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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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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낙원에서의 탈출
창세 2-3장
 
1. 머리말

바울은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또 그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온 것 같이 사람들이 모두 죄를 범하였으므로 죽음이 온 인류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아담에 대한 그의 해석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죄가 무엇이며, 그 결과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창세기의 실락원 이야기를 통해서 밝혀 보려고 합니다.

이른바 창세기의 실락원 이야기는 1장과 2-3장 안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1장과 2-3장은 다른 자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중복되어 있고 혼선도 있으나 오늘은 그런 세부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이야기의 핵심, 즉 편집된 이 이야기에서 말하려는 의미를 밝히려고 합니다.

2. 낙원 이야기

'낙원'이란 말은 사람들의 염원이 반영된 것입니다. 어떤 종족이나 어떤 종교에도 낙원 이야기가 없는 데가 없습니다. 이미 창세기의 낙원 이야기가 있기 전에도 중동 일대에는 이와 유사한 낙원 이야기들이 널리 전해져 있습니다. 구약의 낙원 이야기는 이러한 낙원 이야기들을 수렴하면서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왜 인류에게는 낙원을 향한 염원이 있을까? 그것은 지금의 삶을 투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하다면 구태여 낙원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전제에서 볼 때 낙원에 대한 그리움은 바로 현실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은 소원을 반영한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소원에서는 현재의 세계에 대한 저항의식과 나아가서는 개혁 의지가 내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사회적 비리나 인간의 고통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죄 때문인가? 죄 때문이라면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두 면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으나 창세기의 이야기는 후자에 더 역점을 둔 것입니다.

낙원 이야기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과거지향적인 것으로, 이것은 인간 세계의 본래성을 묻는 데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현실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 상태는 변질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것을 변질시킨 원인을 찾아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원상태를 회복해야 된다는 염원에서 낙원 이야기가 생긴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이 유형은 현실을 부정한다는 면에서는 같으나 본래적인 것의 추구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낙원을 만들어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른바 유토피아 사상이 그런 유형에 속합니다. 유토피아적인 사상에는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가 그 밑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 낙원 이야기는 창세기 안에 나오는 이야기 이지만 앞의 두 유형 중에서 어느 쪽인가를 묻는다면 전자에 가깝습니다. 창세기의 낙원 이야기 안에는 가로놓여 있는 인간의 문제들을 타개하려는 염원이 깔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맨처음'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이야기의 내용을 연대기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이브'가 맨처음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그 다음 이야기에서 곧 모순에 부딪히게 됩니다. 즉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카인'과 '아벨'이 태어났고, 아벨을 죽인 카인이 추방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홀홀단신인 그가 어떻게 누구와 더불어 한 족속을 형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한 삶의 마당 또는 한 막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삶의 한 형태(type), 인간 삶의 한 가능성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천 년 전이거나 수백만 년 전이거나 간에 아득한 옛날에 있었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관련 되는 것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도 아담 이야기를 지나버린 이야기로 보지 않고 지금 우리에게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인간은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즉 아담이 지은 죄와 같은 죄를 우리도 짓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과거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간 역사의 궁극적 목적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그 유명한 '아담-그리스도 도식'이 나옵니다. 인간은 아담-그리스도라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3. 낙원이란?

그러면 낙원은 어떤 것인가? 하느님이 자연을 창조했습니다. 창세기의 낙원 이야기에서는 자연은 직접 "… 되라"고 명명한 데 대하여, 인간은 "어떻게, 무엇 때문에" 만들어야 하는가를 전제하고 만들었다고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과 자연 사이에 그 위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같은 형상으로"라는 표현에 사로잡혀 신론과 구별된 인간론에 묶일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론에 매여 기본 뜻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자연과는 달리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자율성! 그것은 선택권을 가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능성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여기서 자연을 다스린다는 것은 '권력'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자연을 다스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자연을 개발하는 노동을 통해서 역사를 창조해 나감으로써 하느님, 인간, 자연이 혼연일체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된 현실이 낙원입니다.

노동은 강제된 행위가 아닙니다. 노동은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으로서 자기형성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형성하는 일이며, 동시에 역사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이 즐거운 것이 되는 현실이 바로 낙원인 것입니다.

4. 자연과 인간

그러면 이 자연에서의 아담-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제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지시에 따라 인간의 인간됨과 그 할일을 밝혀 보기로 합시다.

첫째, '이 땅을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이땅을 경작하라는 말. 즉 노동으로써 역사를 창조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든 곡식 즉 식물은 먹으라는 말이 있고, 동물을 먹으라는 흔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에 의미를 준다면 자연 안에 살고 있는 동물마저도 인간의 노동에 의해 사육될 수 있는 현장을 만들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자연을 개간하는 일(cultivation), 그것은 노동을 통하여 문화를 창조한다는 말의 근원지입니다. 자연에 주어진 가능성을 개발하는 것이 노동입니다. 땅의 가능성을 도와서 곡식도 심고 꽃도 가꾸며 나무도 자라게 함으로써 스스로도 살며, 자연에도 조화를 줌으로써 하느님의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일이 바로 노동입니다. 따라서 노동은 하느님과 자연. 인간을 혼연일체시키는 행위입니다. 여기에는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발달된 물질과 정신, 혹은 육과 영혼,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는 조화된 혼연일체의 현실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외부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신학 또는 교회에 의해 무시되어 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물(物)과 영(靈)을 구분하고 그리스도교는 영의 세계만을 담당하는 자로 자부함으로써 물질의 세계를 방관 내지 멸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서 권력자들에게 인정된 종교 귀족으로 등장함으로써 노동에 대한 이해를 변질시켰습니다. 즉 자신들은 이른바 영적인 사실을 다루는 자들로 군림하고, 물질을 다루는 노동을 천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천한 자들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이것은 문화(culture)를 정신적인 것에만 국한시키고 육체적 노동과 구분한 지식인 상류사회의 행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물질과 노동을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그것의 실제적인 주체들을 멸시하는 한마디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의 비리가 그리스도교 안에 그대로 자행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칼 마르크스 이래로 구체화된 물질론(유물론)이 그리스도교의 그것과 상치된 형태로 등장함으로써, 또한 반마르크시즘의 경향이 물질을 물질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물질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물질에 대한 책임은 고사하고 아무런 해명도 없는 채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교는 물질에 의해 물질로써 자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노동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과 노동. 이것은 인류의 삶의 기본적 바탕이었으며, 그것이 산업혁명 즉 기술의 도입으로 기계화에 의한 물질생산 형태로 바뀌면서 노동의 변질,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이 강제당하고 착취되며 물질이 강한 자에게 편중되므로 사회에 구조적 불의가 만연되어 가고 있는데도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양상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배반되는 데도 말입니다.

노동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즐거운 행위인 동시에 하느님의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이것이 깨지는 것이 바로 실락원의 상태입니다.

둘째로,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 전체에 주어진 것과 같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여기에 아담과 이브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性)이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2장 이하에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이브는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동반자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 설화는 남성이 권력과 재력의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남존여비의 사회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크게 이용되어 왔었습니다. 남성위주의 인간 사회에서는 성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강제적인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강자에 의해 점유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은 창조행위로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행위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동시에 창조했다고 서술합니다. 이것은 똑같은 두 인격이 자주적으로 만남으로써 역사창조에 참여하는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왜 이 구절은 무시되고 이브가 아담의 갈빗대라는 것만이 강조되어 왔을까? 이것은 바로 성을 독점하고 그것을 강제하는 관계로 만들어 버린 강자 남성들의 죄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셋째 낙원에 있는 모든 곡식이나 실과는 인간의 자율권에 맡겨졌으나 그 가운데 심어진 나무의 실과만은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지시입니다. 금단의 열매! 이것은 무엇이며, 왜 심어졌을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여러 상상을 해 왔습니다. 그것을 다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같이 된다"는 말에서 그것이 지혜를 말한다고 보는가 하면. 그것을 따먹자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렸다는 이야기에서 그것은 성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것이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낙원의 한계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독점할 수 없는, 그러므로 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나는 그것을 일단 '공'(公)이라고 표현하려고 합니다. 모두가 더불어 받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 '공' 또는 공적인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하늘은 공입니다. 하늘은 어느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습니다. 땅도 본래는 공입니다. 그것을 경작하고 그 소산을 나누어 먹을 수는 있으나 사유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어느 누구에게 소유될 수는 없습니다. 이 공을 침범하면 전체의 질서가 깨어집니다. 이것이 금단의 이유일 것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그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노동하는 데 즉 역사창조 행위에도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확실한 기준이 있어야 그 노동행위가 개발을 위한 것인지 퇴폐를 위한 것인지, 또는 전진하는 것인지 후퇴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발, 전진하는 것이 선이고 퇴폐, 후퇴하는 것이 악이라 한다면 노동에 의한 창조행위의 결과가 악인지 선인지 식별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금단의 열매입니다. 금단의 열매를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 역사적 존재가 되려면 한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율은 타율의 상반개념이 아니고 타자(他自). 즉 너 때문에 나를 제한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진 것이 바로 자율적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은 방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단의 열매는 인간을 역사적 존재가 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낙원입니다. 인간은 신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독자적 존재로서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낙원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에는 슬픔, 고통,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5. 실락원

그런데 실락원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언제부터인지 인간의 역사는 증오와 대립, 고통 마침내 유혈의 역사로 변천되었습니다. 찰스 다윈이 동물세계를 관찰하여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의 현상을 보고 인간이 죽이고 뺏고, 죽고 빼앗기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낙원 이야기는 그렇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아담(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어야 했는가? 이것은 바로 공이 침범당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땅은 공적인 것입니다. 성서에는 땅은 당초에 공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이 언제부터 사유화되었나? 가령 북미(北美) 개척사를 볼 때 그 사유화 과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무변 광활한 대지에 백인들이 무력으로 침범하여 마음대로 금을 그어놓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선언하여 침범하는 자는 사정없이 죽여 버립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강도들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전에는 땅의 침범이 곳곳에서 군주라는 이름하에 자행되었으며, 근대에 와서는 제국주의로 구체화되어 이미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 민족들의 땅을 총칼로 강탈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로운 세계를 말하려면 생산된 물질의 분배 이전에 대지(大地)의 불공평한 점유부터 문제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계지도를 펴고 보면 세계가 평화로울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나라는 광활한 땅을 점유하고, 사람이 없어도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고 어떤 민족은 작은 땅에 오밀조밀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됐나? 그것은 모두 힘센 놈들은 더 많이 뺏고 힘 약한 민족은 자기 살던 땅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의 광활한 땅은 앵글로색슨 족들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점유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이 준 기득권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알 뿐 아니라 그 땅의 자원으로 힘을 길러 남의 것을 침범 약탈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누가 대지를 독점할 권리를 주었나? 준 것이 아니라 뺏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기를 수밖에 없고, 그런 땅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낙원에의 길은 무력의 포기가 앞서야 하고 무력을 포기하려면 국경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아직 불공정하게 구획된 국경선 사이에 긴장이 계속되고, 분계선 때문에 싸움이 속출하고 있으며, 실지(失地)의 분노와 판도 확대의 야욕이 전쟁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권력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권력은 원래 하느님에게만 속했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 전제입니다. 권력이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모든 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났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 공적인 권력이 사유화된 것이 왕권으로 시작되는 권력의 독점체제입니다. 권력의 사유화, 그것은 언제나 폭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왕권이나 현재의 독재자라는 것은 바로 이 공적인 것을 폭력으로 찢어 버리는 자들입니다. 인권도 공입니다. 물도 공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권력을 사유한 자들에 의해 찢겨졌습니다. 좀 좁혀서 나라라는 것은 공적입니다. 또한 나라의 중추인 민중도 공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깨지는 한 정의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복지사회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공을 지킨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마저도 사유화로 줄달음치므로 점점 분화되어 가고만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개교회화 즉 사물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과정입니다.

선악과가 지혜라면 지혜는 공적인 것으로서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먹음으로 하느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은 바로 공을 사유화 하겠다는 욕심입니다.

선악과를 성이라고 해석한다면 성도 공적인 것입니다. 이 성을 사유화하는 그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어떻게 한 인격이 내 소유가 될 수 있나? 일부일처제마저도 사유화라면 그것은 공의 침범입니다.

공적인 것을 사유화하는 삶이 시작됨으로 낙원의 한 마당은 끝났습니다. 사유화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사유화의 역사는 하느님마저 사유화하겠다는 것으로 첨예화됩니다. 사유화 역사의 첫 마당에서 카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신을 독점하겠다는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벨탑의 이야기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종교간의 싸움도 바로 하느님의 사유화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싸움에 가장 적극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종교가 되어 버렸는데, 이것은 신의 사유화의 욕구와 서구 제국의 권력 사유화의 욕구가 야합하여 이루어진 죄악입니다.

위에서 본 우리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확실한 주장을 합니다. 公을 사유화하는 것이 바로 죄이며, 이같은 죄인은 더 이상 낙원을 향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처음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류가 죄영역에 들어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같은 죄의 영역에서 해방될 수 있는 문이 열렸다고 선언합니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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