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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1. 투쟁의 역사

역사는 투쟁으로 전개된다. 역사에 만일 종국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투쟁의 악순환을 계속할 것이다. 구약에서는 샬롬(Shalom) 즉 평화를 매우 희구한다. 그런데 그것은 궁극적인 평화로서 이 역사가 끝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진행되는 한 투쟁은 불가피하다는 말이 된다.

다윈은 자연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약육강식, 생존경쟁이 바로 삶의 현장인 것을 입증했는데 칼 맑스는 역사가 계급투쟁을 통해 전개된다고 보았다. 다윈은 자연을 관찰함으로 결론을 얻었고 맑스는 사회분석을 통해 그런 결론을 얻었다. 우리는 우리 현장에서 계속적인 충돌현상을 보고 있다. 남자와 여자, 기성세대와 젊은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의 사이에서 불꽃튀는 대결과 알력을 목격하고 있다. 민주화의 물결과 더불어 노사간의 치열한 투쟁이 연속되고 있다. 무엇이 투쟁의 원인인가? 성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으며 무엇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가?

2. 바알과 야훼의 투쟁

엘리야라는 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예언자 중에서도 가장 생동하는 삶을 보여 주고 있으며 많은 사건을 유발한 인물이다. 그중의 하나가 저 유명한 바알 신과의 대결이다.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에서 열왕기하 2장에 이르기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길르앗의 티스베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그의 신분에 관해 전해 주는 것이 없고 다만 그의 행적만 전한다. 그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 왕 시대에 등장했다. 아합은 페니키아의 도시국가 시돈의 왕 에드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다(열상 16, 31). 에드바알이란 "바알과 더불어"라는 의미인데, 그가 지배하는 페니키아는 그 당시의 지중해 전반을 제패한 신흥 제국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딸과 결혼한 것은 일면 정략성이 있겠지만 또 한 면으로는 종속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관례로 보면 한 왕이 이방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경우 그 왕비의 종교를 존중해서 그를 위한 예배처를 건설해 주는 것을 의무로 알았다. 따라서 아합은 이세벨을 위해서 바알 신전을 사마리아에 세워 준 것이다. 그런데 아합은 이세벨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솔선해서 바알을 예배하였다. 그리고 이세벨의 종교적 횡포를 두둔했다. 그러자 기세등등한 이세벨은 바알로 야훼를 대치하려고까지 하게 되었다. 그녀는 곳곳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바알 사제를 두어 지원하는 한편 야훼의 사제들을 학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합의 신하 오바디야가 야훼의 사제 백 명을 오십 명씩 어떤 동굴에 피신하게 했다는 이야기(열상 18, 13)는 그와 같은 사태의 단면을 전한다.

강대국을 등에 업은 이세벨은 개인의 신앙의 자유만을 향유한 것이 아니라 왕권을 빌어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에 확대해 나간다. 이것은 물론 이세벨이란 한 여인 개인의 행동으로 국한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돈 대국의 이데올로기의 침투작전의 일환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한 종교의 투쟁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정치권력이 결정적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는 여기에 대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엘리야는 3년 동안의 한재로 시달리는 아합 왕에게 나타난다. 그를 본 아합 왕이 네가 이스라엘을 망치는 장본인이냐고 묻는 데 대하여 그는 아합이야말로 바알을 섬기므로 야훼의 계명을 유린하여 이스라엘을 망친다고 항거한다. 나아가 가르멜 산에서 이스라엘 온 백성이 지켜 보는 가운데 바알과의 대결로 승부를 겨룰 것을 제안한다. 이 대결은 3년 가뭄을 극복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다. 이 대결에 앞서 엘리야는 백성에게 "여러분은 어느 때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라고 결단을 촉구했다. 그리고 아합의 사제 450명(아세라의 사제 400명이라고 한 것은 18, 19 끝에서만 언급될 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과 대결한다. 그 이야기는 동화적 서술로 되어있으나 역사적 근거가 있다. 가르멜 산은 시돈과 이스라엘 국경에 있는 해발 1,800척 높이의 산으로서 국경싸움의 격전지일 뿐 아니라 바알과 야훼제단을 서로 파괴하며 세운 종교적 격전지이기도 하다. 아무튼 바알과 야훼의 대결이 이 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대결에서 엘리야를 통해 야훼가 이겼다. 이로써 바알의 사제 450명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다. 바알과 야훼의 투쟁!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3. 바알의 정체

이미 바알종교는 특히 가나안의 여러 군주국가가 공유한 종교다. 바알이란 말 자체가 소유자 또는 주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듯이 그것은 가진 자의 신이다. 가진 자의 상징은 풍요함이다. 바알종교는 소로 상징되는데 이스라엘에 금송아지 숭배 이야기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바알 종교의 영향이다. 그것은 다산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알과 나란히 있는 것은 아스다롯으로서 다산의 여신이다(판관 10, 6; 삼상 7, 4). 이것은 바빌론에서 들어온 신이다. 바알은 생식신이다. 비의 정액으로 땅을 비옥하게 하는 신이다. 구약에 바알과 함께 거론되는 아세라 목상은 다름 아닌 생식여신으로 나무다(판관 6, 25; 참조. 열하 23, 11). 이 바알종교는 계절적 축제에서 재현됐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바알은 그의 처 아도나와 풍요한 삶을 누리는데 한재를 상징하는 초여름의 신 모토(Moto/죽음)에 의해 살해되어 바다의 신 얌의 감시하에 억류된다. 그러나 부활의 계절인 가을에 비가 내림과 더불어 부활하여 비구름을 타고 돌아와 그를 죽인 모토를 벼락으로 쳐죽이고 천상에서 다시 신으로서 즉위하여 죽음으로 갈라졌던 그의 처 아도나와 다시 결합한다. 이 재결합이 축제의 절정인데 그것이 바로 성교행위다. 바알은 풍요의 신인데 그것은 정치적으로 볼 때 왕을 위시한 상류층과 지주의 특권을 옹호하는 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수 기득권자의 신이다.

그런데 이 종교는 민중을 체념과 무력 속에 빠뜨림으로 손쉽게 통치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바알축제의 절정인 성혼(성교)은 가을에 이루어지는데, 이것으로 농노들을 황홀경(orgia)에 빠뜨린다. 저들은 성적인 주체자가 아니고 구경꾼으로서 환상 속에 광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농노들은 일년 중 이 때 한번 노동에서 해방되어 가무성의 방종을 향유함으로써 현실을 망각하고 육의 고뇌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데 지배자들은 바로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세뇌시켰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육체를 떠난 영의 복락, 영원한 피안적인 삶이라는 관념을 싹트게 함으로써 현실에서 체념하고 피안적인 위로에서 사는 민중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영적인 종교의 근거가 됐는데 그것이 본래 농노, 광산노예, 피압박자를 지배하기 위한 종교의 본래적 성격이다.

바알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바알은 독점층의 신이다. 자본의 독점, 권력의 독점, 이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도 아니고 민에 의해 인정된 것도 아닌, 가로챈 것이다. 권력이나 자본의 독점을 위해서 민족을 배반하고 민족정신을 팔아서라도 독점하는 형태, 그런 형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바알 신이다. 아합은 그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시돈과의 야합을 불사했다. 그것이 정략결혼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는 야훼신앙을 유린하고 바알신에게 굴복하게 된 것이다. 이미 독점자로 군림한 그에게는 야훼보다는 바알이 편리했던 것이다. 까닭은 바알은 독점자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기 때문이다.

둘째, 독점은 희생자를 전제한다. 독점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희생자가 많아진다. 독점은 사실상 뺏거나 착취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폭력으로 쟁취한 것이다. 따라서 뺏긴 자, 착취당한 자, 피압박자들의 원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원한을 달래며 그 분노를 희석화시키기 위해서 독점자는 또한 바알신을 이용한 것이다. 일면 폭력으로 또 한면은 체념의 길로 유도함으로 분노하는 민중을 지배하는 것이다. 체념의 방법은 사고의 비역사화, 피안에의 초대 즉 환상 또는 황홀경에 몰아넣음으로써 이룩되는 것이다. 가시적인 세계를 독점하기 위해서 영의 세계, 사후의 세계를 성적 황홀과 연결시키고 그런데서 받을 상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차안에서의 체념과 복종, 희생 등을 감수하도록 길들인다.

셋째로 바알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한 것이다. 똑같은 인간에 불과한 자신을 절대화함으로 신격화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한 것,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우상은 허상인 것이다. 우상임을 직시하고 인식하면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이 우상이 인간 욕망의 본능을 자극하므로 그 눈을 흐리게 만든다.

이같은 바알신은 오늘에도 엄존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풍요와 편리를 최대의 목표로 삼고 피나는 경쟁을 하고 있다. 가진 나라는 가진 것을 지킬 뿐 아니라 더 갖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것이 신제국주의로 등장하며 다국적기업이라는 새로운 침략으로 나타난다. 가난한 나라는 풍요한 나라를 동경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것이 이른바 GNP 경쟁으로 나타난다. 한국은 바로 이같은 경쟁의 첨단에 섰다. 그런데 그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는 뭔가? 근대화에 착수하면서 내건 가치는 잘살아 보자였다. 잘산다는 말에는 윤리나 도덕적인 가치는 완전히 도외시되고 풍요한 삶만이 목표가 되어 있다. 풍요한 삶을 위해서 무역전쟁에 총동원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무역고가 바로 잘사는 것의 척도가 되어 국민 전체의 시선을 거기에 집중시키도록 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은 어떤 방법으로 추진됐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가? 무역고를 절대화함으로 소수 기업에 집중적으로 특혜를 베풀어서 점점 독점세력화시키고 반면에 농촌을 이에 반비례해서 폐허화시켰으며,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철저히 유린하면서 이룩한 것이다. 이렇게 강제하기 위해서는 군산복합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군산복합체가 풍요라는 바알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워 그 폭행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현실은 자본독점이며 군사독재 정권이다. 자본은 극히 소수에게 독점되고 대다수의 국민은 그림의 떡같은 풍요라는 바알신 앞에 종속됨으로 점점 고되고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다. 아합이 시돈국의 힘을 등에 업어 어느 정도의 정치군사경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대가는 시돈에 종속되고 자신을 팔아 버리는 상태에 빠졌듯이 우리는 풍요를 구가하는 동안 미국이나 일본 같은 강대세력에 종속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집권자들은 국민을 스포츠나 다른 오락 등으로 현혹시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흐리게 하며 "내일"의 위대한 약속을 극대화하여 현재의 갈등을 망각하게 하는 술책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를 위시한 많은 종교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내일"을 위해서 오늘 민중들이 수탈을 당해도 좋다고 누가 단정하는가? 그게 우상이 하는 일이 아닌가.

엘리야가 바알사제들과 대결할 때 쌓은 야훼신의 제단은 열두 개의 돌로 되었다고 전한다. 열두 개의 돌은 물론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열두 지파는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족동맹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의 초석은 "야훼만"이었다. "오직 야훼만!" 이것은 파라오의 억압에 신음하던 하삐루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였으며, 그것으로 파라오의 압제와 속박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며, 가나안의 수많은 군주 밑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하면서 자신을 팔고 있던 농노들이 이집트에서 온 하삐루들과 결속하여 군주들의 쇠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며 야훼만의 기치 아래 권력의 독점자 또는 세력을 배격하고 평등과 자유의 종족동맹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훼 그는 하삐루의 하느님이다. 수탈당하는 자의 하느님, 피압박자의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밑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편에 선 하느님이며 그들을 해방시킨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다윗왕조 밑에서 무력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이 아합 왕 때 구체화되어 바알신에 의해 이스라엘에서 야훼의 신은 영원히 축출될지 모르는 상황에까지 온 것이다. 바알과 야훼와의 대결은 곧 민중과 부요한 자, 권력층과 피지배자 계층과의 대결이다. 바알사제들과 엘리야의 싸움은 종교적 투쟁이 아니라 계급투쟁이다. 엘리야는 한 종교적 투사가 아니라 민중의 편에서 지배자에 저항한 혁명가다. 바알사제들이 비를 내리게 하는 데 실패함으로 바알종교의 허구를 폭로해 줄 때 엘리야는 "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여, 이제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제가 한 모든 일이 당신의 말씀을 좇아 한 것임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절규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것은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사건사건으로 점철한 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역사적인 고백과 더불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현장과 그 행동을 성찰함으로 그 하느님의 동의를 구한다. 지금은 바알의 종교에 의해서 야훼의 종교가 완전히 끝장나느냐, 가진 계층에 의해서 민중들이 사람으로 설 근거를 완전 박탈당하느냐 하는 위기다. 그리하여 "하나만 남은" 엘리야 자신마저 죽임당하기 직전, 즉 벼랑에 섰다는 결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그의 하는 일, 하려고 하는 일은 곧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절규로써 표명하면서 아합과 이세벨 제국에 대결한 것이다. 이러한 엘리야의 기본입장은 나봇의 포도원을 뺏은 아합과 대결한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4. 엘리야를 오늘에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다시 재생할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은 맥을 짚은 것이다. 엘리야가 다시 와야 한다는 것은 바알신이 여전히 난무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지금이 바로 바알신이 난무하되 그 절정을 이룬 시대가 아니겠는가? 이미 이 바알은 서구를 휩쓸어 야훼의 종들을 멸절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그리스도교가 맥을 못 쓰고 있지 않나? 바알이란 풍요 아닌가. 서구 사회는 바로 풍요라는 이름의 바알이 난무하여 야훼를 내쫓고 있지 않나!

그런데 그 바람이 바로 이 땅에도 몰아닥치고 있다. 이 땅에 바알신이 등장했다. 그것이 산업화라는 배를 타고 상륙했다. 그것은 "보다 더"라는 채찍으로 우리를 정신차릴 새 없이 다그친다. 이 바알의 정체를 밝히자. 이 바알의 앞잡이와의 투쟁을 위해 제단을 쌓자. 이 바알을 두둔하는 이세벨과 아합을 추방하자. 그 사제들이 어떻게 횡포하며 이세벨과 아합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방법으로 억압하는가? 이런 것을 밝히기 위해서 주저없이 사회과학을 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은 일체를 폭로해 줄 뿐 바알과의 싸움은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 바로 야훼의 종으로서의 우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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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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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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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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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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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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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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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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