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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다
출애 3, 13-15
 
1. 신을 생각하는 두 갈래

국민학교에 방금 들어간 아이가 느닷없이 그의 부모에게 "하느님이 어디 있어?"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부모는 별 생각없이 "네 속에"라고 했더니 그 아이는 "배 안에 있어? 그러면 숨막혀 어떻게 살아?"라는 이유있는 반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주 로케트를 타고 가봐도 하느님은 없더라"고 한 첫 우주인 가가린의 말로 자신의 신념을 시위하던 흐루시초프의 말과 대동소이합니다.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이는 엄밀히 말해서 이미 하느님 안에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성이 반드시 초자연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명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나 사랑 또는 생명같은 것도 "어디 있어?"라고 묻는다면, 이미 그는 그런 것을 느끼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리 설명해도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나 마음 따위는 '어디'라는 공간을 차지한 실체가 아닙니다. 하느님도 그 존재성이 어떤 물체가 있듯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해보는 '하느님이 있었으면!' 하는 소원도 엄밀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존재양식과 같은 어떤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리 우리는 신은 사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 내가 만지고 느낄 수 있게 존재하는 대상으로는 원치 않습니다. 사랑도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은 본능애(本能愛),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물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벌레나 개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사랑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요렇게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그런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만족될까? 참 사랑의 희구는 내가 상상하거나 욕구하는 것을 채워주는 그런 것으로 만족될까? 참 사랑의 희구는 내 가능성 밖에 적어도 내게는 무한과 같은, 상상도 못하던 그런 사건같은 것이 아닐까? 하물며 하느님을 희구하는 심정이 '이렇게 있어 주었으면' 하는 소원을 성취시키는 대상에 그친다면 이미 하느님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구체적인 것을 원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어떤 관념이나 인품으로 표상하다가 마침내 그것으로 하느님을 대치해 버립니다. 그렇기에 어떤 '주의'로 표상되는 것이나 한 영웅 또는 한 왕을 신으로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안일주의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안일주의가 거부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다가 한 우상의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성서는 그런 하느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2. 압도하는 이

성서에서 한 시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압도해 오는 신을 향해 절규합니다.

그를 피할 데가 없다.
하늘에 오를까? 거기도 그가 계시구나!
지옥에 내려가 숨을까? 거기도 그가 계시는구나!
새벽 날개를 달고 수평선 저 끝으로 도피할까?
거기도 벌써 앞질러와 계시구나!
오! 어두움아! 나를 덮쳐 숨겨주려마!
아! 어두움도 그의 앞에는 낮과 같구나!(시편139, 6.9.12)

이는 어떤 사변과 추구에서 얻어지는 하느님이 아니라(비희랍적) 이미 압도당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면서 "나를 압도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고 저항과도 같은 호소를 합니다.

3. 모세의 대결

미디안 광야에서 일개 필부로서 목동으로 늙어가는 모세에게 느닷없이 압도해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압도하는 의지로서 "너는 애굽에 가라. 거기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렇게 압도하는 신은 어디에 존재하나? 그는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타는 떨기가 바로 신의 자리인가 해서 기웃거렀습니다. 떨기는 불붙고 있었으나 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현장 경험은 종교들의 온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를 증거할 근거를 못가진 이 시인은 당신의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에 그 소리의 주인은 불교의 공안(公案)과 같은 "나는 나다!" 라고 할 뿐입니다. "바람은 바람이다", "물은 물이다"와 같은 대답 이상이 아닙니다.

이에 당황한 모세는 모세는 거듭거듭 그 뜻을 피하려고 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내 따위가 어떻게", "당신 설명을 어떻게", "내 말을 안 믿을 것입니다", "내 말이 능치 않습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내가 추구하는 대상이기 전에 피하려고 해도 날 놓아주지 않고 나를 압도하는 의지이다. 그런 현실은 지금 어디서 경험할까?

4. 죄의식

성서에 따르면 그것은 죄의식일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안티고네(Antigone)를 바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안티고네는 본의 아니게 친모자(親母子) 사이에 태어난 '불륜'의 열매입니다. 그 아비는 그 사실을 알고 죄의식에 더 이상 고뇌할 수 없어서 왕좌를 버리고 제 눈을 빼버리고 정처없는 길을 떠납니다. 이로써 그 죄의식에서 탈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유도 모른 채 우수의 분위기 속에서 시들던 안티고네는 소경이 된 그 아비가 지팡이 한쪽을 잡고 다른 쪽을 자기가 잡고 압장섭니다. 아무리 피해도 죄의식은 언제나 자기 몇 발자욱 앞에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고뇌의 자세입니다.

바리사이계 유다교 라삐들은 죄를 신과 인간 사이를 단절하는 독소로 보았습니다. 그들과 괘를 같이 하던 바울로는 죄의식을 신에게 이르게 한 선구자(paidagogos)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신을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죄의식이 있는 한 하느님의 현존과의 관련 속에 있습니다. 예수의 비유 중에 기도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 바리사이인은 의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자신의 경건생활을 열거하면서 신 앞에서 기도 아닌 기도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는 감히 머리도 못들고 '나는 죄인입니다' 한마디뿐 눈물만 흘렀습니다. 예수는 그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었다고 선언했으나 두 사람의 측면에서 보면 둘에게는 모두 죄의식과 신인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5. 불안

죄의식은 율법적인 조문 앞에서 뚜렷해지는 경우인 데 반해 그런 것이 뚜렷하지 않을 때는 실존적 불안으로 나타납니다. 현대인에게는 '죄'라는 말이 생소해져가고 있으며 또 실감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죄의식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죄를 옛 종교적인 개념에서 풀이하면 현대인은 이해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모순, 자기 안의 분열, 이웃과의 관계의 갈등 등으로 바꾸어 해석하면 엄연한 현실입니다. 죄라는 것을 거부하는 현대인은 그 대신 불안의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불안은 근대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불안은 무슨 뚜렷한 원인이 의식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단히 원인 모르는 이 불안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불안은 결국은 존재론적인 불안입니다.

실존론자들이 이같은 불안을 가장 철저히 체감한 자들이며 그 이유를 찾아 몸부림쳤지만 바울에게서도 전형적인 이러한 불안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행하면 그것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행하는 것입니다(로마 7.19-20).

이 불안이 현대인의 죄의 의식입니다.

이 불안을 도피하기 위해서 사람은 망각의 세계로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습니다.

내 불안 앞에 엄숙히 마주서라. 그러면 거기서 나를 압도하고 있는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6. 역사 안의 하느님

성서의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역사 안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입니다. 성서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역사 밖의 신을 말하는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신의 활동 모습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는 독백같은 구절이 있으나 신의 영역을 서술하거나 사변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묵시문학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으나 그것도 이 역사를 투영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행동으로 전제한 글들이나 내용은 한결같이 역사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세계관으로 보면 삼층구조로 되어 있으나 무대는 바로 이 역사뿐입니다. 비록 창세기 대로 세계 창조자임이 전제되나 그의 무대는 인간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희랍신화의 상상력에 따르지는 못하나 상상력이 풍부한 히브리 사람들인데도 놀랍게도 신의 영역으로 상상력을 확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사'에 있어서도 홍익인간(弘益人間)이나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에 관심하지 않고 눌린 자나 가난한 자와 같은 기층민중에 그 관심을 모읍니다. 그런 성격은 성서가 출애굽으로 시작되는 데서 볼 수 있는데(구약은 출애굽으로 전체의 맥을 삼고 있습니다. 출애굽이 창세기 뒤에 놓인 것은 후기 편집의 결과입니다) 그 탈출의 역사에 앞장 선 모세의 이야기부터 진하게 표출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떨기나무에서 불이 붙었으나 그 나무는 타지 않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신비한 경험입니다. 그는 놀랐으나 그것에서 하느님을 경험한 게 아닙니다. 그것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느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모세야!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의 우고를 알고… 저들을 구하려 한다. 저들을 인도해 내라!(출애 3.7b-10)

역사 안에서 만남은 신비적 자기도취에서 그를 만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적 종교 현상들은 역사의 신을 만나기 위한 징조는 될 수 있어도 그 자리가 신의 자체의 현장은 아니다. 신을 만나는 현장은 역사 현실을 고통하는 데 있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하나의 필부로 늙어갑니다. 그는 홀로 짐승들과 함께 매일 매일을 광야에서 보냅니다. 만일 그가 그런 삶에서 만족하고 있었다면 일상성이라는 표피에 꽉 차여 헤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일상성을 깨는 신비한(비상한) 환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 자체를 만나는 장(이 아니고 이집트에서 박해와 착취당하는 자기 민족의 운명을 의식하고 있었으나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이 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떨기에 불꽃을 보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떨기나무는 불붙지 않았습니다. 이 신기함에 망연해 있을 때 "모세야!"라고 연거퍼 부르는 신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신탁이 내려집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게 하겠다(출애 3, 7-10).

이 신탁은 신비한 피안의 소리가 아닙니다. 아니! 바로 지금 역사 안에 일어나는 구체적 사건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뇌리에서 불투명한 상태의 것이 투명해지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다음에 신과 모세와의 대화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모세는 당황합니다. 그리고 그 신탁과 현실의 괴리를 생각합니다. 따라서

모세 :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겠습니까?
신 :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은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모세 :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조상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신 : 나는 나다.

7. 나는 나다

모세의 질문은 "당신은 무엇이요(What)?"도 아니고 "당신은 어디 있소?"도 아닙니다. "지금 나를 압도하는 당신은 누구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만 해도 구약에는 다신주의(多神主義)가 전제되어 있으며 그런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족속들간의 싸움은 곧 신들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종족 간의 싸움은 곧 저들이 섬기는 신들의 능력을 겨루는 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압도하는 신은 동시에 이집트의 바알 신과 결전해야 합니다.

이미 신탁을 줄 때 그 신은 "나는 너희 조상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창세 3, 6)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름은 아닙니다. 신의 역사적 이력입니다. 이런 표현은 이스라엘의 민(民)은 알아듣는다고 해도 신(들)과의 대결에서는 내세울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런 뜻에서 모세는 누구라고 하라느냐고 다시 묻는데 그 대답이 "나는 나다"입니다. ehye asar ehye(I am that I am. Ich bin, der Ich bin).

이것은 특이한 대답이며 모세의 묻는 동기와는 거리가 있는 대답입니다. 나 또는 우리 편의 신이라는 생각에 익숙한 당시에 있어서 신의 보편성이 언제나 문제가 되었는데 구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만을 위하는 신, 이스라엘을 선택한 신, 세계의 신, 세계창조의 신 등이 엇갈려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J자료는 그 신을 야훼라고 했고 E자료는 엘로힘(Elohim)이라고 부르는데, J보다 후기에 E편집에서 야훼와 너희 조상의 하느님 …"을 병용하므로(출애 3, 15) 그 일치성을 인정하게 했습니다.

신과 이름 또는 위격을 연결시키는데 희랍적 사고에 익숙해진 서구의 해석은 위의 수수께기같은 대답도 그런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ehjah는 yahweh에서 온 것이고 야훼라는 이름에 익숙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그렇게 들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화가 구체화의 길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한계성을 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화한 신에게는 이름이 필요하고 선악을 구별하고 이 편 혹은 저 편에 서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는 상대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동양에서 신의 수준이 낮으면 낮을수록 이름이 뚜렷합니다. 동시에 그 신의 영역이 제한 됩니다. 희랍과 같은 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과 결부된 신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 영역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무'(無, 虛)와 동일합니다. 이름이 없으니 무신주의라는 규정은 서구 정통의 시각이지 현실이 아닙니다. 그런 뜻에서 힌두교나 불교 등이 종교가 아니라는 생각은 피상적인 속단입니다.

『도덕경』 첫 줄에 이름이 붙으면 참 이름이 아니라(名可名 非常名)고 합니다. 이름을 붙이면 벌써 제한적인 것이 됩니다. 이름이 실재를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서구에서 persona(라틴), prospon(희랍) 등을 동원시킴으로 일으킨 서구신학의 비극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persona나 prospon을 본체니 본질 등으로 번역하는 우시아(ουσια)나 본체(hypostas)와 구별한 데서 저들의 함정이 생겼습니다. "나는 나"이지 더 분해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본래의 신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역사 현실에 참여하는 마당에 끝끝내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모호한 이런 대답을 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나다"는 존재영역에 비끌어 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 안에 있으면서 역사에 매이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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