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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34장
 
1. 상륙 직전의 모세

본문은 모세의 최후를 기록한 것이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산 아래 두고 홀로 모압평지(요르단의 동쪽 평지)에서 느보 산(요르단 건너편에 있는 해발 800m의 제벨네바이 산)에 오르고 또 올라 비스가 산(느보 산 서쪽 봉우리, 지중해 네갭 남방) 꼭대기까지 올랐다. 그의 시야 안에는 서해, 즉 지중해까지 들어왔고, 소알(사해 반쪽) 평지까지 들어왔다. 이제 40년 간을 난관을 무릅쓰고 그 민족을 이끌어 오던 목표의 본향(本鄕)이 그 눈 앞에 들어왔다. 이제 그는 꿈처럼 그리던 그 미래의 땅을 보면서 상륙 직전에 서 있다.

등산의 경험을 회상해 보면 그 장면을 좀더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년에 한신대 대학원생들과 설악산 상봉까지 오른 일이 있었다. 아침 일찌기 떠났는데, 하루 종일 몇 차례로 험한 계곡을 타면서 체념할 뻔 하다가 결국 고지에까지 올랐다. 시야에는 동해안은 물론 이북 땅이 눈에 들어온다. 저 땅! 25년 이상 두절된 저 땅! 그러나 나의 세대는 저 땅을 다시 밟아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저기에 가야 한다. 산상에 올라 이북에 펼쳐진 땅을 보면서 이상한 감회에 젖어 나는 홀로 있었다.

그러나 비스가 산에 오른 모세는 등산객이 아니다. 어떤 지역의 점령을 목적한 부대장처럼 이제 수없이 먼 행군과 전투를 거치고, 이제 적전(敵前) 상륙 직전에 그 지역을 정찰하기 위해 고봉에 올라 망원경을 들고 살피는 격이다. 이제 저기를 넘어 상륙하지 않으면 이 날까지의 모든 수고는 헛것이 된다.

그러나 이 모세의 처지는 좀더 다르다. 그는 저들과 더불어 목적지까지 갈 수 없는 형편이다. 그는 지치고 지친 몸이다. 그는 마치 전투에서 총알을 맞은 지휘관 같다. 그는 간신히 거기까지 부대를 이끌고 왔으나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그는 흐르는 피, 맥이 빠진 몸을 비틀거리면서 저 지평선 너머의 목적지를, 그 부하들이 상륙할 지역을 마지막 확인하기 위해 고지에 오른다. 나는 저기를 갈 수 없다. 그러나 저 부하들은 무사히 저리로 진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마지막으로 그들이 갈 땅을 바라보며 그 지역을 살핀다. 그런 경우 행동은 기도와 똑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 기도 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적의 추격에서 부하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저들은 앞서서 뛰게 하고 자신은 폭탄을 안고 뒤에 홀로 쳐져 있는 어떤 부대장을 연상하게 한다.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들 뛰어라! 나는 여기서 적을 막겠다!"고 하는…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내게는 부모들에 대한 추억 몇 가지가 떠오른다. 중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나게 하는 어머니, 그리고 독일로 떠날 때 친구들의 손에 부축되다시피 내가 탄 비행기에 손을 흔들던 어머니 그리고 625때 8월 12일 마침내 변장하고 남으로 떠날 때 우리를 환송하면서 하염없이 울던 아버지! "가라! 나야 뭐 다 늙은 게 여기서 죽으면 어떠냐! 너희만 무사히 간다면!" 하면서….

2. 불의한 역사를 책임지고

그런데 이 모세의 입장은 또 더 심각한 내용을 지닌다. 신명기 32장 48절 이하는 그 심각성을 전한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말한다.

느보 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 차지하게 할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앞서 간 겨레에게로 돌아간 것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씬 광야 카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명 32, 48-52).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로 가지 못함은 늙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명기 34장 7절에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려는 듯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한다. 그러면 왜 모세는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않나? 그것은 이스라엘민이 도상에서 지은 죄값을 책임지고 인질로 남기로 결심한 것이다. 과거를 청산함으로 그의 후손들은 새 땅에서 새 출발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그 제물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내용을 성서는 전혀 뒤집어서 서술한다. 즉, 하느님이 그를 끌고 그 산꼭대기까지 이끌어 갔고, 하느님이 그를 거기에 인질로 머물게 한 것이라고 한다(신명 34, 4). 그러므로 그의 위대성을 말해서 영웅화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이끌리는 종으로 묘사한 것이다. 자식 또는 후진들을 향한 부모들아! 선배들아! 이 모세를 보라! 이것은 이 시대의 일선에 선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스승이 되며, 또 정치인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3. 후진(자식)에게 무엇을?

우리는 자식들이나 후진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줄까? 오늘의 지도층, 정치인들은 이 민족을 어떻게 이끌어갈까?

부모로서 자식을 기르고 이끈다는 것은 필생의 일이다. 어린 것을 국민학교, 중학교,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나 수고는 자식들은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을 때까지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도 입학 문제로 너무 신경쓰는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 했다가 언제나 핀잔을 받는다.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입고 먹는 데 걱정 없게 하고, 남보다 편한 처지를 만들어 주어 제 능력껏 뻗어 나가게 하는 것을 최대의 소원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분명히 능력이 있는데 부모가 그 뒷받침을 못해서 그 능력이 제한될 때 부모는 마음에 큰 가책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의 부모들은 '재산을 남겨주자!', '보다 좋은 학교의 졸업장을 얻어주자!' 하는 것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이게 옳은 것인가?

자식을 밥먹는 데 부족함 없는 기술자가 되게 하면 된다. 이런 부모의 눈은 올바른 눈일까? 또는 자식들에게 자기가 하고 있는 유업을 물려주자 또는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킬 수 있는 후계자로 기르자 하는 정도의 생각에 머무는 것이 옳은가? 또는 실컷 제 머리에서 생각된 선한 것, 좋은 것이라는 틀 안에서 자식들 또는 후진들을 강요하는 게 옳은가? 더우기 자식이나 후진을 생각할 때 그들의 덕을 볼 것을 전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옳은가?

만일 모세를 한 부모라고 한다면 어떤가? 그를 옳은 지도자로 본다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첫째, 그는 임기응변적으로 자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서 이끌어갈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그 목표이다. 비록 40년간의 유랑의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 자식들은 탈출한 데로 되돌아 가자고 하는가 하면 아무 데나 편리한 데 정착하려고 반항했다. 그러나 모세는 줄곧 그들을 궁극적 목표를 향해 가도록 채찍질했다.

우리에게, 우리의 자식에게 이같은 궁극적인 방향에의 제시가 있는가?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그런 것이 없는 한 결국 형편대로 편리한 데 주저앉게 되고 만다.

부모가 일정한 연령에 이르고 자식이 사회에 진출하면 그 때에는 완전히 주도권을 자식에게 넘겨주고 '우린 늙은이들이요!' 하고 뒤로 물러앉고 자식의 눈치만 본다. 까닭은 벌써 눈에 보이는 목표에 이르렀고, 더 이상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안에서 자식을 이끄는 한계를 보는 것은 바로 그 이상의 목표가 내게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세는 너와 나를 포함한 목표가 저기 저 지평선 넘어 있음을 보고 있었기에 죽는 순간까지도 그 지도력을 잃지 않는다. 그 지도력은 힘도, 권력도, 재력도 아니다. 이 궁극적 목표에의 신념이다. 자식이나 후진은 이것을 원치 않는가? 아니, 원한다.

그들이 부모에게 염증을 느끼는 것은 웅대한 꿈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것이 없고 그저 부모가 장만한 세계, 부모가 자신이 가진 것에 집착해서 자식들을 거기에 비끌어 매려고 하기 때문에 반항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자신이 이미 도달한 어떤 데로 그 후손들을 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는 너도 나도 아직 이르지 못한 저 지평선 너머의 궁극의 세계이다.

둘째, 그러나 모세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환상이거나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데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약속된 목표며 구체적인 것이다. 그것은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필연의 세계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너와 내가 함께 가진 약속된 땅으로 가자!'

이 약속된 땅은 지평 너머에 있다. 그 곳은 어쩌면 도달할 수 없는 데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삶을 언제나 싱싱하게 하는 유일한 결정이다. 이것이 없을 때 통합된 자기발견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을 연결시키는 줄이 썩은 새끼줄 같은 것이 될 뿐이다. 참 교육은 '너를 기른다'가 아니라 '너와 나의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4. 후진을 홀로 가게 하는 분계선

셋째, 모세는 '내가 너와 함께 갈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이다'를 분명히 알았다. 그는 죽을 것을 의식했을 때 저들에게 유언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이렇게 세간살이 잘하라', '있는 것을 지키라'가 아니라 미래에의 전략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운동장을 달리는 릴레이 선수처럼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달리다가 배턴을 그 자식에게 넘겨주어 계속 달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생에 못하면 다음 세대에 하리!'라는 전체적인 목표가 있는가? 만일 우리에게 이런 것이 있다면 그게 얼마나 힘찬 것이며, 그 연대 관계도 얼마나 두터울 것인가? '내 못한 일을 네가 해라'가 아니라 '내 향하는 길을 네가 계속 달리라'는 것! 이게 얼마나 장엄하고 보람있는 행진인가!

넷째, 그것과 병행해서 마지막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달릴 길에 너를 뒤에서 비끌어 맨 것을 내가 내 생명을 내대서 막아준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죽을 때 빚을 남기고 죽는다면 그것은 참 슬픈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원수를 남겨두고 죽는다면 그 역시 비참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잘못한 그 전철을 밟지 않게 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가정이나 민족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어떤 장애물이 있다. 이것은 만성병처럼 유전된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 추한 '까라마조프'의 씨들이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있다. 우리에게 전승되는 어떤 병이 있나? 궁극적 목표를 향해 달리는데 무엇이 저를 저해할까? 나는 마지막 생명을 내대면서 "이것을 그 뒤에서 단절하고야 말리라!"라는 선배가 되리라. 이광수의 『원효대사』 중에 출가(出家)하는 자식이 집에 대한 미련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 아들이 떠나자 그 아버지가 집에 불을 놓는 장면이 있다. 이러한 각오가 바로 모세의 최후장면이다.

부모나 선배는 후진의 다음의 길을 위해 '이것으로 내 할 일이 끝났다'가 아니라, 저 지평선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에 올라서 그들의 방향을 살피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러한 고지에 올라서 그 아래를 굽어보고 궁극적인 방향을 잃지 않는 일이다.

5. 지도자의 길

이것은 물론 이른바 지도자, 특히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한국의 지도자란 실컷 내세우는 것이 있다면. 배곯지 않게 먹게 한다는 것이고 현실적으로는 산은 고사하고 평지에서도 아니고 지하가 아니면 수중에 내려가서 서로의 이해관계에 얽혀서 제 이익 제자리 다툼이나 계속한다. 더우기 이 민족의 미래보다는 자기들의 지위를 걱정해서 그들보다 앞서려는 민족의 길을 오히려 다리를 비끌어 매서라도 가로막고, '내가 못 갈 경우는 너희는 모두 죽여서라도 가로 막겠다'는 자세이기 때문에 이 민족의 미래는 흐리다.

'너희는 가라! 너희를 이끌고 갈 후계는 여기 있다. 나는 뒤에 남아서 추격하는 적을 내 몸으로 막으마!'

이러한 지도자가 있다면 우리의 상황은 급전할 것이다. 아직 평화적 정권교체를 한 번도 못해 봤다는 것은 모세를 가진 이스라엘과 얼마나 역행하는 역사를 꾸리고 있는 것인지 단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저 지평선 너머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자식, 부모, 선배, 후배할 것 없이 이 약속된 땅으로 함께 전진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 신앙은 반드시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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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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