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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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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과 민족통일
왜 통일 논의가 불붙는가

최근에는 이른바 논객들이 붓을 들기만 하면 통일, 통일 한다. 정부가 올림픽의 '위풍'을 몰아 모든 국민의 소리를 진압하려고 하나 통일 논의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간다. 나도 벌써 몇 차례 거듭 통일에 대한 단상을 써야하는 처지에 있었는데 또 통일 얘기를 하라는 지시가 『씨알의 소리』로부터 떨어졌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반문이 일어난다. 왜 이처럼 통일, 통일 하느냐고. 통일의 가능성을 보고 하는 소리인가. 계속 소리를 지르면 수문이 열리듯 통일의 문이 열린다고 믿기 때문인가. 아무리 봐도 그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그렇게 낙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차대전 이후에 인위적으로 분단된 세 민족 중에서 통일을 이룩한 것은 베트남뿐이다. 그것은 시위나 논객들의 붓 끝으로 된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리며 온 땅이 초토화되다시피 한 희생을 치르는 무장 봉기에 의해서 가능했다. 독일 민족은 애당초 민족 통일을 포기하고 있다. 오데르-나이쎄강 선을 과감히 포기했을 뿐 아니라 동서의 통일도 사실상 포기하고 서독은 유럽 연합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 자기들의 이 다음의 활로라고 설정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대세를 이루는 통일 논의에서 베트남에서처럼 무력 투쟁에 의한 통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주류에 끼어 있지는 않으며, 그렇다고 독일식의 분단 고정화를 떳떳하게 내세우는 사람도 없다. 하여간 통일이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베트남식이 아닌 무슨 다른 방법이 있나! 어느 누구도 묘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인 양 성화를 부리고 있는가. 그것은 통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어떤 절박감 때문일 것이다. 그게 뭔가?

아무리 비판의 눈으로 봐도 우리는 물질적으로 현저히 풍요해졌다. 우리의 생활 환경도 날로 개선되어 춘궁기란 말도 사라지고 비록 오막살이는 아직도 즐비하나 문명의 이기의 혜택은 분명히 확산되고 있다. 약 20년 전과 비교하면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러나 그처럼 가난할 때는 말이 없던 통일 문제가 왜 지금 와서 이처럼 고조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분열분단의 현실이 심화확대되고 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되지 않아 민족 사회의 파멸이 오리라는 불안을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민족 사회가 완전 붕괴되고 말 것이다. 우리라는 의식은 점점 사라지고 나와 너라는 개인주의를 넘어서서 너를 적대시하고, 피해 의식이 날로 심화되는 것이 오늘 이 민족 사회의 현실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한마디로 불신 풍조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은 그 도를 훨씬 넘고 있다. 이제는 이 사회에 계급 형성이 뚜렷하다. 세계 10대 부호의 반열에 드는 대재벌에서부터 단칸방에 여러 식구들이 함께 살며 그날그날 벌어먹고 사는 계층이 병존하는 이 사회. 날이 갈수록 그 사회의 단층은 한없이 많아만 간다. 이러한 무수한 계층 사이에 위화감은 날로 심화돼 가고 있다. 그 거리가 좁혀질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고착화 일로에 있다. 관료주의는 고려조 이후의 이른바 귀족 정치를 뺨칠만큼 특수 계급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이른바 고급 관료는 귀족 계급과 다를 바 없다. 그러기에 자유당 시절에 관료계에 있던 이들 혹은 그 자손들이 오늘날까지 계속 권력 주변에 있거나 아니면 재벌로 행세하는데, 더욱이 군사 쿠데타 이후 군인을 중추로 한 집권층이 그대로 이어오고 있지 않은가. 유신 체제를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그 당시에 중책을 맡았던 자들이 특권 계급으로 도도하게 그 자리를 지키거나 계승하고 있으며, 전정권의 비리를 이토록 외쳐도 바로 그 비리의 주역들이 집권세력권 안에 엄존하고 있다.

나는 가끔 그때 그 자리에서 불의의 주역이던 누구누구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왕자와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접할 때마다 저들은 이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특권 계급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 이래로 몇몇 '운 나쁜' 사람들을 빼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어떤 형태로나 누렸던 권력권에 기식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저들에게는 심판이 적용되지 않는다. 민족의 고혈을 빨아먹은 친일파가 이 정권의 비호 아래서 계속 민족 탄압의 권력을 향유했으며, 일제 하의 일본 장교가 폭력으로 정권을 잡은 이래 그 자신은 물론 그의 측근자들이 계속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러니 한번 손에 칼을 잡으면 세습적인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은 관료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면서도 언제나 공포의 대상으로 불안해한다. 해방 40년 이래 그 언제 한 번이라도 관리는 국민을 위한 봉사자라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었는가. 자유당 때 경찰서나 파출소에 붙인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는 표어가 얼마나 국민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는가. 권력권의 사람이 접근하면 국민은 예외 없이 불안해하지, 그가 무엇인가를 도우리라는 친근감 따위는 상상할 수 없다.

역대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방패로 삼은 반공법 혹은 보안법이 얼마나 이 민족 사회를 찢어놓았는가. 도시는 물론이고 산촌 벽지의 사람의 눈이 닿을 수 있는 곳곳마다 반공 표어들, 그것이 민족 사회 개개인 사이에 어떤 독소가 되었는가. 어떤 사람이 길을 잃어 어른거린다고 하자. 정상적이라면 사람들은 그에게 길을 알려주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들은 그가 간첩이 아닌가 하는 시선으로 보도록 계속 세뇌되었다. 외국에 오래 있던 사람이 귀국하여 버스를 타고 차비를 물었더니 고발되고 지방 사람이 서울에 와 남대문 방향을 묻다가 파출소에 끌려가야 했다면 결국 국민과 국민 사이는 서로 감시자이며 고발자 이상 될 길이 없다. 민주주의를 위해, 정의를 위해 정부를 비판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으로 갔던가. 그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 전체를 페스트병처럼 주변과 고립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간교하고 잔인한 방법을 일삼아 왔던가. 또 정적을 파괴하기 위해서 얼마나 심한 이른바 공작 정치를 해왔던가. 그래서 조작된 '사쿠라'는 얼마나 많이 길러냈으며, 그와 더불어 공산당원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냈는가. 그래서 백색 루머, 흑색 루머가 우리 민족 사회에 판을 치므로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허탈 상태에 빠지게 했다. 언론은 탄압되어 입을 다물고 권력이 폭력과 공작 정치로 없는 것도 있게 하고, 있는 것도 없게 하여 국민들의 입에서 남자가 아이 낳게 하는 것 외에는 못할 것이 없는 게 정부라고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지. 어느 하나라도 확고한 거점이 있어야 새 출발의 발판을 삼을 텐데 감옥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공장에서 정부종합청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흔들리고 있으니 이러고야 민족의 종말밖에 상상할 수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를 아무리 외쳐도 그래서 복마전과 같은 이 현실을 타개하려고 해도 아무런 성과가 없으니 마침내 통일, 통일하고 부르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하나는 이 민족 사회를 이렇게 분열시킨 역대 정부가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은 바로 분단 상황이라는 사실에 대한 안식이다. 전가의 보도(傳家寶刀)로 써먹는 반공법이 바로 분단 상황을 최고로 이용한 무기이다. 역대의 정권은 위기가 올 때마다 남침 위협을 고조했으며,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왔다. 분단 상황은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발판이 됐으며 그것을 비대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독재 체제의 정당성마저도 분단 상황이 떠맡았다. 민주주의를 한다면서 자유의 '유보'라는 대낮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주장이나, '악법도 법이요'라는 한국에서만 산출된 법관들의 궤변도 분단 상황 하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당위성으로 내세워졌다. 이런 허위와 기만은 바로 저들이 발판으로 하고 있는 분단 상황을 철폐함으로써만 깰 수 있다.

또 하나는 분단을 발판으로 유지하는 독재 정권을 앞장세워 이 땅을 종속시키는 외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이 인식이 국민 일반에게 확산된 것은 광주사건 이후이다. 정권 쟁취에 혈안이 된 군부의 만행을 지원한 것이 미국이라는 인식은 점차 심화되어 한국의 분단의 책임자인 미국, 나아가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분단 고정화를 획책하는 원흉이 바로 미국이라는 인식이 급속도로 발전된 것이다. 우리가 이른바 해방 후 현재까지 분단 상태에 있으므로 완전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분단 상황을 몰아오고 그것을 견지하려는 미국에게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자주권이 없기 때문에 독립 민족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실해졌다. 자주적 민족, 그러므로 자기 일을 자기가 결정하며 자기 운명을 자기가 책임지는 길,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길, 그러므로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길은 통일하는 길밖에 없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똑같은 분단 상황에 있는 독일 사람에게마저도 왜 우리가 우리의 통일을 평화와 연결시켜 집요하게 주장하는 이유를 그토록 이야기해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분단 상황이 이처럼 특수하기 때문이다.

통일 논의의 허구

통일을 원하면서도 어느 땐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에 안주하는 층이 퍽 두텁다. 하도 계속 속아와서 마침내 최면 상태에 빠진 것도 이유겠고, 통일에 대한 뾰족한 방안을 찾아낼 수 없는 데서 온 심리기도 하겠지만 근거 없는 낙관론이 통일 논의를 희석시키고 있다. 저 둘은 해방의 날이 예기치도 않았던 때 갑자기 왔듯이 통일도 그렇게 오리라는 막연한 생각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저절로 온 '해방'이 해방이 아니었듯이 설령 저절로 통일이 온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민족 통일일 수가 없다. 통일은 쟁취해서 이루어져야 진정한 우리의 통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분단 이래 그리고 김구 주석 등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좌절된 이래 통일 문제는 정부에게 내맡기다시피하고 역대 정권들 또한 이 문제의 독점권을 주장해왔다. 이승만 정권은 실력도 없으면서 무력 통일이라는 허구한 구호 아래에서 반공 정책만 강화했는데, 그때에는 무력 통일이라는 주장 이외에 어떤 다른 견해는 입도 뻥긋 못했다. 그 때 누가 지금의 정권이 말하듯 평화론을 내세웠다면 그는 공산분자로 처분되어야 할 그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승만 정권을 쓰러뜨린 학생 세력이 잠깐 동안 통일 운동을 정부에서 뺏아 자주적으로 하려고 시도한 것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고, 바로 그것을 미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통일이란 말 자체를 국민에게서 봉쇄해버렸다. 국민들은 새로 등장한 철권 정권 앞에서 전전긍긍하여 생존권을 유지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일부 의식분자들은 통일보다는 민주주의 붕괴와 인권 유린을 막아보자는 노력에도 힘이 부치는 정도였다.

아주 짧은 역사를 가진 민주당 정권은 "무력에 의한 통일을 하려는 무모한 정책의 폐기"를 선언한 바 있는데, 정권을 쟁탈한 군사 정부는 이른바 516혁명 공약에서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집중한다"고 함으로써 반무력 통일을 희석시키고 있다. 실력 배양이란 말에는 무력의 배양이란 말도 결코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에게서도 변함 없이 강조된 것은 "공산주의와 대결하여 민주주의의 승리로써 조국 통일을 성취한다"였는데, 민주주의 자체도 유린하는 마당에 공산주의와의 대결의 길이 있다면 군사력밖에 남는 것이 없다. 이 말 속에는 경제적 실력 배양이라는 생각이 있으나 결코 군사적 대결 자세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그가 정권이 궁지에 몰리자 북한 정권과 내통하여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 이른바 74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내용은 박 정권 정치 구도와 어느 부분에서도 맞지 않는 허구 그 자체였다. 갑자기 언론 매체에서 이북 비판이 사라지고 벽촌까지 누몄던 반공 구호 들을 페인트로 지워버리는 잠깐 동안의 촌극밖에는 통일을 위한 어떤 구조적 변화도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박 정권은 국민의 그토록 염원하는 바로 그 통일을 통치 수단에 기만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저들은 아무런 통일에 대한 마음의 자세나 준비도 없었다. 그러기에 바로 공동성명발표 다음날인 7월 5일 국회에서 답변한 당시 국무총리인 김종필은 "74공동성명은 북한에 의해 강점되어 우리의 실질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대화로 해결하자는 것이며, 북한과의 공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심지어 북한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함으로 74공동성명의 허구성을 그대로 폭로한 것이다. 그는 반공법도 국가보안법도 그대로 시행할 것이며 "북한의 언행을 믿을 수 있게 되기까지 남북 정상회담도 불가능하다"고 못박음으로써 74공동성명을 사실상 백지화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그렇게 떠들썩하던 그 사건 이후 통일론은 국민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하게 통제되었을 뿐 통일 문제 자체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 뒤를 이은 전 정권은 아무런 준비나 대책도 없는 채 느닷없이 정상회담을 제의했으나 그 불성실성에 속는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내정이 한계에 이를 때마다 언제나 실탄도 없는 통일의 공포(空砲)를 터뜨렸다. 하기야 재직 동안 대권을 잡자마자 사리사욕에 그렇게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언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민족 통일 따위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노 정권도 그런 길을 그대로 답습하여 취임 일성으로 통일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것에 상응하는 정치 구도는 전혀 볼 수 없다.

이만한 경험을 했으면 우리는 더 이상 통일 문제를 정권에게 맡길 수만은 없다. 분단 하의 정권은 분단이라는 조건 밑에 형성된 정권이기 때문에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두말할 것 없이 후퇴해야 할 과도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저들은 통일 운동을 싫어한다. "까닭은 자기네의 특권 구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함석헌). 우리가 이런 정권에게 최소한의 도덕성도 기대하지 못하는 마당에 그러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충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정부는 국민여론의 정당성 때문에 밀려서 통일 논의 독점권 주장을 약간 완화하는 표현으로 이른바 단일창구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 무슨 모호한 말이며 기만적인 언어구사인가. 아니다. 정권은 결코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 점에서는 남도 북도 똑같다. 도대체 민주 사회에서 정권은 민(民)의 뜻을 뒷받침하는 기구인데 언제든지 "국민을 내놓고, 내놓을 뿐 아니라 억누르고, 억누르다 모자라면 달래고, 달래서 아니되면 속여서라도 혼자서만 하려는"(함석헌) 것들의 통일 논의를 어떻게 믿겠는가? 왜 떳떳한 민족 대업을 밀수장이처럼 해! 정말 통일을 위한다면 떳떳하게 대낮에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국민 앞에 자신없는 정권이 어떻게 통일의 주체가 되나. 그것은 정치 야욕 때문이며 그러므로 약한 허세이다. 그런 뜻에서 "지배자란 것이 사실은 허깨비이다. 그들이 어마어마하게 무장한 것은 소갈머리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함석헌)라는 판결은 글자 그대로이다.

그러면 우리 통일 문제는 외세에 의해서만 해결될 것인가? 그런 주장이 정권 차원에서 사실상 일관되어 왔다. 미군 주둔을 고수하는 것이라든지 유엔의 감시 하(그것은 사실상 미국의 대명사였는데)에서의 통일 선거에 의한 통일론이라든지 미일 사대국의 공동 노력에 기대하는 통일론 등등이 모두 그런 것이다.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현실주의적 변이 뒤따른다. 그러나 해방 직후 결성된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시작하여 유엔 또는 관련국들 간에서 제기한 한국 문제에서 어떤 성과를 가져왔는가. 이차대전 때 포츠담이나 얄타협정을 쳐다보듯 세계 정세에 기대하면서 통일이 저절로 굴러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또다시 반복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도대체 통일은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이른바 강대국들이 우리와는 아무 연결도 없이 저희들끼리 '한국의 통일 논의를 했을 것이다, 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면서도 그 세밀한 내용은 아무도 모르니 대체 우리는 여러 마리 개들이 둘러선 가운데 놓여진 뼈다귀인가. 미국의 관료가 소련 아니면 중국 관료와 만났다고 하면 으레 한국 문제를 논의했다고 하지만 그 논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보도는 없으며, 가끔씩 그들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기도 하고 거기에 참여한 미국 관리 하나가 한국에 와서 사후 보고했다는 식의 보도를 접하나 그 내용은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세파트를 동반하여 보고장에 임하는 그런 교만한 것들이 보고를 했으면 얼마나 제대로 했을 것인가. 국민에게 주는 인상을 자기들이 결정한 내용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기보다 통고 혹은 지시하는 과정으로밖에 상상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우리를 통째로 삼켰다가 토해내고 아시아 전역을 피로 물들인 일본이 밖에서 한국 문제를 논의했다는 보도를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자기들이 무엇이기에 또다시 한국 문제에 간여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마치 우호적인 노력이라고 간주하는 듯한 정부나 언론의 기대는 구역질이 나게 한다.

우리는 이 이상 사대주의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정의의 사도'라는 미국의 가면이 벗겨진 지 오랜 것처럼 국제적으로 어떤 도의적인 기대를 할 때는 아득한 과거로 지나갔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실리주의가 판을 친다. 정의를 위한 세계 혁명을 높이 내걸었던 공산권 국가들마저도 지금은 그 따위 가공적인 정의론을 포기하고 실리를 위한 체제로 속속 탈바꿈하고 있다.

오늘의 이 시점에서 어느 한 나라가 우리 민족 통일을 원하는가. 하나도 없다. 한국의 분단 고정화가 우리와 이해 관계에 있는 모든 나라에게 유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은 씨알만이

함석헌 옹은 통일을 염원하는 글에서 정부가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저들에게서 통일 의지를 기대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서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그들(남북 양 정부)은 마치 솔로몬의 재판의 가짜 에미와 같다. 솔로몬의 경우는 가짜 에미가 하나였기 때문에 아기가 살 수 있었으나 우리에게서는 두 놈이 다 가짜였으니 절반이라도 갈라 달라는 틈에서 아이는 두 조각이 나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 일은 이 두 조각난 아이를 다시 살려내는 데 있다. 그러려면 먼저 필요한 것이 솔로몬이다. 누가 이 지혜의 임금이 될 수 있을까. 이 민족 자체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명판결이 결코 재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어버이의 마음이다. 아기를 살리자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 그 직감을 얻었다.

그럼 누가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살려내자는 생각을 할까? 남북의 악독한 정치 밑에 흩어져 있기는 해도 그 속바탕에서 다름이 없는 씨알들만이 그 마음을 발동시킬 수 있다. 그러면 직감적으로 계시를 받아 이 두 가짜 에미 속에서 아기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씨알만이 민족 통일을 진정으로 갈구하는 주체이다

이렇게 그는 통일 과제에 있어서 정권은 그 주체가 될 수 없음은 고사하고 본질적으로 반통일 세력임을 분명히 하면서, 통일의 길은 오직 남북의 씨알의 통일 염원이 합칠 때 기적과 같이 가능하리라는 신념을 피력한다. 그러면 씨알은 누구인가. 함석헌 옹은 오늘까지의 위정자의 행태를 비판하는 이야기에서 씨알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불 속의 밤 알을 집어내게 한다"는 말이 있다. 꾀있는 놈이 군밤은 먹고 싶지만 손을 데기는 싫으니까 순진한 놈에게 그것을 하게 하고는 밤알이 불밖에 나와 떨어지자마자 주워낸 놈이 덴 손 끝을 불어 식힐 겨를도 없이 가로챈다는 말이다. 정치가를 두고 한 말이다. 대국, 소국, 문명, 야만한 것 없이 정치란 본래 그런 것이다. 순진한 씨알을 시켜 목숨을 바치며 농사, 장사, 공업, 전쟁을 하게 하고는 그 결과를 가로채어 고루거각(高樓巨閣)에서 잘 살아 보자는 것이 정치가의 심산이다. 이런 현상이 통일운동 과정에서 그대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말에서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지적되었다. 그것은 씨알이란 농사, 장사, 공업 그리고 전쟁까지도 하는 현장의 일꾼처럼 실제로 일을 해내는 것이 씨알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자신은 손 까딱하지 않고 남이 노동한 열매를 가로채서 고루거각에서 잘 사는 그런 것들이 반씨알들인 것이다.

씨알만이 실질적 통일꾼이다

"지나간 오천 년의 역사가 씨알 속에 있다. 씨알의 자궁 속에 새 시대의 아들이 길러지며 민중은 염원의 얼로 수정되어 미래의 역사를 연다." 그런데 이런 새 역사의 얼이 기득권자의 권좌를 뺏은 결과가 되기 때문에 대립되는 것이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르고 나라도 망하고 문명이 사라지는 날이 와도 씨알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까닭은 그것이 본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좌에 있어서만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이 무너짐과 더불어 없어질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 권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바로 생존권 싸움과 같다. 우리의 긴 역사에 그대로 살아남은 것은 왕들도 아니요 관료도 아니요 지식인들도 아니다. 저들은 그 시대의 흐름을 타고 언제나 의복을 갈아 입고 말을 바꾸어 타면서 재주를 부리다 사라졌다.

그러나 씨알은 바위같이 서서 이 민족의 맥을 이어왔다. 통일의 과제도 긴 안목에서 보면 결국 구름에 가리웠다 다시 나타날 해 같은 것이다. 그것은 씨알이 엄존하니까! 씨알은 시에 따라 가변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이다." "도대체 크다는 것이 무엇이냐. 씨알 모인 것 아니냐." "굳센 힘 어디서 나오느냐. 씨알 서로 손잡음 아니냐." 정권 그것이 씨알에게 외면당하면 무슨 힘이 있단 말이야. 그것은 허깨비일 뿐. "씨알을 위아래로 본다면 하나님과 씨알은 한 실오리의 두 끝과 같다. 위에서는 하나님이요, 아래서는 씨알이다." 바로 민심이 천심이란 이 때문이다.

씨알만이 민족통일을 이룩할 힘의 원천이다.

씨알은 민중이라는 말의 한국적 표현이며 파악이다. 그러므로 민중을 말하면서도 한국적 특수한 풀이가 가미된다. 그러나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이 글의 과제일 수 없고 그것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문제이다.

씨알을 민중이라는 말로 또는 참 사람이라는 말로 대치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굳이 씨알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때묻지 않은 인간'이라는 뜻으로 파악한다. 때묻지 않는 존재, 맨 사람, 난 대로의 사람, 순진한 사람, 아무것도 붙여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등등이 바로 그런 존재를 표현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보면 이런 존재는 부정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존재를 부각하는 것은 뚜렷한 부정과 저항의 대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통일의 과제에서 보면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은 통일을 내세워 통일을 끝까지 방해하는 잡것들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씨알이 있어 민족이 있고, 씨알이 있어 국가가 있다. 민족의 실체는 씨알이다. 그러면 민족 통일의 주역도 씨알이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들을 소외하는 세력들이 있어 통일의 길은 막혀 있다. 그런데 이런 반통일 세력이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이름, 아니 씨알(국민)의 이름을 남용하여 씨알의 뜻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기득권자들이다. 그 중에도 통치권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저들이 통일 논의를 독점하고 씨알을 그것에서 소외시키는 것이다. 까닭은 이 둘의 이해 관계가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일과 반통일로 대립된다. 통일운동은 씨알이 주체되게 하여 통일을 이용하는 불순한 잡것들을 제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상에서 함석헌 옹의 씨알에 대한 신념 따라서 통일의 주체로서 실질적 힘에 대한 신념을 보았다. 그러면 이 씨알의 통일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나!

씨알 통일운동의 전개 씨알

씨알의 통일운동의 전개는 씨알이 씨알되게 하면 그 자체로서 전개되는 것이지 그 밖에서 창안해 낼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씨알로 하여금 물이 흐르듯 흐르게 하면 종당에는 자기의 길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해서 얘기하려는 것은 씨알운동의 자기 전개의 가능성을 전망하는 데 불과하다. 첫째는 씨알로 하여금 씨알되게 하고 그것의 자기 전개를 가로막는 모든 반씨알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운동이다. 반씨알세력은 바로 반통일 세력이다. 반통일 세력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계층이다. 이 기득권자들은 분단 상황에서의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씨알의 힘을 분열시키는 일에 모든 정력을 쏟아 왔다. 경제적으로나 권력적 차원에서 기득권 계급을 형성하여 씨알의 세력과 대립시키려고 씨알의 공동체 의식을 지방색으로 조장함으로 희석화시키고, 허구의 이데올로기를 조작하여 씨알 내부의 분열을 꾀하며, 언론 매체를 최대한 동원하여 반의식화 운동을 꾀하는 등의 온갖 공작을 분쇄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시야를 군사적, 정치적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육천만 민족 구성원의 주체인 씨알에 돌리자. 씨알은 나뉘어진 일이 없다. 씨알에게 있어서 정치적 이해 관계나 이데올로기 따위는 속박의 대상이지 생존을 위해서는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공적으로 형성된 분단적 차이점을 헤치고 남북에 갈라져 사는 씨알의 통일성을 시인하며 존중할 뿐 아니라 그것을 활성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분단적 허위에 때묻지 않은 민중 문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그 첩경일 것이다. 이북의 씨알들도 연변에 있는 씨 요들도 남한에 있는 씨알들과 똑같이 아리랑을 부르고 도라지 노래를 부르며, 무대에 등장시켜 인위적으로 만든 것 말고 흥겨워 추는 춤이나 가락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40여 년 이상 단절되었던 사이가 서로 만나 껴안고 울며 통곡하고 그 울음과 표정 하나하나에서도 우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씨알의 공통분모를 체험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체제 이전에 씨알의 문화, 거기서부터 우리는 민족 통일의 출발점을 찾아야 하겠다.

셋째로 정치는 이렇게 해서 전개되는 씨알운동에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 통일 운동에 정치적 협상이 앞서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 정권이라면 최소한 전민족이 공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정치에로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씨알운동은 그 있는 자리에서 정권으로 하여금 남북이 없는 이미 통일된 씨알의 염원과 통일 운동을 상전처럼 받들어 그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로 알도록 제동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은 다스리지 않을수록 좋은 정권이고 자기를 축소할수록 제 길에 들어서는 정권일 것이다

넷째로 씨알은 국가가 있기 전에, 법이 있기 전에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씨알은 국가에도 법에도 나아가 세계의 어떤 외세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사람이 함께 살려면 어떤 형태로나 정부가 있게 마련이며, 그것은 법을 집행해야 하며, 또 오늘 같은 국제 사회에서 상호 규제를 여러 각도에서 받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예속된 것이다. 더욱이 우리 정권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종속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기 문제를 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그러나 씨알은 물과 같이 자기 갈 길을 끝끝내 갈 권리가 있고 힘이 있다. 물은 아무리 막아도 아래로 흐른다.

씨알의 운동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씨알이 제멋대로 하면 자유이고 제자리 찾으면 정의이다." 제가 제자리를 찾겠다는 운동에 누구도 간여할 권리가 없다. 국제관계에서의 외교적 고려의 협정이니 채무 관계니 따위는 씨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수지타산에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이기고 지는 것을 고려함으로 가는 길을 주춤할 수 없다. 남과 북의 씨알이 합치는 운동이 일어나면 그것을 막을 권리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국제 정치적인 고려에서 팔레비를 뺀 이란을 생각할 수 있었으며, 마르코스를 뺀 필리핀을 생각할 수 있었으며, 독재 체제를 제거한 미얀마의 살 길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랑곳없이 상부 구조적 계산을 박차고 궐기해서 그런 일들을 해냈다. 베트남의 민중이 프랑스나 미국 같은 강대국과 맞서 이기리라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씨알들은 그 같은 고려 따위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가졌고, 그 자유를 구사함으로 제 설 자리를 찾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씨알들 사이에는 삼팔선이 없거니와 삼팔선을 무시할 권리를 갖고 있다. 그들이 삼팔선을 설정하는 데 참여한 것도 아니고, 동족 상잔의 전쟁 구상에 가담한 것도 아니며, 휴전 협정에 동의한 바도 없다. 그러므로 저들은 삼팔선을 없는 것으로 무시할 권리가 있다. 이른바 휴전 분계선의 철통 같은 방어진은 무엇 때문에 설치된 것인가. 정말 상호적 군사 침략의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면 씨알들의 만남을 가로막자는 분단주의자들의 반통일선은 아닌가. 삼팔선을 바로 그어놨어도 그것을 무력으로 막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랬다면 이미 삼팔선은 씨알의 합류에 의해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통일의 장벽은 바로 방어선화 된 삼팔선이다. 씨알의 통일 운동은 바로 제자리를 찾자는 운동이다. 그 점에서도 미군 주둔은 결코 용납되지 않으며 씨알은 저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끝으로 구체적인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막아놓은 물꼬를 트는 일이다. 씨알과 씨알들이 제자리로 서는 것을 막는 그 물꼬 말이다. 남과 북의 씨알들이 만나게 하라. 서로 만나려는 그 사이를 국군도 미군병과 자리를 비켜라. 구체적으로 말하면 씨알의 통일 운동은 여러 가지 영역에서 일하는 씨알들이 영역별로, 그룹별로 줄이 닿는 대로 계속 만나는 데서 출발되어야 한다. 정부는 이미 삼팔선이 없는 씨알에게 삼팔선의 인정을 강요하지 말라. 그로 인해서 일어날 혼란 운운의 헛소리는 그만하라 아무런 욕심도, 때도 묻지 않은 씨알은 정권욕과 재물욕에 노예가 된 어느 지도층보다 밝은 판단으로 현명하게 자기의 길을 타개해 나갈 것이다. 이른바 지배층은 숯불에 익은 밤을 직접 자기 손으로 꺼내지 못하겠거든 씨알자신이 꺼내는 것을 막지 말라. 이것을 위해서 정부는 뒷바라지하는 것을 유일한 임무로 알라. 그러면 통일의 길은 열린다. 막았던 물꼬를 틈으로써 높게 쌓였던 물이 삽시간에 물꼬 전체를 헤치면서 합류하듯이.

(『씨알의 소리』 198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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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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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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