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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1

세계 문화사를 보면 흥망성쇠의 연속이다. 그것을 자연의 현상과 직결시킨다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문명 또는 문화는 자연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계획과 노력, 기술과 건설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어떤 문화도 모두 붕괴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문명비판가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 몰락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처럼 싱싱하게 발전하던 문명들이 어떤 노쇠현상은 보이지도 않은 채 졸지에 꺼꾸러진 예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며, 그 이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기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고대 문명사에서 바벨론 제국은(함무라비 주전 1728~1686)은 고대의 세계적 문명을 이룩했었다. 그들의 찬란한 문화는 그 주변 민족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각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들어 세계국가의 양상을 띠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졸지에 붕괴되어 그 잔해만을 남겼다.

구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벨론 제국은 곧 세계의 힘 자체였다. 이스라엘은 저들에게 점령될 뿐 아니라 많은 중견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야훼를 믿는 저들이 그들의 손아귀에 쉽게 항복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그들이 저들의 신앙의 대상인 야훼보다도 강한 대적으로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극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은 하느님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하게 하는 금잔이다.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미쳤다"(예레 51, 7)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됨"을 보았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교만을 책해서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히리다"(이사 14, 13)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순식간에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같이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본향으로 도망하는 것"을 보았다(13, 14). 사실상 바벨론 제국은 세계에서 모아 들였던 많은 민족들을 도로 토해내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야휘스트라는 한 그룹이 있었다. 저들은 세계사를 고쳐 해석한 집단으로써 현대적인 이름을 붙친다면 문명비판가다. 저들은 바벨론 문화의 붕괴이유를 규명했다. 그런데 그 비판의 초점을 바벨론 제국이 건설하던 이른바 바벨탑[城]에 두고 있다. 저들이 국력과 그 문명의 상징으로 웅대하게 세우던 바벨탑이 중단된 것을 바로 바벨론 문명의 몰락의 상징으로 봤다. 왜 저 탑건설을 중단했어야만 했을까?

2

바벨탑을 중단한 것은 기술부족 때문이었나? 아니면 외세의 침략 때문이었나? 아니다. 야휘스트의 문명비판은 특수하다.

야휘스트는 이 문명의 중단을 세계사적 측면에서 해석한다. 세계(온 땅)는 원래 하나였으며 언어도 하나였다고 한다. 이것은 벌써 '왜 이 세계는 많은 종족, 민족, 국가로 분단/분열됐는가?' '왜 세계에 이같이 많은 언어들이 생겨 피차에 상통할 수 없게 됐나?' 라는 문제를 전제하고 본 것을 나타낸다. 세계가 이처럼 나뉘어진 것,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기서 상쟁과 불화의 비극이 생긴다. 그러면 그같은 분열의 이유는 어디에 발단이 있는가? 그것은 세계가 제도상으로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인가? 문화가 전체에 보편화되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야휘스트는 독특한 눈으로 비판한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이동하면서 살았다. 이것은 유목민족의 생태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유목민족은 언제나 자연과 밀착되고 그것에 의존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저들이 동쪽 '시날' 평야에 정착했다. 이것이 문화건설의 시작이다. 그들은 거기에 문화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들은 자연석 대신에 사람의 기술로 만든 벽돌, 흙 대신에 역청 즉 아스팔트로 성곽을 쌓아올렸다. 자연과 유리되는 이른바 문화적 건설이다.

이것은 테크놀로지의 발단이다. 그들은 그 탑(성)을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쌓기로 했다. 대지에서 거리가 먼 만큼 발달된 문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인간의 힘으로 자기들의 삶의 보장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야휘스트는 저들의 건설 목적을 두가지로 규명한다. 하나는 그 "이름을 드러내자"는 것이요. 둘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건설은 인간의 자주선언이요, 자기능력의 과시이며, 인간만으로써 어떤 외부의 간섭도 거부할 수 있는 확고한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원초적인 문명의 정의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영원히 보장할 수 있는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것이 문화의 추진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거대한 바벨탑은 중단되고 말았다. 왜? 우선 그 이유를 일반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벨론 제국은 저들의 국력을 시위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바벨탑은 바로 국력의 시위인 동시에 구심적인 심볼이다. 또한 이것은 인공적 신앙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위해서 집권자는 그 국민과 그리고 포로로 끌어 온 사람들을 혹사했으리라. 이것은 노동력의 무조건적 착취이다. 집권자는 이것만 건설하면 그 결속은 보장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혹사에 견딜 수 없어서 항거가 생기고, 마침내 민심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더우기 국민들은 그 탑을 쌓는 것이 국민을 결속해서 한 집권자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거기서 영광을 누리려는 것을 간파했을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 민심은 붕괴되어 하던 일이 중단되고 그 나라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휘스트는 그 문명의 붕괴의 원인을 바로 언어의 혼란에서 왔다고 한다. 즉 국민 사이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이 간단한 말을 오늘의 용어로 바꾼다면 많은 뜻을 나타낸다. 언어의 단절은 계급형성을 뜻하기도 하고, 집권자와 피집권자 사이의 단절을 뜻할 수도 있고, 불신사회가 형성됐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란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의 단절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관계의 분열을 뜻한다.

그런데 이같은 언어의 분열은 바로 이 문화의 종말을 유발한 것이다. 문화는 건설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냐라는 물음에 납득할 수 있는 통일된 대답이 없으면 반드시 분열을 가져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야휘스트는 바벨론 문명의 쇠망을 초래한 언어분열을 사회과학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한 이는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왜?

야휘스트는 "이후로는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문명의 성격을 꿰뚫어 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명은 바벨탑을 하늘에 닿게 하려는 것처럼 그 한계를 모른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오르면 그 자체의 자율성(Autonomie) 때문에 그것을 만든 인간마저도 소외시킨 채 그 자체로써 계속 앞으로 나간다. 그것은 사람을 실은 채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공중에 뜨기 시작한 것처럼 계속 위로 치솟는다. 그런데 그것은 조종기가 고장난 비행기처럼 더 이상 조종할 수 없게 되며, 마침내 추락되기 전에는 중단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하느님이 언어를 혼란케 함으로 건설을 중단케 한 것을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최종적 자멸을 사전에 막으려는 은총이기도 하다. 이 전설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3

제1차 대전을 계기로 서구인들은 서구 문명의 몰락을 외쳤다. 그것은 문명의 건설에서 궁극적인 보장을 찾으려는 낙관주의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으나, 저들이 형성한 문명에 대해서 더 이상 저들이 주인으로 머물 수 없음을 실감한 데서 부르짖은 소리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저들의 손에서 이루어진 기계 문명이 저들의 손을 떠나서 세계에로 진출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본 것이다. 유럽에서 형성된 문명은 미주로 이동했다. 미국은 이 문명을 고도의 기계문명으로 이끌어 올렸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문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나 동시에 전쟁은 그 부수물처럼 일어나 그 규모가 문명의 높이와 비례될 정도에 이르렀다.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저들의 문명의 결과를 세계에 분양할 수밖에 없게 됐다. 히틀러를 치기 위해 소련에, 일본을 치기 위해서 중국에, 그것이 다시 역전되어 다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일, 일본에 … 이처럼 이 문명의 기물(器物)은 이미 미국에 손에 있으면서도 그 손에 있지 않게 되었다.

이같은 과정 속에서 서구의 문명은 세계의 것으로 확대되어 갔다. 어떻게 보면 이 문명의 혜택으로 민족 또는 국가간의 이해가 촉진된 것같다. 정보(information)와 교통(communication)은 세계를 하나로 묶은 듯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언어가 통하고 인간관계가 정상화에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제는 민족과의 사이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각 민족 내부의 언어의 단절과 불신 풍조가 그 어느 세기와도 비교할 수 없이 깊어졌다. 이것은 후진국인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문명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와 함께 지구가 완전히 초토화되리라는 경고가 연일 빗발친다. 그러나 이 소리를 듣고 브레이크를 걸 힘은 이 문명 자체에는 없다. 과잉생산해서 '내버리는 삶'을 향유하는 미련함 때문에 지구의 기능이 스톱되리라고 경고하는데도 공장은 정지할 줄 모르고 계속 생산품을 토해내며, 국가 간에는 계속 보다 신기한 것을 제작하려는 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 뒤를 따라 후빈국들은 자기들의 고유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은 물론, 자기자신을 값싸게 팔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지상명령처럼 이른바 근대화에로 줄달음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건설이냐? 언어의 분열, 국민간, 국제간의 분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건설해야 한다는 그 윤리를 누가 만들어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은 건설과 더불어 이른바 하나의 세계, 평화 따위를 마치 가장 영리하고 그럴듯한 이 시대의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각각 자기들의 바벨탑을 쌓아올리면서 하나의 세계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서로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한 하나의 세계란 속임수이며, 또 그러한 탑 쌓기를 계속하는 한 하나의 세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

까닭은 기계 문명에 의해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힘이 한 단추에 집중된 이 마당에 하나의 세계가 된다면 인간의 운명은 그만큼 빨리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대립관계 때문에 그 세운 것들이 무의미하게 되어 중단 또는 폐기돼 버려야 하는 현상은 부분적으로나마 인류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4

야휘스트는 인간 역사의 비극을 하느님 없는 세계건설, 즉 인간만의 세계구현이라는 문명성에서 본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에서 아담(인간)의 자주성 선언(자연과의 격리)에서 시작해서 카인, 거인(네피림) 등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인간사회 형성의 과정과 그것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를 그렸으며, 마침내 노아홍수의 이야기에서 그와 같은 세계를 없애고 새롭게 출발하는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제 바벨탑 이야기로써 낡은 세계의 최후적 심판으로서의 분열을 보았다. 그러나 야휘스트들은 이러한 원역사를 그림으로써 부정적인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출현을 위한 서곡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다음 12장에 출현되는 아브라함 이야기이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바벨탑 건설과 대조를 이룬다. 바벨탑은 정착, 건설, 인간의 자주 그리고 수호, 말하자면 소유와 보존으로써 성격화된 데 대해서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데서 시작한다. 이것은 과거에서의 탈출이다. 아브라함은 이방 땅으로 유랑의 길에 들어선다. 이것은 아무런 삶의 보장도 제 손 안에 갖고 있지 않은, 내맡기는 삶이다. 그에게 유일한 재산은 오직 미래적인 약속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미래 밖에는 없다. 그는 미래에 의해서 현재를 산다.

이 고대의 문명비판가는 이로써 낡은 문화세계의 종말과 더불어 아브라함에게서 새로운 인간상을 본다. 이 인간은 소유에 의해서 살므로 바벨탑을 쌓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내맡김으로써 미래개방적인 삶의 자세 위에 이루어질 새로운 세계를 내어다 본 것이다.

이같은 인간상과 그 삶의 자세는 성서에서 개인 또 공동체의 기본적인 모델로써 전해왔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을 그대로 구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번영할 때에나 고난 속에 처했을 때에나 이같은 삶의 자세를 그 미래성처럼 견지해 왔다. 그러나 그같은 삶의 자세를 새로운 상황에서 재파악해서 뚜렷하게 구현한 것은 신약에 들어와서이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삶, 이것은 바로 소유함으로 산다는 문화적 삶의 반제(反題)이다.

5

우리는 오늘날 바벨론의 바벨탑을 눈앞에 보고 있다. 이것은 서구 문명의 결산이다. 이 문명은 인간자주의 선언과 더불어 출발했다. 그러므로 그 쌓은 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율화되어 가고 있다. 우리 눈 앞에는 그것을 정지시킬 거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폭의 종말은 불가피하다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건설과 더불어 언어의 혼란이 오고 있다. 오늘을 지배하는 정치적 언어는 벌써 아무도 믿지 않는다. 시대 사이의 언어의 단절,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언어 단절, 그것은 한 가정에 마저 만연된 현상이다. 언어에 대한 불신 바람은 종교 세계에도 불어 들어왔다. 이것은 오늘의 문명이 가져다 준 산물이다. 언어에 대한 불신은 이론에 대한 염증을 가져다 주어 한동안은 이론에 실제를 요구하더니 지금은 오직 행동만이 남았다는 극단주의가 등장했다. 이것은 건설하는 바벨탑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징조가 아닌가? 하여간 이 날까지의 문명은 갈데까지 다 갔다. 더 이상 이대로 진행시키면 인간의 운명은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명의 바벨탑은 중단돼야 하며 중단시켜야 한다.

우리는 이 날까지 이 문명이 주는 것을 혜택으로 알고 바벨론의 금잔의 포도주에 취하듯이 '보다 더!'라는 습성에 젖어 왔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동안 얼마나 바열한 소유욕의 노예가 됐는가? 우리가 우리의 정열을 쏟는 것은 정말 내게 필요한 것 때문인가? 아니면 현대 문명이 주는 포도주에 취하여 유혹된 소비성 때문인가?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나 동시에 소유욕에 의한 바벨탑을 계속 높여만 가고 있지 않은가!

현대문명은 이런 형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새 시대가 와야만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이 문명이 주는 포도주에 취해서 제 기력을 잃고 있다. 이 문명이 주는 것을 큰 혜택처럼 소유하고 이방을 걷는 성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선교 성과를 개탄하는 것은 무슨 희비극인가?

아브라함의 새 출발은 전설이 아니다. 그는 오늘도 살아 오늘의 인간이 이제 내디뎌야 할 길을 앞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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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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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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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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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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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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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에서 본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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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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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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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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