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스스로가 선 자리를 사랑하는 민이 통일의 주체다
통일의 염원

나는 어릴 적 만주 간도에서 자라났다. 그곳은 이미 일본의 마수가 뻗쳐 있었으나 조선 사람들의 삶의 내부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낮이면 일본 천하 밤이면 독립군의 천하로 뒤바뀌는 묘한 정치풍토에서 호흡하며 자라났다. 나는 여러 차례 밤중에 우리 집에 들어와서 우리 어머니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고마워하는 독립군을 보았으며, 누더기 같은 무릎에 나를 앉히고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들의 손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때로는 한밤중 목소리에 잠을 깨어 어머니가 한아름의 보따리를 갖고 나가 어떤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가만히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독립군을 위해서 숨어서 장만한 그들의 속옷, 양말 등이었던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밤에는 눈보라를 맞으면서 눈위를 밟고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십오륙 명이나 되었을까? 저들은 남루한 옷을 걸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들을 공산당 빨치산이라 했다. 나는 저들이 오늘 밤에는 어느 산으로 입산하여 떨고 있을까 몹시 궁금했다.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대견하면서도 쓸쓸했다. 어느 날 학교 마당에 두 시체를 들것에 들고 오다가 쉬고 있는 일본 군인을 보았다. 두 시체 중의 하나는 하얀 보자기가 씌워있었고 다른 하나는 거적을 아무렇게나 덮어 반쯤은 드러나 보였다. 둘 다 조선 사람이라는데 하얀 것으로 덮여 있는 시체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발된 일본편에 선 이른바 자위대였고, 다른 하나는 독립군의 시체라는 것을 거기 둘러선 어른들에게서 얻어들었다. 죽어서도 그렇게 푸대접받는 독립군의 시체! 나의 마음은 아팠으나 그 죽은 자위대도 조선 사람이라는 데 어떤 착잡한 분노 같은 것을 느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

젊은이들은 밤이면 야학이랍시고 어른과 어린 것들까지 모아놓고 노래도 가르쳐주고 무슨 얘기도 많이 했는데 "독수리 같은 일본 군대"라는 말로 시작되는 노래는 공산주의자의 노래였고, "한 손에 총 들고"라는 말로 시작되는 노래는 독립군의 노래였다. 저들에게서 녹두장군의 얘기도 듣고 홍범도, 김일성 장군의 얘기도 들었는데 특히 김일성 장군의 얘기는 오늘의 슈퍼맨과도 같은 신화적인 것으로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하여간 민족 독립이라는 대과제 앞에 저들은 구별 없이 함께 싸운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가 점점 심해지므로 언제부턴가 저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루지 못한 염원이 비명을 지르며 멀리멀리 사라지는 환상을 보았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고투가 비록 길지는 않았으나 소년의 마음에 화살처럼 박혔던 것이다. 비록 그들은 사라져갔으나 그 뒤 한 가지 사실만은 얼마 동안 더 계속되었다. 그것은 매일 새벽이면 발견할 수 있는 삐라였다. 그것은 밤마다 누가 그림자같이 다니면서 유인물을 창끝처럼 말아 창문에 찔러두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소리내어 읽곤 하는 아버지에게서 일본 제국주의니 계급 투쟁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귀에 익힐 정도였다.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여진다. 그 조그마한 처진 마을의 주민들은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나라 없는 설움에 차 있었으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차 있었다.

815가 왔다. 그때 모두 31운동을 정점으로 거족적으로 염원했던 민족 자결의 자주국이 도래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우리 땅은 미국과 소련 점령 지역으로 분단됐다. 만주간도는 자동적으로 소련 영향권 안에 들어 곧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에게는 좌나 우가 문제되지 않았다. 그만큼 자주 독립 민족이 된다는 희열과 염원이 충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치 지휘권을 장악한 좌익 세력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었다. 지주나 친일파 숙청 등은 이해도하고 박수도 보낼 수 있었으나 그들의 경쟁자의 가능성이 있는 비공산계의 인사들에 대한 경계 내지 박해가 뒤따랐다. 독립된 제 땅을 향해 두만강을 건넜지만 소련군과 완장을 두르고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횡포에 맞닥뜨려야 했다. 내 고향이 이북이건만 거기에 머물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하게 하는 분위기를 등지고 자기 땅이라는데, 분명히 해방된 자기 땅이라는데 대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중에 안내자에게 돈푼을 주고 국경 아닌 삼팔선을 넘어 이남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이남에서 우리를 맞이해준 것은 한국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다. 저들은 카우보이들이 소를 몰 듯 월남 행렬을 줄세우고 짐승을 소독하듯 남녀 구별 없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분무기로 DDT라는 하얀 가루를 의복 밑으로 뿜어대는 것이었다. 우리는 포로, 저들은 전승자. 그후부터 내 마지막으로 찾아든 이 땅에서 한국민으로서의 대접은 물론 사람으로서의 어떤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지만 들어설 때 그 첫 경험과 그 뒤로 외세의 조종 밑에 난무하는 폭력과 비리로 뒤범벅이 된 한국의 현실 앞에서 이것이 우리가 바라던 그 해방이 아닌데 하고 목놓아 부르짖게 했다. 녹두장군, 홍범도 장군, 김일성 장군 그리고 시체가 된 그 독립군, 처진 시골의 그 주민들이 바라던 민족 해방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어떻게 씨위서 형성하고 지켜온 민족이었는가. 우리는 중국 대륙에서 일어나는 역대의 세력들 앞에 연속적으로 수모를 당하면서도 때로는 그들의 종의 시능을 하고 그들의 발을 핥는 시늉을 하면서까지 통일된 민족을 지켜왔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자주적 민족으로 서려는 염원이 어느 민족보다도 강렬했다. 일제의 언어 말살과 창씨 개명에 의한 뿌리뽑기 정책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통일 민족이었다. 다른 민족에 대해서 어떤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고 위협적 존재도 아닌데, 어느 누가 이 민족의 허리를 동강냈는가? 지금이야말로 지정학적 여건에 의한 불가피한 약육강식의 운명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국제시대에 돌입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결코 분단 상태를 허용할 수 없다. 종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지켜왔던 통일 민족을 살려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분단 고정화의 책략도 분쇄해야 한다. 분단 고정을 전제로 한 어떤 이론도 민족의 이름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그런 것은 모두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민족적 세력 블록에서 나온 음모이다. 통일 민족을 사수하라는 것은 어떤 여건에서도 지상명령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통일되어야 하는 것은 선열들과 우리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절대적이지만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도 지상명령이다. 우리의 분단이야말로 제2차대전에 의해서도 가시지 않고 새로 형성된 양 블록의 모순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완충지대이며 동시에 대결 전선이 아닌가. 그래서 이것이 세계 운명을 좌우하는 핵지대가 되어 있지 않는가?

민에 의한 통일

1972년의 이른바 74 공동성명은 일본 제국 항복 소식에 못지 않을 만큼 모든 민족 구성원들에게 충격과 감격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통일 원칙 제3항은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민족적 대단결이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정말 이것만 진실하게 받아들인다면 민족적 통일은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정치 음모에 속은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민족이라는 이름에 황홀하여 통일의 주체가 누구이며 민족의 실체가 누구인지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같은 거창한 과업을 박정희와 그 일파에게 일임해도 된다는 말인가? 민족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중이다. 그런데 박 정권은 민과의 일언반구의 의논도 없이 민을 향해서는 삼엄한 방공망을 펴놓고 자신들은 마음대로 삼팔선을 넘나들었으며 심지어 국회나 각료 회의마저도 거치지 않고 민의 총의의 화신인 양 독단적으로 이 같은 성명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함정을 모르고 무조건 이 성명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민족의 실체는 어디까지나 민이다. 정부는 이 민의 뜻을 받들어 그것을 실천해야 할 임무 이외에 아무 권한도 없다. 민족의 실체인 민과의 일언반구의 의논도 없이 행한 단독적인 그의 월권 행위 뒤에 숨은 음모를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 우리의 큰 잘못이었다. 민족의 실체, 민족 통일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가 이런 잘못을 초래했다. 사실상 이것을 계기로 그는 민족을 밧줄 삼아 민을 완전 결박하려 했던 것이다. 그 점에서는 이북 정권도 다를 바 없었다. 저들은 이것을 계기로 해이해진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그런데 이러한 월권적 행위는 그후 줄곧 계속됐다. 최근 노 정권의 통일 방안 제의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권이 여러 가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통일 정책을 수없이 발표했으나 그 어느 한번도 비록 형식적이나마 민의 의사를 수렴하려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정통성을 갖고 있지 못한 역대 정권의 이 같은 작태를 그 자체의 불법성을 지적하지 않고 그 내용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통일 논의의 외곽을 겉도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정권은 통일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우리의 통일은 행정적 통일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민족 통일이다. 권력 블록은 바로 분단 상황의 조건들 위에 자기들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반통일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저들이 자신들이 향유하는 기득권을 포기할 만큼 애국적일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통일 문제는 민에 돌려야 한다.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외세이거나 그것에 조종받는 국내 세력이거나간에 표피적인 것들이지 민 자체는 아니다. 인위적인 장벽이 제거된다면 민은 물꼬가 터지듯이 곧 이어질 것이다. 왜 역대 정권은 민의 자율적인 교류를 무서워하고 그것을 방해하는가? 그로 인해 정말 사회 혼란이 올 것을 염려한 때문인가. 아니면 통일에 대한 독점권을 지키겠다는 욕망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이 정권은 통일 운동에 있어서 정부가 유일한 창구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이 주장을 야당들도 동조하는 듯한데 이 주장은 실은 그 독점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남북 학생들이 만나는 것을 그들 스스로 자율적으로 하면 안 되고 정부의 주관 하에서 성사시킬 용의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권은 비록 통일 의지가 사실이라 해도 민족 의사를 펴는 데 한계가 있다. 정권은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그것의 존재 기반이 되는 외세나 독점 자본가들의 동의 하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국제적 힘의 균형을 안중에 둘 수밖에 없는 정부는 기능주의적 통일 방안 이상을 내놓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자기 실리만을 추구하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정부가 저들의 이해에 반하는 어떤 행동을 감행할 수 있겠는가? 미국이 한국 통일 문제는 한국인 자신의 문제라고 발뻼하는데, 그것은 그 권한을 전적으로 이양한다는 뜻이 아니라 분단 상태의 책임에서 빠져나가려는 교활함일 뿐이다.

민은 민족의 실체다. 민은 외세에서 자유로우며 자기 운명을 자기가 해결할 자율권을 침해받지 않는다. 민족 자결이란 결국 민의 자율권 관철이다.

우리의 통일 운동은 민이 시작해서 민에 의해 그 결실을 보아야 하며 또 그 길밖에 없다. 40년 분단 상태에서 짓눌려온 지금도 통일을 정부가 이룩해주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특히 74 공동성명 이래로 한치의 진전도 이룩하지 못한 정권적 차원의 통일 논의를 이 이상 방관한다는 것은 민이 그 민됨의 권리와 의무를 유기하는 일이다.

정부는 현금 거세게 일고 있는 통일 운동을 어떤 좌익 집단이 조종한다고 선전하며 그 주모자들을 보안법으로 처리하면 된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작태를 벌이는데,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소수 집단에 민이 호응하는 이유를 되묻지 않는다. 이 막강한 온갖 장치를 장악하고 있는 정부가 그 소수보다 민의 호응을 받지 못한다면 거기 근본 문제가 있지 않는가! 그 소수가 민의 통일 의지를 점화할 수 있었다면 저들이 좌익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옳기 때문에 호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민에게 붙은 통일의 불길은 정부마저도 비록 갈팡질팡했으나 통일 문제가 절실한 것임을 알아 움직이게 하지 않았는가!

민의 삶은 진실하다. 통일에의 염원은 전략도 편싸움도 아닌 삶의 절규다. 그 길은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정부는 통일 운동에 아무런 간여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 정부는 통일의 주체가 민임을 확실히 인식할 때 그 자체의 과제가 뚜렷해질 것이다.

지금은 남북 양쪽 다 무력에 의한 통일 정책을 포기했다. 무력으로 통일이 불가능한 것을 안 것이다. 더욱이 국토 통일이 아닌 민족 통일을 의미하는 이상 무력 통일이란 있을 수 없다.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마당에 그것이 과도적인 장치라면 몰라도 내적 통일 없는 제도적 통일을 내세우는 것은 민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민족 통일은 정말 이념제도를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결국 정치적 경쟁으로만 가능하다. 거짓은 정부에 대해서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어느 정부가 절대 다수의 민족 구성원의 지지를 받느냐를 목표로 하여 자기 체질을 개선하는 일이다. 이 체질 개선은 바로 어느 만큼 민의 뜻을 수렴하며 그것을 대변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민에 의해서 그 대표성을 인정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 정부라고 인정을 받게 되면 민과 정부는 오늘처럼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닌 동반자의 입장에서 통일 행로에서 상호의 역할이 밝혀질 것이다. 그와 같은 합의가 없는 채 아무리 정부가 통일론을 운운해도 그것은 인정도 않거니와 믿지도 않는다.

민이 바라는 정부란 통일 민족 사회에서 절대 다수의 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체질을 갖춘 대표 기구이다. 그러므로 통일을 정부가 정말 염원하는지는 그 정부 자체의 체질과 정책에서 입증돼야 한다. 통일을 목표로 하는 정권이면 통일을 위한 길닦기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통일된 민의 뜻에 가장 접근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지난번 77 성명에서 남북한 관계가 경쟁자의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의 관계가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참 옳은 방향을 선언했다. 그런데 그 후 이 정권의 정책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 말에 역행하고 있다. 휴전선에서 상호 비방 방송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내용 없는 제스처가 아니라면 내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위시해서 각 분야에 속속들이 숨어든 반공반이북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이땅에 사는 민들에게 통일에의 길에서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의 검토해서 시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오히려 사정은 악화되어 마침내는 학생들을 위시한 통일 운동권을 좌경으로 몰아 보안법으로 처형하며 좌익 경향에 대한 우익의 봉기를 호소하는 어처구니없는 작태까지 나타나고 있다. 오늘 날 민이 정부를 보는 시각은 달려졌다. 전에는 단순히 인권 또는 자유의 차원에서 정부를 비판 반항했으나 지금은 민족 통일이라는 대과업의 시각에서 정부의 체질이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만일 정부가 통일 민족 사회를 안중에 두고 있다면 그 정책이 이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통일 민족 사회가 되려면 남북 양쪽에 민이 원하고 그들의 뜻을 최대한으로 수렴할 수 있는 방향 설정과 정책이 분명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체제와 이념을 떠나서 민이 호응하고 바라는 사회는 어떤 것일까? 그것을 몇 마디로 집약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민이 자기 민족의 운명을 자기가 직접 짊어지고 책임적 존재로서 살 수 있는 사회, 각 분야에서 그것을 기획하고 생산하고 분배하는 과정에 주체자로 참여하며, 그럼으로써 자본이 민의 노동을 강요하고 상품을 설정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민이 자본을 조정함으로써 민이 자본의 주체가 되는 그런 경제 질서를 원한다. 민은 민의 이름을 빌어 형성된 정권이 민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정치 질서를 반대하고, 모든 중요 정책과 그 시행에 참여하여 자기들의 뜻을 왜곡됨이 없이 반영하는 정부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정부와 민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장치가 이루어진 사회를 바란다. 사회의 모든 가치 척도나 문화의 성격은 지배권에 속하여 배부른 극소수의 감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노동과 삶에 직결된 절대 다수의 민중의 감정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이상은 극히 조잡하고 간단하나 이념이나 체제와 상관없이 오늘의 민중이 한결같이 바라는 공통된 사회 성격이 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인정된다면 통일을 염원한다는 정부가 이에 부응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가? 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통일 의지를 믿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 구현이 통일 민족 사회에서 옳은 것이라면 통일을 지향하는 남한에서 지금부터라도 그대로 실시되어야 한다. 그래야 남한의 절대 다수의 민의 뜻을 실천하는 것뿐 아니라 북에 있는 민을 수용할 수 있는 기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언제 누가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정부나 심지어 야당까지도 계속 자유 민주주의를 국시처럼 표방하고 그것을 남한의 존립 근거와 결부시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는데, 도대체 한국에 언제 자유 민주주의가 실현된 때가 있었는가. 그것이 통일의 맥락에서 볼 때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아무런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하기는 반공이 국시라는 체질을 그대로 고수해나가는 마당에서 그런 기대 자체가 잘못일지 모른다.

정부가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 있을 수 있는 긴장과 대결, 그것을 위한 전략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북의 정권과 거기에 사는 민과는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라면 한국의 민만이 아니라 북한 정권 밑에 살고 있는 절대 다수의 민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정권이어야 한다는 대전제 밑에서 자기 체질 개선을 해야 할 것이다.

통일 운동 주체의 선 자리

민주화와 통일 논의 과정에서 민주화가 먼저냐 통일이 먼저냐라는 의견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런 명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민주화가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하고 통일 없이는 민주화가 불가능하다. 요즈음 통일 논의가 성화같이 일어나는 까닭에 민주주의를 위한 작업의 일환인 광주 사건, 전 정권 하의 비리 척결 문제들이 그늘에 가려지고 있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상 통일 지상주의가 민주화의 싸움을 저해하는 것이라면 거기 크게 그릇된 인식이 게재되어 있거나 아니면 불순한 동기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의 투쟁은 우리에게 있어서 남한에 국한되어 있다. 위정자들은 남한만 비판하고 이북 사회는 비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주화 운동을 반한적인 것으로 규정해서 처단하는 처사가 빈번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적을 꺾기 위한 의도적인 궤변이거나 아니면 그 우매함을 철저히 폭로 하는 것이다. 남한을 비판하는 까닭은 이곳을 자기 존립의 근거지로 알기 때문이다. 이 사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 사회를 비판할 권리가 없으며 그런 비판은 고려의 대상이 못된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바로 이 땅의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70년대 이 땅의 민주화만을 위해 싸우던 우리 민에게 광주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민주화는 민족 자주와 직결된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통일에 의한 민족 자주와 민주화 운동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과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70년대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 시기였고, 80년대는 통일을 위한 투쟁시기가 아니라, 민주화의 염원 속에서 비민주주의의 원인이 분단이라는 인식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그 투쟁이 한층 진전된 것이다. 그러므로 남한의 민주화 투쟁은 통일 민족 쟁취를 위한 싸움의 존재 근거에 착실히 발을 디딘 행위이다.

남과 북이 40년 동안 갈라져 있었다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우리의 선 자리가 한국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에게는 한국이라는 지역과 사회가 그 존립 근거이다. 이것을 무시하면 우리의 발판을 잃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에 대한 발판으로써 민주화된 남한 사회를 이룩하려는 것이다. 남한의 민주화 없이 통일은 없다. 그것은 남한의 민의 뜻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통일에의 의지와 힘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에게 위험한 현상이 보인다. 그것은 한국 안에서 자기 삶을 영위하면서도 남한이라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방인과 같은 자세에서 한국을 비판 거부하면서 통일 논의만 내세우는 부류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남한 정부와 남한 사회를 혼동하여 정부 비판에서 남한의 실체까지 부정하거나 냉소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그러면 북한을 삶의 거점으로 삼을 용의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러고 보면 저들은 국적 없는 한국의 집시인 셈이다. 이런 자들이 통일 논의에 가담할 경우 그것은 통일 전선을 혼란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들이 만일 이북 정권의 입장에 서서 한국 문제를 비판하면 국외자가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된다. 제3의 자리란 외국인이 설 수 있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하는 비판이나 제안은 쉽게 내정 간섭이 된다. 이러한 자기 위치 설정을 한 사람들을 외국에 사는 교포들에게서 만나게 된다. 저들은 남이나 북 그 어느 쪽과도 자기를 일치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입지를 그들은 객관적 판단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부한다. 그런 그들이 한국 문제를 비판할 때에는 결코 제3의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이들 중의 한 쪽 시각에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 판단이 갈팡질팡한다. 비록 그들의 판단이 옳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견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국 문제는 그들에게는 강건너 불구경하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공자가 "부재기주 불모기정"(不在其住 不謀其政)이라고 했다. 이것은 기존 질서에 그대로 복종하는 악덕을 기를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남의 제삿상에 배 놔라 밤 놔라하는 따위의 간섭은 무례하고 방해받게 될 게 없는 것이라고 봤으면 옳은 말이다.

통일 문제의 주체자는 한국에서의 그의 소속 의식이 분명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 남과 북에는 이미 40년 이상의 역사적 조건 아래서 형성된 고유한 상황들이 있다. 누구도 그것을 무시한 위치에서 삶과 직결된 통일 논의에 개입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남의 민은 남의 사회 내에서 싸워 통일 사회의 주축이 돼야하고 북의 민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이 당면한 문제와 싸워 이김으로써 그 둘이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참 민족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 자기 선 땅에서 주체 의식이 불투명한 자에게 통일 사회에서의 주체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인정할 수도 없다. 이런 논리는 위정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이 아무리 국정을 논하고 통일을 노래한다고 해도 그의 선 자리가 한국의 민의 현실이 아니고 미국이나 어떤 제3지대에 발을 딛고하는 것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거부되어야 한다. 그런 자들은 식민지 정책의 앞잡이 역할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입장이 불리할 때는 그가 선 자리인 외국으로 도망해버릴 도당들이다. 그런 부류들의 지혜는 통일 전선에 사절돼야 한다.

통일의 주체는 그 선 자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는 자여야 한다. 그런 투쟁을 민의 뜻으로 받아들여 자기 체질을 개선하고 정책 선회를 할 수 없는 정부는 바로 반민족반통일 세력으로 규정해야 한다.

(『사회와 사상』, 1988. 10 /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TAG •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