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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평화와 일본
평화 파괴의 주범

평화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시각에서 평화에의 의지는 통일된 힘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반평화적인 작태를 빚게 된다.

첫째는 평화에 대한 이해이다. 평화 운동은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참 평화를 갈망해야 할 위치에 있는 제3세계에는 평화 운동이 가시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풍요를 만끽하는 제1세계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제3세계인들은 자체의 독재 정권과,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외세와의 대결을 지상 과제로 알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평화보다는 투쟁을 일차 과제로 놓게 된다. 또 하나는 독재 정권들은 냉전 체제를 이용하여 존속하는 정권인 만큼 평화 운동을 싫어한다. 그것은 평화 운동이 현실화되면 자기들의 설 자리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이른바 제1세계에서는 평화의 차원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수는 극히 적고, 이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 그럼으로써 기득권이 파괴되지 않는 상태를 평화라고 본다. 그들은 이를테면 원자로나 원자 무기에 대해서 예민한데, 그것은 그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1세계 사람들은 기득권을 보장하는 질서 유지를 평화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3세계인들에게는 기존 세계의 질서가 변화 내지 파괴될 때만이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제1세계의 풍요와 안전은 식민지에서 착취한 물질과 기득권 위에 세워졌다. 말하자면 불의 위에 세워진 것이다. 정의가 없는 평화란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평화보다 정의가 앞서야 한다는 것이 뺏긴 자의 입장이다.

이상과 같은 평화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세계적인 차원에서부터 개인적인 차원에까지 적용된다. 그러므로 평화라는 같은 말 아래에 서로 상반된 주장과 의도가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평화를 구체화하려고 할 때, 상호의 이해 관계에 부딪치게 된다(처음 경우와도 관련된다). 가령, 분단된 독일 민족은 민족의 평화를 위해 통일을 원한다. 유럽인들도 평화 자체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독일인 자체 내의 평화가 통일로 이어지는 경우에는 절대로 반대한다. 까닭은 독일 민족이 통일되어 강대한 국가를 이루면 유럽 전체에 위협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은 평화를 생각할 때 제1차적으로 민족 통일을 당면과제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극동 아시아의 평화를 원한다는 주변 강대국들은 한반도의 분단 상태의 고정화를 기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양 블럭이 각각 분단된 한쪽을 방위선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남한에는 백 내지 천 개의 핵이 배치되어 있다. 한 개의 파괴력은 일본 히로시마를 박살낸 원자폭탄보다 수십 배의 위력를 갖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핵을 탑재할 수 있는 비행기가 도합 170여 대라고 하는데, 그것들이 탑재할 수 있는 핵 폭탄의 양은 적어도 680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며, 이 외에 최소한 백 내지 천 발을 발사할 수 있는 XM753형 포 백여 개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미국은 한국을 대소 첨단기지로 삼고 있다. 평화! 평화! 하면서 실제로는 한국을 화약고로 삼고 있다. 세계가 평화를 노래하면서 실제로는 무기 판매 경쟁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은 이러한 이율배반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세계가 사용하는 군사비는 아프리카 대륙 GNP의 2배나 된다. 일본의 평화주의자 여러분! 만일 한국과의 정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가상하는 경우에, 그리고 그 전쟁의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에게 있다고 할 때 당신들은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 최소한 여러분에게도 이율배반적인 고민이 있게 될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이 소극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라면 적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한마디로 팽창주의라고 하겠다. 식민지주의는 곧 제국주의인데 그것을 집약해 말하면 팽창주의이다.

이 팽창주의의 실현은 두 가지 매개물로 추진된다. 하나는 군사력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력이다. 과거 식민주의 시대에는 군사적 점령으로 세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 구분 자체는 외형적인 것이며, 따지고 보면 군사력과 경제력이 불가분의 관계로 밀착되어 있다. 이른바 군산유착은 세계적 현상이다. 장사꾼들은 군과 밀착하여 무기 판매에 혈안이 되어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세계에 전쟁 유발을 촉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우리가 지금의 번영을 계속 누릴 뿐 아니라 보다 더 행복한 평화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나 외에 다른 나라들은 전쟁을 해야 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팽 창주의의 현대적 언어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수요를 고려하지 않고 계속 생산해야 하며 그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시장 개척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 시장이 한계에 이르면 다른 한편으로 계속 파괴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무기 장사에서 전쟁 도발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작태를 세계 평화라는 이름 밑에 자행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아시아의 평화라는 것을 염원하면서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정말 아시아의 평화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해결의 길을 찾을 의지가 있는가? 그렇다면 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으며 보다 가공하게 파괴할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다. 지난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아시아 전체를 고깃덩이로 보는 이리 같은 횡포를 자행했다. 패전 후에 일본은 평화 애호 국민으로 재생하기 위해 이른바 평화 헌법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일본 국민은 영원히 전쟁에 호소하지 않을 것과 이에 따라서 군사력을 영원히 포기할 것을 선언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군수 생산에 도움이 되는 일체의 공장, 기계 시설의 철거 및 파괴를 단행해야 한다고 했으며, 평화로운 국민으로 있기 위해서는 최저 한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정도의 필요한 것 이상의 경제 능력을 갖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본이 오늘 어떻게 되었는가? 일본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나라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 경제력은 전 아시아는 물론 세계로 침투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군사력도 계속 증강해왔다. 벌써 1957년부터 군사력 5개년 증강계획을 추진하여 무려 다섯 번이나 계속함으로써 군사력을 증강해왔다. 1982년까지 군사비를 GNP의 1퍼센트를 넘지 않겠다고 한 것인데, 1983년에는 실질적으로 그것을 상회해서 1.19퍼센트로 증대했다. 그런데 퍼센트로써 그 군비를 측정하면 안 된다. 이들의 경제 성장은 퍼센트를 그대로 유지해도 군비를 계속 상승시킨다. 1987년도 방위비는 1986년보다 5.2퍼센트가 올랐다. 그것이 무려 천칠백삼십구억원 증가다. 이것이 2퍼센트로 증대될 경우 일본의 군사력은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전체 국가들의 군사비 합계와 맞먹는 막강한 것이 된다. 일본은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탈아시아 지향과 더불어 구미와 같은 열강으로서 아시아의 맹주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경제력과 군사력 증강에 의해서 일본은 점점 교만해지고 있다. 그것이 나까소네 등의 발언에서 잘 드러났다. 이른바 대한해협 봉쇄론, 일본의 불침항공모함론 등이 그것이다. 그의 공공연한 야스구니 신사참배는 군국주의의 복구와 선언을 행위로 보여 준 것이다. 일본은 지난 60여 년 동안 가공할 만한 범죄를 저질렀으나 지금까지 진정한 사죄 한번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거꾸로 지난 죄악사를 미화하고 왜곡하여 아이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칠 교과서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 특히 가공할 만한 사실은 일본의 군수 물자의 생산이다. 1983년도에 일본 방위산업체 중의 하나인 릿싼 기업이 3조억 달러 규모의 매출액을 냈는데 그 군수 물자의 90퍼센트를 자국의 소비에 충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군산복합체가 강화되면 이 강대한 경제력이 군국주의의 손에 장악되어 또다시 아시아 전역에서 횡포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일본이 미국 블럭의 일원으로 있는 한 그 위험은 가시적이다. 일본을 군사국으로 만든 것은 물론 미국이다. 중국의 공산군 승리, 625 한국전쟁 등이 그 계기가 되었고 베트남 전쟁과 중동 지역의 탈미국화 현상은 일본 군국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른바 '아시아는 아시아의 손으로'라는 미명 아래 일본을 중심한 군사 동맹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가령 팀스피릿 훈련에 한국군은 물론 일본도 1983년에 19만 명이 참여했는데 1984년에 21만 명으로 증가일로에 있다. 극동을 중심으로 소련 세력에 대항한다는 확고한 정책이 철회되지 않는 한 일본 중심의 방위 체제는 계속 증강 일로를 달릴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일본 자체의 반평화적 성향이다. 나는 최근에 일본이 세계 예술품의 25퍼센트에 해당하는 물량을 사들였으며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리란 보도에 접하고, 전율을 금하지 못했다. 남아도는 돈을 놓고 몸부림친다는 느낌인데, 일본의 양심이 어느 수준인가하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지금 세계에는 2억의 사람들이 기아선상에서 매일 죽어 가고 있다. 아시아만 해도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구가 빈곤에 시달린다. 이런 마당에 그런 막대한 돈을 들여서 예술품을 사들여도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는 그 양심 말이다. 일본의 현재 군사비만도 아프리카 대륙 국민 총생산의 2배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런 재력과 군사력을 어느 방향으로 분출하려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의 향방이 아시아의 평화를 결정한 것이라고 단언해도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평화 문제를 보는 시각

평화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반평화적인 조건들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반평화적인 조건들은 바로 평화를 깨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집약적으로 말하면 분단 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볼 때나 국내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도 헤게모니를 노리는 지배자는 하나같이 분단과 통치라는 방법을 써왔다. 가령 일본이 아시아 평화를 파괴할 때, 먼저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만주 전역을 중국 본토와 분단시켜 독립국으로 만들었다. 유럽에서는 2차대전 이후에 독일 민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분단했다. 한국은 양대 블럭의 헤게모니 싸움에 의해서 분단되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것 아니고도 민족과 민족 사이에, 그리고 그 민족 안에 있어서도 뛰어넘을 수 없는 분단선이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 무엇이 이러한 분단 작용을 하는가? 과거에는 배타적인 종족 의식, 그리고 그들이 가진 각자의 특유 한 문화의 성격, 그 중에는 특히 종교적 신념이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그 양상이 보다 구조적이요,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세계 평화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지금은 아시아냐 유럽이냐 아프리카냐라는 구분이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냐 자본주의 국가냐로 나뉘어졌다. 아시아에서만 해도 중국, 한국의 반, 베트남, 라오스 등등이 이미 공산주의 블록에 속하는데, 그 중 베트남은 양 블록의 각축전의 전선이 되어 많은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순수한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것이 날로 뚜렷해진다. 같은 공산주의 블록에 속하면서도 소련과 중국의 이해 관계는 상충되어 아시아의 평화를 해치고 있다. 베트남이나 라오스 그리고 버마 등은 이 상충이 첨예한 지역이다. 그 외 일본을 위시한 여러 아시아의 나라들이 이른바 자유 진영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일본 같은 경우는 적어도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는 두 큰 블록과 구별되어 제3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일본의 문화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이미 신도이즘을 일본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장시켰던 일본의 야심은 지금도 포기되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서, 이 이데올로기 싸움은 맹목적인 혹백논리로 분열을 일으키게 한다. 가령 일본을 가장 경계하는 아시아인들의 반일감정은 사실과 유리된 도그마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호 불신 감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둘째는 경제적 조건이다. 일본은 지금 세계 시장을 휩쓴다. 다국적 독점기업들은 이제 자본을 세계에 투자하여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다. 그것은 아시아에서 큰 위협이다. 가령 한국에만도 지금 14개 은행이 상륙하였다. 그래서 땅과 건물 등을 사들인다. 이렇게 아시아에서는 일본 만이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부상되고 있을 뿐, 그 외의 나라들은 모두 가난하다. 이 경제적 불균형은 적대관계를 심화시키고 있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85년 일본의 1인당 GNP는가장 가난한 인도의 그것에 비해 무려 42배나 된다. 1986년 필리핀과의 비교에서는 30배, 같은 해 인도네시아의 37.5배, 한국의 7배이다. 수출고는 한국,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 등 다섯 나라가 82-83년 사이에 수출한 총액의 2.5배나 된다. 말하자면 일본 사람 1명이 소유한 재산이 인도 사람 42명의 소유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과 그 외의 아시아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로 평화 공존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반드시 선망의 대상으로서의 질투심 때문만이 아니다. 그 감정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경제 불균형이 어디서 왔는가? 일본의 부는 역시 아시아 사람들의 희생의 제물 위에 세워졌다. 중국에서 모택동 군이 승리함과 더불어 미국은 평화헌법을 유린하면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일본을 재무장하도록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패전 불과 5년 만에 일본의 피점령지였던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수없이 피를 흘릴 때, 일본은 돈을 벌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일본이 거부가 되는 전환기를 만들었다. 저들은 아시아에서 값 싼 노동을 착취하고 땅을 이용하여 그들의 부를 축적하고 아시아인들은 거기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저들의 부가 축적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아시아 사람들이 기존의 경제적 조건을 전제한 평화를 수용할 까닭이 없다.

경제력,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이 어떤 목적에 사용되는가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경제력은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기보다는 반평화적 독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보다 돈이 중요시되는 이 마당에 어떻게 평화가 기대될 수 있겠는가?

셋째는 군국주의이다. 군사력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경제 착취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 한국과 같은 분단 상황에 있는가난한 나라는 그토록 남보다 몇 배의 희생적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경쟁 때문에 성장하지 못한다. 경제적 힘과 군사력 증강은 직접적인 함수 관계에 있다. 일본은 자기 나라 방위를 다른 나라에 맡기고 재빨리 경제 성장을 일으켰는데, 경제 성장과 더불어 군사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강시켰다. 가령, 그 예로써, 이미 1977년에 일본의 군사비는 한국에 비해서 9.5배, 즉 거의 10배나 증강되었다. 전쟁 상태에 있는 한국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엄청난 군사비인가? 이미 언급한 대로 1983년에 GNP의 1.19퍼센트로 군사력을 증강했는데, 만일에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의 전체 군사비를 넘는 2퍼센트에 이른다고 하면 아시아의 평화가 올 것인가? 또 군산복합체인 기업이 군수물자 수출을 본격화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는 것처럼 뻔하다. 이에 대응하는 그 외의 약소 민족들은 이를 경계하고 군사력을 증강하여 민족주의로 담을 쌓는 길 뿐이다.

평화에의 길

지금까지 나는 줄곧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평화에 대한 비관론만 제시한 셈이다. 그러면 평화에의 길은 무엇일까? 나는 정치, 경제적인 시각에서 어떤 대답을 찾거나 대답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거니와 그런 것을 시도할 뜻도 없다. 나는 지금까지 문제 제기한 것을 성서 전체의 맥락에서 재조명해 보고, 평화에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나의 임무를 끝내려고 한다.

성서의 내용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샬롬"이라고 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샬롬을 추상화하지 않으려면 성서가 형성된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에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토라"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시기는 주전 450-400년 사이가 된다. 이 때에는 이미 이스라엘은 멸망되고 그 나머지 남 유다마저 패망되었다가 페르시아 제국의 관용 밑에서 토라의 집결을 통한 민족 재건을 꾀할 때이다. 다시 말하면 그때는 민족으로서 지리 멸렬 되었을 때이다. 그들의 역사를 간단히 추적해 보면 이렇다. 다윗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통일왕국이 겨우 70여 년을 유지하다가 분열되었다. 그때가 주전 926년이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망했다. 뒤이어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빌론에 의해서 망했다. 이로부터 50여 년 간의 포로 생활에서 율법 형성 작업을 진행했는 데, 저들은 그 같은 고통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염원했을까? 그것이 샬롬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쉽게 이해되나 어떤 샬롬인가? 주전 450년경에 시작된 구약성서 정경의 형성 작업은 로마 등의 속국 생활을 거쳐서 주후 70년 완전히 멸망한 후인 주후 90년경에 완료되었다. 이것을 편집하는 편집자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그 다난한 역사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적으로 극도의 울분 속에 약자의 슬픔을 안고 있던 이스라엘, 남북의 분열은 물론 갈릴리 지역은 600년 동안 계속 새로운 통치자들에 의해 분할되고 사마리아도 찢겨 나누어지고 이집트를 위하여 사방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다인의 참상을 보고 있는 편집자들, 이들에게 이 민족 비극의 현실은 바로 분단의 비극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들이 말하는 평화는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앞서 민족 통일, 그것이었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혼이기도 한데, 저들의 출현은 사실상 분단 이후이다. 저들은 샬롬을 내세우며 그와 병행하여 "하나님만"의 통치 현실을 말했다. 그러면서 집권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말하며 이스라엘로 되돌아가기를 촉구했는데, 그 이스라엘은 다윗 이전의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였다.

다윗은 군사력과 권모술수로 이스라엘을 통일했으나 평화를 가져오 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진실한 평화의 모델인 이스라엘 지파 공동체를 파괴했다.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서 강력한 군주 체제를 만들고 군사력을 증원했으며 야훼를 다윗 왕국의 이데올로기로 삼은 데 반해서 고대 이스라엘 지파 동맹은 "야훼만"이라는 기치를 높이 세움으로써 어떠한 인간의 지배체제도 배격했다. 주변의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적어도 200여 년 동안 군주가 없는 민주사회를 이끌어왔다. 경제 질서도 평등사회였음이 틀림없다. 까닭은 경제력 집중은 권력 집중과 함수관계에 있는데 거기에는 상주하는 권력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원형은 바로 이 고대 이스라엘의 질서를 반영했던 것이라고 보인다. 바로 이것이 평화로운 통일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샬롬"을 말할 때에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야훼의 이름 밑에 평등한 고대 이스라엘 지파 동맹을 안중에 두고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저들이 말하는 샬롬은 민족 통일을 제1의 과제로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민족적 고뇌를 심각하게 경험한 저들은 점점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감염되어 샬롬의 참뜻을 저해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역행하는 결과에 도달했다. 저들이 평화를 말하면서 민족 통일을 염원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나 통일된 이스라엘을 다윗 왕조의 복구와 일치시킨다든지, 메시아 상에 있어서 마저도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민족주의와 결부시킨 것은 이를 말한다. "야훼만"이라는 슬로건이 모르는 동안 "이스라엘만"으로 둔갑했다. "야훼만"은 야훼 이 외의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훨씬 고대로 소급된다고 보여지는 J자료의 실낙원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중요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므로 평화의 나라인 낙원이 파괴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금단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속해야 하고 사람이 자기 것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에게만 속해야 할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 것, 즉 사유하는 것, 그것이 평화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토라의 편집자들이 바로 이러한 실낙원의 이야기를 성서의 서두에 내세움으로써 인간 세계의 역사는 분단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을 사유화하려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대전제로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역사는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위시해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반평화의 극치를 드러내고, 그 시대를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더불어 막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새로운 막이 열린다. 그것은 통일, 평화로 향하는 새출발이다. 바로 그 통일에의 새 장을 열어 후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지파 동맹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분단과 통일의 길은 계속 긴장 속에 명멸한다.

대세는 힘은 힘으로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역대의 제국주의에 의해서 계속 침범만 당하던 이스라엘이 침범하는 그들과 별 차이가 없는 가치 척도를 가지고 몸부리친 결과는가장 비극적인 상태에까지 도달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비관론에 빠졌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도 어떤 평화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는 비극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황을 보여준 것뿐이다. 그것이 참 평화를 터득하는 과정이었다면 그것은 너무도 길고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에게서 새로운 지평을 경험한다. 예수의 시대는 근대적 성격을 지닌 대로마제국 치하에 있을 때이다. 로마는 군국주의로 보나 경제적 착취의 형태로 보아서 이미 제국주의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 이전의 제국들과 비교해 보면 "신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유다 민족을 이끌고 가는 대부분의 그룹들이 타협주의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던 데 반해 갈릴리의 젤롯당만이 유다 민족주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폭력으로 민족 주권을 되찾으려고 싸웠다. 저들은 민족주의에 불탔으며 그것을 폭력에 호소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예수가 출현했다. 우리는 예수 운동에 대한 자료는 갖고 있으나 예수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유다의 전통 사상에 비추어 보아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예수의 행태나 말씀 자체에서 위의 관심과 관련해서 몇 가지 밝힐 것이 있다.

먼저 젤롯당의 경향과 비교할 때, 그것과 공통된 부분을 제시하는 보도가 있다. 그것은 예수가 그의 선교의 대상을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했다는 사실이다(마 15:24; 마 10:5f). 사람들은 이것이 마태 복음에만 있다는 이유로 예수의 말 그대로가 전승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그의 공생활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그러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먼저, 흩어진 민족을 우선적인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예수에게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고 그가 전통적인 민족주의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주목할 것은 그에게는 다윗주의가 없고, 오히려 그것을 상대화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제 올 메시아가 다윗의 후예일 수 없다는 단호한 결론(막 12:35-37)은 유다의 다윗 중심적 민족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둘째로, 그에게 있어서는 유다 민족주의적 메시아 사상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의 선포의 초점은 "하나님나라"이다. 그 현실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고대 이스라엘 지파 동맹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야훼만"의 기치 앞에 구성되었던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 하나님 나라는 곧 "야훼만"의 주권을 인정하는 현실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젤롯당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다른 집단들의 주장과 상통한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유다의 주권을 전제하는 데 반해 예수는 일체의 인간적인 주권을 거부하는 것이다. 정말 인간적인 주권을 거부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주권을 전제로 한 국가 형태도 거부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도 넘어선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표상을 뚜렷이 나타낸 것은 마태복음 8장 11절(눅 13:28)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와서 하늘 보좌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한다. 누가는 동서남북으로 확대하여 그 나라의 탈국경화, 세계성을 나타낸다. 유다 민족주의적인 메시아를 거부하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우주성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거기에 국경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예수의 기본 자세가 예수의 민중으로 하여금 탈유다화하여 모든 국경을 무시하고 세계를 선교의 무대로 삼게 했을 것이다.

끝으로 "그 나라"의 현실은 "나눔"의 현실로 성격화되었다는 점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텍스트가 온 세계 사람들이 모인 것을 전제하고 그들의 평화적 공존의 실재로서 더불어 먹는 축제 임을 나타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가 그의 행태에서나 그의 가르침도 처에서 그 나라를 더불어 먹는 것과 일치시킨 것을 발견한다. 그의 별 명이 될 정도로 그는 민중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 이 '먹고 마심'을 그는 신랑과 더불어 있는 축제로 성격화한다(막 2:18-22 병행).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그것을 샬롬의 구체적인 구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그의 최후에도 제자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으며 그 다음에 올 새로운 장,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도 먹을 것을 전제로 한다(막 14:25).

"그 나라"가 "나눔"의 현실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나눔"은 구체적으로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창자를 채우는 물질 말이다. 이 점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물질을 나누는 현실이다. 따라서 그 나라를 정신화 내지는 피안화하는 해석은 용인될 수 없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내용을 불가사의한 것으로 규정해 버리고 도망해 버리거나, 더욱이 "나눔"에 있어 "물(物)"이라는 구체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물질적 기득권을 그대로 전제한 평화의 설교를 가능케 하려는 악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샬롬"에의 길의 어떤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몇 가지 성격을 제시해 보았다. 그러면 그것을 집약해서 평화를 지향하는 역사의 지평에서 어떤 구체성을 제시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국경의 철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어느 개인이나 민족도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사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을 지상과제로 하는 한, 국경이 그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국경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사실상 오늘날 평화를 파괴하는 주범은 국가주의이다. 이 국가주의가 오늘날 평화를 파괴하는 팽창주의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국가주의를 지양하는 것, 이것이 평화로 가는 길의 첫 과제이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다. 이미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들은 국경의 개념을 변질시켰다. 지금 유럽은 경제적 단일화를 추진하다가 정치적으로 단일화된 사회를 노림으로 유럽 내의 국경을 철폐하여 유럽공동체를 실현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곧 국가 없는 세계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경이라는 개념을 바꾸고 따라서 국가라는 관념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그러면 아시아에 있어서 평화에의 길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 길은 아시아에 있어서도 국경, 국가 개념을 철폐하는 것이다. 그것이 평화의 첩경이라고 본다. 그런 전제를 가질 때 무엇이 이것을 방해하나? 그것은 경제적 불균형과 군사력의 치중이다. 그렇게 보면 일본이 국경 없는 아시아 형성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길은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일본 자체가 스스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한 민족으로 자기 변화를 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시아 민족들이 단합해서 일본을 평화에의 길로 굴복시키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1988, 일본 평화회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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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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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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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남은자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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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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