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1

그리스도교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을 인류역사에 있어서 한 세대의 종식 다음에 새로운 인간상으로 등장시키는데, 그 출발은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창세 12장). 고향과 가족에서 떠난다는 것은 낡은 질서에서의 탈출이다. 그 대신 그에게 주어진 것은 '희망' 하나뿐이다. 희망은 손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어딘지는 가르쳐 주지 않고 단지 지시하는 방향으로 가라는 것은 희망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며, 희망은 오직 믿음에서만 보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을 신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다(로마 3. 갈라 3, 4). 그런데 그 믿음의 규정은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고 믿었다"고 한다(로마 4, 18). 이것은 절망 속에서의 희망, 불가능 속에서의 가능을 믿었다는 뜻이다. 성서에서의 희망이란 낭만적인 유토피아의 환상을 말하거나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전망같은 것이 아니고 언제나 절망 속에서의 희망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에게서 큰 민족을 이룰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 사라는 임신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의 권유로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본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희망을 걸었더니 그는 희망을 성취할 줄기가 아니라고 한다. 사라는 이미 생산 능력을 잃었다. 그런데 한사코 그를 통해 아들을 낳으리란다. 그것은 아브라함 부부가 폭소를 터뜨릴 만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라는 기적적으로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제 희망은 환상이 아니라 구체성을 띠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 아들과 함께 절망적 운명에 휘몰린다.

이삭을 낳은 후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 보내야하는 난국에 처했다. 그는 떡덩이와 물가죽 부대를 주어 두 모자를 떠나 보낸다. 하갈은 정처 없는 길을 헤매다가 브엘세바라는 광야에서 기진했다. 먹을 것도 물도 다 떨어져서 주저앉고 만다. 죽어가는 자식을 도울 길 없는 하갈은 차마 그를 정면으로 볼 수 없었음인지 그를 떨기나무 그늘 밑에 눕혀 놓고 멀리 마주앉아 통곡을 한다. 그가 처한 상황으로 볼 때 그에게는 죽음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지금 죽어가는 어린 것의 미래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 약속을 통해서 그녀는 절망의 현장에서 그 아이의 미래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즉 희망에서 재기했다는 뜻이다. 그 순간(눈이 밝아져) 그녀는 그 앞에 샘물을 볼 수 있었다. 절망의 눈에는 가리워졌고 모든 길은 꽉 막혔지만, 희망에서 힘을 얻었을 때 삶의 길이 열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한 아들 이스마엘은 죽음의 절망에서 살아 났다.

이삭! 100세에 얻은 이삭은 곧 아브라함의 희망 자체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제물로 모리아 산상에 바쳐야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것은 절망적인 입장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이 집을 나설 때나 모리아 산으로 향할 때 아브라함의 침묵에 관심한다. 집을 떠날 때나 모리아 산으로 향할 때 그 무대에는 그의 아내도, 또는 어느 누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침묵은 윤리가 도절됐기 때문이다. 아들을 죽이러 떠나는 그가 어떻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침묵은 때로 통곡보다 짙은 것일 수 있다. 그 침묵은 그의 고통의 절정을 말한다. 사실상 아들을 죽이러 가는 부모는 그 아들을 죽이기 전에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가 아들을 제단에 올려 놓고 칼을 들었을 때, 그 손을 만류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다른 길이 보였다. 그 아들을 마음에서 이미 죽인 순간, 제단 옆에 바칠 수 있는 양이 있음을 보았다. 절망에서 캄캄하던 눈이 희망에서 다시 볼 때 그에게 새로운 길이 보였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이 행위를, 가능성 안에서의 신앙이 아니라, 불가능 속에 선 믿음이라고 풀이한다. 약속이 결부된 외아들을 제물로 잡아 바친다는 것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희망의 줄이 끊기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죽일 결심을 한 것은 불가능 속에서의 신앙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죽어도 살리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가 지금 아들을 죽여야하는 시점에 섰을 때 어떤 방도를 생각할 수 없었고, 그저 죽이는 길뿐이었다. 그런데 "아니! 이 아이는 희망 자체이다. 미래의 아이다"라는 사실을 재인식했을 때. 희망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그 앞에 새로운 길이 보였다. 그것이 아들이 아니라 양을 바치는 길이었다. 이것은 하갈이 절망 속에 있을 때 안보이던 샘이 희망을 가졌을 때 보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새로운 희망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나? 그것은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이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 함은 어떤 경우인가? 그것은 내가 희망(믿음)을 가지는 것과 동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희망(믿음)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절망을 통한 희망이다. 절망은 희망,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관문과도 같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경험한 것이 예수의 제자들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게 운명을 걸었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를 따랐다. 그들에게 예수는 모든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처럼.

그런데 예수는 꼼짝 못한 채 처형됐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절망했다. 그런데도 저들이 속수무책, 수수방관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하갈의 처지와 같다. 모든 것이 끝났다. 하느님도 무심하다! 이러한 절망적인 울분 같은 것이 "하느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의 절규를 들었다는 보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의 비극만 본 저들은 도망치는 길밖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무력감에 휘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들은 부활의 경험에서 새로 태어났다. 절망의 눈으로 그 사건을 보았을 때는 죽음밖에 없었는데 희망의 눈으로 그 사건을 보았을 때 거기서 새로운 삶을 발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희망의 눈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던 것이다.

절망과 희망을 존재론적으로 체험한 이가 바울이다. 바울은 현존을 법[律法] 아래 사로잡힌 존재로 보았다. 그런데 이 법은 조화로운 것이 아니라 모순적 배율(背律)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체험하므로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이 죽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주랴"는 비명을 지른다. 이 비명은 아브라함의 비극적 침묵, 하갈의 통곡, 예수의 십자가상의 절규와 상통한다. 절망의 비명이다. 그러나 바울의 절망의 비명은 급전환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로마 7, 24-25)고 한다. 이 변조 사이에는 '무덤'이 있다. 그런데 이 급전환은 인간의 본질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눈과 희망의 눈에 의해서 보이는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런 뜻에서 그는 뒤이어 "그런데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고 한다. 즉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삶도 되고 죽음도 된다.

2

음악가 베토벤은 이율배반 속에 있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가 만년에 귀가 멀었다는 것은 그에게 숙명적 비극을 가져다 주었다. 음악가가 귀가 멀었다는 것은 눈먼 화가와도 같이 절대적인 절망상태에 빠져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언제 한 말인지 모르나 그러한 그가 고난을 통한 기쁨(Freude durch Leiden)이라는 말을 했다. 이것은 이미 기쁨의 현실에 안한 자의 고백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희망은 고난에 침몰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그러면 고난이나 기쁨이란 주권적, '유심적'인 그림자에 불과한가?

우리에게도 고난 속에 침몰되지 말라는 격언들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파국에 몰렸던 민족사적 흔적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위대한 신앙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희망과 상통한다. 비록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수 있다는 희망만 버리지 않으면 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또는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등의 격언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희망을 강조한다는 면에서는 앞의 경우와 같으나 변조된 흔적이 있다. 전자의 격언에는 "솟아난다"는 분발의 투지가 있는데 비해서 후자 것들에서는 그저 도래할 순조(順調)를 기다리는 소극성이 깃들어 있다. 말하자면 후자는 숙명적인 흔적이 있다. 이런 것들은 "물에 빠져 죽을 놈은 소 발자욱에 고인 물에도 빠져 죽는다"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희망만 있고 그것을 향한 행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같은 측면에서 볼 때 성서에서 보여 주는 희망을 숙명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의 희망은 언제나 행위와 직결시켜 읽어야 그 참 뜻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하갈이 절망 상태에서 탈출한 것은 결단적인 행위와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이려고 들었던 칼을 버리고—이것은 관념이나 인습에서의 탈출이라고 볼 수 있다—양을 잡을 칼로 바꾸어 든 것이다. 하갈은 절망적 상태를 숙명적으로 받아 통곡만하지 않고 샘물을 찾아 나섰을 때 절망에서 살아날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의 절망적 최후는 처음부터 결단의 행위가 갖다 준 것이며 그는 죽음 앞에서도 죽음 자체에 매달리지 않고 하느님과 대결했다. 절망한 제자들의 부활경험은 절망에의 길에서 신앙에의 길로 돌아선 것과 유리시킬 수 없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그들의 길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은, 십자가에 처형하는 권력과의 대결을 죽기까지 하겠다는 결의인 것이다. 바울이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느냐? 환난이냐? 곤고냐? 박해냐? 굶주림이냐? 헐벗음이냐? 칼이냐?"(로마 8, 35)고 한 것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의 결의를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다. 왜 박해냐? 왜 칼이냐? 이것은 단순히 가난하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게 된 상태에서의 절규가 아니다. 그는 칼을 든 자들의 박해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의 결단적인 행위는 그런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힘들에 대항한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주관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권세들이나, 높음이냐, 깊음이나 그 밖에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숙명론 뒷받침하는 일체의 것에 대한 죽음의 도전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희망 믿음의 현실과 상부한다. 행동없는 희망이나 믿음은 체념의 소굴일 수 있다. 하늘이 무너졌어도 솟아나려고 몸부림을 쳐라!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잃지 말고 살 길을 찾아 행동하라! 그럼 죽지 않는다.

3

1975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이런 질문 속에는 벌써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정치, 경제 할것 없이 달라질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바울이 열거한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그리고 칼의 위협이 바로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 느낌이다. 정말 우리는 난국에 처해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으며, 어떤 자세로 임할 것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절망은 곧 자살행위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심리상태에서 해방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돼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절망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상황이 절망하게 한다. 그런데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상황을 평면적으로 보게 됐다. 그것은 인간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경제나 정치적 역학관계가 전부인 양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의 전망이 막히면 절망한다. 사람들이 "한국은 지금 난국"이라는 것도 모두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경제적 위기, 정치적 위기 그 이상을 보려는 사람은 없고, 그런 조건을 내세워 야(野)의 권력은 정부를 비판하고 정부는 '총화'에로 모는 거점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난국을 해결하는 길은 경제와 그리고 권력통제권의 확립밖에 없다는 사고일 뿐, 인간불신이라는 민족성의 위기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불신 풍조를 문제삼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도 경제, 정치 이슈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불신 풍조가 경제 질서나 통치 질서를 저해한다는 따위의 생각이 그것이다.

인간불신 풍조가 경제, 정치를 위태롭게 하기에 앞서 바로 정치적 기교가 이런 풍조를 낳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계속 정치적 기교를 구사함으로 불신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정부나 야당의 발언이나 발표에 대해서 "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이라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위기의 극(極)을 노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정치 영역에만 머문 현상이 아니라 인간불신에로 만연되었다. 어느 놈도 믿을 수 없다는 말 만큼 무서운 말이 또 어디 있으랴!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 없으므로 스스로 절망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이 절망에서 되살아나는 길은 인간을 믿을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인간회복이 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정부는 80년대면 4,000불 소득이 생긴다는 따위의 선전으로 불신풍조를 다스리려고만 한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저절로 온다는 따위의 저들의 생각은, 그렇게 되면 인간이 인간을 신임하게 된다는 논리와 직결시킬 것이다. 아니! 1,000불 소득이 되면 인간불신은 더 심화될 것이다. 까닭은 1,000불 소득이란 분배에 대한 아무런 설계도 따르지 않은 구호이기 때문이다. 100불 소득에서 500불 소득이 됐다는 오늘을 인간신임의 도(度)가 높아졌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절망에서 희망에로 옮겨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무엇을 믿는가가 문제이다, 믿음이란 '을'(on auf)이 분명해야 한다. 요한복음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14, 1)고 한다. '하느님―나'를 믿으라고 한다. 하느님뿐이라면 원리 따위처럼 비역사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나'로서 역사적인 대상이 됐다. 그것은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역사 안에 거점을 둔 신앙의 거점이다. 그것을 그리스도교에서 인카네이션(incarnation) 즉, 수육의 사건이라고 한다. '나'는 바로 역사화된 하느님, 즉 인간화된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이 '나'가 인간을 믿는 거점인 것이며, 그가 인간회복의 바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인간의 희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심리적인 자세가 아니다. 믿는다함은 곧 행위하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곧 행위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함은 '참 사람'이 여기 있다는 대언이다. 아무리 사람들을 믿을 수 없어도 그 만은 믿을 수 있다는 믿음이 인간에 대한 절망에서 믿음에로 옮겨가게 한다. 여기서 100번 배신한 사람에게도 '그래도 나는 너를 믿는다'는 행위가 가능한 것이며 '내일 죽더라도 한 그루의 나무를 더 심으리라'는 말에 빗대어 말한다면 '네 손에 죽더라도 나는 너를 믿으리라'는 인간신임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인간을 향한 절망과 희망이 명멸한다. 나타나 보이는 인간들을 볼 때는 절망한다. 그러나 그 '참 사람'을 봄으로써 희망의 눈을 뜨게 된다. 너에게 절망했을 때 나는 절망한다. 그러나 너를 믿을 때 나에게는 너를 위해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새로운 건설이 있으며 새 질서를 위한 정열이 탄생한다. 세계는 자원란, 식량란을 크게 떠들고 있지만 인간불신의 풍조를 더 자극하여 그런 것의 쟁탈전을 부채질할 따름이다. 정부가 안보위기를 내세워 총화를 선전하면 국민들은 으레 정부가 독점한 것을 수호하기 위한 연막작전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국민이 애국심에서 불량의 시정을 부르짖으면 정부는 곧 반정부 반국가적 음모로 보고 점점 강력통치를 자행한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불신이다. 이러한 위기에 그리스도교는 자던 잠을 깬듯이 오랜 침묵을 깨고 사회참여에 나섰다. 가난한 자, 눌린 자들을 위한 사회 참여는 절망하지 않은 자에게만 가능하다. 너를 위해 나를 내던질 수 있는 것만큼 사랑의 산 증거는 없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가난한 자, 눌린 자의 해방을 위한다면서도 저들을 인간불신의 절망의 병에서 해방하는 복음에 소홀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참여는 대부분 절망적 기조 위에 선 부정과 비판에 그치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부정에 앞선 철저한 긍정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같은 긍정이 있어서 그것을 가로막는 악한 힘과 대결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참 사람의 출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 참 사람은 믿음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됐다. 십자가는 새로운 일이 아니라 기존세계의 절망을 집약한 사건이다. 그러나 절망적 상황에서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스도교의 탄생은 바로 이 부활의 아침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복음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암담한 현실이라고 해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한 희망을 말로, 몸으로 알리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본연의 임무이다. 절망 속에서의 희망이 부활사건이라면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러한 사실의 증인이 되는데,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힘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그것은 이 민족에게 외아들을 바쳐야하는 아브라함이나 하갈과 같은 입장에서 꼼짝 못한 채 주저앉은 이들에게 양을 보여주고 샘물을 보여주는 일이다. 즉, 미래에의 구체적 설계, 제3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이 민족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