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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남은 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1

낙원은 왜 깨졌는가? 사유하면 안 되는 것을 사유화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컬어 공(公)이라 한다. 세상의 평화를 누가 깨나? 그것은 침략자들의 손에 의해서다. 땅이나 인간은 하느님에게 직접 속한 공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없다. 그런데 세상에 폭력이 등장해서 공적인 것을 사유화함으로 평화는 깨지고 비극이 일어난다. 고대에 이른바 국가는 땅과 그 위에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어떤 힘센 자가 폭력을 휘둘러 땅을 구획하여 자기의 판도로 선포하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노동과 생명을 온통 자기 것인 양 선포하고 그것을 일컬어 국가라고 부르면서부터 세계에는 분열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났다. 나라나 국가 따위의 개념은 지배자가 만든 것이고, 신하백성국민 따위는 내용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통치체제에 예속된 인간을 말한다. 지배욕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악마적인 것인데 언제나 공적인 권력을 사유화함으로 성취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권력에 저항하여 탈출한 하삐루와 소군주들 밑에서 타율적으로 농노가 된 가나안 땅의 하삐루가 해후하여 군주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함께 인간 위에 인간이 없고 인간 아래 인간이 없는 평등의 사회를 이루었다. 저들이 주변 군주들의 거듭되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평등사회를 200년이나 지속한 데에는 그들의 "야훼만"(mono Yahwism)의 신앙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사회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 주범은 '나라' 사랑을 빙자한 군국주의자들이었다. 어쩌면 저들은 권력으로 이 평등사회를 지배하려는 야심가들인지 모른다. 저들은 계속 군주제를 들고 나와 민중을 현혹시키며, 점차 그 세력을 펴서 압력 단체를 이루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사무엘상 8장에 나온다. 저들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인 사무엘을 굴복시켜 마침내 사울을 왕으로 임명하게 한다. 계속되는 외세 침범으로 사울은 상비군을 두고 전쟁을 지휘하기는 했으나 군주로서 민에 군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사울 시대는 정상적인 군주국가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군주국이 된 것은 다윗에 의해 비롯된 것이며, 그는 이스라엘의 판도를 넓히고 강대국을 만든 반면 이스라엘을 치명적인 방향으로 오도한 인물이다.

다윗 성, 예루살렘, 이런 것들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史實)에 반하여 미화되었는가?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잘못된 다윗과 그 왕조상이 언제 무너질 것인가? 언제 다윗이 평화의 적이며 이스라엘을 패망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며 야훼의 철천지 배반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 이 깨달음 없이는 성서를 제대로 보는 눈도 뜨이지 않을 것이며 야훼의 참뜻을 가려낼 능력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본래 우리 역사에서 활약한 임꺽정이나 장길산처럼 비천한 출신이었다(삼상 18, 17-23). 어쩌면 그는 의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나발이라는 부농을 직접 약탈하지 않고 부하를 보내어 군량을 구걸하는 장면 같은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상상해 보게도 한다. 그러나 그 외 어디에도 의적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아둘람이라는 산굴을 근거로하고 "억눌려 지내는 사람, 빛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그 밖에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들었으며 그가 저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삼상 22, 1-2), 그 수는 400명이라 전한다. 이런 것을 보아서 그는 한때는 의협심이 있고 용맹을 떨쳤던 사람인 모양이다. 그가 광야에 살았다(삼상 23, 14)는 것이 자주 지적되는데, 실은 그만이 아니라 그러한 패들이 난무한 시대였다. 다윗의 요청을 거부한 나발이 "도대체 다윗이 누구냐? 요즈음은 주인에게서 뛰쳐 나은 종들이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는 세상인데 …"(삼상 25, 10)라는 말은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는 무도한 비적이 아님을 변명한다. 그러나 필요하면 칼을 휘두르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가 자기 부하와 더불어 엔게디 근방 산 속에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가르멜에 나발이라는 부농이 양 삼천 마리와 염소 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목동도 거느리고 있었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재산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을 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식량이 떨어진 어느 날 부하를 보내 정중한 인사로 자발적인 지원을 청하였다. 나발은 그의 청을 일거에 거절한다. 그때 다윗의 부하는 이미 600명으로 늘어났는데 그중 400명을 거느리고 나발을 위시한 사내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겠다고 맹세하고 그의 재산을 뺏기 위해 진격한다. 그러나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재치있는 개입으로 폭력행사는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후 나발은 수수께끼 같은 죽임을 당하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첩이 된다. 이런 것을 보아 비록 서술상에는 다윗과 나발의 죽음이 아무 관계가 없는 듯 되어 있으나 그의 아내를 자기의 첩으로 만드는 위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와 같은 서술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뒤에서 언급될 그의 행태를 미루어 보아서도 단순한 짐작일 수만은 없다.

이처럼 그는 무력부대를 거느리고 약탈을 하거나 아니면 여러 군주들과의 협상에서 용병도 되며, 때로는 세력을 잡아 봉신도 된다. 그가 사울 왕국에 접근한 것도 이러한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사울 왕에게 접근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엇갈린다. 소년으로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쳐부쉬 그의 능력이 사울에게 인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삼상 17장) 그가 거문고를 잘 타서 사울에게 추천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며(삼상 16, 14-23), 아무 전후 맥락도 없이 그가 사울의 사령관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도 전해진다(삼상 18, 13). 그가 무력으로 접근하여 용병이 됨으로써 세력을 얻었다는 상상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배권에 도전한 것이다.

그 첫 길로 그는 정략 결혼을 꾀했다. 그는 사울의 첫딸 메랍을 아내로 얻지 못하게 되니까 둘째 딸 미갈을 유혹했다는 것이 이러한 상상을 뒷받침한다. 다윗 왕조의 사가들은 미갈이 다윗에게 반했다고 하고 사울이 다윗을 부마로 삼기로 했다고 서술하는데, 다윗이 미갈을 얻기 위해 부하를 거느리고 블레셋을 습격하여 남자 백 명의 생식기를 잘라서 사울에게 바치고 부마가 되었다는(삼상 18, 26-27) 이야기는 이를 반증한다. 그래도 대권을 잡지 못하자 그의 음모가 노골화되면서 마침내 병력으로 대결하다가 힘에 부치게 되자 그는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피신처를 요청한다. 그런데 아기스 휘하에 피신하고 있을 때 아기스의 신하들이 저가 사울의 부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므로 생명의 위협이 닥치자 갑자기 간질병자로 둔갑해서 사람 앞에서 기절해 보이기도 하고, 미친 사람 연극을 용하게 해서 정말 미친 자로 추방되어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또는 부하 600명과 그 가족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의 숙적인 블레셋에 투항하여 아기스의 봉신이 되고 그의 이스라엘 원정에 나설 것을 지원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블레셋의 다른 장군들이 불신하여 출정을 못하고 블레셋 내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인근 소종족들을 습격하여 남녀를 다 죽여 버리고 전리품을 실어왔다는 등의 이야기(삼상 27, 8-9)는 그의 사람됨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방법으로 유대의 한 부족 지방인 헤브론에 침입하여 그 지방의 왕으로 군림한다. 그것을 발판으로 이미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지치고 사울의 죽음으로 지리멸렬 되어가는 이스라엘을 계속 공격한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의 명장 아브넬과 만나 밀담하고 그가 돌아가는 길에 자객을 보내 그를 죽여 버렸다.(기록에는 아브넬을 죽인 사실을 나무라면서 슬퍼했다고 하나 그 자객을 처단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마침내 삼키게 됨으로 통일 이스라엘국을 선포한 것이다. 그는 여부스 족의 성인 예루살렘을 뺏어 사영화하고 거기에 거대한 궁성을 지어 왕국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전쟁으로 긴장된 분위기를 유지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왕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야훼 신의 상징이던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함으로 종교를 정권유지의 이데올로기로 삼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것이 후에 그의 세습왕인 솔로몬에 의해 지어진 성전의 근거가 되었는데 현실적으로는 역사의 신 야훼가 다윗 왕가에 납치된 것이다. 그는 어찌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야훼를 모실 수 있느냐라는 반대의 소리를 물리치고(삼하 7, 6-7) 그 일을 감행했다.

그는 한편 대단한 호색가로서 수많은 여인을 거느렸는데 예루살렘에서만 여러 후궁에게서 12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뺏기 위해 추악한 방법으로 자기 부하인 우리야를 전선에서 죽여버린다. 기록에는 이 일에 대해 그가 참회하는 장면이 서술되어 있으나, 사실은 상반되게도 우리야의 아내를 끝까지 가장 사랑했으며,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그 사이에서 난 자식인 솔로몬에게 대를 잇게 한 것이다.

그는 민의에 의해 왕위를 지킨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그것을 유지했다. 그러한 대표적 증거로는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루 아침에 민심이 그에게로 쏠리므로 있을 곳을 잃어버린 그는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맨발의 패잔병 신세가 된 일이다. 기록은 온 이스라엘이 다윗을 떠났다고 전한다(삼하 20, 2).

다윗! 비천한 출신으로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만든 것을 유대인들이 극구 찬양하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권력을 손에 잡자 그는 야훼 신까지 자신을 위해 동원했으니 이스라엘의 정체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를 세습한 왕, 다윗이 저지른 불륜의 자식 솔로몬은 성전을 지은 왕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성전은 사실상 궁전의 일부에 속하는 것으로 궁중예배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궁전을 짓는 데만 13년, 성전을 위해서 7년간 18만 명을 강제 징발하여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보다 더 호색가로 이집트모압암몬에돈시돈셋 등에서 여인들을 끌어 들였다. 그리하여 후궁만 7백 명, 수청드는 여인 3백 명 등 천여 명의 여인들을 희롱했다. 뿐만 아니라 외국 여인들을 위해서 그는 그들이 믿는 신을 위한 신전도 세워 주었다. 결국 개인의 향락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기본정신 따위는 아랑곳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화된 그의 삶을 폭로하기 위해 그의 호화로운 생활을 폭로해야 한다. 그의 하루생활을 위한 식량은 고운 밀가루 30섬, 거친 밀가루 60섬, 소 열 마리, 목장소 20마리, 양 100마리, 그 밖의 숫사슴, 산양, 숫노루, 날짐승 등등 무수하게 많다(열상 4, 22-23). 또 자기 성을 요새화하기 위해 기마대만 만 이천 명을 세웠고, 정치적으로는 다윗이 유대계와 이스라엘계를 반씩 요직에 앉히던 전통을 깨고 이스라엘계는 모두 제거하고 유대계만 등용했다. 그는 모든 권리를 손 안에 넣었을 뿐 아니라 종교도 완전히 그 손에 넣어 버렸다. 그 자신은 많은 잡신을 위한 신전을 세웠는데,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을 만큼 반이스라엘적이었다. 그러한 그가 대사제직마저 겸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종교가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용물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처럼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하면 그 권력을 장악한 자신은 물론 그 사회의 비극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절대권력에서 탈출하여 야훼만을 절규하므로 출발한 이스라엘은 군주국으로 둔갑한 지 2대 만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하였다. 민족의 영구적 분단 사건이 그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등의 무제한적 권력에 맞선 이들이 있었다. 예언자들이다. 다윗 시대에는 나단, 솔로몬 시대에는 아히야가 그들이다. 저들은 무관의 왕자처럼 도도히 왕권에 도전했으나 그들을 개인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 배후에는 저항세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나단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가장 파렴치한 방법으로 탈취했을 때 도도하게 다윗을 규탄했다. 반면에 그러한 그가 다윗 왕권을 인정하고 야훼와의 새로운 계약이 이 왕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역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이것은 다윗 왕조 사가들에 의해서 왜곡된 보도거나 아니면 왕권에 매수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히야는 솔로몬이 그의 궁전을 보수확대하는 현장에 나타나서 그 일을 책임진 여로보암을 만나 솔로몬 왕국의 멸망을 구체적으로 예언하며, 여로보암의 편에 설 것을 확실히 한다. 그가 바로 궁전을 보수하는 현장에 출현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민중들이 노동착취를 당하는 현장이다. 솔로몬이 세운 궁전이나 신전 자체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민중의 피땀을 쏟게 했던 증거가 된다. 아히야는 그의 신탁에서 솔로몬이 시돈 사람이 섬기는 여신 아스도렛, 모압의 신 그모스, 암몬 사람의 신 밀곰을 섬긴 것을 그 죄목으로 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죄로 간주되는 것은 종교적인 시각에서 우상을 섬긴 것이라고 간단하게 보아 버린 경향이 있으나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죄가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야훼만'의 신앙을 흔드는 행위다. '야훼만'의 신앙은 권력이 집중한 군주체제에 항거하는 발판이었다. 따라서 다른 잡신을 섬기는 것은 야훼만의 신앙을 상대화해 버리는 것으로 야훼의 절대주권에 도전하는 일이다. 둘째는 이방의 잡신들을 섬긴 동기와 현실이다. 그는 주변 국가들과 교류를 함으로써 정략적인 결혼도 하고 자기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이방의 세력을 이용하였는데, 그것을 위한 방법의 하나가 이방신을 수용하는 일이었다. 이방신을 수용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여러 신들을 위한 신전을 세우는 일이다. 이 신전들을 세우는 데 또다시 민중의 노동력이 착취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히야가 받은 신탁의 배후에 있는 이러한 정치경제 내지 문화적 동기를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히야는 솔로몬 왕가 밑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대변자로 민중 편에 서서 왕국과 저항하여 싸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히야는 솔로몬 왕가에 의해서 열 두 지파 중에서 단 한 지파만이 남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을 지칭한 것이리라.

4

예루살렘은 그 이후에 외세에 의한 침공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다윗 왕조의 계승, 솔로몬이 건설한 신전 수호의 장으로서 흔들리지 않았고, 오랫동안 구조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중심지로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것의 지배층은 대대로 대속물을 바쳐 왔다. 즉 이스라엘의 특권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도 주저없이 치뤘다는 말이다. 다윗성 예루살렘, 야훼 성전을 가진 성도 예루살렘, 이곳은 또한 예루살렘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장이 되었다. 예루살렘 중심의 이 이데올로기는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칠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우리는 마태오와 루가에서 예수의 혈통을 다윗에게 연결시키려는 족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복음서를 비교할 때 그 무리함을 볼 수 있으며, 마리아 수태고지를 전제할 때 요셉 계보는 무의미해진다는 등 그 어설픔을 볼 수 있고, 예수의 탄생설화에 나타난 베들레헴 모티브도 역사적으로 볼 때 현실성이 없는 인위적인 것이다. 이 모두가 다윗왕조 이데올로기의 영향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예루살렘에서 창출된 메시아주의가 편만해서,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라는 주장을 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복음인 마르코에는 이러한 흔적은 전혀 없다. 족보는 물론 베들레헴 모티브도 없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는 데가 두 번 나오기는 하나 그것은 모두 예수를 만난 자들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고 예수 자신은 물론 그의 제자들은 단 한번도 그런 암시를 하는 곳이 없다. 오히려 마르코에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수 없다는 분명한 선언이 있다(마르 12, 35-37). "왜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다윗 자손이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이것은 재래의 메시아 상에 대한 전적인 거부며, 좀더 깊이 보면 다윗 왕조에서 형성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다.

예루살렘을 향한 비판의 소리도 그친 일이 없었으며, 예수 시대에는 탈예루살렘파들이 있어 예루살렘을 장악한 무리들을 숙청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갈릴래아에서 활동한 예수가 그 최후를 예루살렘에 진격해서 그 곳에서 처형당함으로 마쳤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민중의 땅 갈릴래아에서는 환영을 받고 다윗 왕의 왕도 예루살렘에서 처형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처형되고 부활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찾아 갈릴래아로 갔다는 마르코의 전승은 반예루살렘, 나아가서는 반다윗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이 다윗성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이 마침내 예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않고 다 무너져 버린 것이다.

우리는 예수 운동이 반예루살렘 운동으로 성격화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운동이라 할 것이다. 권력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에게 속했다(로마 13, 1). 그런 의미에서 권력은 공적인 것으로 어느 집단이나 개인이 사유화할 수 없다. 그런데 다윗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권력의 사유화를 꾀했다. 동시에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함으로 야훼를 자기 정권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즉 하느님의 사유화다.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진 신전은 바로 야훼를 연금한 감옥과 같은 것이다. 이로써 사실상 야훼의 권한을 사취한 것이다. 한 손에 통치권을, 다른 한 손에는 대사제권을 장악한 솔로몬은 공(公)을 송두리째 사유화함으로써 철저한 범죄를 감행한 자다.

그러므로 반예루살렘 내지 반다윗 운동은 '야훼만'의 전통적인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것은 사유화된 공으로서의 권력을 뺏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느님의 주권만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가 성전을 숙청하면서 성전을 도적놈의 소굴로 만든다는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였다는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암시를 준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참된 예배를 강조하는 맥락 속에서 당시 사람 둘이 이것은 야훼 성전이다는 말만 반복하는 동시에 그들의 생활은 전혀 그와 다른 방향으로 줄달음치는 것을 고발하면서, 너희 눈에는 이 집이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고 한다. 그런데 저들의 잘못된 생활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억울한 일을 자행하는 것, 유랑인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는 일,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 등을 다른 잡신을 섭기는 일과 더불어 들고 있다. 그러므로 성전 앞에서 비둘기 등 짐승들을 팔고 사며 돈을 바꾸는 등의 행위를 규탄한 것은 예레미야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보다 더 깊은 범죄를 성전의 이름으로 성전을 통해서 자행한 데 대한 공격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애당초 성전 자체는 민중의 노동력과 경제력을 착취하여 건설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전 자체가 야훼 이름으로 종교 귀족들이 민중들을 착취하는 도구 구실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 운동이란 바로 성전을 통한 경제적 착취를 저지함으로 민중을 해방시키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는 이와 같은 확고하고 분명한 반왕권주의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 권력과 제휴하여 자신을 비대시켜 왔으며 마침내는 권력의 시녀로서 자족하는 긴 역사 속에서 '야훼만'의 신앙을 유린했을 뿐 아니라 반민중적인 집단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계속 부패한 왕권에 시달려 왔으며 마침내는 외세의 왕권에까지 유린되는 역사를 가졌는데, 해방 이후에도 비록 형태상으로는 왕권은 없어졌으나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잔인하고 교활한 독재정권들에 의해서 시달림을 받아 왔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대다수는 정교분립이라는 지배자의 조정에 의해서 형성된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권력의 난무에 대해서 무감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과 자세는 현실적으로 불의한 정권의 편에 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독재체제나 불의한 정권에 대한 싸움은 바로 '야훼만'을 위한 싸움이며, 그것은 동시에 그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눌린 자와 가난한 자들 편에 서야 한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 즉 하느님의 질서가 사유화되고 독점화되는 것에 맞서서 싸우는 것은 이른바 정치적 행위가 아니고 예언자와 예수 운동에서 계승된 야훼 운동,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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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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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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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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