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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1. 종주권이라는 인습

낡은 관계에서 탈출하여 새 역사의 장을 연 아브라함! 그는 구약 전체에서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조상으로 떠받들리워져 있으며, 신약에서 마저도 그를 신앙의 원조로서 떠받들고, 심지어는 다음 세계에서의 그의 위치가 마치 하느님의 장자이듯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것을 전제한 이야기도 있습니다(루가 16, 22 이하).

이 아브라함에게도 많은 시련이 속출하는데 그 중에서도 자식들을 통해 당하는 아버지로서의 고통이 가장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16장, 21장, 22장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아들과의 관계를 서술한 사적인 것이지만 실상은 한 혈통이면서 오랜 역사를 통해 대결적인 평행선을 그어왔고 그리고 마침내 적대적인 두 민족 관계로 대결되어 있는 당시의 현실을 문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제는 혈통을 이어갈 종주권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자연법이라도 되듯이 확고해진 종주권에 대한 제도적 인습과 아버지로서의 인간성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 이야기는 그의 첫 아들인 이스마엘과 그를 낳은 여자 하갈에 관한 이야기이고(16장, 21장), 둘째 이야기는 두번째 낳은 아들 이삭에 얽힌 이야기입니다(22장). 아브라함은 첫 아들인 이스마엘을 그의 어머니이며 자기의 여자인 하갈과 더불어 추방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당시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남자아이를 낳아 줄 때만이 아내라는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혈통을 이어주는 의무를 일차적인 것으로 삼아 온 전통입니다. 사라는 혼인이라는 제도가 설정된 탓에 아내로서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아들)을 못낳음으로써 아내로서의 자격을 포기해야만 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사라는 운명과 같은 제도에 도전하여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자기 대신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됩니다. 하갈은 이방여인이고 종의 신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아들을 낳음으로 혈통적, 계급적 담을 뛰어 넘어 그와 동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한 주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습은 이런 순리적인 길을 차단했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첫 아들인 이스마엘의 친어머니이기는 하나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수용되지 않고 사라의 역할을 대신하여 몸만 빌려주는 씨받이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정처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사라는 하갈의 몸을 통해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을 아들로 바친 것입니다.

이런 제도는 동서 고금에 널리 퍼져 있고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런 인습이 얼마나 인위적으로 사람의 관계를 차단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하갈과 정을 통한 아브라함, 자기 씨를 받아 첫 아들을 낳아 준 여자 하갈에 대한 아브라함의 남자로서의 정, 자기 핏줄인 이스마엘에 대한 아비로서의 애정이 한마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왔다."

그러나 사라의 요구에 꼼짝 못하고 순응하여 약간의 먹거리와 물이 담긴 가죽부대를 주어 모자를 내어쫓습니다. 제도화된 인습 앞에 엄격하던 부권도 전혀 맥을 못춥니다. 그는 사라의 종이라도 된 듯이 자기 의사는 드러내지 못하고 그녀의 지시대로 시행할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반(反)인간적인, 인위적인 인습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서였든지 하여간 이미 출산을 체념하고 있던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것이 이삭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정통성에서 보면 희망의 씨앗이지만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보면 비극의 씨앗입니다. 이삭을 낳음으로 그 때까지 정립되던 인간관계가 전부 무너지고 수정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있던 일, 즉 하갈이 사라를 대신하여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주게 된 이스마엘에게 인정된 종주권은 무너뜨려야하고 지워버려야 할, 없는 것으로 치부해야 할 때가 현실로 온 것입니다.

이것으로 아브라함 집안 이야기는 이삭의 이야기로 이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정사(正史)란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을 말할 때 공식화된 것이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영영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것은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에서도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야곱에게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추방된 자와 패배한 자는 정사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정사는 이삭을 통해 그 혈통이 어떻게 계승되는지를 추적하는 데 관심을 모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성서 안에는 이런 정사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끼어 들어 옵니다. 그것은 바로 민중이 전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2. 추방된 하갈과 이스마엘

하갈의 뒤를 좇는 눈은 하갈이 임신할 때부터입니다(16장).

하갈이 임신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여주인 사라의 뜻에 순응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갈이 임신하자 사라를 깔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정사(正史)에서 늘 그러하듯이 정처인 사라를 감싸주는 수사(修辭)로 사용된 것입니다. 오히려 사라가 남편에게 고자질하며 바가지를 긁는 것이 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의 권한을 재확인시키고 하갈을 마음놓고 학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사라는 종이 주인의 아이를 배므로 남편이나 사라와 동등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짓누릅니다. 여전히 하갈에게 자신이 '종'인 것을 재확인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제도적 인습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여종이 주인의 아이를 뱄다고 해서 여주인과 동등하게 되려고 할 때는 형벌로 여종을 격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갈은 학대받는 종이 됐습니다. 그 학대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그녀가 정처없이 도망친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사막을 거쳐 샘물가에 섰습니다. 사막이 절망, 죽음의 상징이라면 샘물은 희망, 생명을 의미합니다. 사막 가운데 있는 샘은 오아시스입니다. 하갈은 절망의 과정을 거쳐 지금 새로운 희망과 생명의 지평에 섰습니다. 이 과정은 다음에 또한번 당하는 그녀의 행로와 꼭 같습니다. 거기서 그는 '어떤 이'를 만납니다. 우리 번역은 '천사'라고 하나 반드시 신적인 존재라는 뜻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자(使者)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신의 사자에 대해 구약은 여러가지 뜻을 상징하는데 그중에 민중을 보호하고 인도한다(출애 14, 19. 23, 20)는 상징이 주목됩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할 때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주신 천사"(창세 48, 16)라고 했는데 바로 하갈을 대하는 이 사자가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야훼께서 들으셨다"(창세 16, 11)고 합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하갈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서 부르짖는 민중입니다. 하느님은 그의 절규를 들은 것입니다. 제도화된 인습에서 쫓겨난 하갈이나 하느님은 그를 소외해 버리지 않습니다. 아니! 그를 축복합니다. 그의 몸에서 밴 아이에게 또 하나의 종주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하갈은 당당하게 집으로 되돌아 갔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들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준 당당한 주체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이스마엘을 유일한 아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창세 17,18). 그런데 사라가 이미 체념했던 상태에서 이삭을 낳게 됩니다. 이로써 숙명적인 알력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삭이 젖을 떼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인습대로라면 그 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그보다는 한두 살 위의 아이였을 것입니다. 두 아이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차이없는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사라에게는 그런 아브라함의 입장은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이스마엘은 이삭을 위해서는 경원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말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고 번역한 "sahak"는 '웃다', '논다'는 말인데, 사라의 눈에서는 '놀린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이스마엘과 하갈을 추방할 것을 강요하여 아브라함은 속수무책 그 정처의 뜻을 따릅니다.

폰 라드(von Rad)는 이 추방의 아침 현장에 아브라함도 하갈도 아무런 말이 없는 것에 관심합니다. 사실 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 표현도 없습니다. 인습에 꼼짝없이 굴복하면서도 억제하는 분노를 침묵으로 나타내는 것일까? '차라리 돌이라도 됐으면' 하는 감정이 슬픔을 나타내는 것일까? 하여간 이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슬픈 현장입니다.

아브라함은 또 한번 '언어도단'의 비극적 처지에 놓입니다. 그것이 신이 이삭을 산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입니다(창세 22장). 그때도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나귀 등에 안장을 얹고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어가지고 자기 아이를 잡아 바칠 지정된 곳(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말은 물론 아무런 감정 표현도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갈을 무자비하게 내어쫓은 이삭의 생모 사라는 전혀 등장도 하지 않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현장에서의 침묵을 주목하면서 그것은 인륜(윤리)의 한계를 깨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갈은 그 어느 때처럼 광야로 갑니다. 얼마나 멀리 그리고 몇 날이나 배회했는지는 일체 언급되지 않습니다. 단지 가죽부대에 물이 다 떨어졌다고만 합니다. 사막에서 물이 떨어졌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았습니다. 창세기 17장 26절에 따르면 그 아이는 이미 15세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서술은 품에 안고 가는 어린 아이를 연상하도록 합니다. 쨍쨍하게 해가 비치고 있다는 것은 그 아이를 덤불 아래 뉘어 놓았다는 표현이 말해줍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 아이가 목이 말라 사경을 헤메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갈 자신의 목도 이미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위해 애곡합니다. "아이가 죽어가는 꼴을 차마 볼 수 없구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죽음을 절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죽음을 애곡하는 엄마의 절규입니다. 추방 당할 때에 단 한마디도 않던 이가 이처럼 절규함으로 그것이 얼마나 처참한 장면인지를 듣는 자에게 더욱 실감나게 합니다. 통곡의 주제가 '우리 모자(母子)'가 아니고 '이 아이'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눈을 이 아이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그것이 연극의 무대라고 한다면 캄캄한 무대에 조명을 그 아이에게만 비추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엄마는 그 아이에게 화살 한 바탕거리만큼 떨어져서 죽어가는 아이를 마주하며 통곡을 했습니다. 그 통곡이야 숨을 거두는 자의 마지막 절규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어떤 소리가 응답했습니다.

"하갈아, 어찌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느님이 들으셨다."

하느님 자신의 소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를 대변하는 힘찬 소리입니다. 하갈이 소리내어 통곡했는데 하느님은 그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갈의 통곡이 바로 그 아이의 통곡을 대신한 것이니 그것은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하갈은 절망 속에서 체념함으로 어두워졌던 눈을 번쩍뜨고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거기 그 어느 때와 같이 오아시스가 있었습니다. 물론 하갈도 그 아이도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느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하시면서 돌보았다"고 합니다.

3. 새 종족 탄생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단절되었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약속은 16, 12, 17, 20-21, 18절에 여러 형태로 반복됩니다. 한마디로 그는 큰 민족의 족장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모든 친척을 떠나서 살게 될 것이다"고 한 표현이 아브라함 혈통과의 단절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가 한 족장이 될 것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한 족장이 되는 것과 그가 살고 있는 땅, 그가 난 곳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집을 떠난다(12, 1)는 것을 전제한 것과 같습니다. 이스마엘은 종의 몸에 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아버지로부터의 추방과 더불어 그의 혈통과 절연했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로 광야에서 목말라 죽었어야 할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 종족의 장(長)이 되었습니다. 그를 살린 것은 그의 어머니 하갈입니다. 아들의 죽음앞에서의 그녀의 절규는 하늘에 사무쳐서 그를 살릴 뿐 아니라 새 종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하갈은 이방의 여인(소외된)이면서 종의 신분의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족장을 잉태한 몸이면서 동시에 죽음에서 살려낸 새로운 모태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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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참여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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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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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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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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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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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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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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