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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I
히브 11, 17-19
 
1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아들, 특히 사랑하는 자식을 제물로 바친다는 풍속은 고대문헌에서 보면 중동일대에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동양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고 모든 원시종교에는 거의 어디에나 있는 현상입니다. 한국의 고전에 속하는 『심청전』도 그 서술의 초점은 비록 달리하고 있지만 배경에는 이러한 풍습 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이같은 인습을 그 자체대로 두지 않고,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서술함으로써 신앙의 문제로 바꾸어버립니다. 이것은 다른 원시종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의 진노를 막기 위해서 아이를 잡아 바친다는 원시종교. 즉 공포에 의한 숙명적인 굴종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시금하는 이야기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귀여운 자식을 죽여서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칼을 든 아브라함의 손을 만류하여 아이를 바치는 대신 양을 잡아 바치기를 원하므로써 그의 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외아들을 바친다는 것도 아브라함에게는 절대 명령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죽여서는 안 된다, 그 아이를 살려라' 하는 것이 또한 절대 하느님의 뜻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반대같이 보이는 두 가지 명령 앞에서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은 그 뜻에 다 복종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결과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후자를 옳다고 보고 이를 선택했습니다. 즉 자식을 잡아 바쳐야 한다는 데에 일단 복종을 하면서도 오히려 그 아이를 살리라는 것이 하느님의 참 뜻이라는 신앙에서 그 전에 절대라고 생각하던 그 뜻을 새로운 신앙으로 거부하고 저항해서 그 아이를 살려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절대적으로 내세우는 인습에 대해서 그것은 하느님의 참 뜻이 아니라는 것을 행위로 드러낸 사람이 됩니다. 즉 그는 설명이 안 되며 이유가 없는 살인 행위에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저항한 것입니다. 이 저항은 오늘에서 말하는 이른바 반동(Reaction)이 아니라 새로운 뜻에 대한 복종으로서 낡은 인습에 저항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성서는 믿음의 조상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기자는 이 사실에 대해 중요하고도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22, 1)로 기록되어 있는데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11, 17)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짧은 문장 가운서 두 번이나 이삭은 약속을 받은 자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벌써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살리자는 축복과 사랑과 미래의 하느님이지 과거를 묻는 진노와 징벌, 복수의 신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기에는 없는 말씀이지만 19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는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몇 가지의 중요한 암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였던 본래의 의사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인다는 것은 단지 아비된 것을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인륜대계가 무너지는 행위입니다. 이삭의 등에는 하느님의 약속이 업혀 있었습니다. 죽이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 이삭의 생명입니다. 단순한 하나의 생명, 단순한 아브라함의 혈육이 아닙니다. 역사와 하느님의 경륜이 그 등에 업혀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아이를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을 죽이는 것이며 하느님의 경륜을 저항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꼼짝 못하고 이같은 숙명적인 강요에 굴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 강요에 저항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만일 당신의 인습이라면 인습이 오늘날의 정치적 혹은 법적 강압보다도 더 강한 압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대사회입니다. 그는 여기에 굴복해야만 했습니다. 이 일은 도저히 납득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억울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숙명적인 쇠사슬에 끌려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묵묵히 움직일 뿐입니다. 그는 지금 제 손으로 제 목을 짜르려는 행위를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여기에 그쳤다면 그는 단지 숙명의 노예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숙명적인 강요에 복종하면서도, 비록 강요받은 의지에 의해 제 자식을 죽이려 하면서도 하느님은 이 죽음에서 그를 살릴 것이라는 신앙을 끝끝내 안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보기엔 이루어질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죽은 생명을 다시 살려서 그의 약속을 꼭 이룰 것이라는 신앙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기자의 신앙의 이해가 이 해석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희망하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 짧은 글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오며, 약속한 것을 비록 그들은 받지 못했고 자기가 사는 동안에는 구체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는 표현이 그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조상들은 바로 그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즉 신앙은 희망, 아직 오지 않은 것, 또는 보이지 않는 것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기본적인 입장이 여기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시켜 볼 때 만일 아브라함이 지금의 그 외아들을 약속의 유일한 것, 혹은 절대로 생각했더라면 그의 신앙은 희망이나 보이지 않는 것에 거점을 두지 않고 보이는 것, 잡히는 것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만일, 보이는 것. 현상적인 것에 절대한 것을 직결시키면 그 보이는 것이 없어짐과 동시에 그 신앙도 거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의 구체적이고 보이는 이삭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에도 그는 약속에 대한 그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때 그는 비로소 참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리라는 신앙, 창조의 하느님을 믿음으로 해서 주어진 불굴의 신앙입니다. 죽어도 산다,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져도 이긴다 … 이런 역리적인 신앙이 참 신앙의 힘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특징은 어떤 상황에 이르러서도 체념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체념은 신앙에 허용되지 않습니다. 체념은 신앙의 무덤입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을 단순히 도그마적인 어떤 교리에만 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내가 지금 바라는 바 전반을 포괄한 표현입니다.

2

우리의 삶은 엄밀하게 말하면 시련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시련의 중요한 특징은 언제나 외아들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련이란 외아들에게 위협이 옴을 뜻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외아들은 무엇입니까. 미리 정의를 내리면 이것이 없어지거나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다 우리의 외아들입니다. 개인생활에서 볼 때에 특히 오늘의 이 현실 이 시점에서 가정과 소유권같은 것이 외아들입니다. 남편과 자식과 부인,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의식주의 권리가 외아들입니다. 화가에게는 눈이, 음악가에게는 귀가 외아들입니다. 정치가에게는 당선이, 사업가에게는 사업체가 외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완전히 자기를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을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굉장한 시련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것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신앙과는 벌써 먼 거리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국가적인 면에서 볼 때 가령 과거의 왕국 시대에는 왕이 곧 그 민족 전체의 외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잡히거나 항복을 하면 싸우던 군병들이나 국민들은 그대로 맥이 빠져 체념해 버립니다.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삼권분립과 언론의 자유… 기타의 자유들이 외아들입니다. 전체주의 체제의 나라들에 있어서는 일사불란의 통솔의 질서가 그 외아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국가일수록 자유라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국제적인 면에서는 평화공존이 외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월남전쟁에서의 미군의 폭격이 세계를 벌집같이 들끓게 한 것은 외아들을 죽이는 것 같은 위협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민주국가의 건설을 위해서 28년을 애써왔고 참된 민주국가의 질서와 언론의 자유 등을 궁극적인 외아들로 알고 길러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권분립도 언론의 자유도 바쳐야 하는 그런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자주적으로 제 운명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같은 체제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전제로서 국민투표에 의견을 부쳐 국민의 찬동을 얻어 그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벌써 잘잘못을 운운할 때는 지나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에 반영된 우리 나라의 현재상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국제정세나 정부의 판단으로 되었든 혹은 우리의 민도의 정도로 되었든 간에 우리는 지금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감안해야 할 것은 우리는 민주주의의 외아들을 제단에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겐 더 바랄 것도 내일도 없는 암담한 것이 되지만 이러한 형식론에 꽉 막혀 체념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 아들을 잡아 바치면서도 절대로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산다. 죽은 이를 하느님은 다시 살릴 것이라는 신앙이 그에게 새로운 이삭을 찾게 했습니다. 여기에 제시된 그의 궁극적인 삶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혈육의 이삭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그 아들을 살리려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포기할 수도 있는 시련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믿음으로 그 시련을 극복하고 이삭을 다시 얻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아브라함의 이같은 신앙의 계보에서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0절 마지막에 이 이야기를 장차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질 하나의 비유로서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보이는 것에 국한되고 역사적인 예수 자체에 모든 운명을 건 것이라면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예수에게 참 미래와 영원한 것을 직결시키지 않고 비록 모든 운명을 걸었던 그가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도 역시 그 죽은 자를 살려 일으키는 하느님을 믿는 믿음에서 다시 솟아났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일이며 우리가 이런 믿음의 유산을 가졌다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축복된 일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외적으로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뜻에 그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존속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민족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나 절대로 포기하거나 체념할 수 없습니다. 여건에 대한 관망으로 이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체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외적 상황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하느님은 필요한 것을 우리 민족에게 줄 것으로 믿고 하느님의 손 안에 그 미래가 쥐어져 있음을 믿습니다. 민주주의나 삼권분립 혹은 자유라는 것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든지 간에 우리는 적극전선에 서서 이를 염려하고 처해 있는 곳에서 애를 쓰면서 바른 길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없어지는가 하는 걱정들을 했는데 지금 동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굉장히 흥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랍니다. 요사이 독일에는 한창 소문이 나고 있는 책 한 권이 있는데 그것은 폴란드에서 신학자가 아닌 한 평신도가 쓴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Jesu für Atheist)라는 책입니다. 같은 폴란드에서 나온 것으로 『하느님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책이 또한 널리 읽혀지고 있는데, 그 서문에서 신학자인 몰트만(Moltmann)은 "지금 서구 사회에서는 『하느님은 죽었다』는 책이 나돌고 있는데 폴란드에 내렸더니 '하느님은 죽지 않았다'는 소리가 높아 기이한 현상이라 생각했으며 오히려 무신세계라고 하는 곳에서 예수에 대한 연구, 성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비등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도 보이는 현상에서 결정적인 힘을 얻자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끝내 살아난다는 것을 현실로써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민족에 대해서도 우리의 믿음은 역사적인 새 현실을 틀림없이 창조할 것입니다. 신앙은 체념을 모릅니다. 체념은 신앙의 무덤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아 바치기로 결심하면서도 체념을 몰랐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희망 속에 그리고 보이지 않은 것에 그 뿌리를 박은 확신으로서 우리의 개인생활에서나 국민으로서의 생활에 있어서 불변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럴 때 시련은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과 국가와 민족을 다시 찾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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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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