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 7
 
1. 탈(脫)

원래 구약의 역사는 출애굽 이야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출애굽 사건을 기원으로 삼고서, 그 주제를 교향곡의 주 멜로디가 계속 변주되듯이 약간씩 변화시키면서 반복된다. 그런데 아브라함 이야기는 출애굽한 한 집단의 역사적 모형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종족 이야기는 출애굽 집단 이야기와 상호 관련시켜 보면 그 성격이 확실해진다.

출애굽 이야기는 탈출함으로써 새 역사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야훼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탈출시키라"고 명령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경우도 탈출로써 그 역사가 시작된다. 이것은 아담, 이브와는 대조적이다. 아담, 이브는 에덴이라는 동산에 정착하여 그것을 가꾸는 인물로 성격화된다. 그런데, 에덴의 아담은 범죄함으로써 강제로 추방당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아브라함은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탈출하는 것이다. 이 탈출은 죄로 인한 추방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한 출발이다. 아담은 평화로운 낙원에서 정착하도록 지시받았음에 비해 아브라함은 생명을 건 미지의 땅을 향해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당시에 고향과 친척, 아비의 집, 즉 종족에게서 이탈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낯선 땅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거는 일이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베델, 이집트, 네겝, 다시 가나안 그리고 헤브론 등으로 배회를 계속한다. 이렇게 많은 순례의 지명들을 보면 그것은 끝없이 떠돌아야 하는 유목민족의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을 떠돌이 아람 사람들이라고 고백한다(신명 26, 5). 떠돌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런 생명의 보장도 받지 못한 떠돌이. 이러한 떠돌이는 숙명적으로 싸우면서 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떠돌이 생활은 탈애굽한 히브리들의 40년 광야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탈출! 그것은 과거를 단절하는 행위다. 탈출은 가진 것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탈출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다. 불교에는 이와 같은 전통이 지금도 살아 있다. 저들은 새로운 삶의 결단을 출가(出家)라고 한다. 그것은 소유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삶의 보장을 내던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인간 아브라함의 특징은 '탈(脫)'에서 규정된다.

2. 향(向)

본향을 떠나라고 지시한 하느님은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을 향해 가라"고 한다. 이것도 이집트의 히브리들에게 한 지시와 같다. 히브리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가라고 한다. '향(向)'―그것은 목표를 내포한 말이다. 그 목표는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창세 12, 2-3)는 말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나아가야 할 궁극적 목적을 나타낸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출애굽의 모티브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밟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지 않고 그의 자손들에게 그 땅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데서 볼 수 있다. 장차 보여 줄 땅이 가나안이라고 하면서도 그 땅을 밟고 있는 아브라함을 거기에 정착시키지 않고 그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향은 목적지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다. 향은 도상의 존재를 나타낸다. 목적을 가진 나그네의 길, 그것이 향의 행태다. 이것은 탈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삶의 양태를 말한다. 아브라함 족속 이야기나 출애굽한 히브리 이야기에서도 목적지는가나안 땅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 곳을 드나들면서도 정착할 수 없는 땅이며, 출애굽한 히브리의 경우에는 애굽에서 가나안이 지리적으로 그렇게 먼 곳도 아니건만 40년을 방랑한 뒤에야 들어갈 수 있었던 땅! 그것은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 오아시스처럼, 보이는 듯하여 잡으려면 잡히지 않는 그런 지점이다. 그것은 일정한 땅이면서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도달되는 그런 땅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삶은 향으로 성격지어진다.

이로써 이 마당의 인간사는 탈-향(脫-向, Aus-Auf)의 역사가 된다. 바울로는 자기의 삶의 자세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뿐입니다"(필립 3, 13-14). 이것이 바로 탈향의 마당에서 사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다.

3. 기존질서에서의 탈출

탈향의 삶은 제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길이다. 그 길에는 다툼이 있고 애정이 있는가 하면 웃음과 울음이 교차되고, 폭력과 화해가 있는가 하면 수고와 안식이 있다. 그 상황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바뀌며, 그 길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고, 많은 도전과 유혹이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정착할 수 없고, 결단과 저항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출애굽한 히브리의 행로가 그랬듯이 아브라함, 야곱, 이삭의 역사가 그러했다.

우리는 이른바 족장들의 이야기를 보고 그들의 허물과 비윤리성에 놀란다. 거기에는 거짓과 약탈이 있고, 비겁과 간교가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혈족인 롯에게는 소유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했는가 하면, 적에 대해서는 그렇게 잔인한 살육도 서슴지 않는다. 적과 대항해서 그렇게 용감하게 싸우는가 하면,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그것도 두번씩이나 누이라고 속여 남에게 넘겨 주면서 자기 안전을 보전하려고 하였다.

야곱의 이야기도 도상에 있는 인간사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야곱은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난다. 그런데 야곱은 먼저 나온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출생했다. 이것은 벌써 이 역사의 장이 생존경쟁의 마당임을 암시한다. 이삭과 그의 아내 사이에 갈등이 나타난다. 이삭은 장자인 에서에게 그의 모든 유산을 승계시키려는 반면, 그의 아내는 남편을 속여서까지 야곱에게 유산을 승계시키려고 한다. 야곱은 굶주림에 지친 형의 곤경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뺏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을 윤리적 차원에서 읽는다면 그 본뜻을 전혀 잘못 파악하는 것이 된다. 이 이야기들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그것은 탈향의 삶이다.

탈향의 삶은 신천지를 개척하는 개척자의 길이다. 거기에는 기존 체제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윤리나 도덕의 척도로 이들의 삶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도대체 윤리, 도덕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정착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가 아닌가? 그러면 누가 이 질서를 만들었는가? 그것은 언제나 강자 즉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윤리는 지배자의 논리로써 피지배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설정된다. 그것을 보다 심화시키면 도덕이 되고, 더 나아가 강제화하면 법이 된다. 그러므로 도덕, 윤리, 법, 그 모든 것이 지배자의 도구가 되어 피지배자에게 무조건적인 순종 또는 복종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보면 구약 족장들의 이야기에는 어떤 체제에도 매이지 않는 개척자적인 자유의 기상이 면면이 흐르고 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 신앙 즉 종교가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기존체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며, 기존의 윤리와 도덕을 뒷받침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 또 그 자체의 권위를 정립하기 위하여 점점 복잡한 규율이 생기고 의식화되며 율법화된다.

아브라함 일족에게는 그러한 종교적 복종 따위는 없다. 그들은 하느님과 직접적인 살아 있는 관계를 가지고 행동한다. 신과 인간 사이에 사제와 같은 중간자가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삶 속에서 신을 만나지 종교 안에서 신을 만나는 일이 없다. 그러한 전형적인 이야기는 압복 나루에서 벌어진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야곱은 일반 종교에서 하듯 신을 질서에 따라 경배하지 않고 그와 밤새도록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씨름을 한다. 그는 집요하게 간청함으로 마침내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냈고 사람과도 겨루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창세 32, 29-30)하는 축복을 얻어내고 만다. '이스라엘'의 원뜻은 "하느님이여! 통치하소서"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결정하는 이름이다. 그는 하느님이 통치하는 한 족속의 시조가 된 것이다.

사람과 겨루고 또 하느님과도 겨루는 이것이 개척자의 길이다. 혹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위의 논지와 다르다고 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편집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 골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강요된 종교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이 마당에는 상전도 귀족도 없다. 따라서 기존적 윤리도 없다. 그러므로 윤리적 차원에서 보면 결코 모범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생존을 위해서 악착같이 싸우는 민중들에게서 본다. 저들은 제 힘으로 피땀 흘려 삶을 개척해 나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이른바 문화인의 눈에는 거칠고 난폭하며 때로는 파렴치하게 보이기까지한다. 그들은 문화나 윤리, 교양이나 도덕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제 힘으로 자기를 산다. 저들은 강자에 의해 착취를 당할지언정 남을 착취할 줄 모른다. 이들을 기존 가치관으로 정죄하는 것은 가진 자 또는 지배자의 횡포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탈향의 삶은 정착하면 썩는다. 윤리, 도덕은 정착자를 위한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유목민적인 삶의 양태와 정착자들의 삶의 양태 사이의 충돌이 역사에 면면이 흐르고 있다.

4. 탈향자의 하느님

탈향의 인간사는 정착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달프고 힘든 삶이다. 자기 힘으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가는 과정에서 저들은 더러워지고 상처도 받는다. 이런 삶에는 정착의 유혹, 가령 출애굽한 히브리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 찌꺼기를 그리워하듯 정착에 대한 동경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그 삶은 지탱하기가 어렵다. 이 삶에는 완충지대가 없고, 멈추면 쓰러지는 삶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런 삶의 도상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 내가 꼭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출애굽한 히브리들에게 약속과 계약이 주어졌듯이 아브라함에게도 마침내 약속과 계약이 주어진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만년에 이르러 주어졌다(창세 17, 1 이하).

계약이라는 사상은 구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의의는 하느님이 인간을 하나의 주체로서, '상대자'(partner)로서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과 주종관계에 있지 않고 그의 파트너다. 계약은 쌍방이 똑같이 구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주종관계를 극복한 동등한 관계를 허용했다는 말이다. 즉 인간은 역사 창조에 있어서 신의 동역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과 같은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과 비슷한 위치로 복귀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계약은 집요한 탈향의 역사에서 획득한 결과다.

5. 탈향에 실패한 그리스도교 역사

인간의 욕구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정착하려는 욕구고, 다른 하나는 자유하려는 욕구다. 이 두 방향은 상호긴장 내지 모순의 관계를 빚어낼 수밖에 없다. 정착의 욕구는 안전하려는 욕구다. 안전하려는 이 욕구에는 벌써 무엇인가 자기의 삶을 보장할 만한 것을 소유했다는 전제가 있다. 안전의 욕구는, 따라서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보수는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최대의 집착이다. 따라서 보수적인 삶은 폐쇄적이다. 자칫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침해 받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외부로부터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자신의 영역을 외부와 차단하는 것이다. 안정의 욕구에는, 그러므로 '보다 더'를 위한 맹목적인 노력이 중심이 되며, 동시에 새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개척적이거나 진취적인 것을 거부한다. 이에 대하여 자유의 욕구는 어떤 속박에서나 해방되려는 욕구가 모든 것에 앞선다.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할 경우에는 그것을 자신을 해방하는 도구로 사용할 목적으로 소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소유 그 자체에 의해 또다시 포로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태를 직시한 사람은 또다시 소유한 그것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또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유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려는 노력에 따라 방위체제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로부터 자유를 침범하는 일을 막아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공동체에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 공동체는 국가 형태가 되고, 국가는 권력으로 치리하는 합법적인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갖게 된다. 이 권력이 역설이게도 자유를 속박하거나 유린하는 본산이 된다.

또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라 한다. 이 말은 생존하기 위하여 자연이 주는 것을 계획성 없이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계획적인 경제활동을 한다는 말이다. 땅을 개간하는 데 기계를 사용하고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작업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며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경제활동이 사회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물질이 편중되어 빈부의 차이가 생긴다. 보다 많은 땅을 가진 자와 적은 땅을 가진 자, 나아가서는 전혀 땅을 갖지 못한 자가 생기게 된다. 이것이 산업체제로 전이되면 노동이 곧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것이 개입해 들어옴으로 자본이 돈을 벌고 그 결과 인간을 노예화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이 현대 산업사회의 진상이다. 그 결과 처음 추구했던 순수한 자유는 없어지고 돈이 있는 자에게만 자유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지고, 돈이 없는 자에게는 일체의 자유가 박탈된다.

자유에의 희구는 모든 것에서의 해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기존적인 것, 가령 그것이 가치든 질서든 재산이든 간에 속박하는 것은 모두 내던져 버린다. 또 자유는 갇힌 것에서의 해방을 희구하기 때문에 언제나 개방적이며 새것을 희구한다. 그러므로 자유의 길에는 언제나 개혁 또는 혁명이 따르게 마련이다. 또한 자유는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자세가 아니고 새것을 추구하려는 자세이기 때문에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의 비유 가운데서 이러한 전형적인 두 갈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만찬초대에 대한 비유다. 이 만찬의 장은 바로 새 나라다. 이 새 나라의 주인은 먼저 이미 초대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을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기득권 때문에 그 초대에 응하지 못한다. 한 사람은 밭을 소유했고 또 한 사람은 소를 소유했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여자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새것에의 초대에 응할 수 없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또한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자들이다. 이에 반하여 그 다음에 초대된 사람들은 기득권이 없는 무리들이다. 초대하는 주인은 거리에 나가 아무나 불러오라고 한다. '아무나', 이것은 바로 기득권이 없는 자라는 의미다(루가복음은 이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즉 가난한 자, 불구자, 맹인들, 절뚝발이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빼앗기고 소외된 지들이다. 이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새것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유한 자들이며, 그러기에 새 나라의 초대에 쉽게 응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는가난한 계층에 의해 시작되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용감할 수 있었다. 저들은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 나라에 대해 진취적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유했다. 그러므로 낡은 것에 대해 공격적일 수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조건이 로마제국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세계 대제국인 로마, 가진 것이 너무도 많았던 로마, 수호적이고 안전 제일주의였고 결코 자기에게서, 그리고 가진 것에서 자유할 수 없었던 로마는 바늘 하나 가지지 않은 예수의 민중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의 민중에 의해 승리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을 정복하는 순간 그것에 예속되고 만다. 저들은 로마제국 안에서 특권계층이 되어 가지지 못한 자로부터 권력, 명예 그리고 재산 등을 가진 자로 변신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는 정착의 종교가 되고 만다. 그들은 기존체제의 수호자가 되며, 안정논리의 대변자가 된다. 저들은 종교 귀족으로서 권력을 휘둘러 새것은 어떤 것이든지 소탕해 버렸다. 저들의 손에 처형된 수많은 이단자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 뿐만 아니다. 저들은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교회체제를 권력체제와 똑같이 만들고 국가권력과 긴장 또는 야합하면서,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종교가 되어버렸다.

이에 더 견딜 수 없어 일어난 것이 이른바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안정을 추구함으로써 기성세력화한 체제를 탈출하여 자유를 찾아 나선 운동이다. 종교개혁에 의해 이루어진 신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Protestant-Reform-Church)라 불리어졌다. 이 칭호를 그대로 살린다면 바로 탈향의 교회라는 말이 될 것이다. 즉 낡은 것에서 탈출하여 새것을 계속 지향하는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교마저도 탈향의 진정한 자유를 구현하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교회의 권력에서는 탈출했으나 그것으로부터 인수받은 많은 유산들을 수호하기 위해서 재빨리 교조적인 교리를 만들고 그것을 무기로 자신을 수호하고 거기서 다시 탈향하려는 세력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이렇게 된 배후에는 당시의 권력과의 야합이 주요인으로 도사리고 있다. 자유에의 길보다 안정을 선택한 신교, 탈향의 길보다 정착을 선택한 신교, 이들은 때를 같이해서 일어난 르네상스 물결,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프랑스혁명과 그 뒤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회질서의 큰 변동이 일어났을 때에나,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기치로 내세운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갖지 못하고 오불관(吾不關)의 자세를 취하거나 자기방어 태세만 견지했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배신하였고, 역사의 낙오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는 안정이나 정착일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바는 하느님나라의 수립에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현실이 되기까지는 탈향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TAG •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