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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솔로몬의 경우
열상 11, 1-13
 
1. 다윗이 물려준 것

다윗에 의해서 비록 동원력은 어설프나 민주적이던 부족종족 동맹은 깨지고 군주적 중앙집권 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추장 중심의 부족 연맹에서 계급적 왕권제가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로써 왕권으로 세금을 합법적으로 거두고 국민은 필요에 따라 군인이나 노동자로 징용할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군대를 창설하여 상비군으로 고용하고 직제를 만들어 관리를 채용하므로 왕의 손발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써 사회제도의 변동이 오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부족에게 토지 소유권이 있었던 것을 대가족 단위의 소유[私有]로 전환하고 그것을 영구 소유권으로 상속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국가의 권한으로 사회가 계층화되게 되었는데 그것은 특혜의 정도에 따라 형성됩니다. 독점권이나 약탈권 그리고 봉토권 등이 그렇게 만듭니다. 이로써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극심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미 그런 제도화가 공고해진 유산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활용하여 그로 인한 사적인 풍요 속에서 타락하거나 강력해질 수 있는 조건들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2. 왕권 확립을 위한 투쟁

솔로몬은 아비 다윗에게서 왕권과 국가 통치권을 물려 받았으나 동시에 여러 장애물도 물려받았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남긴 제도나 정책이며 인맥입니다. 솔로몬은 이어받은 제도적 권한으로 자기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잔인한 숙청 작업과 제도적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열왕기상 2장 이하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먼저 같은 피를 받은 의붓 형인 아도니야를 위험한 경쟁자로 점치고 사정없이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오른팔처럼 충성함으로 군대를 통솔하던 요압을 처형해 버리고 다윗 왕조에서 이데올로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제 세워질 성전에서 주역이 될 사제 에비아달을 사직 유배해 버렸습니다.

다윗은 곁에 언제나 한 친구를 두어 무관 및 자문관 역을 하도록 했으며 예언자라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의 특권을 인정해서 그의 비판과 충고를 신의 말씀처럼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나단이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의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담보로 나단의 이름을 들었습니다만(3, 5; 8, 18-19; 8, 25 등) 나단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그 외 어떤 예언자 따위도 등장하는 데가 없습니다. 자문의 역할을 맡은 '친구'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대담한 관료 교체를 단행했는데 다윗이 원칙으로 삼았던 정책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다윗은 남 유대와 북 이스라엘의 균형을 고려해 무슨 직제에나 양쪽에서 반씩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높은 관직(지금의 각료)에는 몽땅 유대계를 임명하고 북이스라엘계를 전부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워 제거했습니다.

그는 강력한 권력자로 군림하기 위해 군사비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집트에서 전차(戰車)와 군마(軍馬)를 사들였습니다(10, 26-28). 전차 1,400대, 군마 2,000필이나 수입했는데 전차 한대 당 그때 600세겔이나 지불했고 군마는 한마리에 150세겔이나 지불했다고 하니 당시 국가 예산으로는 거의 광인의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군사력을 대폭 증강했습니다. 이로써 일인 독재의 틀을 갖춘 것입니다.

3. 왕권 시위

그는 예루살렘을 다윗의 성으로 성역화하고 거기에 새롭게 궁궐을 지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다윗때에 이루지 못한 신전을 세웠습니다. 다윗 왕조사가들은 솔로몬의 업적을 기록하는데 성전 건축에 대하여 세밀한 서술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궁전은 13년, 신전은 7년간 지었습니다. 이 두 건물을 짓는데 동원된 노동력이 3만(5, 3) 집을 지어 나르는 노동력 7만, 그 건물에 필요한 돌을 깎는 석공만도 8만(5, 25)이었다고 합니다. 궁전은 그의 왕권 시위를 위한 것인데 비해 신전은 이 왕조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은 본래 다윗의 복안이었습니다. 다윗의 도시 예루살렘에 히브리-이스라엘의 야훼 신의 상징인 법궤(이스라엘 민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행진할 때 그 대열 앞에 야훼신의 상징으로 앞세워 가던 가마 같은 것)를 연결시키므로 유대와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자는 발상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계획대로 새로 지은 신전에 그 법궤를 안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과는 달리 철저히 유대주의에 섰고 북 이스라엘은 영호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전의 의미는 이미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신전은 야훼와의 계약을 생활로써 지킬 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계약대로의 생활과 종교 예식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신전은 이미 허구한 공간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신전을 지을 때 자신이 직접 신탁을 받고 그것을 실천하는 듯이 행동했고 신전 봉헌도 그 자신이 직접 나서서 축복과 장엄한 봉헌 기도로 대사제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왕과 사제를 구별하는 다윗의 원칙을 위배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신마저 독점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군대, 궁전, 신권 등으로 그의 왕의 권위를 충분히 시위하여 민에게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값비싼 전차 1,400대가 국방에 필요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왕권 시위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민을 얼마나 착취했을 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그치지 않고 레바논 수풀 궁도 짓고 '옥좌의 공간'이라는 이름의 궁도 지었으며 이집트의 왕 바로의 딸을 첩으로 맞아들이면서도 그를 위한 궁을 따로 지었습니다(3, 1.7.8.9.16; 9, 24). 사람들은 그 때 예루살렘이 일변할 정도로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서고 요새들도 많이 세운 것을 그의 문화적 공헌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만 그의 시위적 허영에 흘린 민의 땀과 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4. 솔로몬의 정체 폭로

그는 자기 아비(다윗)를 뺨치는 호색가였습니다. 그는 인근의 나라와 관계를 맺는 것과 그 나라들의 왕녀를 첩으로 맞이하는 것을 두가지 일로 보지 않은 사람같이 반드시 수교국의 왕녀를 첩으로 데려왔습니다. 맨처음 이집트의 바로의 딸을 맞이하더니 모압, 에돔, 시돈, 헷 나라들의 왕녀들도 첩으로 데려왔습니다. 다윗 왕조 사가는 후궁 700명, 첩 300명(11, 3)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분명한 숫자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매일 소모하는 식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4, 22-23). 매일 밀가루는 두 가지 종류로 60섬, 소 30마리, 양 100마리 그리고 수 사슴, 노루, 암 사슴 심지어 살찐 새까지 추가됩니다. 이같은 기록은 궁전과 신전 설계를 세밀하게 소개하는 취지와 같이 그의 호화로움을 스스럼없이 자랑하는 것입니다. 단지 편집자는 다음과 같은 편집구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께서 일찌기 이 여러 민족을 두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경고하신 일이 있다. 너희는 그들(이방인)과 결혼을 하고자 해서도 안되고 그들이 청혼하여 오더라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분명히 그들이 너희의 마음을 그들이 믿는 신에게로 기울어지게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경고는 솔로몬에 의해서 현실로 적중됐습니다. 외국 왕녀를 첩으로 맞이하는 대신 신이 하나씩 이스라엘에서 늘어났습니다. 이집트의 바로의 딸과 더불어 '바알' 신이, 시돈의 왕녀와 더불어 저들이 섬기는 '아스도렛' 여신, 암몬 여인과 더불어 그 민족의 '밀곰' 신과 동시에 '몰록' 신이, 모압의 여인과 더불어 '그모스' 신 등이 도도하게 입국하되 먼저 궁전에 그 터를 잡았습니다. 그는 왕녀들에게 청혼할 때부터 그 나라와 왕에게 그 종족의 신을 그대로 섬기게할 것을 조건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 자신 그 여인들과의 정실 정도에 따라 신당도 크고 적게 지어주고 또 저들의 신당에서 드리는 의식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행위를 후세의 예언자들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만 당시에는 그의 행위를 제동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같은 그의 다원 종교주의자적 행위는 그가 그토록 열심히 성전을 짓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또 스스로 대사제적 행위와 야훼신에게 충성을 보인 것은 참 신념에서가 아니라 민을 기만하기 위한 시위적 허위행위였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5. 성전 건축과 야훼신앙 변질

사실상 성전을 건축할 때부터 야훼종교를 변질시킬 소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전건축을 위해 그는 외국, 특히 띠로에서 신전 건축 기술자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에는 신전이 없었기 때문에 일정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원래 야훼의 신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갇혀 있을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이스라엘 신앙의 기본자세였습니다.

다윗 왕조는 성전 건축으로 이 야훼신을 이방의 신처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포로로 가두어둔 셈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짓겠다는 계획 자체가 야훼신의 변질을 전제한 것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야훼신앙에 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훼신을 경험한 곳들을 성지로 정하고 예배를 드려왔을 뿐입니다.

이 마당에 이방의 건축자에게 신전 건축을 의탁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종교 양식의 침투를 전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띠로의 기술자들의 신전의 구조나 제사도구들을 자신의 종교의 그것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종교에서 흔히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외형의 내용까지 바꾸어 혼합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건설 자체가 야훼종교의 본질을 탈바꿈시킨 행위입니다.

솔로몬의 종교 행위는 사실 그의 공적을 과시하는 행위의 일환에 불과했습니다.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다는 뜻에서 솔로몬의 다른 죄과들을 묻어두고 그를 지혜의 소유자로 떠받들며 신전 건축으로 야훼종교에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는 통념에 사로잡혔지만, 실은 그 성전에 목이 매여 긴긴 세월 침략 대국들의 종노릇을 해왔습니다. 성전 수호의 대개가 저들을 정치적으로 노예화했다는 말입니다.

그 여파는 유대교에서 탈출한 그리스도교에까지 파급되어 저 유명한 수치스러운 십자군 사건을 일으켰고, 그리스도교의 교회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한국에까지 파급되어 지금 성지 순례라는 이름을 내세워 돈을 버는 장사꾼들이 성시를 이룰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같은 일련의 반성이 예언자들에게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엘리아, 아모스, 예레미아 등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성전에 앞서 율법을 중시하고 율법에 명시된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전제에서만 성전의 예배에 의미가 있다는 성전 비중의 축소 해석도 했었고 역사적으로 성전을 악용하는 악당들의 횡포에 분노하여 성전을 도둑놈의 소굴이라고 극언했으며 이런 시각에서 예수의 예루살렘 행과 숙청 사건을 새롭게 인식해야 될 것입니다.

아무튼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위시한 종교 행위는 야훼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종교를 이용한 독신행위입니다.

6. 민중의 적

그의 업적이라면 호화로움 자체의 실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만큼 호화로운 사치생활을 한 왕은 없었습니다. 아니, 비록 늦게 출발한 절대군주국이며 중동 일대의 절대군주국을 모방했지만 저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풍요함을 간직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같은 호화생활을 경제적으로 어떻게 지탱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돈으로 자기 중심의 건물을 그렇게 많이 짓고 예루살렘의 면모를 웅장한 건물들을 세워 바꾸어 버렸으며 그 막대한 전차, 기마 등을 갖추었나!

그는 외교에 능하여 주변 국가들과 수교하므로 유리한 교역을 했습니다. 군사강국이 되어 군사력으로 판도를 확대해서 얻은 전리품을 거두어 들이기도 했습니다. 팔레스틴이 중간지대였기 때문에 상인들이 빈번히 통과하는 것을 이용해서 턱없는 통관세를 받아들이는 등으로 경제 부담의 일부를 메꾸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수입원은 민중 착취를 구조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앞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대북 이스라엘 정책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다윗에 의해 남유대와 연합되어 정치적으로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본래 여부스 족의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빼앗아서 유대와 합쳐서 유대의 왕이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북이스라엘과의 통일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한 나라가 되었어도 내적인 비중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지방에 두었습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런 분위기를 생리화한 사람입니다. 이미 다윗의 흡수 작업 당시 북이스라엘의 민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그런 비판 운동이 솔로몬에게 와서 늦추어졌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북이스라엘에 대한 악감정을 조장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결과가 이미 언급한 대로 유대지방 중심 정책을 가속화했습니다.

그는 이미 한 나라가 되었음에도 유대와 북이스라엘 사이에 국경선 아닌 금을 그어놓고 통과세를 징수하였습니다. 그 통과세는 일차적으로 북이스라엘민들을 겨눈 것입니다. 까닭은 행정 수도가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전은 재빨리 종교의 명목으로 경제 착취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어용 종교인들은 성전에만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관철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중심의 커다란 종교 행사를 늘리면서 그런 것에 참여하는 것과 신앙심의 비중을 결부시켰습니다.

따라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바로 착취당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유대 지방에 들어설 때의 통관세, 통화가 다른 탓에 환전하는 과정에서 뜯기는 것, 그리고 제물로 바칠 짐승을 사고 팔 권리를 성전 당국이 독점한 탓에 턱 없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등.

솔로몬은 왕이 되자 북이스라엘을 12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에 전체의 책임자와 세금 징수관을 파견 주둔시켰습니다(4, 7이하). 이것은 착취구조의 현실화 작업의 하나입니다. 파견된 자들의 역할은 로마시대의 세리 제도를 뺨칠 정도였습니다. 솔로몬은 북이스라엘을 식민지로 간주한 것입니다.

세금은 실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세금을 못내는 자는 속속 징발하여 군대로 보내거나 노동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이스라엘에는 노예제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못내는 민중 특히 북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수없이 많은 수가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4, 7-19).

마침내는 징병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 징병제를 이용하여 전쟁이 없을 때는 부역제로 바꾸어 전 국민 중 남자는 모두 징발되어 노동력 착취를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노역자의 수가 엄청났습니다. 그들을 감독하는 자들을 지휘하는 책임 관리가 550명이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처럼 민중을 통털어 착취해도 경제적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엄청난 범죄를 합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 속하는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20개 성읍을 띠로 왕에게 팔아버렸습니다(9, 11). 나라의 땅을 잘라 팔면서도 그같은 사치 생활을 계속했다는 것은 그의 왕권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북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비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성읍들을 산 띠로의 왕이 수지 계산이 맞지 않아 블평했다(9, 13)는 것은 그 주민들이 몹시 가난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7. 끝말

이스라엘은 절대 군주에게서 탈출한 하삐루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주변의 군주국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군주 없는 민의 공동체를 200년이나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이른바 부국강병주의자들이 있어 사사 사무엘에게 군주제도를 요구하며 왕을 세우도록 강압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신의 뜻을 대변하여 왕을 세우면 너희를 모두 노예처럼 부릴 것이라는 경고를 자세히 했습니다(삼상 8, 10 이하). 그런데 그 경고가 솔로몬에 와서 적중했습니다. 권력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사람을 썩게 합니다. 권력을 쥔 자만이 아니라 한 민족이 썩게 됩니다. 비록 왕조 사가들이 다윗 왕조를 그렇게 미화했으나 솔로몬의 썩은 모습을 숨기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보아야 할 거울이 될 것입니다. 정말 국가제도가 불가피한가, 그렇다면 권력행사를 견제하는 세력을 견고하게 구축하는 것이 민족을 위하고 인간을 위하는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그토록 내세운 것은 절대 권력을 견제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민'이 뭉쳐 있었습니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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