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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 하느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요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서서 혼자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나는 다른 사람들같이 욕심이 많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니며 또 이 세리와 같은 사람도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있으며 내가 얻은 것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하고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 앞에 옳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이 세리였고 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었다(루가 18, 10-14).

이 이야기는 기도하는 두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으로서 당대에 유다 사람들의 종교적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란 말은 '구별한다'는 뜻으로 신분적 종교귀족이 아니라 율법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그룹을 만들어 국민운동에 앞장서서 지도층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 수는 최고 4,000명까지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회원이 되려면 지식이나 행실이 그에 알맞는 조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예수시대와 그 이후 유다 전쟁이 일어나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어 사제들이 설 자리가 완전히 박탈됐을 때, 오히려 저들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유다 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들은 밤낮없이 율법을 바탕으로 나라를 잃어버린 유다 민족의 생활규정을 만들고 민족적 동질성을 일깨워주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저들이 침전된 국민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이 같은 그룹을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여 한동안 위정자, 즉 왕에게 큰 미움을 산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들은 굴복하지 않고 운동을 계속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저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적대해야 결국 왕권에 손해를 가져올 것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왕은 임종시 그의 왕위를 이을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 저들과 제휴할 것을 권하고 죽었습니다. 그 후 여왕이 된 알렉산드라(주전 75~67년)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저들과 타협하고 왕권비호 세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때부터 바리사이파의 권한은 막강해졌습니다. 저들은 왕의 정책에 관여하고 저들이 펴는 국민운동은 국가적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야에서 운동하던 저들이 여권에 속하면서부터 운동의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국민을 위한 국민 운동이라기보다는 국민의 행동을 감시하고 정죄하는 검찰과도 흡사한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주동이 되어 만든 기준에서 '죄인'을 가려내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죄인'이란 바로 이들에게 낙인 찍힌 사람들입니다. 또 날이 갈수록 저들은 더욱더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많은 계율을 강요하는 입장이니 만큼 계율 실천에 앞장선다고 자부하는 저들도 그 법규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시위하는 식으로 위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국민생활의 3대 생활실천사항으로 기도와 적선과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의 금식을 권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소리 높여 기도하고, 금식하는 날에는 머리를 일부러 헝클어뜨려 창백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의 관심을 얻으려 했으며, 적선 역시 사람들에게 되도록 많이 알려질 수 있도록 드러내놓고 자랑하듯이 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행동을 부끄럼없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누구보다 저들을 비판했는데, 늘상 "위선자들아!"라고 지칭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든지, 맛을 잃은 소금이라든지, 앞선 자가 뒤서고 뒤선 자가 앞선다 등등의 말은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태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아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거만하고 안하무인이었으며 자기 선전에 혈안이 됐나 하는 것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는 다른 사람들같이 욕심이 많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니며 또 이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있으며 내가 얻은 것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 말 중에 특히 "이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그들의 됨됨이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바꾸어한다면 '저런 따위 놈들과 같지 않다'라는 멸시가 담뿍 담긴 말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 중엔 단 한마디의 간구도 없습니다.

자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슨 기도가 필요합니까? 이것은 시위입니다. 하느님을 부르고 있으나 실상은 하느님을 무시하고 하느님을 이용해 자기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 바리사이파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도도하며 교만에 찼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바리사이파에 대응하여 등장한 것이 세리입니다. 이것은 제사장 족속과 사마리아 사람을 대조시킨 것만큼이나 파격적인 대조입니다. '세리'란 글자 그대로 '세를 거두는 사람'입니다. 로마제국은 많은 속국이나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데 교묘한 방법을 썼습니다. 그들의 부(富)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복한 지역에서 거두어 들인 것인데, 거두어 들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한 흔적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식민지에서 경제적 착취만큼 식민지 국민을 자극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역대 민중봉기의 주요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로마제국은 간접적으로 세금을 걷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저들은 점령지의 사정을 조사한 다음, 착취가 가능할 만한 액수를 책정하고, 그것을 거두어 들이는 임무는 그 지역을 정치적으로 관장하는 총독에게 맡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청부형식으로 맡겼습니다. 예수 당시에는 유다 지방에만 600달란트라는 세금을 책정했습니다. 그런데 청부를 맡고 나선 사람은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책정된 액수를 거둬들여 로마정부에 바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많이 거둬들인 부분은 자기 것이 되지만, 만일 거둔 세금이 그에 모자라면 자신의 재산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러니 사복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세금을 거두는 방법이 얼마나 잔인했겠습니까? 청부를 맡은 사람은 그 방법에 따라 구역을 나누어 하청을 주었습니다. 하청을 맡은 사람들이나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다인 자신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돈을 거두어 들이는 사람은 로마인인데, 유다 사람과 부딪치는 사람들은 모두 유다인이었습니다. 결국 재주는 원숭이가 넘고 돈은 약장수가 벌어들이는 꼴입니다.

청부를 맡은 층은 나름대로 경제적 터전도 웬만큼 갖춘 사람들이고 장삿속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직접 세금을 거두러 다니는 사람들과는 구별돼야 합니다. 그들은 국가 행정의 말단에서 국민의 미움을 사가면서 국민의 고혈(膏血)을 빠는 일에 하수인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니, 사실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침략자인 로마를 증오하는지라 그 손발 노릇을 하는 사람들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제국에 대해서는 저항할 엄두도 못 내기 때문에 죽지 못해 그것도 직업이라고 십부름꾼 노릇을 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했습니다.

저들에 대한 온 유다 민족의 감정을 그렇게 이끌어간 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크게 한몫을 했습니다. 이런 세리들을 유다 사람들은 민족반역자로 치부하고 증오하고 멸시했으며, 사람을 죄인이라고 규정할 때는 저들을 그 안에 포함시키면서도 '세리'라는 말을 나란히 붙여 '세리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일제시대에 일본 헌병이나 경찰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 사람들을 일본 사람보다 더 멸시하고 증오했던 경우와 같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세리와 바리사이파를 이 이야기에 나란히 등장시킨 것입니다. 세리는 어떤 기도를 했으며,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우리의 관심에 대해서 이 이야기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루가 18, 13)

성전의 외형적인 구조 자체가 바리사이파 계층이 설 수 있는 자리와 이른바 죄인이 설 수 있는 자리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서는 자리도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천시를 받으면 받는 것만큼 제단(지성소)에서 거리가 멀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신분상 의롭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리는 멀리서 감히 가까이 갈 엄두도 못 내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의 상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했다"라는 말에서 바리사이파가 기도하는 태도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들은 두 손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얼굴을 높이 쳐들고 긴 사설을 엮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부모를 저버리고 멀리 떠나서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다 돌아와 감히 아버지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읊조리는 어떤 탕아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감히 쳐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행동을 조목조목 대가며 잘못을 용서해달라거나 또 어떤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 하느님!" 이 한마디는 그의 온갖 고뇌와 한(恨)과 사죄(謝罪)하는 마음과 사죄(赦罪)를 원하는 마음과 몸 전체를 맡긴다는 신뢰와 살점을 에는 아픔으로 토해내는 기도라기보다는 절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이 기도는 온몸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나는 스스로는 내 생명을 보장할 길도 없고 당신에게 권리를 내세워 무엇을 요구할 존재도 아닙니다. 내 생명은 오직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이 세리의 기도에 덧붙이는 설명은 오히려 그의 가슴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아픔을 담은 존재적 고뇌를 가리는 것입니다.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오직 하느님이 자비를 베풀면 살고, 아니면 끝난다는 글자 그대로 몸 전체를 내맡기는 간구입니다.

예수가 특히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유다 종교 지도층들이 그를 증오하도록 유다 민중을 선동하는가장 중요한 무기였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세리의 친구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로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를 죽여버려야 한다는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들을 저주하는데 앞장선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투시하는 것보다 더 예리하게 세리들의 한 맺힌 고뇌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회에 소외된 계층은 많았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한마디 변명조차 늘어놓을 수 없이 멸시받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층은 역시 세리였습니다. 예수는 저들의 직업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는 앞서 저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고독을 중시했습니다. 저들 편에 섰다가는 민족반역자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세리에 대한 그의 의외의 행태는 많은 점에서 현대의 민족주의와 공통점을 가지는 젤롯당에게 반감을 사고 어쩌면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몇 안 되는 제자들에게까지도 배척당하는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소외시키고 증오하는 세리!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고독한 존재! 어느 누구도 그를 이웃으로 맞아들일 수 없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도 예수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이웃사랑이란 결국 내가 아니면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는 그 자리를 인식하고 그에게 사랑의 손을 뻗치는 행위입니다. 예수는 바로 세리에게 그런 이웃이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당시의 바리사이파를 비판하고, 세리같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소외당해도 단 한마디 변명도 못하는 세리의 가슴에 지니고 있는 진실을 알리려고 한 것일까요? 그리하여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알리려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이런 현장을 목격하고 한 이야기인지, 상상한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단순히 그때의 상태를 서술하여 사람들의 동조를 기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시를 받은 자와 같이 엄청난 선언이 뒤따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 앞에 옳다 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이 세리였고 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었다(루가 18, 14).

이것은 마치 전권(全權)을 가진 재판장이 내리는 선언을 연상케 합니다. 이것이 재판정이라면 바리사이파 사람이 원고(原告)이고, 세리는 피고(被告)입니다. 그는 이 두 사람의 진술을 듣고 세리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때 유다 사회의 정황에서 보면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내릴 수 없는 선고입니다.

그러나 단지 무죄만 선고한 것이 아닙니다. '옳다 함을 받았다'라는 원뜻은 '의롭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에게 용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온 유다 사람이 전부 죄인으로 규정하고 침을 뱉는 그들! 더러운 놈이라고 치부되고, 그래서 그의 헌금마저도 거부하는 그들을 예수는 의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의 사견(私見)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이 선언은 그에게 그런 마음을 일으킨다는 감상(感想)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 즉 하느님의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의인이라는 판정을 내립니다.

"오! 하느님!"

이 살을 찢고 나오는 절규에 대해서 예수는 팔을 벌리고 그를 품어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언한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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