이 복음 안에서 유대인, 이방인의 담이 무너질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민족 개념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하나님의 민족'이라는 표현이다. 그는 이것을 즐겨 '참 이스라엘'이란 말을 쓴다. 여기서 민족이란 단어는 혈연이나 지연 따위의 조건을 벗어나서 '새로운 공동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참 이스라엘'이란 다름 아닌 교회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몸에 지체가 있듯이 한 민족은 전체의 지체처럼 그 자체로서 할 일이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기독교에서의 민족 이해를 결론 삼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기독교는 민족이라는 공동체적 단위를 존중한다. 그러나 그것은 혈연지연 등의 공동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측면에서만 존중된다.

② 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장이 될 수도 있으나, 동시에 심판의 대상도 된다.

③ 민족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실현하는 단위이다.

④ 민족은 정치체제화된 국가의 국민과 엄격히 구별된다.

⑤ 민족은 궁극적 단위가 아니라 온 민족이 하나님의 새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까지의 과도적인 단위이다.

⑥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민족'은 있어도 '민족주의'는 용납할 수 없다.

(『위기 시대를 사는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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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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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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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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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주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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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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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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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부 통일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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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과 민족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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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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