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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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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이다(마태 5, 13).

이 이야기는 비유에서 제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역할을 빛 또는 소금과 비교하여 가르쳤으니 비유가 아니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다른 이야기와는 달리 이것은 속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소금과 빛 이야기는 꼭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금과 빛이 따로따로 취급된 경우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의 역할은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금은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한 물질입니다. 염분은 사람의 몸에도 필요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당시에는 음식을 오래 보존해두고 먹으려면 소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애용하는 방부제 역할을 담당한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 종교적 가치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다교에서는 성전제단에 소금을 반드시 갖추어 놓았습니다(레위 7, 13). 그것은 소금 자체가 썩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다른 것도 썩지 않게 하므로 '정결'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금 그 자체가 변치 않는 탓도 있고, 다른 것을 변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계약'을 맺을 때에도 사용했습니다(레위 5, 13절 이하). 그리고 팔레스틴 같은 열대지방에서는 소금이 더더욱 필요했습니다. 아마 먹을 것 다음으로 귀중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로마도 소금과 해(太陽)만큼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부정한 것은 썩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아직 균(菌)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대에 사람들은 균에 의해 살이 썩어들거나 죽어가는 것을 악령의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을 물리치거나 악령을 쫓는 방법으로 소금을 뿌리는 관습을 많은 민족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저들의 몸의 성분이 소금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들이 세상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결국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짠맛을 잃는다는 말인데, 소금이 짜지 않으면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불가능한 비유입니다. 이 말은 사실 역설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소금이 제 구실을 못하면 사람들에게 멸시와 소외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와는 달리 '소금'과 관련시키지 않고 제자들을 '빛'에 비유한 예가 여러 곳에 있습니다(마태 5, 14~15; 루가 8, 167, 33).

고대로 울라갈수록 '빛'에 대한 필요성은 절실했습니다. 빛은 그리움의 대상일 뿐 아니라 마침내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종교를 갖지 않은 민족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기가 발견되기 이전, 그리고 석유가 개발되기 이전에 빛을 찾아 헤맨 인간의 노력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있어왔습니다. 인간은 빛을 찾아 갖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빛을 내는 것과 생존에 직결되는 식품이 상충되던 시기, 즉 빛을 내기 위해 귀중한 식유(食油)를 썼는데, 팔레스틴에서도 역시 식유로 쓰는 올리브 기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자연 아낄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만주의 농민들이 수숫대에 쌀겨를 발라서 나무로 허술하게 만든 등대에 걸치고 그것에 불을 붙여 등불을 대신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 때 쓰는 향나무를 가늘게 쪼개서 등잔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팔레스틴의 서민들의 경우는 빛에 대한 갈구가 더했습니다. 저들은 집이래야 창문 하나 없는 단칸방이어서, 낮에도 캄캄했습니다. 그러니 빛이 없으면 늘 밤과 같은 생활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엇으로나 방에 빛을 내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방 가득히 환희가 차는 것같고, 심하게는 '죽음의 세계'에서 '삶의 세계'로 옮겨간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보다 더 높은 위상이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 진한 인정(認定)이 어디 있겠습니까!

등불을 켜는 것은 곡식을 되는 말(斗) 같은 것으로 덮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등잔걸이 위에 올려놓아 온 방을 비추게 하여 함께 앉은 사람들을 보며 일을 하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빛이 빛의 구실을 하려면 봉화처럼 높이 들려야 합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역시 너무도 평범한 일상생활을 소재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밑바닥에서 사는 서민의 생활을 말입니다. 아무리 소금이 귀하고 빛이 소중해도 권력을 손에 틀어잡은 사람이나 부호(富豪)들은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은 돈으로, 권리로 그런 것을 모두 확보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어릴 때부터 경험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도 반복되면, 공기(空氣)가 사람에게 절대적인 것이지만 언제나 잊고 살듯이 무관심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항상 그랬듯이 일상성이 만들어준 두터운 표막(表膜)을 깨고 그 소중함을 다시 환기시킵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 썩어가는 그 '때'에 대한 위기 의식이거나 아니면 임박한 하느님 나라 앞에서 그의 제자들의 막중 한 사명을 생각한 것이 계기가 됐을 수도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만도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세 복음서에 병행되는 것까지 합해서 무려 121회나 나옵니다. 이것은 지금의 세상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보았는지를 반영합니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데서 주제만큼이나 '심판'이란 말을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으며, 하느님의 나라를 말하는 서두 아래 심판만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행태 중에는 병 치료 하는 것이 가장 많은데, 그중에 소경을 눈뜨게 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을 말하는 중에 '소경을 눈뜨게 하는 일'을 꼭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빛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의 눈을 "몸의 빛"(마태 6, 2~23)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눈은 빛을 받아들이는 창문입니다.

예수는 이 세대(eon)를 악마가 지배하는 세대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치유행위는 바로 악마추방의 구체적 행위였습니다. 그에게는 악마추방과 하느님 나라 도래가 동전의 두 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가 귀신을 쫓아내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다"(마태 2, 28; 루가 11, 20)고 말합니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는 어둠 자체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도래의 약속은 한 줄기 빛을 받아들이는 창(窓)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 든 사람이 우글거리고 가난한 사람이 절대다수인 것은 불의한 자들이 윗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썩게 한 탓입니다. 무력으로 약소민족을 침범하여 수탈하고 강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자기 백성을 등쳐 먹는 데 앞장선 자들이 민족을 지배하는 자리에 앉아 있고, 거룩해야 할 성전마저 이 같은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면, 이런 것들이 바로 세상을 썩게 하는 병균으로서 당장 없애버리지 않으면 그 화(禍)가 전체에게 미칠 것입니다.

이 같은 현장에서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중책을 맡기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인정은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같은 일의 두 가지 표현일 뿐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자기를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소금이 소금의 구실을 다하고 빛이 빛으로 제 구실을 한다는 것은 똑같이 자신을 소모시키는 일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분해해서 해체시킬 때만 부패를 막고 제 맛을 낼 수 있듯이, 빛은 결국 자기를 태워 없애는 희생의 산물입니다. 기름이거나 석유이거나 자기를 소모해야 빛이 됩니다.

지구에서는 태양이 빛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만물을 살리는 생명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실로는 태양이 계속 자기를 파괴하는 데서 오는 산물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는 등불의 빛을 보면서 타들어가는 기름을 보았고 썩지 않고 맛을 내는 음식을 맛보면서 자기를 해체시키는 소금을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의 길을 분명히 의식하고, 그를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그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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