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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1. 누미노제

루돌프 오토의 『거룩한 것』(Das Heilige)이라는 책이 1917년에 나왔는데 1936년에 25판을 거듭하고 1958년까지 30판이 됐다. 17-36년 사이와 36-58년 사이의 판매부수를 비교하면 독자의 한계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거룩한 것"에 대한 관심의 도를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을 낼 때는 계몽주의의 여파로 이성, 합리주의가 판을 칠 때이다. 그때는 종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것' 따위는 결국 미개(무지)한 눈으로 본 데서 온 것이고, 종교의 핵심은 윤리적(이성적)인 교훈이라는 결론에 주저앉았을 때이다. 물론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바이스(J.Weiss)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는 1892년에 첫 판을 냈으나 당시에는 그것이 어떤 전환점이 되지 못했고, 1906년에 낸 슈바이처(A.Schwitzer)의 『예수생애 연구사』가 위의 책을 높이 평가할 뿐 아니라 바로 그 입장을 자기 것으로 했을 때 비로소 그 때까지의 예수 이해의 일방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 윤리적 관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 도래이며, 그것은 인간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전혀 이질적이며 초월적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당시의 개념적 구분으로 하면 윤리가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 바로 예수의 설교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 후 10년만에 내놓은 오토의 주장은 세계 또는 인간이해 전반에 걸쳐 새로운 제동의 역할을 했다. 즉 인간 세계에는 윤리적이요, 이성적인 것도 있으나 그것으로 포괄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단순히 추리가 아니라 그런 현실이 인간의 경험 속에 들어오며, 그것은 인간에게 절대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누미노제(Numinose)라고 부른다. 누미노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주 놀라운 사건으로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경이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힘으로서 때로 공포의 대상 또는 진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또 하나는 경탄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황홀경에 넣고 모든 사물을 꿰뚫어 새롭게 보게 하므로 생의 의미를 전적으로 전환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방향 전환을 전개한다. 이런 것을 한마디로 하면 '거룩한 것'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당할 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런 경지를 경험한 자의 행위에 아무런 것도 간섭할 수 없으며, 그것은 설명없이 단순히 행동으로 현실화될 뿐이다. 그가 말하는 경지는 바로 '지성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는 계속 이른바 세속화에로 줄달음쳐 왔다. 이성위주의 사고는 이른바 거룩한 것의 자리를 박탈해 갔으며, 마침내 성속(聖俗)의 구별 따위를 완전히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른바 '세속화 신학'이라는 이름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주장에도 분명히 참 것이 있으며 정당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속을 구별하므로 '성'이란 이름 밑에 공간과 시간을 일반적인 것에 밀착한 채 일정한 종교 계층의 특권을 보장하며 그들의 허구성마저 뒷받침함으로 횡포의 근거를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는 데 필요했으며, 또 하나는 하느님의 주권의 영역을 일정한 데만 제한한다는 것은 역사와 세계의 주권자로서의 하느님을 상대화할 뿐 아니라 바로 이른바 '속세'는 내버려두는 신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당성을 가지면서도 세속신학의 위험성은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져버리므로 성서에서 엄연한 현실로 전제하는 '지성소'적 요소를 평화화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낡은 세계관에 기초한 윤리의 붕괴는 당연히 있어야 할 측면이다. 이에 따라서 '양심'도 그 거점이 흔들리게 됐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이 시대의 문제점이다. 가치관도 그것에 따른 윤리도 그것을 뒷받침하던 권위와 함께 없어지는 마당에 판을 칠 수 있는 것은 실리주의 밖에 없다. 오늘의 정치, 경제 세계에 이미 윤리적 고려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며 이러한 대세 속에서 개인들에게도 의리니 신의니 하는 것도 점점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이 마당에 판을 칠 수 있는 것은 공리와 실리를 위한 거짓일 뿐이며, 그런 바탕 위에 세워진 건설이란 결국 모래 위에 세운 집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마당에서 사명이니 정의니 신앙양심이니 하는 것도 결국 상대적으로 받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룩한 것', '지성소'를 잃어가는 것이 오늘의 비극이다. 그러면 다시 성속의 담을 쌓아야 할까? 또는 오토와 더불어 '현실'과 평행하는 누미노제를 입증함으로써 이원적인 세계상을 재구축할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거룩한 것' 또는 누미노제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

모세는 강한 자가 약한 자(자기 민족)를 박해하는 것을 더 보아 넘길 수 없어 의분의 주먹을 들었던 과거에서 후퇴하여 이른바 '범인'의 생활에 들어가서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고 일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어 소일했다. 사람들 중에는 거기서 그가 웅지를 품고 준비에 몰두 했으며 때를 기다려 기도와 명상에 잠겼으리라고 설명하나 본문에는 그런 서술은 전혀 없다.

그는 여느 때처럼 양을 몰고 풀을 찾아 이동하다가 성산(聖山)으로 이름난 호렙산 부근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불붙은 나무를 보았다. 그것은 광야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불은 붙는데 나무는 타지 않는다. 이 누미노제! 순간 그는 '거룩함' 즉 일상성을 깨고 들어오는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한다. 본문은 "모세야!" 부르고 "여기는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호렙 산이라는 공간 자체가 '성소'라는 유다전통적 관념과 관련이 있으리라. 그러나 모세에게서 보면 그것은 일상적 매너리즘에 빠졌던 그가 소스라쳐서 잊었던 자기 사명, 잃었던 자기성찰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다'는 원뜻은 구별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일상적 공간이나 시간에서 구별된 영역이란 뜻이다. 따라서 '거룩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평상적인 일상의 자명성이 연장돼서는 안 되는 자리요, 순간이다. 모세에게는 호렙산이라는 공간 자체가 성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명령을 들었기 때문에 그 곳은 거룩하다. 그것은 동시에 그가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할 장소 또는 순간이 바로 지성소이다.

이로써 지성소란 후기 유다교에서 성전 안에 안치한 제단이라는 일정한 공간은 '거룩한 것'의 상징에 불과하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미 공간적 지성소를 거부한 뚜렷한 선언이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지성소가 그리심산이냐 예루살렘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여인아, 내 말을 믿으라. 이 산 위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요한 4, 21. 23). 절대자를 예배하는 곳이 지성소이다. 이것은 지성소는 이미 공간적 장소는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지성소는 영과 진리가 현존하는 곳과 때이며, 그것은 일상성과 구별되는 장이다.

우리는 일상성이 완전 정지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당한다. 가령 전쟁이나 죽음같은 사건은 일상적 궤도를 뒤엎는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길과 계획을 차단해 버린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순간이다. 또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 경우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을 할 때 일상성을 깰 수밖에 없다. 거기에 지성소의 소재가 있다. 또 우리에게 "모든 것은 다 양보해도 이것만은 절대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지성소이다. 그것은 양심일 수도 있고, 부처님일 수도 있고, 하느님일 수도 있다. 이같은 지성소를 갖고 맹세하는 이 앞에서는 그 이유를 따질 수 없다. 단지 그의 것을 그대로 믿어주느냐, 아니냐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같은 지성소도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이기심과 밖으로부터의 폭력적 강압에서 온다. 이기심은 스스로 내세운 지성소를 방패로 삼게 한다. 그러므로 위선자가 된다. 가령 유다인들에게 '코르반'이란 관례가 있다. 일정한 것을 구별해서 하느님께 바쳤다는 맹세이다. 그런데 저들은 때때로 이 코르반의 맹세를 이기적 동기에서 했다. 윤리적 차원에서 볼 때 그 어떤 것을 제공해야 할 경우에 코르반이라고 하므로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제 의무를 도피할 방패로 삼는 경우가 그것이다. 예수는 이런 것을 맹렬하게 비판했다(마르 8, 8 이하). 그와 동시에 예수는 어떤 것(thing)과 지성소를 일치시키는 맹세를 엄금했다(마태 6, 33 이하). 까닭은 그로써 전생(全生)으로 결정하고 지켜야 할 성실성에서 도피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는 이기적 계산에서 지성소가 썩어버리는 위험을 경계했다. 또 하나는 폭력적 강압으로 지성소가 유린당하는 경우이다. 이 강압적 힘 앞에 양심도 버려야 하고 신앙적 고백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이런 위험성을 보고 있었기에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수난과 죽음을 각오하라고 한 것이며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다. '지성소'를 애당초에 갖지 않은 자에게 수난이 올 까닭이 없는 것이다. 수난과 죽음을 각오하라는 것은 '지성소'를 절대로 사수하라는 뜻과 같다. 까닭은 그것 없이는 인격도 공동체도 다 붕괴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런 위기에 처해 있다. 그것은 지성소를 내세운 자들 자신이 그것을 이기적 욕심의 도구로 악용하거나 유린하는 무리가 많이 있으며 동시에 폭력적 강압에서 유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지성소' 부재의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양심을 걸고 신앙을 걸고 맹세한다고 해도 믿지 않으므로 마침내 불신시대에로 접어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위기신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성소'의 뜻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성소'를 내세워 자기 욕심이나 거짓을 은폐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지성소가 없다. 그런데 외적 강압에 의해 '지성소'를 무너뜨리는 경우에는 '지성소'를 결정한 그것에 어떤 허점이 있는 증거이다. 단순한 누미노제는 지성소일 수 없다. 까닭은 그것은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주로 '감정'이라는 유동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누미노제는 비록 언어적으로 표현될 수 없어도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전생애, 전인격의 방향을 결정히는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3. 누미노제와 소명

모세가 비일상성인 경험(Numinose) 앞에서 그 발의 신을 벗었다. 만약 그것 뿐이었다면 누미노제적 경험을 한 장소에 제단을 쌓고 떠나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곧 지나가 버리는 것이 될 뿐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 누미노제적 경험과 더불어 중대한 명령을 받는다. 누미노제적 경험에서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그에게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憂苦)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구하여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 3, 7-10).

모세는 누미노제적 황홀경, 또는 공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것은 결단과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는 이 지성소에서 애굽의 압제 밑에 고통받고 억눌려 부르짖고 압박받는 이스라엘을 해방하기 위해 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다. 바로 그런 명령을 받은 장소이기에 그것이 참 지성소이다. 그는 그가 경험한 신비함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게 아니라 수난당하는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모세가 선 '거룩한 땅'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뜻, 역사적 상황의 인식, 그리고 모세의 결단이 하나가 되어 사건이 일어나게 한 것이 바로 그 장소이다.

우리는 이것을 모세의 입장에서 추리해 볼 수 있다. 일상성에서 체념의 삶을 보내던 그는 호렙 산 아래서 누미노제적 경험과 더불어 그가 버리고 떠난 이스라엘의 고통의 소리를 들었다.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잊게 한 잠에서 깨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는 하느님의 지상 명령으로 받은 것이다. 이것이 참 지성소를 가진 자의 현실이다. 본문은 계속해서 모세가 그런 일을 감당하기에 무력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도피하려는 변(辯)과 하느님의 흔들 수 없는 명령과 권고의 과정을 서술한다. 이것은 그가 받은 명령(누미노제적 경험)이 자기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것이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일상성을 깨야하는 현실에서 결단을 앞두고 고민하는 그의 모습의 반영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것은, 참 '지성소'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신음하는 눌린 자의 소리에 응하는 결단의 장일 때 성립된다는 뜻도 된다. 이 순간은 분명히 두려운 순간이며 되도록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것은 비겁과 용기, 체념과 신앙, 이기심과 사랑, 일상성과 비일상성이 맞서서 불꽃을 튕기는 장이다. 하느님의 뜻, 부르짖는 눌린 자의 소리,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결단에서 형성된 '지성소'를 지닌 자의 길은 어떤 힘으로도 파괴하거나 유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기자들이 출애굽기를 이스라엘 민족형성의 출발로 삼고 그것의 시발점으로 모세의 누미노제적 경험과 결단의 장을 크게 부각시킨 것은 바로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사의 주춧돌이 그 '지성소'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4. 맺는 말

우리는 민중의 부르짖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세와 같은 인물이나 집단의 출두를 갈망한다. 모세는 누미노제적 경험에서 하느님의 절대명령과 동시에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를 들으므로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서 민중의 요청을, 민중의 신음소리에서 하느님의 명령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크게 경계해야 할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모세와 같은 인물 또는 집단이 못 되는 이유일 수 있다. 일부에서는 누미노제적 황홀경에 취해서 그저 공포 아니면 경탄 속에 잠몰되어서 세상을 외면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있어서 "신음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을 귀가 없으므로 우리 민족적 과업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운동이 있는 반면에 사회참여, 현실참여, 사회정의 등에 예민한 이들이 있어 가난한 자들과 눌린 자의 편이 되기 위해 수난을 당하고 있으나 많은 경우 그런 그룹들에게는 누미노제적 두려움, 즉 지성소를 잃었거나 경시하는 폐단이 있다. 그러므로 그 방법에 있어서나 사고에 있어서 일반 정치적 운동과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산기도'같은 것을 하고 어떤 누미노제적 경험을 한 것을 기점으로 일약 대예언자처럼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가 경험한 환상—나무에 불이 붙으나 타지 않는 것을 본 것 같은—에 집착하여 그것을 기점으로 맴돌며 그러므로 청중을 자기가 경험했다는 황홀경에로 유도할 뿐 역사의 한복판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이나 행위는 이웃 뿐만이 아니라 세계와 외면하는 비역사의 혼미 속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이러한 누미노제는 글자 그대로 환상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서 누미노제적 '지성소'를 갖지 않은 '사회 참여자'들 중에는 비록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을 내세우나 그것이 '지성소'는 아니고 하나의 표면상의 간판일 뿐 의지하는 것은 자기들의 지혜와 정의감과 전략만일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대로 높이 평가할 면이 있다. 그것은 그 행위가 정말 이기욕에서 출발하지 않고 눌린 자의 신음소리에 호응하여 자기를 투신함으로 예수의 뜻을 행동으로 구현(부분적으로 나마)하는 경우와, 그로 인해서 수난을 당하는 경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운동은 '지성소'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 전형적인 예로 모세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정의감에 불타고 전략과 용기를 갖추었다고 해도 그에게 그리스도가 참된 '지성소'가 아니면 그는 이른바 정치계의 일익을 담당하는 결과 밖에 못된다. 그런 한 물리적 힘의 우열에 의해서 약해도 지고 강해도 질 뿐이며 거기서 지면 진 것으로 끝나버린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의 힘이나 능력을 믿고 정의감만으로 일어선 것이 아니다. 아니 도리어 그는 그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나는 못 해요"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마침내 그것을 자기 사명으로 결단하고 결연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걱정마라!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때문이다. 사실상 이 하느님이 함께 해서 그는 그 민족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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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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