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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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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비극
—욥
욥기 23, 1-9
 
1. 두 얼굴의 신

나는 구약을 읽어 나가면서 욥기에 부딪혔다. 욥기를 읽으면 너무나 처절한 인간의 고민상이 아로새겨져서 그간 몇 차례간 설교 준비를 하다가는 후회하곤 했다.

얼마 전에 '어떤 말씀이 필요하냐?'고 물으니 두 번 연달아 꼭 같이 좀 위로의 말씀이 듣고 싶다고 했다. 성서에는 확실히 위로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으나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평면적인 위로는 없다. 성서의 위로의 근거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이 그렇게 자명적이 아니다. 그렇기에 확고한 정초(定礎)를 주는 위로도 불가능하다.

성서는 물론 자명적인 밝은 하느님의 면이 있으며, 따라서 단순한 믿음 안에서 명랑하고 씩씩한 모범도 많다. 그러나 반면에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모순에 싸여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오히려 고뇌를 주고 몸부림치게 하는 또다른 하느님의 면이 있다.

성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하느님은 그저 은혜요, 조화요, 모든 좋은 것만 주시는 하느님으로 묘사된 면과 그는 끝끝내 복면을 쓴 이, 모순 자체처럼 나타나서 어떤 거점도 허락하지 않는 면이 있다.

예수가 보여준 신은 전혀 다른 신이라고 할 정도로 새롭다. 그러나 그에게도 양면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백합을 보라. 하느님이 먹여 살린다!"(마태 6, 25-34) 또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막론하고 해와 비를 내리신다!"(마태 5, 45)라는 말씀에 나타난 하느님은 정말 부모의 품처럼 훈훈한 사랑의 하느님을 나타낸다. 예수가 우리에게 하신 설교는 대체로 그러한 하느님이다. 정말 우리를 목자처럼, 아버지처럼 무조건 돌보고 지켜주는 은혜의 하느님이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로 이상하게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미지의 의지, 억지, 모순, 침묵, 가리워진 단절의 하느님으로 나타나 있다. 예수의 수난사가 바로 그렇다. 그의 수난기간의 하느님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던 침묵의 하느님, 따라서 우리 주는 그와 더불어 피나는 고투를 한다. 그의 게쎄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나 십자가 상에서의 비명은 바로 이런 하느님과의 결투와도 같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알 수 없는 암흑 속의 하느님의 모습과 그 앞에서 고투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욥기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욥기를 '그리스도 고난의 서곡'이라고 한다.

2. 행운의 신, 불행의 신

욥은 자기의 지난 한 때의 처지를 회상한다(29장). 그는 암흑 속에서도 빛을 힘입어 힘찼고, 하느님은 친구처럼 그 집과 그 자녀들과 동행했다. 생활은 풍부해서 기름으로 목욕할 수 있었다. 그가 거리로 나가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자리를 깔았고, 소년들은 황공해서 숨고, 앉았던 노인들은 일어나 인사하고, 관리, 귀족들도 말을 하다가 조용하기 위해 입을 막고, 누구든지 그 소리를 듣거나 보면 축복했다. 그 까닭은 그가 가난한 자, 고아들을 돌보고, 소경이 지나면 그를 이끌어주고, 절뚝발이가 오면 업어다 주고, 또 불의한 자들에게 대항하여 억울한 자들을 보호했다. 그랬기에 비록 망하게 된 사람도 그를 위해 기도했고, 외로운 과부도 그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기뻐했고, 그들은 '그'라는 존재를 가뭄의 비처럼 알았다. 그래서 그 자신도 '내 뿌리는 물가로 뻗어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맞도록 이슬에 젖으며, 내 영광은 새로워지고, 내 활은 내 손에 날로 강해지고, 내 자손은 바다의 모래처럼 번창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자였다. 양이 74마리, 약대가 34마리, 소가 500마리, 그 일대의 가장 부자였고 아들이 7명, 딸이 3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소와 나귀를 스바인들이 몽땅 약탈해 갔다. 다음은 양이 전부 천재(天災)로 몰살당했고, 다음은 약대를 갈대아인들에게 전부 약탈당했다. 그리고 다음은 자녀들이 맏아들 집에서 잔치를 즐길 때 태풍이 불어 집이 무너져 전부 죽었다(욥 1,1-19).

그래도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났으니 적신으로 돌아가리라. 주신 자도 하느님이니 취하신 이도 하느님이라. 그러니 하느님을 찬송합니다"(욥 1, 21)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이 깃들었던 그의 몸에 부스럼이 나기 시작해서 그것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차 올랐다. 그러자 그와 평생을 살아온 아내도 그를 저주하고 떠난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저주해도 끝끝내 하느님에 대한 원망도 없고, 오히려 아내를 꾸짖고 다시 침묵한다.

그러나 친구들이 우정으로 찾아와서, 그가 왜 이러한 불행을 겪게 됐느냐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면서,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으니 어서 회개하라"(욥 8, 1-5)고 할 때, 그는 저들의 신관(神觀)에 대항한다. '아니다! 나는 죄 지은 일이 없다!' 그는 그 때까지 하느님을 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친구들의 합리적인 설명이 욥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을 왜곡하는 설득에서 그는 결국 모순! 모순! 어디까지나 모순 자체임을 폭로한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주는 하느님이라면!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이런 곤경에 빠지니 그런 하느님은 나와 상관없다.' 아니, 하느님은 합리적인 사고에서는 알 길이 없다.

납득될 수 있는 하느님의 뜻! 이것에 대해서 욥은 반항한다. '아니! 하느님은 질서정연하지 않다. 따라서 한가한 위로 따위로는 그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의 현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낸다.

3. 고뇌하는 인간

욥은 고통한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자기 소유를 잃었다거나 제가 고통한다는 것 자체에서 넘어선 고통이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 수 없기 때문에 있는 고통이다. 따라서 그의 고통은 즉 신앙의 고통이다.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이다!' 이것은 그의 사는 현실에서 보면 사실이 아니다.

"악인이 그 소행대로 망하는 것을 얼마나 봤나?"(21, 17-18)

"오히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느님을 진노케 하는 자는 평안하지 않나?"(욥 12, 6)

내가 잘못해서 벌을 주는 하느님? 천만에!

"나는 잘못이 없다"(욥 27, 6).

"아니, 나는 의롭다"(욥 13, 15).

그런 논리로 따지면 하느님은 내게 억울하게만한다(욥 19,7 이하).

아니오! "내 일군들이 다 주인이 준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지나는 나그네를 거리에 자게 한 일이 없고,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만이라도 범죄한 일이 없다. 내가 언제 남을 해쳤는가? 누가 나에게 원망하는 소리가 있는가?"(욥 31) 하느님 대답해 주시오!

아니, 하느님은 모순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눈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라"(욥 9.30).

4. 신은 침묵?

비극에는 세 가지 타입이 있다.

첫째, 그 비극의 이유를 내게서 찾아내 아는 경우 둘째, 그 비극이 왜 오는지 모르는 경우, 셋째, 그 비극이 비극인지도 모르는 경우다. 욥은 둘째의 경우에 속한다. 원인을 모르는 비극이다. 그러나 이 비극을 감수하여 그대로 복종할 또 하나의 욥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대로 시들어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수난 속에서도 오직 그의 뜻, 그의 때리는 손을 느끼고 그를 실감하면 된다. 그저 그를 때리는 그가 보고 싶고 그 뜻을 알고 싶다. 그러나 그에게 그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찌하면 하느님을 뵈올 곳을 알 수 있을까? 그러면 내가 그 앞에 나가서 그 앞에 아뢰며…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동쪽으로 가도 주는 거기 없고, 서쪽으로 가도 그는 못 찾겠고, 북으로 가서 찾아도 그는 못뵙고,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거기서 그를 뵈올 수 없구나"(욥 23, 8-9)고 한다.

그를 만나지 못하는 사실이 그의 고통이다. 이 고통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그의 아내의 말처럼 그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를 만나야만 한다.

"하느님은 후일 땅 위에 서실 것이다. 나의 이 피부,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이 육체를 떠나서라도 하느님을 뵈오리라"(욥 19, 25 이하).

5. 그래도 거부할 수 없는 이

그러나 그는 반면에 이 침묵, 이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그 고통에 주저 앉아서 숙명론자처럼 체념하지 않고 싸운다. 그런데 바로 그 고통 속에서 그는 그를 떠나지 못하는 자기를 발견한다. 아니!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잡혀 있음을 느낀다.

"왜 주는 내 침 삼킬 때까지도 나를 놓지 않습니까?"(욥 7, 19)

그는 반항한다.

"내 날이 적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만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욥 16, 20).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십시오"(13, 21).

무엇인가 그를 붙잡고 있다. 합리적인 손이 아니다. 밝음 속에서가 아니다. 아니, 침묵, 어두움. 모순 속에서 느끼는 손!

아니, 그러나 욥은 고통 속에서 "주는 화살이 내 몸에 박히고 하느님의 두려움이 나를 치는구나"(욥 6, 4). "당신은 나를 사자처럼 뒤쫓습니다"(욥 16, 11)고 절규한다.

이 모순률! 이 닿을 듯 닿지 않는 하느님과의 관계, 그것은 결국 "하느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니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도 없고 시비를 가릴 수도 없다. 또 둘 사이에 존재할 자도 없다"(욥 9, 32)는 탄식을 하게 만든다. 여기서 욥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단절 속에서의 마주 서 있음을 절감한다.

그것은 논리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말의 세계가 아니다. 거기에 연속선은 없다. 있다면 단절 속에서 마주설 뿐! 여기서 그는 결국 그래도 "나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있음을 안다"(욥 19, 25 이하)고 고백한다.

6. 결론

사람이 완전히 발가벗겨졌을 때라는 것은, 그것은 단순히 재산이나 내 건강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윤리도 지성도 감성도 내 의지할 것이 못되는 경우에 사람은 발가벗겨지는 것이다.

그 때 나는 하느님과 관계 맺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때 나는 내 교양, 내 감정, 내 사랑을 끝끝내 살릴 것인가? 아니, 그 때 나는 나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그냥 아무것도 없는 단독자가 된 경우에도 내게 남는 것 그게 참 내것이다. 우리는 이 훈련을 해야 한다. 이 훈련은 우리의 생활이 시킨다.

서양 격언에 "재산을 잃은 것은 가장 적게 잃은 것이다.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다. 하느님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왜? 그것은 나를 잃은 것이기에!

우리는 잃은 것에 골몰하다가 마침내 하느님까지 잃는다. 그러나 잃은 것 속에서 욥처럼 참 신앙의 정점에 선다면 그는 전체를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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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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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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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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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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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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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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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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