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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 바울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실험의 실패 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로 소바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나는 전에 몰랐던 새로운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비에트 연맹'이라는 큰 덩어리 속에 그렇게 많은 종족들, 이질적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1917년 혁명이니까 우리 모두가 세상에 나기 전인 75년 전에 시작해서 철의 장막에 가두어 두고 유토피아 건설을 해 나가기 위해 공산당을 앞에 두고 "날 닮아라!"는 작업을 그토록 맹렬히 진행했는데도 사람들이 자루에 담았던 모래알같이 각각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이기심에 찬 낡은 인간 그대로라는 사실이 폭로된 일입니다.

공산주의도 분명히 휴머니즘에서 출발해서 계급 없고 국경 없는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 것인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 없는 사회를 지향한 것인데 그 어느 하나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단지 발달했다면 군사 시설인데 그것은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기획물입니다.

이 소련을 위시해서 그 밑에 묶여있던 이른바 위성국들인 동구 공산주의 사회도 지금까지 칼 마르크스나 레닌을 신(神)의 자리에 올려놓고, 최소한 45년 동안 전인민을 수용소에 집어 넣다시피하고,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공산주의를 세뇌해 왔었으나 그것을 억누르던 폭력을 제거하니까 인간 자체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폭로됐습니다. 계급적 갈등도 종족 간의 갈등도 제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폭력으로 인간을 강제하여 변조하거나 개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입증한 셈입니다. 이제 남은 중국이나 북한, 쿠바 등도 그 죽(竹)의 장막을 거두는 날이 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이 전전긍긍하는 데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사회는 건전합니까?

여러분은 그 커다란 미국 내에 얼마나 많은 종족들이 상호융화는 고사하고, 이른바 Racism(인종차별)으로 연일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만일 정보기관을 철폐하고 경제적으로 몰락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우리는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는 종족이 얼마나 남을까요?

소련은 소련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Pax Soviet, Pax Americana를 시도했었지만 내적으로 보면 여전히 모래를 담은 자루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소련은 힘이 약해지니까 내부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도 위성국가들에게 자유를 주며 군비축소 등의 적극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서, 미국은 바로 소련과의 긴장 관계에서마저 풀려나고, 승자의 기분에 들떠, 그 힘을 제3세계에 기울여 내정간섭뿐만 아니라 생존권에까지 압력을 가속화해 가고 있습니다. 무역 개방을 강조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데 심지어 요새는 국산품 애용이나 소비성 풍조를 제동하려는 국민 운동에마저도 간섭하여 정부로 하여금 그런 운동을 금지시키고, 법을 설정하여 정죄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으니 이렇게 되면 이제는 식민지를 넘어서 한 속국으로 얕잡아 보는 판국에까지 몰고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판국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평등으로 살 만한 평화의 세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Pax Romana와 Pax 그리스도

바울이 살고 있을 때의 로마제국이 오늘의 미국이나 조금 전까지의 소련을 방불하게 했습니다. 세계 대제국과의 결전에서 강력한 군대로 승리한 로마는 맨 마지막 대경쟁자인 희랍 마케도니아의 세력을 정복한 다음 그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을 뿐 아니라 어느 길로 가든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군사 통로를 만들어 갔는데 그것이 모두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적 도로였습니다. 오랫동안 이 세력과 대결할 어떤 신흥 세력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지중해 일대와 소아시아 일대를 완전히 평정한 셈입니다. 그 판도는 멀리 파도를 건너 영국에까지 뻗쳤고, 아프리카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이른바 Pax Romana를 구가하게 된 셈입니다. 로마에 의한 세계 평화입니다. 무력으로 정복한 로마는 사상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을 절감해서 여러 종교들을 혼합하여 로마의 국교를 만들고, 이것을 점령한 식민지 백성에게까지 강요했습니다. 그 종교는 폭력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카이저의 신격화, 나아가서는 숭배를 강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로마의 판도 안에 수많은 종족들이 포함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로마는 사실 저들이 점령한 작은 민족들을 전리품처럼 노예로 삼고, 노동력으로, 군사력으로 이용하면서 지탱해 나갔습니다.

세계를 휩쓸던 마케도니아 제국을 멸망시킨 후, 저들이 세계 제국 속에서 독점적 위치를 차지한 때가 BC 68년이었고, 폼페이우스가 동방 점령에 나서서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한 때가 BC 63년이었습니다. AD 70년에, 반기를 든 이스라엘을 토벌하여 멸망시킴으로써 사실상 이스라엘을 송두리째 삼켰으니, 점령해서 통치 과정을 거쳐 완전 속국으로 삼켜 버릴 때까지 무려 107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제국도 결국 세계 평화의 주체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계속 내부 정치 다툼으로 출혈을 계속했고, 종족간의 알력은 심화됐을 뿐입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 민족도 태반이 고향에 안주하지 못하고, 전세계에 유리 방황하는 민족이 되어 가장 밑바닥에 깔린 계층으로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그리스도교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팔레스틴 본토가 아니라 소아시아에 속해 있는 길리기아의 수도 다르소라는 도시에서 자랐습니다. 거기서 그는 로마의 문화 정책으로 이루어진 헬레니즘에 의해 변신되어야 할 위치에 있었으나 끝끝내 그것에 굴하지 않으려는 듯이 자기 뿌리에 집착해왔습니다.

그리스도교에 전향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에 있어서 신뢰할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에 있어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열심에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한 자이며, 율법의 의에 있어서는 흠없는 사람입니다(빌 3:4-5).

이 고백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졌다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추호도 로마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철두철미 그의 뿌리인 이스라엘의 전통에 자신을 접맥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바울 자신 안에 그리고 세계 안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 평화, 인류가 하나 되는 신천지 개벽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일반적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기 전에 평화에 대한 갈구를 그토록 그의 편지에 계속 나타내고 있는데, 에이레네(eirene)라는 말을 무려 43회나 계속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이 세계에 하나님의 평화, Pax를 일으킨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이것을 믿는 한 이미 계급도, 불평등도 없어졌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의 평화 운동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사건에 대한 인식이요 고백이지, 아직 현실은 아닙니다. 이것을 현실화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민중이 할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사명을 인수받았다는 것, 자기가 예수의 사도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세계를 한 바퀴 돌 만한 순례의 길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 운동은 현 제도를, 현재의 갈등을 그대로 두고 전쟁이나 싸움이 없는 것으로 무마해 버려서 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아니, 평화를 가로막는 구조적인 조건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너와 나 사이의 막힌 담을 하나하나 헐어가는 작업이 계속 따라야 합니다. 이 작업으로서 바울은 양면적인 작전을 전개한 것입니다. 첫째는 자기의 민족이며, 그가 뿌리를 박은 이스라엘 자체가 지닌 반평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이와 동시에 폭력으로 형성된 로마제국과 그 안에 있는 많은 종족들에게 폭력에 대치되는 새로운 사상과 그것을 실천하는 운동을 펼치는 일입니다.

그 첫째 목적을 구체화한 것이 바울의 편지들의 내용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자신이 생명처럼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율법을 폐기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모든 희망을 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만큼이나 힘든 요구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체부터 그런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정말 더불어 사는 평화의 세계는 오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그리고 로마서 일부는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으로써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부정의 대선언입니다.

둘째로는 랍비 유대교에 의해서 특별히 강조된 이스라엘 민족 자신의 선민성에 대한 신념을 부숴버려야 합니다. 그 선민성의 구체적인 표시는 첫째로는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남아(男兒)의 생식기 표피 앞부분을 잘라내는 것은 위생적 동기가 있었을 것이나 그것은 유대인, 비유대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담하게 선언합니다.

할례나 무할례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갈 5:6).

한걸음 더 나아가서 크리스천이 되고도 할례를 고집하는 놈은 생식기를 잘라버리라고까지 극언합니다(갈 5:12). 선민사상을 주장하는 한 타민족과의 담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극단적입니다.

셋째로 구체화한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음식물의 문제입니다. 음식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그 어느 행위보다도 공동체 또는 공동 의식을 현실화하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들과 공동 식탁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까닭은 로마 시민을 위시해서 로마권 내에 있는 종족들이 모두 제각기의 종교를 가지고, 모든 식물은 일단 신 앞에 제물로 바친 다음에 먹는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우상을 거부하는 데 철저한 이스라엘인은 우상에게 준 제물을 같이 먹을 수 없다는 신념을 병행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타민족과의 식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존의 길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우상에 대한 경계를 말하는 듯하면서도 "도대체 우상이 어디 있느냐? 없다면 우상의 제물이란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음식물을 보고 우상의 제물이라고 꺼리는 사람은 인습에 젖은 약자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따위 것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주고 아끼는 마음입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그는 고린도전서 8장에 솔직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먼저 이스라엘에게 자기 희생 내지 포기부터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는 것만으로 이 분단의 담은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민족이 무기를 맞대고 서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 무기를 버리고 평화의 도구로 만들려면 먼저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어져야 합니다.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하며, 새로운 인식에서 출발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웅주의에 기반을 둠으로 폭력을 통한 승리에 의해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로마주의와 상반되는 대안인데, 그 길은 민중에 의해서 민중적 자세로 싸움으로 이 담을 헐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계획을 공개합니다. 먼저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면 그 때 비로소 세계의 평화가 완성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첫 사명은 '이방을 그리스도에게로!'를 목표로 전생애를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내용이 로마서 11장에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어떻게 누가 합니까? 로마처럼 폭력으로? 아니면 공산주의의 이상처럼 경제적 균등 사회로? 그것을 위해서 폭력을?

바울은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그 길을 말합니다. 폭력과는 정반대되는 끝없는 사랑의 길만임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그러므로 그의 편지의 금자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 합니까?

민중에 의해에 주도되는 Pax

첫째 주목할 것은 고린도전서 4장 10절 이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여러분은 강하며, 여러분은 영예를 누리는 몸이지만 우리는 천대를 받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없이 헤매면서 제 손으로 힘들여 일합니다. 욕을 먹으면서도 축복해주고, 박해를 당하면서도 견디어 내며, 비방을 당하면서도 좋은 말로 대해 줍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모든 이의 찌꺼기처럼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습니다(고전 4:10-13).

이렇게 말하는 동기는 고린도 교회원들을 나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즉,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한 사도의 길, 그 무기, 그 자세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없이 헤매고, 노동해 먹고, 욕을 먹으면서도 축복하고, 박해를 당해도 견디고, 비방을 당해도 좋은 말로 피하고, 세상의 쓰레기, 찌꺼기처럼 된 그! 이게 바로 바울 개인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뛰는 그 때 예수의 역군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실상이 너무도 민중적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평화 운동의 선구자들은 민중이었고, 바울도 의식화된 민중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새 평화의 길은 민중에 의해 되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목할 것은 바울이 말한 고린도후서 5장 16절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표준으로 판단하려 하지 않습니다."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 새 가치관이 섰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지는 자가 이겼다는 이 가치관입니다. 여기서 민중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적 인간 평가의 모든 외적 조건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입장은 그리스도(예수)도 육적 표준(낡은 가치관)으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외적 조건에서 메시아임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에게 항복한 것(회심)은 바로 이 외적 조건(육적)에서 탈출한 것과 뜻을 같이합니다.

셋째로 주목할 것은 고린도전서 12장 22절입니다.

몸 가운데서 비교적 약하다고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몸으로 비교하고 한 마지막 결론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민중을 보는 눈이 열린 열쇠입니다.

이 민중에 의해서 주도되는 새로운 평화의 세계, 민중에 의해서만이 길이 열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1991. 9. 15 향린교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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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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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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