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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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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이 세대는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소리질러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그는 귀신이 들렸다'고 밀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보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하고 말한다. 지혜는 그 결과로 그 옳음이 증명된다(마태 11, 16~19; 루가 7, 31~35).

이 이야기의 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농부, 어부, 만찬식장, 결혼식, 여자가 떡을 빛는 현장, 포도원, 고용주와 노동자 등등 다양하게 그 마당을 바꾸는데 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이야기의 마당입니다.

팔레스틴은 대부분이 박토여서 농부들은 한치의 땅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밭으로 개간해서 아이들이 뛰어놀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학교가 생겨나면서부터 학교마당이 시골아이들이 뛰어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유다 사람들의 '학교'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서당'과 다름없이 일반가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긴했으나 놀이터가 될 만한 공간은 없었습니다.

단 하나 있던 광장은 주기적으로 장사꾼들이 모이는 장터였습니다. 이 장터는 보통 때에도 해질녘에 동리사람들이 모여서 담소할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이 장터에 나와 여러 가지 놀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장터와 놀이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하는데, 그중에서 결혼식놀이와 장례식놀이가 있었습니다. 아마 두 가지 행사가 아이들의 눈에 가장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하기는 이 두 가지 행사만큼 인간의 삶에서 더 큰 사건이 어디 있을까요.

신랑 편에서 보면 다른 혈통의 여자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대를 이을 자식을 얻는 일이니 가장 즐거운 날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부 편에서 보면 자기를 낳고 기른 부모의 품을 떠나 혈통이나 가풍이 전혀 다른 가정으로 살 자리를 옮기며, 평생 얼굴도 한 번 못 본 한 남자에게 몸을 맡길 뿐아니라 그를 통해 그 씨족의 후손을 퍼뜨려야 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결혼을 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과제가 해결되고 일생의 동반자를 만난다는 호기심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에 부푼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식날은 그 집안들만이 아니라 그 동리 전체의 축제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골에서도 흔히 보듯 한 집안에서 결혼하는 날에는 온 동리가 떠들썩합니다. 아랍민족들 전체가 그렇지만 팔레스틴의 축제는 더 성황을 이룹니다.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춤을 추면서 이 날을 빌려 그 부락의 공동체의식을 다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혼의 날을 기쁨의 상징으로 표시한 노래가 많은데, 예수는 바로 이러한 민중적 정서를 중시하고 결혼하는 날을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표현하는 데 곧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대사(大事)는 죽음의 날입니다. 죽음,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주변에서 늘 죽음을 보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죽음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우리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죽음 자체를 인식해서이기보다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영원한 이별에 대한 슬픔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간 한 동리에 있는 어느 집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온 동리에 죽음의 그림자가 안개 덮이듯 내려앉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친하게 지내던 그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슬픔에 잠길 것이고 노인들은 새삼 자기들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삶의 허망함이 뒤섞인 비애에 잠길 것입니다. 그 가정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죽은 자에 따라 그 슬픔의 폭이 다를 수 있으나, 예컨대 그의 죽음이 오랜 병상생활로 그 집안의 짐이 되어왔다면 그 우환이 끝났으므로 해방감을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같은 해방감을 겉으로 나타내는 집안은 없습니다. 죽으면 슬퍼해야 한다는 관습이 그것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의 풍속에서도 상을 당한 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내심 슬프지 않아도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하는 울음소리를 내 슬퍼해야 하는 것을 의무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례날까지 계속 곡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곡을 해주었고 그것도 불가능한 경우에는 계속 울어주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풍속이 있는데 묘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이와 꼭 같은 풍속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웬만큼 산다 하면 곡하는 사람만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노래하는 패들을 불러 애절한 음악을 곁들이게 했습니다.

아무튼 이 두 큰 행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온 동리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행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어릴 때부터 이런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년기에서 소년기에 이르는 사이에 저희들끼리 모여서하는 놀이 가운데 이 두 가지 행사를 놀이 속에서 재현시키고, 자기들이 주역이 되는 자부심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아이들의 놀이터는 물론 장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이까지는 자신들이 실제 주역이 된 듯이 신이 나서 잘 어울립니다. 아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곧잘 즉흥적으로 엄마, 아빠, 형, 동생 해가면서 역할을 나누고 자기들이 경험한 엄마, 아빠의 화신이나 된 듯이 그것을 체현(體現)해 보입니다.

그러나 더 나이를 먹으면 그런 놀이도 시들해집니다. 그것은 아무리 그래 봐야 자기는 아빠도, 엄마도 아닌 힘없는 하나의 어린아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부터입니다.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도 어느 나이가 되면 자신은 죽은 자의 아들도, 아내도 아니고 그 장례를 주관하는 동리의 어른도 아닌 변함없는 하나의 어린이로 남아 있는 것을 인식했을 때 그 놀이는 싱거워져서 시들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 같습니다.

어떤 활달한 아이가 주동이 되어 자기 또래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결혼식놀이를 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활달한 소녀가 그의 또래를 모아놓고 이제 장례식놀이를 하자고 열심히 말했으나 아이들은 끝끝내 놀아주지를 않았습니다. 즉, 흥이 나지 않은 것이지요. 이런 원망을 한 글이 유다 문헌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 이야기는 유다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을 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마태 11, 17; 루가 7, 32).

피리를 부는 것은 우리말로 '풍악을 울려라'라는 말과 비슷한 것으로, 결혼식의 홍을 돋우고 모두 모여 춤을 추기 위한 것으로 결혼식을 상징합니다. 악대(樂隊)가 피리를 중심으로 흥겨운 풍악을 울리면 거기 모인 온 동리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면서 신랑, 신부와 그 집안을 축하함과 더불어 스스로도 흥겨워서 그날을 즐기는 것입니다. 곡을 한다는 것은 물론 장례식놀이입니다. 장례식놀이를 하자고 제안한 아이가 어른이 하던 그대로 흉내내 처량하고 애절한 가락으로 곡(哭)을 하면 아이들은 따라서 슬피 우는 시늉을 합니다. 아이들이 따라하지 않으면 놀이는 결국 일찌감치 파장이 되어 각기 흩어져 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같은 간단한, 그리고 유다 사회에서 늘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왜 했을까?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이 풀이한 이야기들과는 달리 예수 자신이 이 말과 직결시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에게 먼저 눈을 돌려볼까요.

격언에 가까운 이 짧은 이야기가 이루어진 배경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 민족들이 모두 알 만큼 널리 사용되고 있는 표현을 바탕으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가 시골장터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접촉하다가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바라본 경험에 바탕을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예수는 이야기의 소재를 대부분 서민들의 일상생활 구석구석에서 찾아냅니다. 그 어느 쪽이었든지 간에 그는 구경꾼의 경험담이나 사람들이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속담으로 일정한 교훈을 주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 세대에서 쓰디쓴 경험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갈릴래아에서만은 많은 민중들이 예수를 따르고 열렬히 맞이했으며 또 그의 말을 듣고 동의한 듯한 장면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예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생활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대로라면 일반대중은 고사하고 자기의 생활을 모두 팽개치고 예수를 따라나섰다는 제자들마저 예수의 말을 듣는 듯하였으나, 실상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활의 변화를 보인 흔적도 별로 엿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힐책과 한탄 섞인 책망이 자주 나옵니다. 그 제자들은 저들 나름대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에게서 그것을 채워보려고 했는 데, 예수는 거듭 다른 방향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마지막까지도 예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까지 했을 것이며 또한 그가 점점 위기에 몰릴 때, 하나하나씩 다 떨어져 나갔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민중들은 그 나름대로의 집념은 버리지는 못했어도 예수의 뜻을 따르려고 했으나 밥술이나 먹고 직업과 사회적 지위가 안정된 사람들은 거의 예수의 말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했습니다만, 마음은 아팠을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와 라삐들에게 심한 욕을 퍼부으면서도 내심으론 저들이 자기 말에 귀를 가져다 대기를 원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한 쓴 경험을 안으로 삼키고 있던 예수는 바로 아이들이 노는 장면에서 거부당하고 있는 자기의 심경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흔적은 바로 그 위에 짧은 이야기로 된 세례자 요한에 대한 구절과 자기에 대한 무감각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를 외면하고 심지어 악의를 품기까지하는 이 세대에 대한 예수의 비판의 소리에 드러나있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그는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보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하고 말한다(마태 11, 18-19 :루가 7, 33- 34).

이 말은 너무나 실감이 나서 예수의 말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들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포함한 예수에 대한 세평이 예수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곡을 하고 예수가 피리를 불어도 같이 울어주거나 춤을 추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들을 빈정거렸습니다. 이러한 그 세대의 작태에 예수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하소연으로 반응합니다.

이 세평에 거짓말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세례자 요한은 금욕주의자, 은둔자로서 일반사람들과는 달리 식사를 제대로하지 않고 광야에 서식하는 메뚜기나 석청 같은 것으로 연명하거나 아니면 먹는 날보다 안 먹는 날이 더 많은 생활을 계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끄는 마력 같은 힘이 있어서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비꼬는 사람들은 그 힘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이 들린 것이라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악의에 찬 소문은 예수에게도 들씌워져 그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잡으러 오기까지 했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민중에게 영향력이 있고 마침내 민중을 선동하여 봉기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민중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유포한 말입니다. 그런데 순진한 사람들은 이러한 유언비어를 생각 없이 받아들여 그것이 자신의 판단인 양 입에 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에 대한 세평도 내용상으로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생활의 특성을 가장 간결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는 세례자 요한처럼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다 종교 전통에서 경건한 생활의 실천으로 알고 있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하는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중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을 사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 그런 기회를 만들어나갔습니다. 예수에게 식탁을 같이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데 생명줄과도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것도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의 직계제자 중에도 세리의 전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며, 복음서에는 세리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가 세금을 거두는 일에 세리가 앞잡이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종교적인 판단 이전에 민족적 원수로 간주되어, 우리가 일제 시대에 우리 국민을 학대하고 피를 빨아먹던 경찰, 헌병보, 특히 사상범을 다루던 고등계 형사들에 대한 감정과 비슷하게 세리들을 죄인 중에서도 첫째 손가락에 꼽았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면 종교적인 척도에서 규정하기 때문에 가장 배척하고 멸시해야 할 대상을 말할 때는 '죄인과 세리'라는 복합적인 말로 대신했습니다. 예수는 분명 이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그들과 조금도 거리를 두지 않고 사귀었으며,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왔노라"고까지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며 세리나 죄인들의 친구라고 한 표현은 분명히 예수를 경계하는 지도층이 유포시킨 악담입니다.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긴다는 원문의 뜻은 '먹고 마시는 데 게걸들린 사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중국의 공자도 사람들과 더불어 식탁을 같이하는 것을 즐겨해서 특히 제삿집에는 부지런히 드나들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일러 '상갓집 개'라는 악의에 찬 말을 유포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먹고 마시는 데 게걸들린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본뜻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데 중심이 있지 않고 민중과 유대를 깊이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의 운동에 대해서 지배층이 만들어낸 세평에 비판 없이 놀아나 예수에게 등을 돌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는 예수의 마음은 극도로 슬펐던 것 같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함께 울지 않으니까 흥이 깨져 손을 털고 맥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예수는 그 세대의 무지와 뿌리 깊은 만성병을 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절규나 예수의 말과 행동이 어린 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것이 아니고 정말 현실로 다가오는 위기를 알 리는 것인데, 그 세대 사람들은 흥이 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아이들처럼 반응이 없었습니다. 저들은 깊은 만성병에 빠진 것입니다. 저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이제 곧 심판의 저주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탄식과 같은 어조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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