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 제자가 선생만큼 되고 종이 그 주인만큼 되면 만족할 것이다.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 불렀으니 그 집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랴!(마태 10, 24~25)

우리도 많이 들어왔지만,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루가에도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다 배우고 나면 선생만큼 될 것이다"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즉 아무리 제자가 배우고 또 배워도 스승만큼 되면 잘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는 것은 위의 말과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봉건체제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사실은 유다 사회에서 스승은 왕과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더할 나위 없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동양에서는 스승과 같이 걸을 때 세 발짝 뒤에 처져서 걸어야 하며 스승의 그림자도 감히 밟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 하다는 말은 관습과 비교해서는 상당히 여유 있는 표현입니다.

봉건사회에서 '종'이라는 것은 사람이기 전에 하나의 노동력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은 그를 죽이고 살리는 권한까지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 마당이니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라는 말은 이미 그 관계를 분명히 밝히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선생만큼 되고 종이 주인만큼 되면 만족할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정입니다. 지식만으로 보면 제자가 스승 만큼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아무리 많이 배운들 절대로 제자의 위계가 스승보다 높다거나 같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종이 주인만큼 된다'는 것은 더구나 말이 되지 않습니다. '종'과 '주인'은 신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분은 하늘이 주었다고 믿던 그 당시에 종이 어떤 계기로 주인만큼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종은 여전히 종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스승만큼 되고 종이 주인만큼 되는 현실이 온다는 것은 혁명이 아니고는가능하지 않습니다.

세계 역사상 몇 차례의 혁명을 거쳐 이 신분의식이 해소된 것을 우리는 압니다. 아니, 아직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아직도 작위제도가 그대로 인정되고 있는 나라도 있고, 왕이 수여하기도 하며, 법적인 위치는 인정되지 않아도 그 이름 앞에 귀족신분을 표시하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짧은 이야기의 목적은 낡은 질서를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되면 만족할 것이다"라는 말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제자와 선생의 관계, 종과 주인의 관계를 어떤 다른 관계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뒤로 미루겠습니다. 다음에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으니 그 집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라는 은어 비슷한 이야기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베엘제불'은 유다 사람들 사이에서 민속종교의 대상으로 우리 말로 하면 '귀신의 왕'에 해당합니다. 그 말은 '높은 집의 주인' 또는 '신전의 주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민속신앙은 더 세분화되어서 산에는 산신(山神), 물에는 수신(水神) 등으로 그 고유영역을 주관하는 주권자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귀신'이란 일정한 지배영역을 가진 것이 아닌 인간생활 전체에 관여하는 묘한 역할을 하는 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민속신앙을 야훼신앙과 대립시켜 그것을 마침내 '사탄의 왕'과 일치시키게 됐습니다. 그리고 민속적인 언어로는 '베엘제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경계하는 종교 지도층들은 그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즉 사탄의 힘에 의해서, 사탄의 앞잡이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의 행태를 모두 '사탄의 조화'라고 볼 것이고 또 그를 아무리 박해하더라도 민중들은 오히려 사탄과의 투쟁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를 귀신이 들렸다거나 미쳤다고 소문을 퍼뜨린 것도 결국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리송한 이야기의 뜻은 분명해집니다.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으니"라는 말 속에는 집주인을 사탄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박해했으니 그 집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얼 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집주인은 누구이며, 그 집사람들은 누굴까요? 이미 말한 대로 베엘제불이라는 모함을 받고 박해를 받아 죽음에까지 이론 것은 예수 자신입니다. 그는 저들의 터무니없는 모함에 대해서 "만일 내가 베엘제불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결국 집안싸움을 한다는 말이냐? 그러면 그 나라가 설 수 있겠느냐?"(마태 12, 24 이하 참조) 하며 저들의 자가당착에 대해 빈정대듯이 반응했습니다. 물론 그 말은 당치도 않은 음모이며 날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예수에 대한 세평을 다시 환기시키면서 예수가 베엘제불이라는 전제 밑에서 박해를 받았으니 이 세상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할지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것은 분명히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유일한 스승으로 자부하고 또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한 다음에는 주님(kyrios)이라고 믿고 자신들을 종(doulos)이라고 믿었던 것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입니다. 여기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 세대가 예수의 민중들을 박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런 상황에서 그들을 이끌고 가는 우리 주인께서도 베엘제불이라는 누명을 쓰고 박해를 받았는데, 우리가 박해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느냐? 우리 스승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박해를 받았는데 그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제자들인 우리가 이 정도 박해를 받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 아니냐? 일개 종에 불과한 우리가 주인과 똑같은 박해를 받아 주인의 반열에 참여하게 됐으니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무엇이냐?"라고 자신들을 위로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목적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 자신이 했는지 아니면 그가 처형당한 이후에 교회를 이끄는 누군가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단 한 번도 '종'이라고 불러본 일이 없고, 스스로를 '주인'이라고 부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외는 있기 때문에 예수의 말이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박해를 받은 후에도 박해를 당하는 예수의 민중들을 위로하려고 예수의 수난을 상기시키며 바로 그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그와 하나 됨을 인식한 제자들이 한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짧지만 그 세대의 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늘같이 믿던 '주님'이 그렇게 무참하게 지배자에 손에 죽어갔습니다. 그를 박해하던 그 손이 한때 그를 배반했다가 그가 절대로 죽지 않았다는 신념을 안고 다시 뭉쳐 그가 가던 길을 가고 있는 저들을 여전히 박해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예수를 죽인 빌라도의 박해는 2,000년 전의 예수를 죽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세력은 이름과 장소를 바꾸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력을 쥐고서 같은 불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인 피 묻은 손을 씻으며 그 같은 잔인한 일을 더 이상하지 않겠다는 어떤 신호도 없습니다.

이 세계는 분명히 저들이 예수를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사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인간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긴긴 세월 그 자리에서 그렇게 못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둔 책임은 만성병에 오염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예수의 그 같은 비극적인 수난으로 불의한 세력의 악랄한 박해의 손, 피비린내 나는 학살행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한, 예수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그의 제자들도 그런 각오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저들은 예수가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정의로운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세력은 너희 대(代)에서도 여전히 상존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의 명령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의 망령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가 스승같이 되고 종이 주인같이 되는 길은 세상이 뒤집히면 저절로 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확신을 가지고 전진하던 예수의 민중의 시대와 예수시대 사이에 결정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가 스승같이 되고 종이 주인같이 되었다는 인식은 바로 예수가 당한 그 수난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주체의식입니다.

바울로가 자진해서 예수의 십자가에 참여하여 그와 똑같이 그의 부활에 참여하겠다는 의식이 이들의 자의식이 되었으며, 그것은 보이지 않는 도도한 물결이 되어 표면상 변함이 없는 땅 위의 세력들은 언젠가는 무너지고야 만다는 신앙에 불탔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날을 '도래', 즉 파루시아(parusia)라고 불렀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