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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1. 전율할 인간생명의 죽임현상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어떤 영국 종군 기자가 한국을 마치 낙원처럼 서술한 책을 본 일이 있다. 낙원이란 경제적인 시각에서 하는 말로 물론 아니고 법 없이도 살 수 있고 어떤 주의(主義)를 내세우지 않고도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정(情)이 많은 민족공동체라는 의미에서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군을 따라다니며 들러보는 동리마다 담장은 물론이고 대문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데 놀랐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여기부터 우리 뜰입니다'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뭇가지나 수숫대를 대충 얽어맨 그런 것들을 세워놓았고, 집이 비었어도 문을 잠그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잔치나 제사 등이 외국인의 눈에는 낭비의 악습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약간이라도 가진 자가 동리 전체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는 축제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 부락공동체에는 법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들의 자율적인 관습이 법 따위를 수립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반면 다른 것도 보았다. 그것은 서울을 위시한 도시의 풍경이다. 거기에는 서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범죄의 싹이 트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도시문명이란 바로 서구의 문명이라고 전제하고, 한국의 도시에도 범죄적 서구 문명이 이식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얼마 전만 해도 미국에서 온 사람들, 특히 여인들은 다른 시각에서 한국을 낙원이라 했다. 그것은 미국 도시에서는 밤에는 물론이요 낮에도 마음대로 산책도 할 수 없는 골목이 많은데 한국에는 전혀 그런 불안이 없고, 대하는 것은 친절을 잔뜩 머금은 채 미소짓는 얼굴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이 땅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는가.

지금은 매일 아침 저녁에 신문 사회면을 펼치기가 무섭다. 범죄 기사가 연속되는데, 그것도 너무나 잔인하고 기상천외의 비인간적인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지난 2년 3개월 동안 경기도 화성군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아홉 건의 살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피해자들은 나이에 제한이 없다. 60대에서 10대까지, 여자이면 누구나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같이 추행을 당한 후 목이 졸려 죽었으며 그들의 주검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학대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15-6세 되는 중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들이 중학교 동창인 같은 또래의 소녀들을 유인하여 윤간을 했을 뿐 아니라, 마피아의 수법을 그대로 흉내내어, 윤락가에 팔아 넘겨 착복한 돈으로 향락가를 누볐다.

봉고차를 몰고 다니며 젊은 여인들을 집단으로 유인하거나 납치해서 그들을 강제 추행하고 윤락가에 팔아넘겼고, 그로 인해 충격을 받은 주부가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이야기, 아내나 남편 혹은 정부를 죽일 뿐 아니라 그 시체를 토막내서 내다버렸다는 이야기, 최근에 한 교사로부터 여고생들이 싸우는데 유리를 자근자근 씹어 그 파편을 상대방의 얼굴에 뱉고 장갑낀 손으로 내리훑어서 얼굴 전체에 정형할 수 없을 만큼의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이 사회가 갈 데까지 다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린치 살인 사건들이다. 이미 오래 전이라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탈주병이 한 동네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난사해 수십 명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발광적인 살인 사건이 속출하는 세태이다.

이 사회가 왜 이토록 급격히 포악해지는가? 우리는 쉽게 몇가지 커다란 원인들을 추리해낼 수 있다. 우선 군국주의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세계에는 군국주의가 팽배하고 있는데, 군국주의는 필연적으로 자기가 속한 사회에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것은 인류역사의 교훈이다. 미국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이후에 사회의 범죄상이 급격히 달라졌다고 한다. 그것은 특히 월남전에서의 패배가 좌절감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전쟁에서의 비인간적인 잔학성이 그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을 통해 미국 사회에 만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해방 이후 군국주의가 급격히 팽창했다. 군인이 적을 사살해야 한다는 것은 필요악이며, 따라서 증오심을 고양하는 것도 필수조건이다. 전쟁에서는 적에 대해 잔인하면 잔인한 만큼 공을 세우는 군인이 된다. 선봉대로 상륙을 감행하는 해병대나 적진으로 투입되는 특공대들이 적군을 인간으로 보게 되면 그 임무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군대란 특수사회이다. 그것과 일반사회 사이에는 엄격한 차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훈련된 군인의 일부가 총칼로 정권을 장악한 이래 이러한 특수 집단의 군대 문화가 일반사회에로 전염되어 인간생명의 경시풍조가 만연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하나는 기형적으로 급성장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이루어지는 마피아 집단이다. 저들은 사회부조리를 타고 그것을 자기들의 존재 근거로 삼고 자라난다. 그들의 눈에는 돈 외에 사람의 생명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불의한 권력이나 재벌의 하수인이 된 경우 허가받은 무서운 살인집단이 된다. 그런데 저들의 세계가 상업주의를 업은 영화나 소설 따위에서 분장된 모습으로 계속 소개되어 도리어 저들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기도 한다.

아무런 사려도 없이 마구 들여오는 미국의 폭력영화와 그것을 본받은 한국의 저질 범죄영화 따위가 극장에서 안방까지 계속 송출되어 청소년들에게 이같은 범죄와 그 잔인한 수법까지 가르쳐주고 주인공들을 영웅시하게 한다.

여기다가 한국 사회의 부조리가 너무도 심화되어 정당한 방법으로는 질식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체념의 군상들을 무수하게 배출한다. 저들은 글자 그대로 이판사판이다. 자기의 삶을 저주하고 냉소하는 마당에 인도주의 따위는 밥술이나 먹는 자들의 사치품이다. 구속감과 좌절감 그것이 마침내 복수심으로 바뀌어지면서 저들은 철저히 잔인하되 후회 따위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한 젊은이가 강간미수로 구속됐다. 그와 간수 사이에 대화가 오간다.

"무슨 죄로 들어 왔지?"
"물총강도질하다가 들어왔소."
"그런데도 항소할 체면이 있어?"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돈 많은 놈들은 여자를 열이고 백이고 희롱해도 명사 대접만 받습디다."
"그러나 넌 폭력을 써서 강압적으로 그런 거잖아?"
"돈으로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가요?"

이런 대화는 한국의 병리적 현상을 압축한 것이 아닐까.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이런 사회풍조를 정화하려면 사회구조적인 변화가 있어야 되고,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의 원천을 봉쇄해야 할텐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설령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범인을 취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알고 그렇게 잔인한 고문과 학살을 재미로 알았던(그리고 알고 있는) 저 수많은 살인귀들을 다 어떻게 처리하나! 이 일을 놓고 이른바 스탈린식 숙청론이 대두하는가 하면 사회변혁 불가피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 해결의 길을 못 찾고 있다.

2. 카인 이야기

성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나? 살인자의 시조 카인에 관한 이야기를 보자. 카인과 아벨은 형제이다. 하느님을 배반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난 후예들이다. 카인은 농부이고 아벨은 목동이다. 그런데 저들이 신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신은 아벨의 제사를 받고 카인의 제사를 거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신은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신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는 카인은 자신이 아벨을 지키는 자이냐고 반문하면서 자신의 죄상을 은폐하려 한다. 신은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고 하면서 그 땅에서 추방했으며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한다. 그로부터 카인은 영원히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로 살 처지가 된다. 사람을 죽인 그에게는 복수의 위협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신은 놀랍게도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일곱 갑절의 벌을 줄 것이라 하며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어떤 표를 찍어 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카인이란 어원은 '창'이나 '대장장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 뜻대로 하면 무인(武人)일 것이다. 또 카인이란 켄 족을 상징한 이름일 수도 있다. 켄 족은 이스라엘처럼 같은 야훼를 섬기면서도 끝끝내 이스라엘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돌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상이 역대기상(2, 55 이하)에 나오는데 저들은 레갑인과 같은 뿌리를 가졌음이 예레미야 35장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여간 어느 때인가 있었던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 사이의 알력과 투쟁의 역사가 이처럼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압축, 해석되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아벨은 히브리어의 '헤벨'로서 '숨', 나아가서는 '허무'라는 뜻이 있다. 그가 어처구니 없이 살해된 것 때문에 그런 이름이 주어졌는지 모르나 카인과의 관계에서 보면 강자에 대해 약자를 상징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여간 이야기가 성립되기 전에 전역사가 있었는데 그것을 원인간의 문제로 압축하고 그것을 통하여 악의 문제에 집중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제 그 중심을 찾아보자.

3. 살인의 원인

첫째로 이 살인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 원인은 바로 부조리이다. 그 부조리의 책임은 하느님 자신에게 있다. 왜 그는 아벨의 제사는 받고 카인의 제사는 거부했는가? 왜 그렇게 편애적이고 불공평한가! 정통적인 해석 중에는 아벨이 목동이었기 때문에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친 데 반해 카인은 농부였기 때문에 곡식을 바친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 신은 아벨의 제물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 해석의 배후에는 후기에 발전된 의식종교, 곧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을 정당화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짐승을 바치라고 한 바로 그 신이 '타작한 첫 곡식과 술틀에서 나온 포도즙을 미루지 말고 바치라'고 한다. 그러므로 곡식을 바쳤다는 것이 카인의 제물을 거부한 이유일 수는 없다. 정말 그 신이 짐승의 희생 자체를 좋아할 신인가. 그렇다면 그 신은 피를 좋아하는 신이라는 엉뚱한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대인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일을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인의 삶 전체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는 추측을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 자체에는 그 어디에도 반영되어 있지않다. 그 신은 "나는 은혜롭고 싶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자비롭고 싶은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출애 33, 19)라고 한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보면 모든 부조리는 신의 편애로부터 왔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을 낳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리고 많이 이 부조리 앞에서 고뇌했는가! 최근에 어떤 청년이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보고하는 끝에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필리핀 사회가 너무도 부조리에 차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키노에 의한 새 정권이 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빈부의 차이는 날로 극심해져 가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평등은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찌 필리핀만이랴! 우리는 이 땅에서도 그런 부조리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516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일부 정치군인에 의해 형성된 인맥들은, 전(全) 정권의 비리척결 운운하지만 도도히 살아서 사회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군림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의 그늘 밑에서 지원을 받으며 민중의 고혈을 수탈하여 세계적인 부호가 된 소수의 기업주들은 지금도 탄탄대로를 걸으며 오히려 시혜자인 양 활개를 치고 있지 않는가. 이런 판에, 태어난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갖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뼈빠지게 일을 해도 그날 그날 먹고 사는 일에 허덕여야 하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어떻게 윤리를 말하고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하느님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시각에서 보면 카인의 행위는 억울한 군상들의 대리자로서 분노를 터뜨린 결과가 골육의 형제를 죽이는 일로까지 발전했다고 볼 수 있겠다. 더군다나 이 카인이 바로 켄 족의 상징이라 한다면 이런 해석이 너무도 타당하다. 분명히 이스라엘만 선택된 민족으로 특대를 하고 저들은 끝끝내 소외자로 주변에서 헤매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카인이 한 일은 잘한 것인가? 카인의 죽임의 행위는 그로써 살 길을 연 것인가. 우리의 이야기는 정반대였다고 한다. 아벨은 카인에게 죽임당할 이유가 없다. 카인은 분노의 대상을 잘못 설정한 것이다. 카인이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그 부조리이다. 그 부조리를 유발한 것이 신이라면 바로 그 신 자체가 카인이 대결해야 할 대상이어야 한다. 왜 하느님에게 대들지 못했나. 왜 하느님에게 그 불평등의 이유를 대라고 항의하지 않았나.

부조리한 세상에서 압박을 받았으면 그 부조리 자체와 싸우고 그 부조리를 형성한 주범들과 싸워야지, 그래서 잘못된 체제를 뒤집어 놓아야지 왜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죽임의 비극을 낳는가! 그게 어떻게 자기의 분노를 해소하는 복수의 행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죽임의 행위는 자기 살림의 길이 될 수 없다.

4. 대지와의 원수

둘째 아담은 하늘과 불화하여 낙원을 잃어버렸는데 카인은 대지에 무죄한 피를 흘림으로 대지와 원수관계가 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딴전을 피우는 카인에게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네가 아무리 애를 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 관계가 조화를 이룰 때 삶이 풍요해진다. 그런데 하늘이 카인을 거부했는데 이제는 대지가 그를 거부한다. 카인은 대지를 경작해서 대지와 더불어 노동함으로써 살림의 문화를 이룩하도록 태어났는데 그 대지에 피를 쏟으므로 대지는 카인을 거부하고 그를 죽임의 세계로 내몬다. 대지는 무고하게 흘린 아벨의 피를 은폐하지 않는다. 아니 그 피로 하늘에 고발하게 한다. 대지는 흘린 피를 마심으로 피해자의 편에 서서 가해자의 원수가 된다. 한 생명은 그것 자체로 홀로가 아니다. '대지 속에 있는 생명'이란 동양의 생각이 여기 부각되어 있다.

오늘의 인간은 바로 이 카인의 후예가 아닌가! 그간의 역사에서 이 대지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피를 그 가슴에 받았는가. 카인의 후예들은 '보다 더'라는 욕심을 총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갑작스러운 부자가 되기 위해서 대지 위에 무서운 독을 뿌리므로 대지는 날로 초토화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거꾸로 보면 대지가 인간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들의 농간에 놀아난 카인의 후예들이 편리라는 거창한 배에 잡다한 것을 쓸어 넣고 독기 섞인 배설물을 대지 위에 쏟아버리므로 생태계는 마구 파괴되어 가고 있다. 거기에는 물론 아벨의 피가 함께 섞여 있다. 이 대지는 오염되고 이제 그 오염을 통해 카인의 후예를 거부하고 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예는 마침내 핵무기, 화학무기 등 인간을 순식간에 몰살시킬 뿐 아니라 이 대지를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무기고 위에 앉아 떨고 있어야 할 상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죽임의 행렬이 계속되다가 막다른 골목에 선 것이다. 남을 죽임으로써 자기가 살려는 생각은 어리석게 되었다. 까닭은 그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벨이 피를 흘림으로 대지와 원수될 것을 모른 카인처럼 그 후예들도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대지와 원수관계에 있다. 그것은 어머니와 원수된 자식과도 같다. 인간의 젖줄인 물이 오염되고 사람의 숨결인 초목이 죽어가고 사람의 양식은 모두 독극물이 되어가고 있다.

5. 살림의 길

형제 아벨을 죽인 카인은 정처없이 떠나야만 했다. 살인자로 낙인찍힌 카인에게는 복수에 의한 죽음의 위협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카인은 죽음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해 줄 것을 호소한다.

어떻게 이 죽임의 역사를 끝맺을 수 있을까? 살인자 카인을 제거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인가? 지난 독재정권 밑에서 억울한 죽음과 고난을 당한 가족들과 본인들의 분노를 당사자 외에 누가 바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 때 당하던 고문을 생각하면 자신을 고문하던 바로 그, 인간 아닌 인간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런 죽임의 역사가 살림의 역사로 변하지는 않는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듯이 죽임의 행위는 그 다음의 죽임에로 이어진다. 복수는 한 사람의 죽임에서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죽임에로 증가될 뿐 죽임의 역사는 종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큰 전환점이 온다. 죽임의 역사를 유발한 그 하느님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그 신은 이렇게 선언한다.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선언한 그 야훼는 누구든지 카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시를 했던 것이다. 하느님이 달라졌다. 죽임의 역사를 유발한 하느님이 살림의 수호신이 되었다. 피에 굶주린 신이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을, 인권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어쩌면 카인의 저항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라는 카인의 말은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던 그 카인의 말이 아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가는 카인으로서는 최후의 발악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항이라기보다 추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비로소 살림의 신, 살림의 의지를 찾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하느님은 카인을 살릴 것을 선언함으로 죽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비록 살인자라도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없다는 대헌장을 선포함으로 살림의 길을 연 것이다.

살림의 길은 이해관계가 대치되거나 의견이 다르거나 혈통이 다르거나 이질적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한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즉 공생의 길을 찾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얘기는 오늘 이 땅에서 벌이고 있는 카인의 후예들의 죽임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문제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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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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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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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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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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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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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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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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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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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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