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예수께서 무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너희는 날이 덥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이 때는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루가 12, 54-56)

농경사회에서는 날씨에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농부들은 땅과 하늘에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들은 그 생명줄을 땅과 하늘에서 받고 있으며 또 그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대지를 파헤치는 농부의 손길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찾는 어린애의 손길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땅을 파헤치고 삶과 직접 관계되는 갖가지 곡식과 나무들을 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작년에 떨어진 낙엽이나 마른 곡식대 등을 썩여서 그 땅에 묻어줍니다. 대지는 그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썩여 흙으로 동화시켜 땅을 비옥하게 만듭니다.

애기를 가진 엄마에게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여 젖이 더 풍부하게 나오게 하려는 그 심정으로 농부는 땅에 비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농부는 단순히 땅에 의존하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부여안고 생명의 양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한 후에는 하늘에 맡기듯이 하늘에 기대야만 합니다. 햇빛과 비가 골고루 내리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단순히 기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곡식에 따라서는 강한 햇빛을 가려주고 비도 도(度)를 넘으면 물고랑을 만들거나 물꼬를 터주는 등 사람의 손길이 가야 합니다. 또한 바람도 불어주어야 합니다.

바람은 '기'(氣)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기이동의 현상이라는 차원을 넘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소통하게 하는 숨결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이 '기'가 제대로 소통되지 않으면 모든 생물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뜨거운 햇빛, 그 밑에서 타는 대지, 극심한 폭우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땅과 사람들에게 큰 재해를 가져 다줍니다. 그것을 '기'가 바람이 되어 조화를 이루어줄 때만 우리가 말하는 천재(天災)를 피할 수 있고 동시에 생물이 자연스럽게 자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농부는 자연에 대해서 예민하고 오랜 경험을 통해 오늘과 내일의 날씨는 물론이고, 일 년 중 계절에 따른 날씨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농부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게 사람답게 사는 표본이라고 할 것입니다.

공담(空談)과도 같은 정치 이야기나 현실과 거의 상관없는 허공에 뜬 윤리도덕을 뇌까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이 자기를 기준으로 사람과 그 직업의 값을 매겼는데, 농부를 장사꾼이나 장이들과 더불어 천한 계층으로 간주해버렸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농부들 자신은, 농사를 짓는 사람은 '천하의 가장 으뜸이 되는 근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말 없는 반항을 하면서 일터로 당당하게 나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그 세대의 인간을 비판하는 데 농부들마저 싸잡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너희는 날이 덥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로 된다(루가 12, 54~55).

마태오에는 이 루가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너희가 저녁에는 하늘이 붉으니 날씨가 맑겠다고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리니 오늘은 날씨가 사납겠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원래는 루가복음의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도 틀림없이 농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통념이 된 천기(天氣)에 대한 예감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사람도 이와 비슷하게 내일의 날씨를 서슴지 않고 예고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 놀랍게도 고도로 발달된 기재를 쓰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히 맞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가 자주 언급하는 농부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언제나 신기하고 감탄스러운 것만을 말해왔고 농부를 비판하는 일은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지금까지 말한 범위 안에서는 농부들이 터득한 지혜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갑자기 방향을 바꿉니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이 때는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56절)

이것은 격렬한 책망입니다. "위선자들아!"라는 말로 시작한 것으로 보아서 이 이야기의 청중은 농부들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마태오에서는 예수를 시험하려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를 겨냥한 말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루가의 이 이야기에는 그들만을 책망했다고 금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바리사이파 등이 가진 기후에 대한 지식도, 그 본원지는 농부들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여기에서는 농부들이 배제될 수 없을 것입니다.

농부들은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뜻에서 삶과 가장 밀착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시사철을 늘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 안에 숨어 있는 규칙을 잘 알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에 순응해서 사는 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때 그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직감적으로 대응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농부들은 별 생각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대로 해 온 일, 작년, 재작년 그리고 그 전해에 일어났던 그런 일들이 계절에 따라 올 것이며 농부들은 그때마다 할 일이 무엇인가를 거의 자명하게 알고 움직입니다. 그러는 동안 중요한 것, 아니 절체절명의 사건이 도래하고 있는 것에 눈이 어두워져버릴 수 있습니다. 자연의 때는 잘 알면서 역사의 때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치명적인 무지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는 사람들을 위하되 한 편에만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로 사람을 나눈다면 예수는 언제나 가난한 자의 편에 섰고, 또 기득권자들이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소외시킨 자와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았거나 자부한 사람으로 나눈다면 예수는 언제나 죄인 편에 섰습니다. 아마 때리는 자와 맞는 자를 봤다면, 그는 무조건 맞는 자의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비판을 받는 예수를 변호하려는 사람들은 그에게 편파성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언제나 "하느님은 의로운 자나 악한 자를 불문하고 해와 비를 똑같이 내려준다"는 마태오 5장 45절의 말을 큰 방패처럼 내세웁니다.

예수가 편파적인 것은 사실이나 근거없는 맹목성을 드러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시대의 민중은 지주들을 빼놓으면 농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예수는 그들과 늘 친밀하게 지냈으며 소박한 그들의 생활 속에서 영원한 진실을 찾아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가 책망한 직접적인 대상은 지도자로 자부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등이었던 것 같으나 그는 농민들이 계절에 따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살아가는 동안에 역사적 시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찾아낸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허점이요, 동시에 맹점인 것입니다. 농민들은 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기후에 대한 예측과 대처방안을 잘 알고 있으며 또 그런 자연현상을 일반의 상식으로 확대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층이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그들의 생각을 조종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가리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또 저들이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끌고 가는지를 물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때'에 대한 의식이 없으니 주체적으로 자기결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저들이 '때'에 대한 눈을 뜰 때만이 낡은 세계의 변혁과 새 세계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실질적인 삶의 담지자이고,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농부들이 '때'를 인식하여 그날 그날 살면 된다는 만성병에서 깨어나기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농부는 두 가지 이유에서 '때'에 대해서 무감각해집니다. 하나는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므로 순환적인 생활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지배층의 교묘한 세뇌정책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면서 자신을 '예언자'라고 한 사람들 중에 사실은 군왕들의 우민정책의 손발 노릇을 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진정한 예언자들은 '때'는 위급한데 '평안하다, 평안하다'라는 말을 반복하여 민중들의 눈을 어둡게 한다고 저들을 신랄하게 공격한 예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상생활에 젖어 위기를 볼 눈이 없고 지배자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눈이 없이 자기 삶을 살지 않고 저들이 만들어준 틀 속에 사육되는 동물 같은 생활에 젖어버린 다수가 있는 한, 이 세상은 결국 부패하고 저주를 받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는 서글픔마저 감돕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