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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1

널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을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세 18, 22-33).

소돔이 멸망한 이야기는 성서 특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종교사학파들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중동 일대에 많이 유포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중요한 점은 이처럼 흔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혀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성서만이 갖는 독특한 것입니다.

소돔은 고모라와 더불어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상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전설은 오늘의 사해(死海)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해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이 곳엔 염분이 너무 많아서 어떠한 생물도 살 수가 없으며 심지어는 주변의 풀들도 자라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일대는 화산지역으로 되어 있어서 바위들이 무시무시하고 앙상한 그런 풍경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이 지대가 본래 비옥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이처럼 불모의 지대가 되어버렸을까 하는 것은 그 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문입니다.

"폼페이의 최후"라는 소설이 있고 또 그것이 영화화된 바도 있지만 옛 폼페이 시의 유적을 보면서도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적어도 2천년 가까이 지하에 묻혀 있던 이 도시가 발굴되면서 당시의 문화가 얼마나 찬란하고 고도했던가를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화려한 도시가 주후 79년에 화산의 폭발로 순식간에 매몰되어 버렸습니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에 다 죽어버린 셈입니다. 지금도 쓰러진 대로 죽어 화석이 된 시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왜 이 도시가 이처럼 비참하게 일순에 망했나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거야 화산이 터져 그런거라고 설명하면 그뿐이지만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어떤 수수께끼가 그 곳엔 필시 숨어 있을 거라고 느껴져 그것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종교가들은 그 이유를 극에 이른 죄의 값이라고 말하고 마치 징벌에 대한 경고의 상징처럼 폼베이 시를 이야기하며 특히 성적인 문란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벽화들에 의하면 오늘의 우리들로서도 놀라울 정도로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합리적인 생각을 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도시에 지진이 일기 시작하고 화산이 폭발할 징후를 보인 것은 주후 63년부터라고 합니다. 주후 79년에 완전히 이 도시가 매몰되었다고 하면 적어도 16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계속 위험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주민들은 그곳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참변을 당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것은 상상이긴 하지만 집의 구조나 목욕탕, 정원을 가꾼 것을 보면 지금의 서울 생활로도 부족하리 만큼 부요하게 살았는데 역시 저들이 쌓아 올린 그 부(富) 때문에 위험도를 보면서도 차마 버리고 떠날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끝내 그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화석화한 시체들을 보면 거의가 무엇인가를 끌어 않은 채 죽었습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가 귀하게 여기던 보물을 마지막 순간까지 안고 뛰다가 죽은 것이 아닌가할 정도입니다. 위기가 왔는데도 이미 소유한 것들에 대한 애착 때문에 결국은 탈출할 기회를 잃은 비극적인 모습을 폼페이는 지금도 생생히 말하고 있는듯 합니다.

소돔이 멸망한 이야기에도 이와 비슷한 요소가 있습니다. 소돔 성 중의 모든 백성들은 그만두고 '롯'의 가정만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저들은 소돔이 멸망할 예고와 함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향해 달려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 보았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역시 추측이 되겠지만 뒤를 돌아다 본 것은 역시 자기의 소유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미련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

구약을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벌을 받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 거의 상식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벌을 받음에 있어서도 개인과 전체를 분리시키지 않고 함께 망한다는 집단적인 생각만을 했는데 성경을 분석해 보면 주전 7세기 경부터 이스라엘의 신학적인 물음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왜 의로운 사람도 악인과 함께 망해야 하며 불의한 사람들의 운명의 와중에 함께 휘말려 들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 것입니다. 주전 7세기 이전까지는 이스라엘은 벌의 연대성을 확고히 믿어 왔습니다. 십계명에서 보는 대로 아비의 죄가 3, 4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연대성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에서는 개인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7세기 이후부터 이에 대한 불공평성을 문제시함과 아울러 집단이나 연대성보다는 벌을 받는 직접적인 원인이 개개인에 있다는 개인의 책임사상(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같은 생각이 신명기 24장 16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아비는 그 자식을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각 사람은 자기 죄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리라."

이것은 분명히 십계명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에제키엘서 18장 1절에는 이스라엘 땅에 널리 유포된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되리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영혼이 다 네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은 하느님과 직결되어 있지 연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상, 즉 인격이라는 사상이 여기에 배태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적인 술어로 말하면 인권사상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신앙을 사람들에게는 연대적인 책임아 없고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개개인이 자기에게 부과된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스스로 책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전체와 개인 사이에도 연대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전체의 운명을 위해서 각자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개인의 결단 여하가 전체에게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강조한 말입니다. 개인은 전체 속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 자신이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새로운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소돔의 이야기는 누가 벌을 받는가 하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체에 대해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서 개인과 전체의 연대관계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저주의 대상이 되어버린 소돔을 앞에 놓고 하느님과 대화를 합니다. 그는 처음에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심은 공의(公義)로 심판한다는 당신의 뜻에 모순이 있다고 하느님께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만일 이 성 중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당신은 이 50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멸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하느님은 놀랍게도 이 물음에 대해 "나는 그 50명을 위해 전체를 살릴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마지막 10명이 있다면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여전히 "만일 그렇다면 그들로 인하여 나는 이 성이 이미 당해야 할 운명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대화에서 몇 가지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은 처음에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실 수는 없지 않느냐는 항의를 하다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의인들의 운명만이 아니라 그 전체가 살 길이 없는가 하는 문제로 바꾸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은 만일 의인 10명만 있어도 나는 그들로 인하여 내 분노를 철회하리라고 합니다. 의안 10명에 의해서 이 집단, 사회, 민족의 운명이 급전환해서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저주와 벌의 하느님이 아니라 심판에 앞서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축복할 근거를 찾지 못해 애쓰시는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5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를 두루 다니며 광장 거리에서 찾아 보아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감히 이렇게까지는 제안을 못했지만 여기서는 만일 한 명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하느님은 그 진노를 철회하고 이 성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나는 이 성을 멸하고 싶지 않다. 공의를 행하는 한 사람이 발견되면 나는 이 진노를 멈출 것이다. 그러니 나를 도와다오" 하고 갈구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하는 이 말씀을 보다 엄격히 표현하면 이 땅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약은 첫 단계에서는 이스라엘 전민족이 의로운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렇게 희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은 그렇지를 못했고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기대는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습니다. 그러자 주전 7세기경부터 개인에 대한 신앙이 싹트고 소위 '남은 무리' 사상이 등장했습니다. 이 신앙은 특히 이사야에서 발단되어 예레미야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체가 실망했으나 '남은 무리' 신앙으로 인해 다시 새로운 희망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집단과도 같은 의로운 핵심체는 계속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다시금 절망할 수밖에 없었으나 또다시 축소해서 마지막엔 한 명만이라도 참된 의인이 있다면 그를 통하여 새로운 살길이 열릴 것이라 믿고 이 신앙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종내 그러한 의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3

2000년전 역시 같은 팔레스타인에서 예언의 소리가 끊어져 희망을 잃고 지날 수밖에 없을 때, 한 적은 무리가 지금까지 구하던 한 사람, 한 의인이 여기 왔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저주의 시대는 지나가고 복음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에제키엘서 22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 백성은 강포하여 늑탈하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29-31절).

결국 "나로 멸하지 못하게할 한 사람"을 찾지 못하여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목할 것은 '의인'이라는 것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여기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인이란 무너진 성을 새로 쌓고 그 무너지고 뚫린 구멍을 자기 몸으로 막아 하느님의 진노를 그 몸으로 대신할 자로 보았습니다. 바로 이런 자를 하느님이 찾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진노 못하게 해주는 자", "내가 분을 품지 못하도록 뚫어진 구멍을 가로 막으면서 '안 됩니다' 하는 사람을" 나는 지금까지 찾고 있지만 그런 사람이 없어서 결국 나는 진노할 수밖에 없다는 놀라운 사상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을 표현하여 "하느님의 진노를 자기의 몸으로 가로막은 자", "하느님의 매를 자기의 등으로 맞은 자", "하느님이 주는 저주를 자기 몸으로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무너진 성을 몸으로 막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돌이킨 자라고 주장했으며, 이 신앙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너진 성을 쌓거나 뚫어진 구멍을 내 스스로 막으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체념 속에 주저 앉아서 불평이나 일삼는다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계보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신약에 와서 바울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내 사람됨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보아서 민족을 살려달라고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숨김없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를 표현한 대로 티끌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는 개인이란 참으로 무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렇게 체념 속에만 빠져 있으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은 그리스도 한 사람을 찾아서 이 땅 이 역사를 확실히 구원한다고 믿고 출발한 신앙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역학 위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기상도에 의해서 약해지거나 강해지거나 희망과 절망을 느낀다면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사람, 뚫어진 성을 자기 몸으로 가로막아 죽은 그 십자가의 신앙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의로운 이라 믿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절망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몸'이라 하고, 우리를 그의 '지체'라 했습니다. 지체는 반드시 몸이라는 전체가 하는 일에 따르는 법입니다. 그리스도가 정말 이 성의 뚫린 구멍을 몸으로 가로막은 자라면 우리는 그의 지체로서 역시 그 몸이 있는 곳에 있기 마련입니다. 의인을 믿는 사람은 지체가 그 몸의 일부가 되듯이 스스로 의인의 길을 가게 마련입니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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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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