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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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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왜곡된 역사에 책임지는 이 하나 없는 세대에
신명 32, 48-52
 
1. 역사는 결단으로 점철된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들은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헤맸다 그동안 저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그럴 때마다 배반도 하고 분열도 일으키고 다시 이집트로 되돌아가겠다는 반동도 삼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을 이끄는 모세는 그때마다 책망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위협도 하면서 저들을 무마했다. 그렇지만 때때로 그의 힘도 한계에 이르러 야훼에게 매달리면서 힘을 구했고, 때로는 저들의 요구가 부당한 것을 알면서도 저들의 뜻을 따를 때도 있었으며, 야훼께 부당한 간구로 저들의 뜻을 관철시킨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광야 40년 동안 히브리들의 역사는 고난을 당하는 다른 민족사에서도 볼 수 있는 그대로다. 광야 40년에 히브리들의 삶은 희망 속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전진한 면도 있지만, 목적을 잊어버리고 좌절 또는 방종하는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기도 하다. 성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히브리와의 약속대로 저들을 목적지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인도했다고 증언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히브리는 한 운명공동체로 성장했으며, 한 민족을 형성할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마침내 저들은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저들은 그 경계선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요르단 강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요르단 강! 요르단 강 이쪽과 저쪽은 이 공동체에 지리적인 차안과 피안만이 아니라 민족적인 미래를 형성하는 분계선이기도 한 것이다. 이 분계선은 히브리에게는 제2의 탈출이 시작되는 분계점이며, 제2의 마당에서 목적지인 제3의 마당으로 옮겨지는 분계선이기도 하다.

역사는 물과 같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결단으로 점철되면서 형성된다. 결단은 탈(脫)과 향(向)을 결합시켜 역사적 동력이 되게 하는 연결고리다. 한 민족의 역사가 산 역사로 발전되는 것은 언제나 결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결단해야 할 때 날 세운 칼로 자르듯이 과거를 단절하면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며, 그 새 출발의 터 위에서 민족사는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 민족사는 무의미의 연속이 되거나 소멸되고 만다. 히브리는 이제 결단해야 될 중요한 지점에 섰다.

2. 분계선 앞에 선 모세

우리는 목적지 앞에 선 모세의 행태에서 너무도 성서적이면서, 한 민족이 가야 할 길을 너무도 분명히 보여 주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게 된다. 신명기 32장 48-52절에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바로 같은 날,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예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맥을 타고 느보 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 차지하게할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그 산에서 죽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앞서간 겨레에게로 돌아갔듯이 너 또한 앞서간 겨레에게로 돌아가거라. 너는 씬 광야에 있는 카데스의 므리바 샘 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둘러선 가운데 나를 배신하였다. 내가 하느님인 것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저 땅을 건너다 볼 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로 같은 날"이라는 것은 32장 47절에서 말씀이 전해진 바로 그날임을 말한다. 그날 모세는 하느님에게 이끌리어 느보 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목적지인 가나안을 바라보고 거기서 그대로 죽었다. 그런데 성서는 그것이 자연사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34장에서 이 책의 마지막 편집자의 손에 의해 약간 다른 표현으로 반복된다. 즉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 40년을 배회한 그 시대의 막을 내림과 동시에 그도 그 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러 형태로 전승되었다. 모세가 느보 산 산맥 서쪽 봉우리인 비스가 산에 묻혔다는 전설(32, 50), 그러나 모세의 무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34, 6), 모세가 사람의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갈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야훼께 목적지까지 가도록 사정했으나 하느님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3, 23-26)는 등 많은 전설이 유포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단편적으로 여기저기에 나오는 전설이 가리키는 공통점은 낡은 세대와 새 세대의 철저한 교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역사이해의 철저화다. 역사는 물이 흐르듯 흐르는 것이 아니고 단속적이어야 한다. 한 막이 올랐다가 그 막이 내려짐으로써 새로운 막이 오르듯, 한 마당에서 다른 마당으로 옮겨질 때마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역사는 진전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특수한 것은 한 막에서 다음 막 또는 한 마당에서 다음 마당으로 옮겨질 때마다 한 사건에 계속 이어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막이 내려지고 새 마당이 끝날 때 그 무대에 섰던 인물들이 모두 함께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연극에서 말하면 주역이다. 일반적으로 한 연극은 막을 바꾸면서도 주역은 계속 상존함으로 그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런데 주역인 모세 자신마저도 한 막이 내려짐과 더불어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만이 아니다. 탈이집트 세대는 하나도 남김없이 요르단 강 이 편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 연극이 다음 막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낡은 무대가 끝나고 새로운 연극의 무대가 펼쳐지는 셈이다. 이것은 과거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이다. 철저한 단절이 없으면 분명한 연속이 없다는 역사관이다. 전승은 모세의 사라짐이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의 눈은 아직 흐리지 아니하였고 그의 기력은 떨어지지 않았다는(신명 34, 7) 것을 첨가한다. 왜 이래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연상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그 민족의 운명이 판가름나는 한복판에서 정신적인 지주로서 그 민족의 갈 길을 지휘했다. 그중의 일부는 고난 속에서 좌절하려는 지배계층이나 자기 민족을 향해 희망을 설교하는 일도 있었으나, 생명을 내놓으면서도 자기 민족이 멸망할 것, 아니 멸망해야 한다는 것을 거듭 예고한 이들이 있다. 저들을 독일어로 Unheilspropheten(不救援 예언자)라 부른다. 가령 예레미야가 그런 인물이다. 저들에게는 분명한 신념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은 구원의 뜻과 심판을 뚜렷이 구분함으로써 역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구원의 뜻은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고 심판은 그 과정마다 결행되는 청산이다. 우리는 성서에 실락원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노아홍수 이야기,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같은 전사적(前史的)인 전설에서부터 이스라엘 역사는 흥망성쇠 과정에서 일어나는 철저한 단절과 새 약속들로 점철된 것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사라져야 할 것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자신이 속한 민족이라 하여도 이 사실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목표가 구원이라면 심판이 없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새 것은 낡은 것이 소멸될 때만 생겨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신학적 역사관은 모세의 구체적 행동을 통해 역사화된다.

모세는 파란만장한 역경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자기의 집단 히브리를 목적지 바로 앞에까지 이끌어 왔다. 그것은 중대한 순간이었다. 출애굽한 히브리의 다음의 길을 위해서 홀로 호렙 산에 올라갔던 일이 있는 모세, 그는 이제 이 히브리들을 두고 홀로 요르단 강 동쪽 모압 평지에서 그 강을 끼고 뻗어 있는 느보 산 산맥 서쪽 봉우리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랐다. 거기서 그는 이제 진입할 약속의 땅을 바라 보았다. 그의 시야에는 서해, 즉 지중해까지 그리고 사해 남쪽 소알 평지까지 들어왔다. 얼마나 많은 악전고투 끝에 도달한 땅인가! 이제 눈앞에 보이는 요르단 강만 건너면 젖과 꿀이 흐르는가나안 땅이다. 그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본 경험이 있다. 내 체력으로서는 악전고투의 노력으로 거기에 올랐다. 도중에 몇 차례씩 오르는 것을 포기하려다가 겨우 정상에 올랐다. 대청봉에 올랐을 때 동해안은 물론, 이북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우리의 땅, 나의 본향,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가보고 싶은 땅, 저기 나의 친척들이 살고, 나의 동포들이 산다. 오늘의 삶은 바로 통일을 향한 여정에 불과하다. 분단 40년 역사는 바로 히브리들의 광야 40년과 같다. 그런데 저 앞에 분계선만 넘으면 통일이 온다. 우리에게 통일은 다름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현실이다. 그런데 그 무엇이 나를 막는지 나는 분계선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면서도 꼼짝도 못하고 있다. 이 때에 경험한 절망감!

이 때 나는 비스가 산 봉우리에 선 모세를 연상했다. 물론 전민족을 이끌고 40년의 진군 끝에 비스가 산 봉우리에 오른 모세와 한 등산객의 감정을 대비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그러나 어쩌면 내 생애에는 넘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숙명적인 생각 때문에 모세를 연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내 상념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설악산은 한 때는 외세가 그은 38선에 의해 이북에 속했던 땅이다. 한국전쟁 때 악착같은 전투 끝에 남한이 차지한 지역이다. 이런 생각은 한 부대를 이끌고 전선에 나선 어떤 부대장을 연상하게 했다. 한 전위부대를 지휘하던 부대장이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38선을 목전에 두고 중상을 입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지휘하에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휘봉을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그러면서 그는 한 많은 민족사에서 저 분단선을 넘을 때만 참 해방이 온다고 역설하면서 최후까지 힘을 내서 목적지까지 가도록 독려하고 자신은 상한 몸으로 기관총을 메고 이 고지에 올랐다. 꿈에도 그리던 이북 땅! 민족통일! 바로 그 땅. 그 현실이 그의 시야에 펼쳐진다. 그러나 그는 거기로 갈 수 없다. 이 마지막 순간 그는 38선을 넘을 자기 부대를 지원사격하기로 결심하고 거기서 최후까지 할 일을 다하고 숨진다. 물론 이것은 남북의 대치를 전제한 상상이니, 애초에 잘못된 것이긴하지만.

신명기는 모세가 그 최후에 자신의 부족을 모아 놓고 출애굽 이래 야훼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 야훼가 준 계명을 지킬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그리고 자신은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는 야훼의 말을 전하고 히브리 전체에게 용기를 낼 것을 강조한 다음, 자기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결정하여 부족들 앞에 내세우고 그를 독려한다.

힘을 내라. 용기를 가져라. 야훼께서 이 백성의 선조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이 백성을 이끌고 들어갈 사람은 바로 너다. 저 땅을 유산으로 차지하게 해줄 사람은 너다. 야훼께서 몸소 앞장을 서 주시고 너의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너를 포기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도 겁내지도 말라(신명 31, 7-8).

여기서 그는 자신은 이미 노쇠해서 전선에 설 수 없다고 말하나, 위에서 언급한 말을 이에 결부시키면 여호수아에게 그 지휘권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그의 자연적 연령이나 건강 때문이 아니다. 위의 문맥에서도 그는 야훼가 허락하지 않으니까 요르단 강을 건널 수 없다는 말을 앞세움으로써 자신의 노쇠가 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3. 악한 역사의 대속자

이와 관련해서 보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다른 측면이 있다. 모세는 왜 요르단 강을 건너서는 안 됐는가? 왜 그는 목적지인 마지막 무대에 설 수 없었는가? 성서는 그것을 죄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죄인가? 이에 대해 성서에는 두 가지 다른 대답이 있다. 하나는 모세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고(신명 32, 48-52; 민수 20, 11-12;17, 12-1 4), 다른 하나는 히브리 전체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신명 1, 37; 3, 23-29; 4, 21). 이 둘은 원래 자료상 다른 계열이다. 전자는 이른바 사제자료에 속하고 후자는 야위스트 자료에 속한다. 그런데 어느 것이 옳은 해답인가? 이 둘의 차이는 단수와 복수의 차이가 아닌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모세 개인의 죄란 무엇인가? 씬 광야의 사건에서 모세가 범죄한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그런데 모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극히 모호하다. 씬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은 출애굽기 17장 1절 이하에 서술되어 있다. 이스라엘 회중이 씬 광야를 떠나 야훼의 지시대로 전진했는데 로비딤이라는 지역에 이르러 물이 없어 목마른 이 히브리들이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할 작정이냐"고 대들었다. 모세에 대한 일종의 봉기인 셈이다. 모세는 저들의 부당한 공격을 책망하는 일면 야훼에게 부르짖으면서 저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지 않으면 자신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고 호소했다. 이에 야훼는 모세에게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로 호렙 산의 바위를 쳐서 물을 내어 저들에게 공급하라고 하였다. 야훼의 지시대로 따르자 바위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 저들의 반란은 해소되었다. 이 이야기의 내용에서는 모세의 잘못을 찾아낼 길이 없다.

이 이야기는 민수기에도 전승되는데(민수 20, 1-11) 그 과정을 비교적 더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내용상 출애굽기의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를 잇는 말 즉 "너희는(복수로 된 것은 아론을 포함한 것임) 나를 믿지 못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없는 죄라고 하는데, 이 구절은 위의 이야기와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답은 이른바 사제 집단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첨가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모세 개인에게 집중하는 이런 해석에 반해, 모세가 문책당한 것은 실상 모세 개인의 죄가 아니라 히브리라는 집단의 죄를 책임진 것이라는 생각이 성서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해답이다. 성서는 도대체 개인의 역사가 아니고 집단의 역사다. 아담이 개인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집단의 대표였듯이 모세 역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대표다 그런데 대표라는 말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처럼 주객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관계다. 그 점에서 성서의 모든 인물이 그렇듯이 모세도 헬라적 의미의 영웅이 아니다.

한 사람의 고통을 한 집단 전체의 고통으로 보며 그 전체의 고통이 한 사람의 고통으로 응결된다는 생각은, 그 한 집단을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능적 집단으로 보지 않고 생사를 같이해야 하는 숙명적인 공동체로 볼 때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이 이른바 '수난의 종'이라는 사상으로 제2 이사야서에서 뚜렷이 부각되고 마침내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에 절대적인 의미를 창출한다. 그런데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것은 죄라는 개념이다. 십계명에서 주목할 것은 한 개인이 지은 죄라 하더라도 그 죄의 책임을 그 개인에 국한하지 않고 연대적으로 물어 벌하리라고 하는 것이다.(출애 20, 5; 신명 5, 9) 그것은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가 후대의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이런 사상을 교리적으로는 수용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런 사고를 거부한다. 까닭은 서구인들에게 개인(individium) 또는 인격(persona)이라는 사고가 지나치게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틴 노트는 '남 대신 벌받는다'는 이 사상에 대해서, 그렇게 되면 의로운 개인이 하느님에게 부당하게 징벌받게 된다는 문제를 미처 깨닫지 못한 미성숙한 발상이라고 한다.

성서에도 십계명의 약속과는 달리 사람은 자신의 책임만 지게 된다는 언명이 있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들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속담을 경계하면서, "사람의 목숨은 다 나(하느님)에게 달렸다. 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에제18, 1-2)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면 개인주의의 근거가 될 만해 보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그것은 개인주의를 조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역사, 죄의 역사에 휘말리지 않고 그것을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죄와 벌을 개인에게 적용시킬 때에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라 쉽게 납득하나, 집단의 죄(잘못)를 어떤 소수나 개인이 책임(벌)진다는 사실은 얼른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서구 정신의 개인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죄와 벌을 개인에게 국한시키는 경우는 쉽게 받아 들여지나, 집단의 죄를 어느 개인이나 어떤 소수가 책임(벌)을 진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현대인은 성서가 말하는 죄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속죄 또는 대속자라는 말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이런 사건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죄는 결코 종교적인 개념에 국한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의 수난도, 그것이 개인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보는 경우에도 그 개인이 지은 죄는 엄밀한 의미에서 혼자의 죄 때문이 아니다. 어떤 죄를 범한 책임을 그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다. 아니 그 사회가 그를 그렇게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은 측면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고 할 때, 그 도둑질의 책임을 그 개인에게 국한하여 묻는 것이 윤리 또는 법에서 말하는 원칙이나. 그것으로 그 실상이 다 설명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즉 그로 하여금 도둑질할 수밖에 없도록 한 책임은 여전히 남는다. 이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역사에서 법률적이건 윤리적이건 또는 종교적이건 일정한 행위를 죄로 규정한 것은 누구며 그 규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일반적으로 법이나 윤리는 관습을 바탕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자명적인 것으로 거의 자연법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자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종교도 한몫 해왔다. 어떤 종교도 기존의 법이나 윤리를 보장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법처럼 보이는 그 관습에는 실은 오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후천적 사고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강한 자의 주장, 지배자의 논리, 그들이 지배하기 편리한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설득한 결과가 관습으로 고정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규정된 죄란 대부분이 잘못된 역사에 따라 형성된 체제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죄를 심판하는 자는 바로 지배층이다. 구조적인 죄는 바로 이와 같은 제도를 만들고 권력으로 자기의 기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또는 기득권을 남용하여 피지배자의 인권이나 재산을 박탈한 그런 죄다. 이것을 크게 말하면 역사를 잘못되게 한 죄다. 성서는 바로 역사를 잘못되게 한 죄를 심판하는 하느님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다는 것은 바로 옳은 역사의 길을 방해했다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죄가 역사를 오염시키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한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전되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것은 결코 한 개인에게가 아니라, 그 세대 그 체제에 있다. 비록 어떤 개인 또는 한 소수가 강제로 역사를 왜곡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고 해도 그것을 방지하지 못한 책임이 그 세대 전체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죄의 책임을 묻는 데 새로운 시각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그릇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죄를 청산해야 한다. 낡은 것에 대한 청산 없이 새출발은 불가능하다. 잘못된 데 대한 책임을 척결하지 않고서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없다. 가령 민(民)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면 숙청의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이같은 숙청 없이는 낡은 것으로 쉽게 되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일부만 수술하듯 제거하면 과거의 범죄는 청산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유야 어떻든 간에 전 세대의 책임을 떠맡은 제물들이다. 다른 한편 역사가 일부 특권층에 의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때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봉기하는 세력은 소수다.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자들도 극히 소수며 저들은 절대 다수의 뜻을 등에 지고 앞장서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만이 희생된다. 이 희생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 희생은 어느 쪽에서 누가 일으켰든지 잘못된 것(죄)을 책임지는 대속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렇게 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대속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가령 전태일이 어린 한 노동자로서 부당한 착취에 저항하다가 저항의 마지막 수단으로 분신자살을 하였다. 이 행위는 가깝게 보면 자기 권익을 위한 투쟁이며, 동시에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넓은 시야에서 보면 그는 잘못 돌아가는 역사에 맞섬으로 희생된 제물이다. 그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구조적 죄에 의해서 희생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희생이 지향하는 바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착취하는 역사 마당의 막을 내리자는 데 있다. 그런 마당을 끝맺기 위해서 그 마당의 막을 내림과 동시에 자신도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그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결코 모든 노동자들이 그의 뒤를 따라 그렇게 죽어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희생으로 그런 시대를 끝마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막을 내리지 않으니까 계속 제2, 제3의 전태일이 나오는 것이다.

모세가 새 마당, 궁극적 목적지를 앞에 두고 죽은 것은 그 개인의 죄 때문이라고도 하고, 히브리 집단 전체의 죄 때문이었다고도 하는 이 엇갈림은 결국 낡은 역사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전체에게 묻느냐 아니면 어느 소수 또는 개인에게로 축소시키느냐 하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모세가 진실한 지도자였다면 모든 책임이 자기 개인에게 있다고 고백하고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을 것이며, 히브리가 건전한 집단이었다면 과거의 책임을 자신들 전체에게 돌렸을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모세는 우리 전체의 잘못(죄)을 등에 지고 순직했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모세의 순직과 이스라엘 역사의 단(斷) 앞에서, 책임질 사람 하나 없는 오늘의 우리 현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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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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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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