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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실현
평화 희구

우리 번역으로 평화, 화평 또는 평안 등으로 번역한 희랍어 원문은 '에이레네(eirene)'다. 이 어원으로 '평화적', '평화케 하는 일' 등 여러 가지 뜻이 파생되고 있다. 라틴어 번역에는 이 단어를 베드로전서에서 한번(5:14) 그라티아(gratia)로 번역했을 뿐 그 외에는 몽땅 팍스(pax)로 번역했다.

신약에서 평화에 대한 희구는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갈구일 수 있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신약이란 적은 책에 무려 91회나 이 단어가 나타난다. 바울은 편지의 시작이나 끝에 평화를 비는 것을 빼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인사도 이 말을 쓰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 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서로 만나면 샬롬(schalom)이라고 하는 데 그것은 이미 창세기에도 나타날 만큼 오랜 관습이다. 왜 이처럼 평화를 갈구했을까?

이런 문안의 말은 놀랍게도 우리 관습과 통한다. 우리는 아침에 만나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고 묻고 보통 '평안하십니까' 또는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며 헤어질 때는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하며 밤인사도 '안녕히 주무십시오'라고 한다. 이것은 샬롬이라는 뜻과 같다. 이처럼 서로 관련이 없는 민족이 어째서 같은 관습을 갖게 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평화에 상반되는 상황에서 시달린 역사가 같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가 전쟁, 엄밀히 말하자면 외세 침략이 한 세대가 멀다고 계속되어서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재산은 거덜나는 일로 점철됐으며 안으로도 계속되는 왕권과 그것을 둘러싼 세력의 횡포로 안심하고 사는 날이 없었던 것이다. '밤새 안녕했느냐'는 물음은 바로 하룻밤 사이라도 평안했으면 다행이라는 표시인 것이다. 바로 이스라엘이 그랬다. 약소 민족으로 계속 일어서는 신흥 대국의 침략을 받아서 나라가 초토화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직 '민족'으로 성격화되기 전 이집트에서부터 시내산의 유랑시대와, 정착지를 찾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그리고 무엇보다 왕조시대에 들어서면서 내란이 계속되고 관권의 횡포에 시달렸던 것이다. 샬롬! 이것은 그러므로 저들의 한(恨)의 노출이요 저들의 노래는 이른바 '탄식'으로 꽉 차 있다.

평화의 뜻

위에서 벌써 그 말이 민족적 갈구였다는 것으로 그 핵심적인 뜻이 반영됐다. 평화는 결코 개인의 염원이 아니다. 민족의 운명이 평안하지 않고는 개인의 평안이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에 샬롬이 있을 때 그것에 속한 개인들에게도 평화가 가능했다. 이 점은 신약에서도 같다. 신약 시대는 이스라엘이 중심이 아니다. 이미 국권만이 아니라 팔레스틴에서 설 자리가 없을 때 그리고 마침내 망국의 비운 속에서 영영 고향을 버리고 외국 땅에 배회하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는 때에 쓰여진 것이 신약이다. 그들의 무대는 세계요 저들이 평안하려면 '이방'인 세계의 평화가 있을 때 가능했기에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평화를 갈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 문화권에 들어섬으로 그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개인의 평화다. 특히 스토아 철학파의 은둔적 평화주의가 영향을 끼쳐 되도록 세상을 멀리하고 자기 안의 욕구 따위를 억누르는 고행주의 등으로 마음의 평안을 추구한 저들의 영향이 그것인데 그것은 도저히 거대한 세계적 힘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갖기 쉬운 처세술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평화가 올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렇다고 구약 시대와도 다른 처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평화가 곧 개인들의 평화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때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로마제국이다. 그런데 그 로마제국은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를 내세웠다. 그런데 그들이 추구하는 평화는 저들의 통치 밑에 세계가 복종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세계였다. 그 평화의 수단은 무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평화를 믿지 않았다. 무력이나 정치력으로 궁극적 평화는 올 수 없다. 평화는 갈등으로 깨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대전쟁(주후 66-70) 때에 젤롯당을 중심하여 이스라엘민이 총궐기하여 칼로 대항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저들은 예수에게서 참 평화의 길을 배웠기 때문에 우회적인 평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평화의 본질

평화는 전쟁에 의해 파괴된다. 그러면 전쟁을 막기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하면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의 참화를 너무도 잘 알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당하기도 했지만 예수도 로마의 강점 하에서 활동하다가 그들의 손에 처형됐으며 그 후 계속적으로 무력적 폭력에 의한 박해를 받다가 유대전쟁이라는 처참한 경험을 했다. 전쟁은 이 땅에 영원히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 길은 폭력은 폭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원리대로 '칼은 칼로'라는 자명적이 된 생각을 거부했다. 아니 칼은 칼을 부르며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이러한 악순화은 정지돼야 한다. 문제는 전쟁의 원인을 단절해야 한다.

전쟁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소유욕, 독점욕이다. 남의 것을 내 수중에 넣겠다는 집념이 전쟁을 부른다. 영토를 넓히고 재산을 뺏고 세계에 군림하겠다는 권력욕이 전쟁을 일으킨다. 또 하나는 이에 발단되는 증오심이다. 바로 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증오심을 조장한다. 이 증오심은 상대방은 사람이 아니라 '원수'가 되게 한다. '원수'! 그것은 사람이 아니고 오랑캐요 악마이기 때문에 그들의 피를 흘리고 목숨을 뺏어도 살인죄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선을 위한 싸움, 나가서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생각에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이 통념으로 됐을 때 예수의 산상설교는 폭탄선언이 될 수밖에 없다. 살인! 그보다 앞서는 것은 증오다. 간음 행위! 그보다 앞서는 것은 남의 여인에 대한 소유욕이다. 그것이 바로 탐욕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공인될 때, 그것이 집단화되어 이룩되는 것이 전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그리고 칼은 칼로라는 이른바 황금율을 거부하고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면 십리를 가주고, 속옷을 뺏으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소유욕과 증오심에 대한 철저한 도전을 명한 것이다. 이것은 약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폭력으로 지배되는 세계 질서를 뒤집어엎으려는 확고한 결단을 내린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소유에 의해서 삶이 보장되거나 증으로써 증오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양보가 아니라 세계 기존 질서에 대한 철저한 저항이다.

그러나 저항만 갖고 세계의 평화가 오지 않는다. 평화의 궁극적 실현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다. 여기서 마침내 구약에서 생각할 수 없는 선언을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진정한 평화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전쟁을 불가능하게할 뿐 아니라 바로 샬롬! 에이레네의 본질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미 구약에서도 예시됐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현실, 그것이 평화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요약한 것이다(막 12:28-34). 사랑! 그것은 바로 평화의 갈구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대표하는 아가페라는 단어가 신약에만 116회나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이레네를 43회나 반복한 바울이 아가페를 75회나 사용하는데 저 유명한 사랑의 찬가(고전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집약하고도 그 중에 제일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한 것은 평화의 갈구를 적극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아가페를 많이 말하는 에배소서에서 그리스도교를 "평화의 복음"(6:15)이라고 단정했으며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고후 13:11).

바울은 자주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말로 인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밝힌다. 주목할 것은 고전 14:33의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무질서는 평화와 상반된다. 무질서는 구체적으로 분쟁과 분열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분쟁을 한탄하면서 평화의 하나님을 역설한다(5:22-26). 무질서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사랑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다. 그것은 결국 아집과 독점욕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평화와 정의

'사랑하라!'는 본래 뜻은 감상적이거나 무사안일의 방편이 아니다. 외적으로 분쟁이 없고 전쟁이 없으면 곧 평화가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강제로 통치함으로, 눌린 자의 손발을 묶어 버림으로 조용해진 상태가 평화일 수 없다. 가진 자는 점점 더 갖기 위해 가난한 자의 것을 뺏어 배가 터져 죽고 가난한 자는 먹지 못해 죽어가도 저항 한번 못하기에 조용한 상태가 평화일 수 없다. 한마디로 악이 지배하는 세계가 평화의 세계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판국에 사랑이나 평화가 설교 될 때 그것은 어떤 저항도 포기하라는 말로 보도됨으로 마침내 굴종과 체념으로 외적 평온이라도 유지하라는 말이 되며 그것은 마침내 불의를 용인하고 그것에 복종하라는 설교가 된다. 예수가 사랑을 말하고 평화를 지향한 것이 단순히 그러한 의미뿐이었다면 그의 십자가 처형은 있을 수 없거니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과 평화를 말하는 예수는 또한 분노했다. 분노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 계층의 분노를 일으킴으로써 그들에 의해서 처형된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는 일찍부터 평화와 사랑을 말하면서 동시에 크게 내세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의다. 로마제국의 '팍스 로마나'는 정의가 서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강자의 특권을 전제하고 약자의 자유와 재산을 약탈하고 무력으로 진압한 평온으로 불의가 지배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내세웠다. 그 나라의 평화는 정의와 병행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쁨의 나라다(롬 14:17). 평화와 사랑을 그처럼 강조한 바울은 '정의(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을 57회나 반복한다. '정의'라는 말은 신약 전체에서 91회나 사용되는데 그 수는 우연히도 '평화'의 사용 빈도와 똑같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예언자들에 의해서 강조된 것이다(사 48:18; 62:1-2; 시편 85:11-13) 그 중 시편의 내용의 일부를 보자.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에 걸어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구약에서 이미 예레미야는 불의가 판을 치는데도 평화를 위장하는 자들에 대해서 "평화, 평화하지만 어디 평화가 있느냐!"(렘 8:11)고 외쳤지만, 신약에서도 정의 없는 평화는 용인하지 않았다. 바울은 참되게, 옳게, 순결하게, 사랑으로……할 때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진다(빌 4:8-9)고 했는데 무엇이 참되며 옳고 무엇이 사랑으로 하는 행위겠는가! 누가복음에는, 이러한 길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전하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줄 때 하나님의 은총의 해가 온다고 집약돼 있는데(4장), 이것이 바로 예수가 온 목적이며 예수가 행한 평화의 길인 것이다. 이 선언처럼 평화에 이르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강자와 부한 자에게서 해방시키고 그리고 마음만이 아니라 권리도 재산도 나누는 즉 나눔(sharing)의 행위가 선행돼야 한다. 나누는 일, 그러므로 '나'가 아니라 '우리'로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의 현실이다. 예수의 행태는 바로 나눔의 삶이었다.

그는 사랑이란 말을 쓰지 않고 행동으로 이를 실천했다. 그것이 바로 나눔의 행위였고 또 그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이 나눔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이 사실만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예수는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을 나누어 먹고 마시는 새로운 평화의 공동체로서 자신의 정체를 인식했다. 그런 인식이 저들로 하여금,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부족함이 없이 서로 나누어 먹고 마시며 새 평화의 세계를 갈구하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했을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옳고 참된가.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닌가.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사랑은 바로 나누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하는 것인데(롬 5:1) 그것은 그의 몸을 나누어 줌(십자가)으로써 이룩된 것이다(골 1:20). 이러한 나눔으로 이룩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계승하는 공동체 여야 진정한 평화의 도구로서의 그리스도교 교회일 수 있는 것이다(골 3:15).

이것은 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는 다르다. 로마의 평화와는 다르다. 폭력으로 이룩한 평화, 독점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깬 평화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뚜렷하게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그것과 다르다"(14:27)고 한다.

세상의 평화와 다른 평화를 준 그리스도는 이 평화를 위해서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15:33). 무슨 까닭일까! 평화를 주는 이가 고난을 예고한다면 그것은 벌써 세상의 평화와 다른 증거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경험하고 배운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워야 할 과제가 있다는 뜻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 싸우는 자,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며, 평화를 위해 싸우는 공동체, 그것이 그리스도 공동체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이미 평화는 이루어진 듯이, 또는 교회만 지키면 평화에 대한 의무는 끝난 듯이 생각하는 교회는 예수의 뜻을 외면한 것이다. 이 점에서 단순히 평화를 말하지 않고 평화롭게 하는 자, 즉 평화를 이 땅에 수립하기 위해서 싸우는 자는 복이 있으며 그래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딸, 아들이라는 산상설교의 축복(마 5:9)은 거듭 생각하고 명심해야 할 내용이다.

궁극적 평화 하나님의 나라

그러나 정의가 구현되는 평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이사야는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됭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됭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그러한 평화의 세계를 환상한다. 그런데 그런 평화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늑대, 표범, 곰, 사자 등 강한 자의 횡포가 없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평화의 파괴는 언제나 강자가 한다. 이상의 환상을 본 예언자는 사람의 세계에서의 평화는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하고 천민의 시비를 바로 척결하고 잔인한 자들과 무도한 자들이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평화의 때라고 본 것이다(사 11장).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이새의 뿌리에서 새싹처럼 나타나는 메시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 메시아는 바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 수립하는 이다. 그것은 바로 천지개벽이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이사야는 그러한 현실을 눈에 보듯이 환상한다(65:17-19). 그러나 그러한 때는 오지 않았다.

이러한 갈구와 희망이 체념과 절망으로 바뀔 즈음 예수가 나타났다. 그의 일성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였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의 선언을 바로 세례자 요한이 잔악한 권력자 헤롯 안티파스에게 체포됐을 때에 했다는 것은(막 1:14)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만이 관철되는 평화의 현실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군림하는 모든 인간의 불의한 주권의 종말을 고하는 선언이므로 도전적이요 정치적 사건을 유발할 선언이다. 그 선언은 궁극적 평화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단호한 신앙이 내포돼 있다. 이것은 사람의 차원에서 무력으로 외교로 경제건설로 사회 정책으로 평화를 이룩해보려는 온갖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험을 천여 년을 두고 해오면서 간헐적으로 절규하던 예언자들의 희망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은 적군 또는 부패한 권력자와 싸우면서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운동가들은 그런 악한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힘의 근원을 영원히 제거해야 된다고 보았다. 그 근원을 바로 사탄이라고 이름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사탄의 지배의 종말이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 한 것이다.(마 12:28)고 한다.

예수는 그 나라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그 나라 도래를 가로막는 악마의 투쟁전선에 선 이처럼 싸웠다. 싸움의 면모를 다음 몇 가지 사실에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가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정치적 위기에, 바로 그가 군림하고 있는 현장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최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즉 가장 악랄한 역사 현장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나라 도래를 위해 무기를 들지 않고 민중에게로 갔다. 모든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압도적 다수의 친구가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언자들이 희구하던 평화의 나라의 질서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위다. 저들의 권익을 찾아 주는 것이 바로 정의, 평화의 나라 수립과 직결된 것이다.

그는 귀신들린 자를 치유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갓 기적의 능력을 시위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사탄과의 투쟁의 현장이다. 그것은 행위로 사탄의 지배의 종말과 새 나라 도래를 증거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사탄의 아성으로 보았다. 까닭은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하나님 신앙을 유린하면서 계속 바뀌는 외세와 야합한 종교 지도층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가난하고 비천한 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박탈하고 경제적 착취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침내 그의 최후에 예루살렘 적진에 폭탄을 안고 들어가듯 돌진하여 성전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것은 돌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않고 다 무너져야 한다. 까닭은 그것이 사탄의 거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폭력으로 싸우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氣)에 의지하는 운동으로 한 것이다. 그는 상대방을 죽임으로 평화의 왕국을 도래하게 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함으로써 평화 운동을 이룩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예수의 죽음의 뜻을 깨달았다. 저들은 그의 죽음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해시키는 화해의 제물이라고 믿었으므로 속죄의 희생제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믿었으며, 그 평화의 궁극적 실현은 그리스도의 내림에서 이루어진다는 희망에서 이 싸움을 계속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1985.10/『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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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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