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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창세 4, 1-16
 
1. 인간사의 출발

실락원 이야기는 하느님의 편에서 보면 추방의 이야기고 아담 부부의 편에서 보면 탈출 이야기다. 낙원에서의 생활은 인류의 유아기로 성격화된다. 벌거벗고 사는 사회, 성의 구별이 없으므로 이른바 성적 수치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단계로 묘사되어 있다. 실락원으로 새로운 인간사가 시작된다.

새로운 인간사는 성적 접합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알몸으로 성이라는 의식 없이 낙원을 소요하며 즐기던 그런 사귐과는 다른 것이다. 낙원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였다. 남자와 여자도 하나고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던 관계에 '갈등'이 일어난 것, 그것이 실락원이다. 아담과 이브는 이제 남자와 여자다. 한 몸이 아니라 두 몸이다. 그 분열 과정은 아담이 이브에게, 그리고 이브가 아담에게 책임을 떠미는 데서 드러난다. 이브는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아담에게도 뒤따라 그것을 먹게 했다. 욕심을 나누자는 것이었다. 공을 함께 나누어 사유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벌써 원수 관계를 전제한 것이다. 에고(ego)와 에고의 만남이다. 즉 욕심과 욕심의 부딪힘이라는 말이다.

성은 둘을 결합하는 행위이나 그것은 동시에 비극의 씨앗을 잉태했다. 성은 아담과 이브, 즉 사람을 분리시킨 구체적인 증거다. 성은 육체와 정신 또는 육체와 사랑을 분리시킬 수 있다. 카인과 아벨을 낳게 한 성의 관계는 사랑의 결과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성은 사랑과 관계 없이 육적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수의 자식을 밴 여인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강간을 당한 여인들이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입증하며, 성이 얼마나 비극성을 내포했는지 말해 준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이 분열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다.

그 관계에서 맨 먼저 태어난 것이 카인이다. 둘째 열매가 아벨이다. 이 둘은 비록 때는 달리했으나 똑같은 과정을 거쳐 태어난 형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여야 하며 아주 다정해야 할 관계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갈등의 관계였다. 이 아들들은 벌어진 아담과 이브의 관계를 묶어 주는 강력한 끈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한없는 고뇌와 슬픔을 안겨 줄 애물이다. 이런 실상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한몸같이 가장 가까워야 할 형제가 하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둘인 것을 드러낸다.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 순간에 아담과 이브가 하나가 아니라 둘인 것을 보여 준 것처럼 말이다.

카인과 아벨은 제물을 바친다. 그런데 저들은 한 제단 위에 함께 바치지 않고 따로따로 자기의 제단을 만들었다. 둘이 가져온 제물은 각기 달랐다. 카인은 농산물을 가져다 바쳤고 아벨은 짐승을 제물로 바친다. 저들은 이미 생활 방법이 달랐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는 농사를 짓고 하나는 짐승을 길렀다. 하나는 정착민이고 다른 하나는 유랑민이다. 둘은 성격적으로도 달랐다. 카인이란 '창'이라는 뜻이다(삼하 22,16). 이것은 폭력을 상징한다. 아벨은 숨, 또는 무허라는 뜻을 지녔다. 형태적으로 보면 숨은 허무와 똑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숨은 살리고 관계를 묶어 주는 역할을 하듯이 무나 허는 바로 자체를 비웠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것을 전체로 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창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농사꾼이 왜 창으로 이름지어졌으며 짐승을 기르는 목동이 왜 아벨로 이름지어졌을까. 그 이름은 분명히 직업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갈등구조의 한 면씩을 표출한 것이다.

마침내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린다. 갈등관계가 첨예화한 결과다. 창이 숨을 끊어 버린 것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탈출한 아담과 이브의 첫 막은 살인으로 피가 낭자한 장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줄 알았던 형이 아우를 죽이는 비극적인 살인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 역사는 살인의 역사로 점철되어 간다. 카인은 자기 아우 아벨을 왜 죽여야만 했나?

2. 카인은 왜 아벨을 죽여야만 했나?

성서 기자는 하느님이 카인의 제물은 용납하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용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표현대로 해석하면 종교 싸움이 살인을 불러일으켰다는 말이 된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제물(또는 예물)이란 말을 지나치게 제사의식적으로 이해하여 그 결론을 성전종교에서 이끌어오려는 노력을 했다. 유대 성전종교는 짐승을 제물로 받아 그 피를 생명으로 이해하고 제물은 곧 속죄의 제물이라는 인식 밑에서 아벨은 피를 가진 동물을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하느님이 아벨의 것만 용납했다는 해석을 즐겨 해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제의적 냄새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속죄제물이라는 발상은 발디딜 데가 없다. 이스라엘 전통에는 하느님에게 짐승만 예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곡식 중 처음 맺히는 것을 바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제물로서 열거된 기록에(출애 22, 28.29) 짐승 그리고 맏아들도 나열되어 있지만 타작한 첫 곡식과 술에서 나온 포도주들이 그런 것들보다 먼저 서술되어 있다.

어떤 부류에서는 이 이야기에서 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친 원시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보기도한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산 채로 제단에 바쳐야만 했던 이야기가 그런 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본래 그런 것이었다면, 카인이 아벨을 제물로 죽여 바친 원래 이야기가 이렇게 변형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것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제물이나 예물로 바칠 때 중요한 것은 첫 것이라는 데 있기 때문에 카인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카인은 자기의 의무를 전가하여 자기 대신 아우를 잡아 바쳤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설들에서 건질 만한 것은 없다.

단 하나 이런 추측에서 인식되는 것은 맏아들의 종주권이 얼마나 큰 위력이었던가하는 것이다. 카인은 아담의 가계(家系)를 권리로 이을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대리할 수 있으며, 형제에 대해서까지도 종의 주인처럼 군림할 수 있는 위치를 인계받도록 되어 있는 자다. 그런데 그가 하느님에게 드린 예물이 수용되지 않고 아벨의 예물이 수용됐다는 것은 그의 종주권이 박탈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그의 제물만 수용한다는 인식과 결부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종주권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벨을 영원히 없는 것으로하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카인의 행위가 내적 번뇌를 수반했다고 하는 것은 여실하게 서술되어 있다. 신이 카인에게 한 말로 "화를 내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얼굴을 쳐들지 못하고"라는 표현은 그의 내적 분열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그는 한쪽을 선택하고 아벨을 죽일 만한 장소로 끌고 가서 쳐죽인다. 아벨을 죽이려고 하는 생각은 카인에게는 자기 몸을 자르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신 앞에 드러난 그의 모습이다. 그러나 카인은 그 분신이며 동시에 자기 분열의 한 면을 처단해 버림으로써 온전하게 자기를 살릴 수 있다는 결론에 정착해 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어떤 의미로나 자기의 장자 종주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아벨을 배제해 버렸다.

그는 그 시체를 보이지 않게 땅에 묻고 흘린 피를 흙으로 덮었을 것이다. 아무도 못 알아보게 하려고,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고.

3.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나무 밑에 숨은 아담 부부에게 신은 "사람아(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총체적인 한 존재가 분열된 다음의 인간에게 주어진 첫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은 자기 분신과 같아야 할 아우를 원수로 단정하고 죽여 버린 카인에게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공간적인 거리를 묻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것을 카인 자신의 말로 돌린다면 "이러한 내가 이제 설 자리가 어디냐"로 될 것이다. 경쟁자 없이 자기 입지를 굳히고 내적 평화를 찾으려는 그에게 그와 반대로 불안이 오고 당혹감에서 안정을 잃어버린 자기를 발견하고 놀랐을 것이다. 그것이 그는 정착하지 못하고 영원히 방랑하는 자들의 선조가 되고 말았다는 서술에서 제시된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만일 카인이 이 물음에 항복했다면 그에게 구원의 다른 길이 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그의 부모처럼 이 물음에서 도피해 버렸다. "모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면서, '난 몰라'란 나와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말이다. 이미 손을 뻗어도 만져지지 않는 과거에 속한 일이라는 뜻도 있고, 그 시체를 땅에 묻어 버렸으니 아무도 이미 일어났던 일을 들추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토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인에게는 무와 같이 없어진 사건을 하느님은 사형선고와도 같이 준엄하게 고발한다.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하느님은 아벨의 피를 삼킨 대지(大地)의 뜻을 대변한다. 따라서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大地]에서 물러나야 한다" 하며, 그가 아무리 땅을 갈아도[農耕]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주목할 것은 추방되는 아담에게도 대지와 갈등 관계가 되어 곡식을 심어도 대지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고 했는데, 카인도 대지와 대립되리라고 한다. 여기서 동양 사람들의 세계관처럼 사람과 땅과 하느님과의 유기적 관계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4. 민중의 다른 해석

이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밝혀야 할 단계에 왔다. 카인이 아우를 살인했다는 주제에서 그를 죽인 원인을 묻지 않고 카인이 어떻게 그 종주권을 잃어버리게 되었느냐 하는 질문을 하려고 한다. 주목할 것은 이 이야기의 종주권의 원조인 아담이나 이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야곱과 에사오를 아들로 가진 이사악이 두 자식들의 상속권, 즉 종주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듯이 아담도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현장에는 카인 하나밖에 없다. 이 기록에서 아벨은 이름만 등장했을 뿐 존재 없는 자처럼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고 있으며, 저항했다는 흔적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곳은 카인의 독무대일 따름이다. 그는 홀로 느끼고, 계산하고, 결단하고 아우를 처단한 뒤 매장해 버린다.

이렇게 홀로 있는 그에게 하느님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신은 사실상 카인이 결정하는 현실에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 결단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카인에게 경고를 주고 있으나 그것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아벨의 제물을 즐거이 용납한 신이며 그가 지금 죽임을 당할 위협 앞에 있는 것을 아는 신이라면 죽임당함을 제지할 수 있는 신이라야 한다. 그러나 아벨이 죽어 피를 대지에 쏟고 그 몸이 묻힐 때까지 그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 신은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한다. 하느님은 땅이 흡수한 아벨의 피의 호소의 전달자다. 그리고 그 호소가 마침내 카인의 종주권을 영원히 무효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를 영원히 추방하는 것으로 바로 이런 뜻을 나타낸다.

아담과 이브의 첫 아들인 카인은 그 족보에서 완전히 삭제됐다. 그것은 창세기 5장에 새로 시작되는 아담의 족보가 분명히하고 있다. 거기에 카인은 없고 '셋'이 아담의 첫 자식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누가 이런 결과를 가져 왔을까. 이런 이야기를 누가 계속 반복하여 마침내 카인의 종주권을 뺏고 그를 그 계열에서 추방했을까? 누가 그 족보를 다시 쓰게 했을까? 누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아벨의 슬픈 이야기를 전승했을까?

이 이야기는 정사(正史)적 성격을 띠지 않는다. 전형적인 민중의 이야기다. 민중의 이야기는 정사가 무시해 버리는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한다. 성덕왕 신종의 이야기를 에밀레종으로바꾼 것처럼 무쇠가 녹는 데 흡수되어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민(民)의 생명과 피와 땀의 이야기를 에밀레의 절규로 되살리듯, 땅에 묻혀 영원히 보이지 않을 아벨과 그가 흘린 피의 이야기를 되살려서 카인의 종주권에 대항하여 싸운 것이다. 그런데 에밀레종의 이야기와 다른 점은 하느님을 자기들 이야기의 증언자로 내세운 점이다. 이 이야기를 전한 민중들도 무명의 민중들이다. 땅에 묻힌 아벨과 같이. 이 무명의 민중들은 종주권의 횡포에 짓눌려 다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묻혀 버린 희생자의 편에 선 하느님. 그런 의미에서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란 신념이 특이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지마저도 바로 이 수난자의 편에 섰다는 확신도 주목된다. 민중은 표면적인 정사를 마침내 하느님의 이름을 힘입어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아무 힘 없이 말 한마디 못한 채 저항 없이 사라져 버린 아벨의 한의 절규를 들을 귀를 가진 민중이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로써 이 이야기를 만들어 전한 무명의 민중은 무와 같은 존재인 아벨의 한 그리고 그의 편에 선 하느님이 일체가 되어서 인간의 지배자들의 정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예수가 그를 환영하는 민중들의 환호소리를 가로막으려는 적대자들에게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라고 한(루가 19, 40) 말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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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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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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