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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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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내 몫을 주십시오.'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며칠 후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낭비했다. 돈을 쓸 대로 다 썼는데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 아주 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는 제정신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그 많은 일꾼은 양식이 풍부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겠구나. 나는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 이렇게 말하겠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일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는 일어나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가 집으로 가려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하여 견덜 수 없어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하여 '어서 좋은 옷을 꺼내어 내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손에 끼우고 신을 발에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잔치를 베풀고 이날을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이왔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그래서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큰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려오므로 종 하나를 불러 '이것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보았다. 종이 대답했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고 하여 아버지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달랬으나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저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며 한 번도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는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지내느라고 아버지의 재산을 다 먹어버린 그 아들이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군요.' 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아 너는 늘 나와 같이 있고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인데 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을 수 있느냐?"(루가 15, 11-32)

이 이야기는 루가에서만 전하는 것으로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교에서 나온 버릇으로 선교의 목적을 앞세운 풀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그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라는 이름에 반대하고 '한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제목을 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없는 아들이 없듯이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라는 존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냐, 아들이냐'로 갈라놓는 것은 옳지 않고 둘의 관계를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두 아들 중에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내 몫을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유다 사회는 다른 데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가부장제사회였으나, 재산분배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정이 있어서 아버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둘이 있는 경우면 아버지는 막내에게 재산의 3분의 1을 상속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막내아들은 바로 이 규정대로 그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줄 의무는 가졌으되 그 시기는 아버지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관례로라면 결혼이 그 기점이 됐습니다. 결혼 후 분가를 요구할 경우 그의 몫을 주어 자율적으로 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아버지의 판단에 따라 그 시기는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로 보아 그 아들은 아직 미혼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18세에서 20세까지를 결혼 적령기로 삼고 있었습니다. 물론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20세를 초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일 이 아들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직 미성년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그의 요청을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대로 그의 분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물론 그 아버지는 아들의 목적을 물었겠지요. 그리고 타당한 요구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순순히 그의 요청에 응했을 것입니다. 그 판단이 무엇이었든 그는 아들에게 자율권을 주었습니다. 즉, 그의 자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아들은 오래 전부터 계획한 듯 며칠 사이에 자기 분깃을 다 거두어 갔다고 했는데, 그것은 돈으로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돈을 챙겨 가진 그는 먼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영역에서 멀리 떠나 자립하겠다는 의사표시일 수도 있고, 향락의 장(場)인 도시를 찾아갔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그가 독립하여 생활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그 돈으로 향락에 빠져든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받은 재산을 전부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일대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흉년이 들면 산업사회에서 겪는 경제공황보다 민심이 더 각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돈 한 푼 없는, 이방에서 온 떠돌이를 누가 동정하리라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던 그는 마침내 어떤 집에 돼지를 치는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더할 수 없이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다 사람은 돼지를 가장 불결한 동물로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아들은 이미 자존심 따위는 물론이요, 굶주림 앞에서 사람의 위신마저 포기해야만하는 궁지에 내몰린 것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로 보아 일삯을 정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기식하며 밥술이나 얻어먹는 정도였겠지요.

흉년이 든 탓도 있겠지만 그 주인도 강팍한 사람이었던지 끼니도 제대로 얻어먹을 수 없었습니다. 오죽 배가 고팠으면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구했을까요! 그러나 그는 돼지에게 주는 쥐엄열매도 얻어 먹지 못했습니다. 한국에도 '개밥에 도토리'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쥐엄은 그나마 도토리보다는 맛이 있어 굶주린 돼지도 그에게 먹을 기회를 주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나봅니다. 그렇기에 유다 라삐의 격언 중에 '쥐엄열매를 먹어봐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회개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이 아들은 영영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몰락한 거지 꼴로 돌아가야하는 그의 행로는 그야말로 실패자의 말로, 그것입니다. 멀리 있는 집을 향해 걸식하며 돌아가는 그에게는 아무런 권리의식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자기 몫은 다 찾아갔고, 그 재산을 탕진하여 아버지를 배신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들임을 포기하고 기식만하는 한 종으로 받아주면 그 이상 원(願)이 없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돌아갑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멀리 보이는 집 앞에 아버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인데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단숨에 그에게 달려와서 측은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며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너무나 뜻밖에 자신을 반기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돌아 오는 내내 '일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릴 생각이었으므로, 이 말에는 그런 뜻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아들이 돌아왔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그는 당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새 신을 신겨주었습니다. 이것은 그 아버지가 복권의 의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의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돌아온 아들만 있지,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떠나가서 방탕한 짓으로 재산을 탕진한 아들은 더 이상 없습니다. 과거는 없고 만나는 현재뿐입니다.

그는 이 기쁨을 홀로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동이나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처럼 그는 큰 잔치를 베풀고 온 동리사람과 그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은 그 만찬의 풍요함을 최대한으로 나타낸 것이고,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그의 변(辯)은 그의 기쁨을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에게는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이어졌고, 아들이 살아온 것이 아버지에게는 잃은 것을 다시 찾은 것으로 연계됩니다. 결국 그 아들의 실패가 아버지의 실패요, 아들의 재생이 아버지의 재생인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 같으면 이쯤으로 끝내도 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장을 바꾸어서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분석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악센트가 한 곳에만 있는데 이 이야기는 둘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음에 계속되는 이야기는 후에 사람들이 첨가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내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이야기를 묶어놓은 것이 아니라 한 이야기의 연속이며 유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 동안 집에 있으면서 아들의 임무를 다하던 맏아들이 밭에 나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 종들에게 내막을 듣고는 분노합니다. 집에도 들어오지 않으려는 맏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에게 그는 이렇게 항의합니다. "저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며 한 번도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는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지내느라고 아버지의 재산을 다 먹어버린 그 아들이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군요." 이것은 일단 정당한 항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형평 원리를 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 맏아들의 아들 됨의 허상이 폭로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아버지를 오랫동안 섬긴 것이 아버지를 중시해서가 아니라 보상을 전제로 한 계산된 행위였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참섬김이란 섬기지 못하는 자기를 한탄할 때만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못다하는 사랑의 자책으로 남는 것처럼 섬김 역시 그러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하기보다는 결국 자기 권리를 쌓아온 셈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그는 아버지와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는 하나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할 수 없는 동거자에 불과했습니다. 참된 아들이었다면 아버지의 기쁨이 그대로 자기 기쁨 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을 폭로합니다. 일은 열심히했어도 장자 됨의 권리만 의식하는 동안 그의 인간성은 병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질투만 남고, 돌아온 동생을 기뻐하는 형의 심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시종 돌아온 그를 그 아버지와 연결시켜 '그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자기 동생'이라는 말은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반대로 '동생이 돌아온 현재'에 있지 않고, '자기 몫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 받은 재산을 탕진한 과거'에 매여 있습니다.

예수가 이 이야기를 하며 오랫동안 주목한 것은 아버지라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은 모두 그렇지만 아버지도 두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식과의 공동운명체로서의 아버지, 그러므로 이 아버지는 아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아버지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아버지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은 어떤 인위적인 것에 의해서 자연스러운 자기를 억누르고 당위성으로 무장한 아버지입니다.

그것은 관습일 수도 있고 도덕률일 수도 있고 종교적 계명이나 어떤 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런 것들이 '이래야 돼', '이래서는 안 돼'라는 철칙을 절대화하여 자식에게마저 위장된 자기로 일관하는 그런 아버지입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상류사회일수록 이런 유형이 많습니다. 특별히 유다 사회에서는 유다 종교의 계명이나 관습에 따라 인간관계가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기풍이 엄할수록 인간관계는 인위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유교에 젖은 사람들이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하기 전에 '삼강오륜'이라는 틀을 고수하고 그 틀 안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두 가지 형의 아버지 중에 예수는 첫째 얼굴의 아버지를 참된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는 모든 제도나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을 등에 업은 계율까지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그것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을 확고하게 밝히고 있습니다(마르 2, 27). 이것은 그가 사람을 대하는 행태에서 자세히 드러납니다. 그는 윤리든 종교든 관습이든 어떤 틀을 상정하고 그 안에서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건없이 사람을 상대할 수 있었고 그의 기쁨과 슬픔을 액면 그대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기본행태는 그가 생각하는 아버지 상(像)과 맥을 같이합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의 과거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무조건 그를 맞아 기쁨의 만찬을 베풀 뿐 아니라 앞으로의 서약 같은 것을 조건으로 세우지 않는 것도 예수가 민중을 대하는 행태와 꼭 같습니다.

그가 믿는 하느님도 바로 이런 '모습'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기존 가치체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맏아들의 행태가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맏아들의 항변에서와 같은 그런 형식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로 보입니다. 그 시대에는 라삐유다교, 그중에서도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유다교가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마태오에는 바리사이파가 주도한 유다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하는 예수의 말이 길게 실려 있습니다. "위선자! 라삐와 바리사이 사람들아! 네게 화가 있으라. 까닭은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한다. 위선자! 성전과 그 안에 있는 금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지도 볼 줄 모르는 맹인들아! 박하와 회향과 근채 등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의 핵심인 정의와 사랑과 신의를 무시하는 놈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아! 이 회칠한 무덤아!"(마태 23장 참조) 등등 엄한 힐책이 그것입니다. 인위적인 관습이나 사고나 제도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가로막는 것을 예수는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바로 이런 위선을 초월한 모습입니다. 그는 자유인입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로막는 어떤 것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체면이니, 형평이니 하는 것 따위도 그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집을 나가 그가 받은 분깃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 꼴로 돌아온 아들의 죄와 그의 회개에 초점을 두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은폐되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맏아들의 편에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맏아들의 허상을 깨고 있으며, 바리사이파적인 요소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한 아들을 배제하거나 중오하지 않고 설득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장애물에 의해 포물선을 그으면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관철됩니다. 그러므로 분노하는 맏아들을 타일러 "내 재산은 모두 네 것인데, 이 사실은 변한 것이 없지 않느냐! 너는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 참여할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것으로 그칩니다. 맏아들이 태도를 바꾸어 만찬에 기꺼이 참여했다는 말도 없고 돌아온 아들이 회심하여 부모를 섬기면서 잘살았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 뿐입니다. 이 아버지의 상은 예레미야서 31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마음을 그린 노래를 연상시킵니다.

오냐! 에브라임은 내 아들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나의 귀염둥이다.
책망을 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잊은 일이 없었다.
가엾은 생각에 내 마음은 아프기만 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하는 말이다.
푯말을 세워두어라.
갔던 길을 잊지 않도록
길목마다 표를 해두어라.
처녀 이스라엘아, 그 길로 돌아오너라!
너희가 살던 이 성읍들로 돌아오너라(20~21).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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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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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치의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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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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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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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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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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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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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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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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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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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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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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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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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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