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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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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향(脫鄕)의 기수
― 모세 2
출애 3, 7-10
 
1. 히브리

탈향의 도상으로 가던 아브라함의 집단이 마침내 무서운 적을 만납니다.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대군주 제국인 이집트의 권력 체제입니다. 창세기는 야곱이 가뭄으로 인한 기근을 모면하기 위해 그의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가는 이야기, 그가 가장 사랑하던 어린 아들 요셉이 여러 역경을 거쳐 이집트의 재상으로 등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극진한 후대를 받으면서 정착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성서는 저들을 '히브리'라 부릅니다.

이집트는 적어도 주전 3000년경에 군주국으로 역사에 등장하여 계속 중동의 강대국으로 세력을 떨쳐왔는데 주전 1570-1200년 사이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파라오'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것으로 적어도 30대의 왕들을 그렇게 불러 왔습니다. 이것은 이집트라는 제국을 신격화한 개념이지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제국이 지탱해 나가는 원동력은 노예들의 노동입니다. 그들의 판도 안에 각처의 'pr'을 어간으로 하는(가령 '하피루', '아피루') 이름의 계층들에 대해 언급된 자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이집트의 강제노동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집단적으로 봉기했다가 강력한 이집트국에 의해 토벌되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집트 안에 있는 히브리들은 한 종족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회 안의 계층을 표시하는 것입니다(우리는 '히브리'라는 칭호가 초기에 나타났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탈향의 삶에서 자율적인 노동을 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나가는 일군이 이제 이 제국의 권력 아래 눌려서 강제로 노동을 착취 당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성서에는 이들이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할 굴과 람세스 성 건설에 필요한 벽돌을 찍어내는 데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자율적 노동은 자기 세계를 창조해 나가지만 강제된 노동은 인간을 노예화합니다. 그런 상태는 바로 비인간화의 상태입니다. 성서에는 저들이 수적으로 번성하는 것이 두려워서 사내아이들은 태어나는 대로 없애버리는 정책을 썼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저들이 봉기를 꾀한 사실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머문 저들의 생활에 대해 더 이상 상상할 수 있는 단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는 모세라는 인물이 크게 부각됩니다. 모세의 행태에서 우리는 이 히브리들의 현장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모세와 히브리

여기서 모세는 결코 한 개인이 아니라 히브리라는 집단을 표상하는 이름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젊은 혈기로 히브리들이 이집트 병정에 의해서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 병정을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그 후 자기네끼리 다투는 히브리들을 책망한 것이 단서가 되어 이집트 병사를 죽인 것이 탄로나고 그는 결국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히브리들이 그와 같은 질곡 속에서도 단합되지 못했던 것을 노출합니다. 또 저들이 모세의 지휘로 탈이집트하는 도상에서 역경을 만났을 때 모세를 원망하며 이집트에서 고기국과 떡을 배불리 먹었던 때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있는데(출애 16, 3) 이것은 저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최소한의 양식이 공급되는 조건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안주해 버리는 때도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말하자면 정체된 체념의 삶입니다. 이것은 탈이집트하여 미디안에 가서 가정을 이루고 양을 치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정착하여 살려고 했던 모세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젖은 모세는 그 여느 때와 같이 호렙산에서 양을 돌보고 있다가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기에 호기심에 가까이 가서 보니 불이 붙는데 그 나무는 타지 않고 있었습니다.

루돌프 오토는 인간 세계에는 윤리적 혹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의 만남이 분명히 있다고 하고 그것을 '누미노제'라 불렀는데 그의 정의대로 하면 모세는 누미노제를 경험한 것입니다. 모든 누미노제도 단순히 공포나 진노의 대상을 경험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경탄의 대상으로서 그것과 만나는 자를 황홀하게 하고 일상성을 넘어서 사물을 새롭게 하며 삶의 의미를 전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주는 경우로 나누는데, 이렇게 나누어 본다면 모세는 후자의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른바 거룩함(das Heilige)의 경험입니다. 놀라움에 찬 그는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어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거룩한 땅, 그 곳은 지성소입니다. 그 곳은 일상성을 지속시키는 장소가 아니라 일상성을 끊고 절대적인 것을 받아 들여야 할 경지입니다. 사람은 일상성의 노예입니다. 사람들은 삶을 희로애락 등으로 표현하는데, 삶은 이런 것들이 거미줄처럼 되어 자신을 얽어 내는 것이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재미에 노예가 됩니다.

모세의 삶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누미노제의 경험이 일상성을 끊고 평소의 생활과는 구별되는 절대 불가침의 경지에로 그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신비한 경험에 그대로 몰입되어 버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변화산상에서 신비한 경험을 한 예수의 제자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영원히 머물러 있고자 하는 소원이 거부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장소, 비상한 순간, 절대 경지에 선 그에게 그 다음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 온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출애 3, 7-10).

누미노제의 경험은 초역사적인 경험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은 사적인 특수경험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누미노제의 경험을 한 모세는 역사의 현장에로 내려왔습니다. 아니 역사 현장에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모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억제된 인식이 폭발하는 화산처럼 표출된 생입니다. 그는 히브리들의 처참한 삶을 잊기 위해 일상생활의 리듬 속에 자기를 내맡겨 비상한 것과 자기를 차단시켜 왔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삶은 체념의 삶이었습니다. 체념은 바로 탈향의 삶의 무덤이며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집트의 현장에 살고 있는 히브리들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미노제의 경험을 한 모세, 그것으로 풀려 나은 모세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비상한 사태에 대한 지상의 소명감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즉시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결단 앞에 거대한 권력의 조직 체제인 대제국의 위력이 보였으며 그 앞에 초라하고 힘없는 자신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주저합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나, 아무런 지위도 갖지 못한 이름없는 나, 그러한 소명감을 가지게 된 동기에 대한 분명한 확신도 없는 나, 이렇게 제한된 자신에게 눈을 돌림으로써 그는 비상한 체험을 부정하고 다시 일상성에 주저앉으려고 합니다. 이것도 이집트에서 신음하는 히브리들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런 질곡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소원은 섬광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거기에서의 탈출이 하느님의 지상명령이라는 의식도 있고 야훼의 전능한 팔에 의해 기적으로 구출될 것이라는 누미노제적인 의식도 가끔 가져 보지만 자신들을 돌아볼 때 너무도 초라하고 힘이 없으며 단결력조차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체념의 삶, 그런 것이 그대로 모세에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대 모세는 일상성에서 탈출하여 히브리를 구출하는 길을 결행합니다. 역사의식이 곧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곧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에게는 히브리들의 참상이 현실로 부각되었고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자기의 사명의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이 행동으로 옮겨지게 한 것은 누미노제적 경험입니다. 누미노제적 경험과 역사현장에서 자신이 해야 할 과제가 일치될 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뜻이 계시로 나타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런데 그 계시는 역사현장에 대해 눈을 뜨게 하고 그 안에서의 주체적 사명을 인식하게 합니다. 그럴 때 그것은 하느님의 참 뜻입니다. 모세의 내적으로 억제된 고민과 하느님의 명령을 매개한 것이 바로 신비경험입니다. 그 하느님의 명령은 언제나 인간을 역사적 결단 앞에 세웁니다. 그렇지 않을 때 사람은 신비의 세계 즉 비역사의 세계에 몰입되어 버리고 맙니다. 적어도 모세는 이런 지상명령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누미노제적인 경험과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인간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사실이 동시적으로 인식될 때 출애굽의 사건이 가능했습니다.

3. 약속의 땅을 향해

이 해방전승에는 두 가지 요소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유월절과 무교절 전승입니다. 유월절은 제의적 유물이고, 무교절은 농경민의 축제입니다. 유월절은 양치는 유목민의 제사행위입니다. 목동은 언제나 이동하면서 양을 쳤기 때문에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한 초원에서 다른 초원으로 옮길 때마다 조우하는 그 지역의 다른 부족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또 이동하는 지역이 멀며 그 도상에는 광야가 있었으므로 야수의 습격을 당하고 강도들의 기습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액운을 떼기 위한 특별제사를 지냅니다. 그것이 해가 지면 가장 흠없는 양을 바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잡은 양의 피를 받아서 초막 문설주등에 바릅니다. 이것은 부적과 같은 것으로 악령을 몰아내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남은 양고기를 모두 처분하고 길을 떠납니다. 또 하나의 축제인 무교절은 농부들이 일년 농사를 짓고 추수한 것에서 처음난 것으로 순수한 것을 바치기 위해 아무것도 넣지 않고 떡을 만들어 이레동안 신에게 감사하는 일종의 감사절 축제입니다. 이 두 행사는 원래 서로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 두 행사는 원시인들에게 공통된 것으로 자연 또는 상황에 대한 조건 반사적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를 자연에 국한시키면 타부나 토템적 종교행위로 되고 자연을 사변의 대상으로 승화시키면 우주론이 되어 철학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에게는 이러한 일반적 전승이 역사의식과 결부됨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목민의 행사인 유월절이 히브리 해방의 사건에 결부됨으로써 전혀 다른 성격을 나타냅니다. 저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저들의 원수인 이집트의 장자들이 심판의 제물이 되어 그런 화를 면하게 되었고, 무사히 탈출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교절 행사는 농경민 즉 정착민의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래 가나안 정착시에 이루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목민적 삶과 농경민적 삶의 양상이 탈향의 역사를 거친 히브리인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반영합니다.

저들에게는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뚜렷한 약속의 땅 즉 향(向)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된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 점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신약의 경우와 다른 점입니다. 가령 바울이 자기의 삶의 자세를 탈-향(脫-向)으로 뚜렷이 나타내는 데는 같으나 어디에서(from), 무엇으로(to)가 추상적으로 서술된 반면 히브리의 탈향에는 토지(땅)가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집트라는 땅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이라는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 탈향의 히브리들에게도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어떤 보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약속으로만은 미흡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편집자는 탈향의 히브리인들의 도상에 계약의 사건을 도입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나이산 계약입니다. 이미 앞 마당에서 아브라함과 야훼의 계약이 개인과의 계약이 아닌 것을 말했지만 여기서는 뚜렷하게 하느님이 해방된 히브리라는 집단과 계약을 합니다. 히브리는 이제부터는 세상에서 취급했던 것과 같은 소외된 종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당당하게 하느님이 자신과 맺은 계약 상대자로써의 주체로 인정한 것이 계약의 사건입니다. 히브리는 새 역사를 창조하는 하느님의 파트너로 승격한 것입니다. 이러한 계약에 의지했기 때문에 비록 탈향의 도상에서 반복하여 좌절하고 일방적으로 하느님과의 계약을 배반하는 일이 있었으나 광야 40년의 온갖 시련에서 좌절하지 않고 민족 형성의 근본을 이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출애굽기와 아브라함 이야기의 유사성을 지적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처럼 서술된 데 대하여 출애굽 이야기는 한 집단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본향과 부모, 가문에서 탈출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군주제국이라는 커다란 권력 집단에서의 탈출입니다. 이집트는 당시의 사실상의 세계의 군주제국입니다. 이 군주제국은 개인 혹은 일부 특권층에 의해서 통치됩니다. 파라오라는 이름은 한 개인인 왕의 이름이 아니고 이 부강한 제국을 지배하는 세력을 신격화한 이름입니다. 부강한 제국이란 결국 보다 많이 가진 집단이라는 말입니다. 판도로서도, 경제적으로서도, 군사력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는 어쩔 수 없이 안정 또는 정착을 최대 목적으로 합니다. 그것은 지금 가진 것 즉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가진 자의 길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착과 안정을 목적으로 하지만 쉽게 그 안정을 파괴시킬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더"라는 욕심 때문입니다. 보다 더 갖기 위해서는 판도를 확대하고 권력을 집중하여 경제적 증가를 노리게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저들은 싸움을 해야 하고 국민을 군대로 강요하거나 아니면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기 마련입니다.

가진 자는 변혁을 싫어합니다. 변혁은 기존적인 것을 파괴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모험을 해도 그 목표는 정착에 있고 정착하기 위해서는 폐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고이면 썩듯이 정착하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구는 소유한 것으로 자신을 보존하려는 것인데 결과적보로는 가진 것에 의해서 노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상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힘없는 자들을 단순한 노동력으로 취급함은 역시 비인간화합니다. 이런 과정은 국가의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이른바 통치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그것에 예속된 대다수의 노동력을 교묘하게 착취하느냐 하는데 목적을 둡니다. 저들은 단순한 폭력으로만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압니다. 폭력만이 사용될 때 마침내 저항 세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항 세력이 되지 않을 만큼 강요하면서 그들을 무마할 수 있는 미끼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피지배자들에게 현재의 삶에 미련을 줌으로 그 미련이 불의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마비시킵니다. 저들에게 향락의 길을 터준다든지 미래의 비전을 보여 준다든지 나아가서 종교 등을 동원하여 그 의식을 피안화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결국 주어진 여건에 그대로 주저앉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정착된 사회를 이룩하지만 바로 정착하는 기간이 길면 내적 부패가 일어나고 만다는 원리 때문에 마침내 그 집단 자체가 망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제국에서 과감히 탈출한 것입니다.

4. '히브리 탈출'과 오늘의 우리 현실

이 사실은 우리가 사는 오늘에도 비록 다른 형태이지만 그대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폭력으로 땅을 넓게 차지하고 강력해진 나라들이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보다 더 갖기 위해서 군사력으로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저들은 그 식민지에서 권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나는 온갖 천연 자원들을 자기 본국에 수송함으로 점점 더 부유해졌습니다. 그러나 현금에는 군사력을 전면에 내세운 식민정책 대신에 보다 교묘한 방법으로 약소민족을 착취하는 이른바 신식민지 정책이 난무합니다.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종속관계가 대표적입니다. 이 경제적 종속관계는 원조라는 형식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원조에서 상호협력투자 등 여러가지 형태로 변모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경제적 종속관계를 굳히는 방법이었으며, 지금 제3세계는 모두 이른바 선진국에 종속되고 말았습니다. 원조의 형식으로 수입된 문명 이기는 편리라는 마력에 감명되게 하였으며, 그것은 소비는 곧 미덕이라는 사회로 급전하게 했고, 이른바 근대화라는 것과 서구화를 혼동하게 함으로 생활양식을 바꾸고 따라서 의식구조에까지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구적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의식에 도달하게 되었기에 원조라는 것이 낚시의 미끼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습니다. 얼마나 오늘의 세계는 물질 문명에서부터 내면의 세계까지 서구에 예속되어 가고 있는가? 이것을 의식했을 때는 벌써 자신이 너무나 서구적인 것에 얽혀 거기서 탈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에 와서는 이른바 우호국이라는 것이 모두 자기 실리를 추구하는 이상 다른 목적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예속의 길로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면 그 전형적인 면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역대의 정부는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강대국에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강대국에 예속된 상태에서 그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국민을 통치합니다. 외채에 의해 분명히 생활 수준이 상승되고 편리해집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외채는 늘어나고 국민의 생활은 결국 빚더미 위에서 편리를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예속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아상실의 길로 줄달음칩니다. 정권을 잡은 자들의 가장 큰 목표는 정권 안정입니다. 이 정권의 정착을 위하여 정권에 위협을 주는 세력은 가차없이 이른바 보안법으로 다스립니다. 무엇이나 새로운 것은 정착하려는 정권에 위협이 됩니다. 그러므로 정권에 연연하면 할수록 보수화의 길로 달립니다. 이런 과정에서 세계는 자꾸 새 시대로 접어드는데, 폐쇄 사회를 고수하려다가는 결국 지배자나 피지배자 모두 부패하고 마침내 망해 버릴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렁에 빠진 상태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정착의 본능은 한국 교회 내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교인은 늘고 교회 재산도 증가함으로 외적으로 보면 강대한 세력인 듯 하나 외적으로 비대해질수록 밖에 대해 자기를 폐쇄하는 보수주의에 빠지며, 이 민족, 역사, 사회와의 관계가 단절된 채 내적으로 병들어 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신교를 이른바 개혁교회 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계속적인 탈출, 가진 것에서의 탈출, 정착하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 것인데, 한국 교회는 미래지향적인 새것에 대해서 그렇게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상태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들에게 히브리의 탈이집트 사건은 정면으로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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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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