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의 이야기는 어느 민족 설화에서도 볼 수 있는 한 전설적 거인의 이야기이다. 그의 생애는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거인의 전설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의 치하에 있을 때에 형성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족속에게 점령되었다. 주전 12세기에 이 블레셋 족속은 지중해 연안을 침입해서 주변을 점령하고 한동안 상당한 문화권을 건설했는데, 이스라엘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때 한 부부가 낳은 자식을 이른바 '나실인'으로 바쳤다. '나실인'이란 하느님께 특별한 목적으로 바쳐진 사람이다. 나실인의 임무는 첫째로 절대로 알콜을 입에 대지 않고, 둘째로 시체를 만지지 말 것이며, 셋째로 머리털을 절대로 깍지 않는 일이다. 말하자면 알콜을 입에 대지 않는다함은 금욕생활이며, 시체를 만지지 않는다함은 청결을, 그리고 머리털을 깍지 않는다함은 힘을 오직 하느님께 받는다는 의미에서이다.
삼손이 나실인이 된 것은 그가 블레셋 민족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지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갈팡질팡한다. 한때 그는 블레셋 여인에게 반해서 아내로 맞이하기도 하며, 창기집에도 드나들었다. 또 함부로 힘을 과시해서 사자도 찢어 죽이고, 또 사람도 수십 명, 수천 명씩 죽이고 그 물건을 약탈하며, 어떤 때는 격분해서 여우 300마리를 잡아 꼬리를 서로 매어 거기에 불을 붙여 곡식 밭에 몰아 넣어 곡식단을 태우기도 했다.
대체로 머리털을 깍지 않은 것 외에는 다른 규율도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 하나의 힘인 머리털도 '드릴라'라는 한 이방여인의 유혹에 결국 넘어가서 깍이게 됨으로써 완전히 힘이 박탈되어 블레셋 사람들에게 체포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블레셋인들은 그를 묶고, 그의 눈을 빼고, 옥중에 가두고, 그 안에서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게 했다. 그의 생은 이제 막바지에 왔다.
블레셋인들은 그들의 신 다곤(곡식의 신, 바알 신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축제에서 삼손을 희롱하기 위해 3,000명 가량의 고위층이 모이는 신전에 그를 끌어냈다. 그가 마지막 제물로 바쳐질 무대이다. 그는 그때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느님이여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한다. 왜 그런 기도를 했을까? 그것은 '블레셋 사람,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소서' 하는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최후! 마지막 순간! 생명을 내던지려는 순간! '내게 한번만 힘을 주소서' 한 것은 역시 거인다운 소원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실패의 삶을 마지막 순간에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원은 복수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희랍의 신화 프로메테우스의 최후 이야기가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창조신으로서 인간 편에 섰다. 그래서 그는 제우스 신의 법을 어기고 불을 훔쳐다가 사람에게 줌으로써 코카서스 바위에 동철(銅鐵)로 결박된 채 독수리에게 간을 뜯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아우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는 그 아우에게 상자 하나를 주면서 그것을 꼭 간직해 두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아우는 제우스가 인간을 멸하려는 목적으로 보낸 여인(판도라)에게 꼬임을 당해서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받은 상자를 연다. 그 순간 그 안에서 병, 미움, 도둑질 등 악한 것들이 뛰쳐 나왔다. 그래서 겁이 나서 뚜껑을 도로 닫는다. 그랬더니 상자 안에서 갸날픈 소리가 '나도 내보내 주시오'라고 한다. 너는 무엇이냐고 묻자 '나는 희망입니다'라고 했다. 여기 프로메테우스의 최후의 순간까지의 소원이 드러난다 '희망'을 인간에게 주고자 했던 것이다!
자기는 최후적 저주를 받을 각오로서 최후의 힘을 모아 '인간을 위해서!'를 저버리지 않는다. 삼손은 '복수'가 최후 소원인데, 이는 인간을 위한 것으로 그들이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루가는 예수의 최후를 이렇게 서술한다. 예수는 삼손이나 프로메테우스와 꼭 같이 꼼짝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그도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인간에게 철저한 배신, 하느님도 철저히 침묵하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그대로 지쳤음인지 침묵한다. 그런데 그는 '내가 한 번만 강하게 하소서'라는 삼손의 최후의 소원처럼 그의 온갖 피로, 절망, 원통, 아픔에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서 한 기도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이다(이것은 루가만이 전한 것이다. 참조. 루가 23, 34).
삼손은 한번만 힘을 달라고 해서 그 힘으로 복수를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신이며, 아버지인 제우스와 인간 사이에서 '인간을 위해서' 그 편에 섬으로써 그 아버지를 배신했다. 삼손보다는 높은 차원인 것은 그가 스스로를 위하지 않고 인간을 위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예수는 어느 편이 아니라, 자기 몸을 바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제물로서 최후의 절규를 삼았다.
'이번만 힘을 주소서!'
이 최후적인 순간! 내 전력을 총집중하는, 생명을 내대는 이 순간 이 소원! 그것은 바로 그의 삶이 선 최후 거점이다. 우리의 삶은 궁극적인 소원이 무엇인가에서 결정된다. 우리가 이런 최후적인 순간에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진상이다. 이것은 죽는 순간에만 해당되지 않고 어떤 위기를 당했을 때, 또는 내게 마지막 기회일 때 우리 속에 숨었다가 불쑥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에 마지막으로 그 힘을 총집중해 보지 못하고 죽는다. 이것은 목숨이 끊어질 때의 현상만이 아니라 어떤 불가항력적 사태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해당된다. 그저 약하니까 제 힘을 스스로 포기하고 흐지부지해 버린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런 순간 마지막 힘을 모아 절규한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죽음을 각오한 최후적 절규는 무서운 힘을 가진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최후적 절규는 대체로 발악으로 그친다.
수전노의 최후를 보자.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의 손아귀에 보석을 쥔 채로 죽는다. 결국 무덤에도 가져가지 못할 동전이 무엇이라고 그것을 안 놓치려고 손아귀에 꽉 쥔 채로 죽어간다. 이것은 철저히 자기애로서의 최후이다.
요새 우리 나라에는 일본에 있는 '김희로'의 저항 이래로, 다방을 점령하여 무고한 사람을 인질로 하고 자학하다 죽어버리는 예가 속출한다. 그들은 마지막 힘을 모으기는 했으나 그 힘이 구심점을 잃었기에 무엇을 위해 쓸지를 모른다. 그저 욕구불만을 이렇게 나타내고는 죽는다. 이것은 평소에 그에게 아무런 방향도 없었음을 말한다. 방향이 있다면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했는지 모르나, 사회 전반, 아니 제 운명에 복수하는 행위일 것이다. 우리는 저런 죽음을 보면 오히려 삼손의 최후를 찬양하게 된다. 죽음을 각오했을 바에야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인들을 죽인 것처럼 구체적인 원수라도 하나 제거하고 죽지하는 생각이다.
우리 나라의 어떤 야사(野史)를 보면 복수를 높이 산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서원하고, 죽음을 내대고, 그 원수를 쫓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고, 그것을 다하지 못하고 쓰러질 때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다오' 하는 유언을 남기면 무비판적으로 통쾌하게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 사람이 최후 순간에 어떤 악의도 없이 오직 남겨두고 가는 처자나 애인의 행복을 절규하고 죽는 예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연장이다. 그것은 하나만 생각하고 나머지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그에게 주고 싶은 절규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오늘의 프로메테우스로 자부하는 공산당은 삼손과 프로메테우스를 병행시키고 있다. 나를 억눌렀던 자에게 복수를, 그리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 또는 자기 편에게 넘겨주는 것을 혁명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최후적 순간에 물질적 혹은 정신적 빛을 갚은 사람들도 있다. 원수된 관계의 사람을 불러서 용서를 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원수 관계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의 순간에 나 아닌 다른 두 사람의 원수 관계를 풀어주고, 그것을 위한 제물이 되려는 절규도 있다. 가령 원수된 남편과 아들 또는 갈라진 아들과 며느리 또는 두 자식 아니면 자기 아들과 원수된 그 아들의 친구를 불러 두 손을 잡게 하고 화해할 것을 부탁하며 죽는 어머니와도 같은 절규다. 예수가 마지막 힘을 모아서 한 그 절규는 바로 이 마지막의 경우에 해당된다.
그의 이 '마지막 나를 강하게 하소서', 즉 '내 슬픔, 괴로움, 억울함을,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주소서' 라고 한 결과는 바로 하느님께 향해서 자기를 죽이는 저 인간들을 버리지 말고 화해해 달라는 절규를 위해서였다. 바로 이 최후의 절규는 바로 그 이의 일생 소원이었다. 그것은 그 최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삶의 근거였던 것이 끝내 굴절되지 않고 발로(發露)된 데 불과하다.
우리 사회는 '앙갚음'이 그 동력처럼 되어 있다. 그것은 적게는 질투, 경쟁심 그것이 발로되면 싸움, 살인 그것이 집단화되면 전쟁으로 번진다. 그런데 바로 '복수심', 이것이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나 세계를 망친다. 그것은 사리를 바로 판단하는 지성을 흐리게 하고, 그 마음을 고갈하게 하여 어떤 다른 새것을 받아들일 여유를 주지 않는다.
복수는 반드시 복수를 낳는다. 그런데 그 복수는 언제나 증대된다. 뺨을 맞은 사람이 복수를 모토로 할 때 단순히 뺨을 돌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얼굴 전체를 때려야 시원하다. 이렇게 번져 나가면 결국 점점 험상궂은 악순환으로 번져 간다. "눈은 눈으로, 이에는 이로"의 이 복수심은 연쇄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남는 것은 복수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인류가 복수심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증거는 그 악순환의 사이 사이를 가위로 자르듯 자르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이렇게 가위를 들고 나타나는가? 그것은 복수의 화살을 자기 몸에 받아서 화해의 제물이 된 이들에 의해서다. 리우데자네이루 시 가운데에는 남산과 비슷한 산이 있다. 그 산을 중심으로 이쪽 저쪽의 족속이 원수 관계가 되어 마냥 복수전을 연속했다. 그런데 그 산 위에 예수상이 세워졌다. 그후부터 그 복수전은 종식되었다고 한다. '쏠려면 나를 쏴라. 죽이려면 나를 죽여라! 나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너희에게 다시 맞아 죽으마!' 이 예수상 앞에 종족간의 복수라는 이 악순환의 쇠사슬은 단절되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복수전은 우리 민족의 중추를 상하게 했다. 그러나 4ᆞ19에 와서 이 상처는 아물고, 이 악순환의 쇠사슬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4ᆞ19는 복수심의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포악과 관권과 부정부패를 젊은 몸으로 가로막은 사건이다. 수백 명이 무슨 소리를 하면서 죽었는가? 그것을 대변한 것은 이승만이 항복하는 순간 대학생들이 곧 거리로 나와 교통 질서를 지휘한 것처럼 정상적인 질서를 되찾자는 자세에서 보여 주었다. 저 죽어 쓰러진 젊은이들의 최후의 소원은 올바른 민주 사회 건설에 있었음을 이 간단한 행위가 대변했다. 만일에 저들이 복수전을 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참극이 벌어졌으리라. 그러나 이승만은 유유히 거리를 거닐었다. 이 위대한 죽은 자들의 최후의 소원을 왜 오늘의 집권자들은 외면하고 또 경계하는가?
여기서 있는 십자가는 바로 우리 주님의 최후의 절규의 상징이다.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저들은 제하는 일을 몰라 그렇습니다.'저들에게 맞아 죽으면서 저들을 위해 빌었다. 그랬기에 처음 기독교인들은 복수심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이 십자가는 마지막의 절규로서 너희도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염원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 복수심의 악순환 속에 휘말려든 이 현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아 무엇인지를 말 없이 말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준 주기도에서도 이런 화해의 권고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