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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혀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려두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길로 지나가다가 그 사람에게 와서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감람유와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며'이 사람을 돌보아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소' 하고 말했다"(루가 10, 1 30~35).

이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유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라는 유서 깊은 도시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과 예리고는 27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 있는 인적이 드문 광야에 강도 떼가 잘 나타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다 벗기고 몹시 때려서 '거의' 반죽음을 시켜 내버리고 갔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출발한 곳과 가려는 도시 이름까지 밝힌 것을 보아 어떤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종족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왜 그 길로 가고 있었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어서 그가 어떤 상태에서 강도들에게 당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만일 그가 장사꾼이었다면 가진 물건이나 돈 따위를 다 빼앗겼을 것이고, 옷이 깡그리 벗겨지고 반죽음이 되도록 구타당한 것으로 보아 반항을 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쯤 죽어 있었다는 표현은 극히 간결하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가다가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돌린 채 그대로 지나가버렸습니다(루가 10, 31).

'피해서 지나갔다'는 표현을 보아 적어도 약간의 갈등 속에서 주춤거리다가 결국 가던 길을 그대로 가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다음으로 레위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 역시 앞 사람과 꼭 같이 피해서 제 갈 길을 그대로 갔습니다. 레위 사람이란 신분적으로 사제계층입니다. 제사장 역시 그러합니다. 이 둘은 모두 유다교의 핵심인 예루살렘 성전에 속한 사람들로 하느님을 섬기는 의식을 집행하여 먹고 사는 직업적 종교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토라(모세 5경)에 있는 신의 계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유다교에는 토라에 있는 두 계명, 즉 '하느님을 사랑하라'라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직업 종교인만이 아니라 유다인들이면 누구나 다 아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관습으로 이 두 계명이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행위가 이웃을 희생시켜야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이웃사랑에 충실하려고 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예수가 바리사이파를 비판하는 한 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다교에는 '코르반'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재물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맹세한 재물은 사람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십계명에도 명시된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면 부모가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나 그 부모에게 바치는 것이 자식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무를 피하기 위해서 그 부모에게 필요한 재산을 '코르반'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즉 부모를 섬겨야 하는 의무에서 도피하는 간교한 방패로 쓰는 것입니다. 예수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이 같은 간교한 행위를 신랄히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두 계명을 다 충족하는 듯한 구실을 찾았으나 사실은 두 계명을 다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사제계급의 일차적인 의무는 성전에서 예배의식을 집행하는 일입니다. 사제계급은 그런 직무에 따른 발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은 결국 성전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하고, 진심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이 주장이 일반에게도 어느새 통념이 되어 사제는 예배의식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마치 이웃사랑의 계명에서 면제되는 듯한 오해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서로 양립하지 않고 분리시키는 것을 상식으로 알기에 이르렀습니다.

강도 만난 이 피해자를 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사제계급의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위해, 즉 성전과 관계되는 일일 경우에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자기 행위에 대한 명분으로 삼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한 종교인으로서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둔 채 피해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은 그 길을 지나다가 강도 만나 신음하는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가 짐승을 타고 갔다고 했는데, 팔레스틴에서 흔히 타고 다니는 '노새'였을 것입니다. 그는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에 감람유와 포도주 같은 것을 지니고 약간의 돈도 가지고 있었겠지요. '사마리아 사람!' 이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상징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역사적 계기가 여럿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때 사마리아는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고, 예루살렘은 유다 지방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저들의 정신적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빌론 신흥제국이 유다를 공략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도 대파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유다의 많은 고위급 지도층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바빌론을 물리치고 중동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페르시아에 의하여 수세기 후에 특별한 계기로 되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바빌론제국 왕에게서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성전재건은 바로 유다 민족의 재건을 의미했습니다.

처음에 유다 지방이 점령될 때 사마리아 지방도 함께 점령됐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수도는 이미 수도가 아니었던 탓에 포로로 잡혀 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대신 바빌론의 침략정책으로 바빌론 사람을 위시해서 다른 이방 민족들을 사마리아 지방에 이주시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면서 외국 사람들과 혼거해야 했습니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다 지도층이 성전 재건에 나서려고 할 때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같은 야훼를 섬기므로 기꺼이 이 재건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지도층들은 저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증오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저들이 이미 혈연적으로도 혼혈이 되었고 종교적으로도 이방 종교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저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을 앙숙으로 만든 구체적인 계기입니다. 그래서 그후로 잦은 충돌이 있었고,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해도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거치지 못하고 멀리 리비아로 해서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싸잡아서 부정한 것들로 매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사마리아의 그리짐 산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한 또 하나의 성전이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원수 관계가 종교적으로도 굳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이 짐승을 타고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무조건 그를 살리려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감람유를 바르고 포도주를 발라 상처를 싸매 응급조치를 한 다음 자기가 탔던 짐승에 태워 그 근방 동리의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쯤 죽은 사람이었으니 하루 이틀 돌본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 이제는 2, 3일이면 완쾌하리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계속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고 혹시 돈이 모자라면 돌아올 때 꼭 갚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한 '데나리온'이 정상적인 하루의 일삯이니까 이런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상인이었다면 그는 상당한 손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계획했던 모든 것을 중단하고 이름도 모르는 이 사람을 위해 시간과 돈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도 사마리아 지방을 일단 구별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제자들을 파견할 때 "이방에도 그리고 사마리아에도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이라 한 말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갈릴래아 지방 사람들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갈릴래아 지방에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의 비교적 큰 충돌사건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쳐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일행을 방해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예수의 제자 중 몇 사람은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다 타 죽게 합시다"라고 흥분했는데, 이것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일반 유다인의 감정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한 이유는 저들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또 예수 자신도 그렇게 흥분하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었다고 했습니다(루가 9, 55). 예수가 사마리아 도시를 싫어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사마리아 도시들이 완전히 그레꼬 로마화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마리아 사람 자체를 소외시켰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과 하나가 되려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요한복음은 저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림처럼 아름답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느냐였지 민족이나 역사의 찌꺼기로 남은 계층 따위가 문제 됐을 리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제자의 흥분에서 보는 대로 유다인 대다수가 가진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결의한 듯합니다. 이러한 그의 의식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성역화하고 신분적 계급인 종교인들을 높이는 통념을 사마리아 사람과 대결시킴으로써 두 가지 잘못된 편견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민족 내지 지역감정을 다룬 이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희랍 여인의 이야기(마르 7, 24 이하)와 더불어 특이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이야기를 초대 제자들은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를 궁지에 몰기 위해 이런 질문, 저런 질문을 하다가 "누가 나의 이웃이냐?"라고 한 질문에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저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이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누가 내 이웃이냐'라는 질문과 이 이야기는 상관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이 이야기로 질문 자체의 잘못을 바로잡았습니다. 대체로 질문은 자기들이 듣고 싶은 대답을 끌어내려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대답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질문을 새겨보십시오. 그러면 그 중심이 '나'라는 것을 곧 발견할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유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할 때에는 벌써 전제를 깔았습니다. 즉, 자기 민족(유다 민족)만 이웃이고 그 외(외국인)는 원수라는 전제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배타적 민족주의를 오래도록 고수해 왔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듯한 예수를 시험해 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의 이야기는 그 주체를 뒤집어놓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가 아니라 누가 강도 만난 '너'의 이웃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렇게 '나'에서 중심 이 '너'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 '너'도 막연한 '너'가 아니라 지금 수난을 당해 이웃의 구원의 손이 절대로 필요한 '너'입니다. 이로써 민족이나 계층의 구별 따위가 자연히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이야기를 한 다음에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이미 대답을 결정하지 않습니까? 유다 민족의 정신적 상징이라고 하는 저 사제 족속들, 바로 수난당한 그를 피해간 저들이 이웃입니까? 아니면 지금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이 어느 민족 어느 지방 사람인지 가려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 신음소리에 응하여 재빨리 손을 써서 그를 구해주는 사람이 이웃입니까? 이로써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은 안 된다는 이의를 내세울 틈도 주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 예수가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곧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의 이웃'이라고 했다면, 그의 적대자들은 돌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자체가 던지는 질문 앞에 저들이 진실했다면 맹목적인, 배타적인 감정을 크게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이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해석한 전통을 따르는 생각이 옳은지를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에서 이미 중세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서를 알레고리(은유)적으로 해석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은유적인 질문은 이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합니다. 정말 이것이 예수 자신이 한 이야기라면 자기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말했을까요? 예수가 언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예수 자신이라고 고집하려면, 이것은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를 따르던 자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이야기에서 주역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봅시다. 주역은 의외로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느 민족인지도 직업도 알 수 없고,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반쯤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그가 한 것이 있다면 비명 또는 절규뿐이었을 겁니다. 이것을 무대라고 가정해봅시다.

그 무대 한가운데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제사장은 그를 보고 처음에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 멈칫했다 얼굴을 돌리고 못 본 듯이 지나가 버립니다. 다음의 레위 사람도 그와 똑같이 무대 뒤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들의 역할은 엑스트라와 같은 단역입니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 사람이 노새를 타고 등장합니다. 노상에 쓰러진 알 수 없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자 노새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가서 상처가 심한 것을 확인하고 짐승에게 실었던 감람유와 포도주를 갖고와서 그의 상처에 발라주고 무엇으론가 붕대를 만들어 그를 싸매주었습니다. 여기서 일단 제1막은 내립니다.

다음에 제2막이 열립니다. 이번엔 한 여관이 무대입니다. 여전히 중심은 강도 만난 그 사람입니다. 그 제사장도 레위인도 물론 등장하지 않습니다. 등장한다면 여관집 주인이나 심부름꾼 정도였겠지요. 사마리아 사람은 행동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여러 날을 묵으며 상처를 닦아주고, 음식을 갖다주는 등 그를 살려내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진정한 이웃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그러면 '이가 바로 예수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으로 하여금 참된 이웃이 되게 한 장본인은 누구입니까? 일상생활을 중단시키고 그를 비상한 사람으로 만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수난당한 사람 자신이 아닙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큰 계명에 속한다면 그를 이 같은 이웃이 되게 하고, 이웃이 될 기회를 준 장본인은 바로 수난자 자신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진젠도르프(Zinzendorf)의 회심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부유한 귀족인 진젠도르프는 여유롭게 생을 즐기다가 어느 날 십자가에 처형돼 피 흘리는 예수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 그림 아래 '나는 너를 위해서 이렇게 피 흘리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이후 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 진젠도르프를 '진젠도르프'로 만든 이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남을 돕기 위해 자기 일상생활을 희생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는, 저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위치에 있는 예수의 상(像)이었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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