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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1. 우리나라의 교육의 이념

우리 나라는 천년의 불교 전통과 5백년의 유교 전통을 가지고 내려 왔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형성된 전통사회가 급전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부터다. 그것은 벌써 국운이 기울어졌을 때였으므로 주체적으로 제 갈길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자다가 놀란 사람이 아무 문고리나 잡는 식으로 내디딘 것이다. 우선 일본이 강해졌다. 그것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간단한 결론에서 일본을 통해서거나 아니면 직접 미국으로부터 그 문명을 흡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곧 '신교육'의 이념이 됐다. 그 마당에 우리의 유산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제시대에는 고작 반항을 전제로 한 민족주의라는 것을 암암리에 숨겨 전했을 뿐 사실 일본에 내맡겨진 교육의 공백기였다. 있었다면 풍문으로 듣는 서구문명에 대한 충격뿐이었으리라. 비로소 교육 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대학들이 우리 손으로 처음 세워졌다. 그래 보았자 일제시대에 허용됐던 전문학교들의 이름을 바꾼 정도이고 그것도 자기를 반성하여 자주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미군정에 의해서 그 기틀과 그 교과목이 결정돼 버리는 새로운 식민 교육 기관이었다. 그 때에 우리에게 교육 이념이 있었다면 미국에서 수입된 '실용주의'다. 그것은 미국의 교육 이념이기도 하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후진국인 우리에게는 결국 속알맹이는 다 내놓고 아이가 어른과 도박하는 격이 됐다. 국가는 사람이나 민족보다 '써먹을 인재'를 기르려고 했고 피교육자는 써먹을 것을 배우기 위해 학교로 몰려들었다. 우리의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부 이같은 실용주의에 동의해 갔으나 그 수는 느는 데 반해 혼란된 사회가 끼치는 영향에 항거할 힘이 없었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가 해결 못된 채 혼선을 빚어왔다. 국가는 '써먹을 인재'라고 할 때 미국과는 달리 아직도 향수에 젖은 조국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 조국 건설에 이바지할 인재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선 조국이라는 것과 근대화라는 것은 공존되지 않는다. 스펭글러(Spengler)의 분석대로 한다면 고향, 조국, 종족, 혈족 대신에 대국가, 마음의 종교 대신에 이데올로기, 전통 대신에 실용주의, 민족국가 대신에 국제적 공동체, 대지나 실질적 가치 대신에 돈, 허영, 민족 대신에 대중, 모성(母性) 대신에 여성 등등으로 가치가 이동한다. 그러므로 조국과 근대화란 구두인신(狗頭人身)격이다. 대학을 찾는 자는 국가가 요청하는 인재와는 달리 개인주의적 실리주의자로 탈바꿈한다. 나라니 전체니 하는 것보다는 개인의 출세, 실리 추구가 목적이 된다. 이렇게 되면 대학은 기술습득과 자격증 부여의 기관 이상이 될 수 없기에 이념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기독교대학'이란 특수한 자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실용주의적인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기독교 대학이라는 것이 설립가능한 것이다.

2. 대학의 이념의 본체성

현대적 의미에서의 대학은 서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것을 재확인하는 것은 우리 대학의 방향을 반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서구의 대학 이념을 한마디로 하면 '진리 자체를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실용주의와 상반된다. 이 성격은 그 제도에서도 단적으로 표현돼 있다. 그 기본 학과는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이다. 대학은 이러한 학과가 문제로 하는 진리 자체를 규명할 뿐이다. 학문(Wissenschaft)이란 바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다. 그 결과를 이용하는 것은 대학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술을 습득하는 공과, 상과, 예술 따위와 같은 기술에 관련된 과목은 대학(University) 안에 있을 수 없고 독립시켰다. 대학에는 졸업장도 없거니와 직업을 주는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진리탐구로서의 학문(Wissenschaft)과 기술(Technic)은 엄격히 구별된다. 이런 경우에 그것은 기독교의 기본 입장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았다. '하나님을 위해서'와 '진리를 위하여'는 공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르바 충성의 자리가 있었다. 만일 이러한 전통이 바로만 발전한다면 개인주의는 허용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 '순(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낡은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다. 까닭은 '진리'라는 것이 그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며 그 대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자연법도 될 수 있고, 전체도 될 수 있고, 정의도 될 수 있고, 국가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일관할 수 있는 것은 진리로 포괄된 대상 자체를 위하는 인간 교육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의 대학 체제를 배울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자체'를 위하여 '나'를 바칠 수 있는 인간을 기르는 대학이 되게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대학은 전체의 구심점을(그것은 궁극적인 것이다) 규명하는 장소요, 각 과는 그 구심점의 한 부분을 규명할 임무를 지닌 것이며 학생은 무엇을 배우든지 그 구심점을 위한 일원으로서 한 부분을 담당한 자라는 자각이 있게 하는 일이다.

기독교는 이 궁극적 구심점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 하나님은 개인도 사회도 그리고 국가도 포함하면서 초월한다. 기독교는 국가도 이 전체의 한 부분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런 전제에서 국가는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대학이란 라틴어의 Universitas, 즉 전체(Gesamtheit)다.

3. 기독교와 문화와의 관계

그러면 기독교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하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기독교 대학은 기독교 자체만을 규명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문화와의 관계를 매개하는 장소이기에 문화와의 관계에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다. 이 물음은 우리의 문화와 기독교를 어떤 관계에서 매개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서구의 문화가 어떻게 형성됐을까 하는 것을 간단히 성격화하자. 그것은 헬라 사상과 히브리 사상과의 대립 또는 조화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서구 문명의 발상지는 헬라다. 헬라의 문화가 알렉산드리아의 원정에서 로마를 통해서 구라파로 퍼져 나갔을 뿐 아니라 중동 고대 종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희랍적인 세계관은 그들의 코스모스 세계관에서 본다. 코스모스란 존재하는 것의 전체의 표상이다. 그것은 원의 세계관이다. 있을 것은 이미 다 있는 세계이며 그것을 이끌어 가는 것은 법칙(Nous)이다. 그러므로 진리탐구라고 할 때 그것은 기존의 법칙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기존하는 것이기에 발견(發見)할 수 있으며 객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전제에서 학문은 발견(Entdeckung)의 기쁨과 확신이 있다. 기술이 이 법칙을 이용한다. 그런데 이것은 윤리에도 그대로 적응됐다. 윤리란 기존 법칙을 찾아 그것에 나를 적응하는 것이다. 그 적응성 자체가 동시에 기술이다. 그러므로 덕(Arete)과 기술(Techne)은 동의어가 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동양의 것과 본질상으로 차이가 없다. 가령 유교나 불교는 그 무대를 일차원, 이차원으로 적용한 차이는 있으나 세계관에서는 원의 세계관이다. 그런데 서구 문명은 고도로 타락했고 동양의 문명은 중단됐다. 어디서 온 차이인가? 나는 여기서 기독교가 서구문명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기독교란 좀 막연한 표현이다. 기독교는 벌써 문화 형태를 띤 것이다. 나는 기독교에 포함된 히브리 사상 즉 헤브라이즘을 말한다. 헤브라이즘의 특성을 헬라적 사상과의 관계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관조적이 아니라 행동적이다. 사변적이 아니라 신앙적이다. 합리적이 아니라 역설적이다. 지성적이 아니라 의지적이다. 그런데 이것이 헬라적인 것과의 만남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 동양의 역사관은 헬라와 같이 목적론이 아니기 때문에 윤회적이고 반복적이다. 유교와 불교도 이 점이 같으나 차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고 하모니 속에 몰입되어 침체해 버릴 수 있다. 그런데 서구의 헬라적 문화에 헤브라이즘이 계속적으로 자극해서 역동적이 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다르게 말하면 몸에 박힌 가시와 같이 안주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문화 자체의 발상이 원천이라기보다 계속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극하고 채찍질을 하여 언제나 역동적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동양에는 문화의 온상이 될 수 있는 세계관이 있었고 또 그런 정열도 있었으나 히브리적인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을 발견하고 그것에 몰입되고 쉽게 조화되어 한가한 사변과 안 일에 주저앉게 했다. 그러므로 소재는 갖고 있었으나 그만 잠들 듯이 몰입되어 버려서 중단 또는 반복된 것이라고 본다.

이상의 관찰에 타당성이 있다면 한국의 기독교 대학은 서구식이라는 탈을 벗기 위해서도 그리고 새로운 문화 형성의 선구가 되기 위해서도 동양적인 문화 형성을 살리기 위해서 기독교를 재파악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히브리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이것을 동양적 문화의 소재와 마주서게 하는 일이다. 나는 마르크시즘도 바로 반기독교를 전략으로 내세우면서 히브리 사상을 그들의 선자리의 문화와 마주 세우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물론 마르크스 자신이 그것을 의식했느냐는 별문제이고 여기서 말하는 헤브라이즘은 변질된 것임을 전제한다.

4. 오늘의 기독교 대학의 방항

끝으로 좀 더 구체적인 방향 설정이 무엇이겠는가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에는 크게 세 가지 사조와 그것에 의거한 국가적 정책 방향이 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다. 어떤 나라는 이런 것을 병행시키고 있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다. 구라파의 스칸디나비아는 사회주의, 독일은 이 둘을 병존시키는 듯하다. 남미 등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런 틈에서 많은 기독교의 입장은 자본주의 편에 서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먼저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그것은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제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까닭은 그것은 본질상 기독교의 기본 입장에 배치된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일 수도 없다. 그것은 땅 위에서의 절대주의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사회주의다. 그러나 사회주의에는 크게 둘로 갈라진다고 본다. 일차적인 것과 이차적인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쉽게 전자에 기울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것을 뚜렷이 한 사회주의를 그 방향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교 대학 이념

물론 나는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지 못하며 설령 어렴풋한 골격을 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전개할 계제가 못된다. 단지 지금의 여기가 실은 심포지엄의 자리이니까 막연하나마 토론을 통해서 그 골격의 구상화가 이루어졌으면하는 기대를 가질 뿐이다. 그런 전제로 다음에 그 기본 골격에서 절대 뺄 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을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과 같이 한 민족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념을 교육적 차원에서 어떻게 전개하느냐가 문제다 물론 도그마적 변증론이 대학에서 통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고전 철학이 시도했듯이 존재론적 변증도 유효하지 않다. 이런 것에 대해 나는 정치사적 실험방법(우선 이런 언어를 써본다)으로 해명해야 한다고 본다.

제도적으로 말하면 군주제(君主制)가 인류 역사에서 민중을 괴롭혀 왔으며 소유의 균형을 파괴시켰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평화를 파괴하고 전쟁에로 몰아넣은 원흉이다. 현금에는 이름은 다르나 계속 등장하는 독재자들의 횡포나 제국주의가 패왕적 군주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큰 과오는 힘의 편중화의 마력을 미처 계산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본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과도적 수단으로 생각했는데 그 힘의 독점이 자본 독점보다 결코 만만한 대상이 아닌 것을 못 본 것 같다. 또 힘의 독점에 의해서 인간성이 얼마나 달라지며 또 정세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는 전략적 차원에서 계산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신 중심 신앙은 바로 이런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그 타당성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신만이 주권'이라는 주장은 종교적 차원에서는 절대 복종을 의미하겠지만 정치적 차원에서는 어떤 인간—개인이거나 집단이거나—에게도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도래의 현실이란 바로 하나님의 주권만이 지배하는 현실을 말한다. 바로 그것이 로마제국 아래 예속된 식민지에서 선포됐다는 것은 로마제국을 포함한 절대권력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반면에 십계명에서 요약된 대로 어떤(우)상도 만들지 말고 하늘에나 땅에나 심지어 물속에 있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런 것에 절(참배)하지 말라고 한 첫 부분의 계명은 '나'외에 어떤 것도 '신'으로 떠받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신'이라는 이름을 빌린, 어떤 형태도 만들지 말고 권위를 부여하지 말라는 분명한 명시다. 쉽게 이것은 종교간의 경쟁에서 파생된 독점주의로 인식되나 실은 신의 자리를 뺏거나 그것을 등에 업는 일체 권력 구조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수난의 역사라 하면 그 이유의 태반이 군주 체제에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무능한 군주를 옹위한 간교한 세력들이 민중을 등쳐먹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려는 싸움이 계속 됐고, 왕조래야 민의 지지가 없는 탓에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일관하고 조공을 바침으로 연명했던 것이다. 국제적 관계가 난무할 때 결국 흥정의 대상으로 망한 후,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앙집권제'를 통해서 계속 민은 도탄에 바져 신음한 역사밖에 없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해방하는 길은 민중을 지배 구조에서 해방시켜 글자 그대로 민이 직접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인 노릇 하게 하는 길이다. 여기서 못박고 넘어갈 것은 그 신은 군주의 신이 아니라 민의 신이라는 사실이 확립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공(公) 사상의 실질적 확립이다. 공 개념은 일차적으로 땅(土地)에 적용해야 한다. 동양에서 땅은 사유물(私有物)일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땅에 대한 공(公) 전통의 뿌리가 있었다. 그러나 땅은 군주의 것이라는 사고가 그 본 뜻을 망친 결과를 가져왔다. 땅이 군주에게 속했다는 그것이 국가의 것이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사유화 개념으로 오도되어 왕이 두부 장수처럼 뚝뚝 잘라서 측근자에게 주어 충성을 다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봉토(封土)라는 말이 생기고 땅을 받은 자를 봉신(封臣)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소유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관리권을 주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런 봉토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채무, 고용관계 등으로 얽키고설켜서 결국 원점으로 돌리지 못한 채 사유화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성서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대선언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33)." 이것이 그 사상을 집약한다. '식객'이란 개념 속에 왕이 예외일 수 없다. 그러면 식객이 어찌 봉토가 가능하랴.

땅에 대한 기득권은 폭력으로 된 것이다. 한국의 남북 분단도 폭력으로 됐다. 그런데 남은 자본주의에 예속됐기에 땅은 애당초 사유물이라는 생각이 자명화됐다. 북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제 남북통일을 전제할 때 일차적으로 벽에 부딪치는 문제가 땅의 문제다.

어정쩡하나마 한국에서도 땅투기를 막는 미봉책으로 땅의 공개념이라는 말을 많이 이용해 왔기에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다. 이 마당에 땅은 국가도 어떤 집단도 소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공(公)' 개념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 이것이 기준이 되어 우리 안의 모든 기득권에도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앞장서서 해야 할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제도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바탕을 닦아야 한다. 어떤 이념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면 관념으로 사장된다. 또 사람의 손에 들어오면 썩지 않는 게 없는데 특히 재물과 권력이 그렇다. 이런 현실을 막기 위해서 민이 감시자요 압력 세력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그 길은 크게 말하면 민주주의라고 하고 의회주의가 바로 그것을 구현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우리의 정치 경험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제동장치가 못된다. 더욱이 권력과 재력 그리고 정치 윤리가 땅에 떨어진 사회일수록 '민주주의'란 이름은 허상이다. 그 구체적 청사진은 갖고 있지 않으나 의회제도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랜 독재체제하에 '재야'라는 특유의 개념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른바 재야운동, 학생운동이 합법성을 지닐 수 없게 되므로 결국 악순환만 계속된다. 그러므로 이른바 재야 또 국민들의 뜻이 직접 전달되는 통로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형식상으로 볼 때 스위스 등에서 실시하는 직접 민주주의 제도와 간접 민주주의를 절충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독일교회는 매년 교회의 대표들이 정책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그것을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그것을 정중하게 받아 의제로 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도, 어떤 시위단체든 일정한 틀에서 공인된 경우, 그들이 어떤 정책적 제의를 국회나 국가의 어떤 위원회에 제출한 권리와 그것이 반드시 반영될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 공인된 단체 속에 그리스도교를 위시한 종교 단체가 참가할 수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길이 설정되는 경우 정책적 제의 작업에 그리스도교 대학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상의 짧은 발상을 그리스도 사회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해 본 것이다. 현재의 두 블록인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또는 많은 부문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방향과 도저히 일치시킬 수 없기에 제3의 길로서 '그리스도 사회주의'라는 가칭을 사용한다.

(1967년 숭실대 주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것에 가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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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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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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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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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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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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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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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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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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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평화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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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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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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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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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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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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